[역대 UEFA Euro Champion 리뷰] 7편 뢰 블레 군단의 사령관이자 선봉장으로 무쌍난무를 펼쳤던 플라티니를 추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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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UEFA Euro Champion 리뷰] 7편 뢰 블레 군단의 사령관이자 선봉장으로 무쌍난무를 펼쳤던 플라티니를 추억하다

토르난테 2021. 6. 9. 1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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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EFA Euro 1984 챔피언 프랑스

 

개최지: 프랑스

본선 대회 기간: 1984년 6월 12일 ~ 1984년 6월 27일

참가국: 프랑스, 스페인, 덴마크, 포르투갈, 서독, 벨기에, 루마니아, 유고슬라비아


머리말

 

2020년에 하기로 했던 UEFA EURO 2020은 전 세계를 덮친 코로나로 인한 락다운으로 1년 뒤인 2021년에 개최하게 되었다.

그리고 2021년 6월 11일 개막하며 터키와 이탈리아의 경기가 열린다. 그렇다 유로 2020까지 약 한 달 남은 것이다.

그래서 유로의 역대 챔피언을 리뷰하는 컨텐츠를 하려고 한다. 월드컵처럼 전 세계인의 축제라기에는 무리가 있지만 축구 팬들에게는 유로 역시 월드컵 못지않은 큰 행사다.


프랑스가 우승하기까지

 

 

이 대회부터 다시 준결승전이 부활했으며 각 조 1위는 2위와 만나 준결승전을 치른 뒤 이긴 팀이 결승에 진출하는 방식으로 변경됐다.

프랑스는 개최국으로 선정되어서 예선을 치르지 않고 본선에 바로 진출했다.

프랑스는 덴마크, 벨기에, 유고슬라비아와 같은 조가 되었다.

프랑스는 마법의 사각형이라 불리는 압도적인 네 명의 중원 라인을 통해 볼을 점유하며 상대의 수비진을 끌어냈다. 특히 플라티니는 트레콰르티스타의 위치에서 시작해 3선까지 내려가서 볼 순환을 도우면서 단숨에 1선까지 올라가 득점하는 맹활약을 보였으며 조별 리그 세 경기에서 두 번의 해트트릭을 포함해 총 7골을 기록하며 팀의 전승 행진을 이끌었다.

준결승전에서는 디펜딩 챔피언 서독과 복병 루마니아를 밀어내고 2위로 올라온 포르투갈과 만났다.

당초 백업 수비수로 출전했으나 월드컵 신인왕 아모로스의 부진과 퇴장으로 주전 자리를 찾은 도머그가 선제골을 기록했다. 포르투갈의 주포 후이 조르당이 동점골을 넣고 연장에 갔다.

연장전에서 후이 조르당이 두 번째 골을 넣으며 프랑스는 탈락 위기에 몰렸지만 도머그의 동점골과 플라티니의 역전골로 결승에 진출했다.

왼쪽부터 벨로네, 라쿰베, 지레스, 페르난데스, 티가나, 바티스통, 보시스 ,르 루, 도머그, 바츠, 플라티니


결승 상대는 1964년에 우승을 경험한 스페인이었다.

프랑스는 같은 대형을 활용하는 스페인을 상대로 중원 싸움에서 완승을 거뒀다. 하지만 아르코나다의 선방으로 전반전을 0-0으로 마무리한다.

그러나 후반전에 플라티니의 프리킥을 아르코나다가 잘못 처리하며 허무하게 골을 내준 뒤 경기는 압도했다. 85분에는 프랑스의 수비수 이븐 르 루가 경고 누적으로 퇴장당했지만 90분에는 벨로네마저 추가골을 넣으며 스페인을 2-0으로 제압한 프랑스는 마침내 앙리 들로네를 들어 올리며 유럽 챔피언의 자리에 등극하고 프랑스 축구 국가대표팀은 최초의 국가대항전 우승을 경험한다.

위달고 감독과 플라티니는 이기는 축구와 재미있는 축구라는 두 마리의 토끼를 다 잡는데 성공했다.


우승국 프랑스는 어떤 팀이었을까?

 

프랑스의 감독 미셸 위달고에게는 딜레마가 있었다. 두 명의 훌륭한 공격형 미드필더가 있었으나 공존이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플레이메이커 성향의 미셸 플라티니와 알랭 지레스의 공존은 어려운 일이었다. 브라질도 지쿠와 소크라치스를 공존시키려다가 강한 수비력을 지닌 이탈리아에게는 먹히지 않았지 않는가? 실제로 둘을 공존시키려고 노력했으나 1982 스페인 월드컵 때 지레스에 비해 플라티니의 빛이 발했다.

그러나 1983년, 지레스는 전성기에서 내려가고 있었고 플라티니는 당대 유럽의 3대 강호였던 유벤투스에서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하며 발롱도르를 탔다.

위달고는 자국에서 열리는 유로 84에서 우승하기 위해 이 숙제를 극복해야 했다. 결국 여러 시행착오 끝에 그가 도입한 방식은 잉글랜드가 월드컵을 우승할 때 사용한 4-4-2 다이아몬드 체제였고 왼쪽 메짤라에 지레스를 기용하는 것이다.

페르난데스의 포백 보호 능력, 티가나의 왕성한 활동량, 지레스의 측면과 중앙을 오가는 공격 지원 능력과 이들을 하나로 묶으며 공격진을 지휘한 미셸 플라티니가 이끄는 미드필더진이 이 전술의 핵심이었는데 이들은 마법의 사각편대라 불렸다.

마법의 사각편대는 '나폴레옹' 플라티니의 지휘 아래 압도적인 중원 장악이 무엇인지 보여줬으며 오른쪽 메짤라 자리의 지레스는 레프트 백 도머그와 함께 측면을 풀어나가기도 했다.

