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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수용의 스타플레이어 열전 6편- '드림팀의 천재' 미카엘 라우드루프

토르난테 2021. 3. 24. 15: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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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림팀의 천재' 미카엘 라우드루프, 그는 누구일까?

 

출처: 법정스님의 소유

이름: 미카엘 라우드루프

출생년도: 1964년 6월 15일

신체조건: 키 183cm / 몸무게 71kg

포지션: 공격형 미드필더, 레프트 윙, 포워드


1. 북유럽에서 뜬 별, 이탈리아로 향하다.

 

1964년 6월 15일에 덴마크의 수도 쾨벤하운의 부근인 프레데릭스베르에서 태어난 라우드루프는 유소년 시절 여러 팀을 거쳐 쾨벤하운 BK에서 프로로 데뷔하며 두각을 나타냈으며 1982년에는 브뢴뷔 IF로 이적한다.

첫 시즌에 24경기에 출전해 15 득점을 올리며 두각을 나타낸 라우드루프는 1982년 6월 15일, 자신의 열여덟 번째 생일에 덴마크의 국가대표팀에 데뷔하는 선물을 받는다. 그리고 그는 모르텐 올센, 예스퍼 올센, 프레벤 엘카에르와 같은 쟁쟁한 선배들과 함께 덴마크 국가대표팀을 이끌며 유로 84 예선에 통과했다. 그리고 이러한 활약으로 1982년에는 덴마크 올해의 선수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Ebbe Skovdahl와 함께 사진을 찍은 1982 미카엘 라우드루프

 

이런 활약을 본 이탈리아의 명문 유벤투스와 잉글랜드의 명문 리버풀은 그의 영입을 시도했다. 원래는 리버풀 이적에 근접했으나 계약 기간에 대한 의견차를 극복하지 못해서 라우드루프는 리버풀을 택하지 않았으며 유벤투스로 이적한다.

유벤투스는 그를 플라티니의 후계자이자 팀의 미래로 점찍고 1983-84 시즌을 앞두고 여름 이적시장에서 영입했다. 그러나 당시 유벤투스에는 라우드루프와 동 포지션인 공격형 미드필더이자 최고의 축구선수인 미셸 플라티니가 건재했으며 보니엑이라는 용병도 있었다.

당시 세리에는 팀 내에서 용병을 두 명만 보유할 수 있었으며 라우드루프를 라치오로 2년간 임대 보낸다.

1983-84 시즌, 라치오에서 라우드루프는 30경기 8골을 기록했으며 유로 84에서는 4-4-2 시스템에서 처진 공격수로 출전하며 엘카에르 라르센을 보좌했으며 조별 예선과 준결승전을 포함한 4경기 모두 출장하며 빼어난 볼 컨트롤과 날카로운 패싱력을 선보였으나 득점에는 실패했고 4강에서 탈락한다.

1984-85 시즌에는 라치오에서 30경기에 출전해 한 골밖에 넣지 못했으며 팀도 16개의 구단 중에서 15위로 최악의 부진을 보이며 강등당했다.

1985-86 시즌, 유벤투스에 복귀한 이후에는 트레콰르티스타 자리에 플라티니가 건재해서 과거 보니엑의 자리였던 처진 공격수와 레프트 윙을 겸하며 뛰었으며 29경기에 출전해 7골을 넣으며 유벤투스의 리그 우승에 기여했으며 1985-86 시즌 월드 사커지가 선정한 시즌 탑 10에 선정되었으며 그중 6위를 기록하는 활약을 보여준다.

유벤투스 시절 미카엘 라우드루프


이러한 우수한 활약을 보여준 라우드루프는 1986 멕시코 월드컵에서도 데니쉬 다이너마이트의 일원으로 참가하며 주전으로 맹활약한다.

덴마크는 지역예선에서부터 강한 모습을 보여줬는데 라우드루프와 엘카에르 투 톱의 활약으로 당대의 강호 디나모 키예프가 주축이 된 소련을 지역예선에서 2위로 밀어냈다. 그리고 덴마크 축구 역사상 첫 월드컵 진출을 이뤄냈다.

하지만 덴마크의 월드컵 처녀 출전 신고식은 꽤 혹독할 것으로 예상됐다. 같은 조에 전 대회 월드컵 준우승 팀 서독, 남미 챔피언 우루과이, 그리고 알렉스 퍼거슨이 이끄는 스코틀랜드와 한 조가 되며 죽음의 조에 속했다.

그렇지만 데니쉬 다이너마이트는 대중들이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강했는데 이런 죽음의 조에서 3전 전승으로 통과했다. 명장 퍼거슨이 이끄는 스코틀랜드를 상대로 라우드루프는 수비진을 괴롭혔으며 아르네센의 패스를 받은 엘카에르 라르센의 결승골로 스코틀랜드를 제압했다.

그리고 우루과이전에서는 팀의 6-1 대승을 주도하고 라우드루프 본인도 역습 상황에서 빠른 스피드 이후 골키퍼를 넘기는 슛으로 월드컵 데뷔 골을 넣었으며 맹활약했고 서독을 상대로도 2-0으로 승리하는데 기여했다. 조별 예선을 3전 전승으로 돌파한 것이다.

하지만 토너먼트에 대한 경험 부족으로 16강전에서 선제골을 넣었음에도 부트라게뇨한테 4골을 내주면서 스페인에게 5-1로 대패하며 탈락하기도 했다. 16강 탈락이라는 성적은 아쉽지만 처녀 출전팀이 3전 전승을 하며 선전했다.