프랑스 라인업


감독: 미셸 위달고

출처: 법정스님의 소유

상술했던 4-4-2 다이아몬드 시스템을 통해 프랑스의 딜레마를 해결했다. 경기장에서는 팀의 리더이자 에이스 플라티니에게 전권을 위임하며 우승에 크게 공헌한다.


골키퍼: 조엘 바츠 (옥세르)

1957년 1월 4일 (결승전 당시 27세)

바르테즈 등장 이전 프랑스 역대 최고의 골키퍼로 통했던 사나이다.


리베로: 막심 보시스 (낭트)

출처: 법정스님의 소유

1955년 6월 26일 (결승전 당시 29세)

본 포지션은 레프트 백이지만 이 대회에서는 리베로로도 훌륭한 모습을 보여줬다. 적극적인 공격 가담과 뛰어난 수비 라인 통솔력을 보여주며 팀의 우승에 기여했고 그 활약으로 발롱도르 투표에서 12위를 기록했다.


스토퍼: 이본 르 루 (AS 모나코)

1960년 4월 19일 (결승전 당시 24세)

189cm에 달하는 압도적인 체구를 이용해 상대 공격수를 찍어 누르던 터프한 스토퍼였다. 거친 선수로 경고와 퇴장을 상대적으로 자주 받던 선수였다.


라이트 백: 파트릭 바티스통 (지롱댕 보르도)

1957년 3월 12일 (결승전 당시 27세)

높은 전술안과 축구 지능을 지녔으며 공격력과 수비력 모두 준수했던 밸런스형 라이트 백이었다. 이 대회에서도 오른쪽에서 공수 양면으로 공헌했다.


레프트 백: 장 프랑수아 도머그 (툴루즈)

1957년 6월 23일 (결승전 당시 27세)

공격적인 레프트 백이지만 스토퍼도 소화할 수 있었던 자원이다. 부진한 월드컵 신인왕 아모로스를 밀어내고 주전 자리를 차지했으며 포르투갈전 멀티 골로 팀의 결승행에 공헌했다.


수비형 미드필더: 루이 페르난데스 (파리 생제르맹)

1959년 10월 2일 (결승전 당시 24세)

마초라 불릴 정도로 힘이 셌으며 포백 커버 능력과 우수한 볼 컨트롤 능력을 겸한 완벽한 피보테로 앞선의 미드필더들을 보좌하는 살림꾼 역할을 맡았다.


오른쪽 메짤라: 알랭 지레스 (지롱댕 보르도)

출처: 법정스님의 소유


1952년 8월 2일 (결승전 당시 31세)

키는 작았지만 뛰어난 볼 컨트롤 능력과 교묘한 드리블링, 그리고 중앙과 측면을 적시적소에 오가는 공간 지각력을 지니고 있었던 플레이메이커였다. 이번 대회에서는 플레이메이커 자리를 플라티니에게 양보하고 메짤라 자리에서 오른쪽 측면을 지원하며 헌신했다. 대회 베스트 일레븐에 들었으며 발롱도르 투표에서 9위를 차지했다.


왼쪽 메짤라: 장 티가나 (지롱댕 보르도)

출처: 법정스님의 소유

1955년 6월 23일 (결승전 당시 29세)

작은 피지컬임에도 왕성한 활동량과 빠른 주력, 그리고 뛰어난 축구 이해도를 바탕으로 유럽 최고의 박스 투 박스 미드필더로 이름을 날렸다. 이 대회에서는 막강한 수비라인 커버와 공격 가담을 당시에 보여주며 우승을 이끌었다. 이러한 활약으로 대회 올스타팀에 선정되었으며 발롱도르 투표에서 2위를 기록했다.


공격형 미드필더: 미셸 플라티니 (유벤투스)

출처: 법정스님의 소유

1955년 6월 21일 (결승전 당시 29세)

당대 최고의 플레이메이커로 개인의 역량과 팀 플레이 능력 모두 정점을 발휘했다. 빌드업이 원활하지 못하면 3선으로 내려가서 직접 패스를 풀기도 했으며 스트라이커들이 골 가뭄에 시달리면 직접 득점하기도 했다. 플라티니는 다섯 경기에서 아홉 골을 득점했으며 압도적인 활약으로 대회 베스트 일레븐 선정과 당해 발롱도르를 수상했다.


스트라이커: 베르나르드 라쿰베 (지롱댕 보르도)

1952년 8월 15일 (결승전 당시 31세)

체구는 작았지만 빠른 발과 영리한 방향 전환을 활용해 수비진에 균열을 내는 공격수였다. 리그 내에선 득점력도 훌륭했으나 대표팀에선 득점력이 좋지 않았다.


스트라이커: 브루노 벨로네 (AS 모나코)

1962년 3월 14일 (결승전 당시 22세)

본 포지션은 레프트 윙이지만 왼쪽 스트라이커로 활약했다. 플라티니의 동선에 따라 측면과 중앙을 오가며 빠른 발로 상대 수비진에 균열을 냈다.


결론

 

프랑스는 최초의 메이저 대회 우승을 달성했으며 이는 프랑스가 축구 강호로 자리잡는데 중요한 요소로 작용했으며 플라티니는 이 대회의 압도적인 활약으로 인해 마라도나가 전성기에 도달하기 전까지는 세계 최고의 선수로 명성을 누렸다.

이 대회를 본 많은 재능 있는 어린이들이 축구를 시작했고 결국 이 때 시작한 세대들이 월드컵을 우승하기에 이른다. 플라티니 세대는 베른의 기적때의 서독처럼 자국이 축구 열강으로 타고나는 발판을 마련하는 역할을 확실히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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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수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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