라우드루프는 이후에도 세리에 A에서 뛰었으나 플라티니가 은퇴한 뒤 유벤투스는 쇠락했으며 특히 1987-88 시즌에는 리그에서 한 골도 득점하지 못하는 수모를 겪었다. 유벤투스의 부진과는 반대로 AC 밀란은 아리고 사키의 휘하에서 화려하게 부활하며 좋은 성적을 냈으며 남부의 나폴리도 마라도나를 앞세워 스쿠테토 경쟁에 참가했다.

거기다가 리그에서의 부진이 국가대표팀에서도 이어졌다. 라우드루프는 스페인을 상대로 유로 본선에서 첫 골을 넣었지만 결국 패했으며 조별 예선에서 덴마크도 3전 전패하는 수모를 겪었다.

결국 부진이 겹친 라우드루프는 새로운 국면을 위해 유벤투스를 떠날 결심을 한 라우드루프는 1988-89 시즌 이후 요한 크루이프가 이끌던 드림 팀 바르셀로나로 이적하면서 세리에와는 작별을 고한다.

 

Kjobenhavns Boldklub

1981 ~ 1982
14 Apps / 3 Goal


Brondby

1982~ ~ 1983
38 Apps / 24 Goal


Lazio

1983 ~ 1985
70 Apps / 12 Goal


Juventus

1985 ~ 1989
152 Apps / 38 Goal


2. 꾸레의 영웅에서 꾸레의 대역죄인으로

 

1989-90 시즌을 앞둔 여름 이적시장에서 크루이프는 미카엘 라우드루프와 로날드 쿠만을 영입하며 플레이메이커와 리베로를 모두 갖추며 승부수를 던졌다.

바르셀로나를 이끄는 세 명의 축, 쿠만, 크루이프, 라우드루프


첫 시즌에는 코파 델 레이 우승 이외에는 좋은 성적을 내지 못했다. 그리고 덴마크 국가대표팀에서도 감독 리하트 묄러 니엘센과의 갈등으로 동생 브라이언 라우드루프와 함께 국가대표팀을 은퇴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두 번째 시즌부터는 크루이프와 라우드루프 그리고 드림 팀은 라 리가의 새로운 역사를 쓰게 된다.

공격에 방점을 찍어줄 포워드 흐리스토 스토이치코프를 영입했으며 바르셀로나 B팀에서는 팀의 피보테로서 후방에서 공격과 수비의 균형을 잡아줄 펩 과르디올라가 1군 팀으로 승격했다. 과르디올라는 승격하자마자 1군 주전으로 라 리가 정상급 피보테로 성장했으며 스토이치코프는 라우드루프의 공격 상황에서의 부담을 덜어줬다.

결국 바르셀로나는 2위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와 승점 10점 차이라는 압도적인 성적으로 라 리가를 우승했으며 컵 위너스 컵에서도 결승에 진출했으나 퍼거슨이 이끄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게 2-1로 아쉽게 패했다. 하지만 6년 만에 라 리가를 우승함으로써 성공한 시즌으로 평가받는다. 라우드루프도 리그 30경기 9골, 모든 공식경기 42경기 11골로 훌륭한 시즌을 보냈으며 스토이치코프, 치키 베히리스타인, 훌리오 살리나스 등과 함께 좋은 모습을 보여줬다.

바르셀로나의 세 명의 외국인 에이스 라우드루프, 스토이치코프, 쿠만


1991-92 시즌에 라우드루프는 더 발전했으며 라우드루프는 36경기에서 13골을 넣으며 라 리가 2연패에 크게 기여했다. 비록 엘 클라시코에서 두 번 비겼지만 레알 마드리드를 승점 1점 차로 따돌리고 우승했으며 이러한 활약으로 돈 발롱은 라우드루프에게 라 리가 베스트 외국인 상을 수상했다.

그리고 바르셀로나는 이 시즌에 빅 이어를 들었다. 챔피언스리그로 개편되기 이전, 마지막 유러피언 컵에서 바르셀로나는 동독의 한자 로스톡과 서독의 카이저슬라우테른을 꺾었으며 특히 카이저슬라우테른을 상대로는 원정 다득점으로 올라왔다. 그리고 8강 조별 리그에서는 라우드루프와 스토이치코프, 그리고 살리냐스의 활약으로 디나모 키예프와 벤피카, 그리고 스파르타 프라하를 모두 꺾고 결승에 진출했다.

결승에서는 세리에 챔피언 삼프도리아를 상대로 연장까지 승부를 끌고 갔다. 만치니, 비알리와 스토이치코프, 라우드루프의 테크닉 대결도 볼 만했지만 결국 쿠만의 프리킥 골이 승부를 갈랐으며 바르샤는 이 시즌에 리그와 유러피언 컵을 모두 우승하며 최고의 시즌을 보냈다.

하지만 미카엘 라우드루프가 떠난 덴마크 국가대표팀이 내전으로 참가자격이 박탈된 유고슬라비아 대신 참가하며 브라이언 라우드루프의 은퇴 번복으로 인한 복귀와 그의 맹활약으로 유로에서 우승하는 이변을 거뒀다. 국가대표팀을 은퇴했던 미카엘 라우드루프로선 매우 아쉬운 상황이었다. 그는 바르셀로나의 활약으로 1992년 발롱도르에서 7위를 기록했지만 덴마크 국가대표팀의 성적까지 더해졌으면 반 바스텐과 스토이치코프 모두를 꺾고 발롱도르를 수상하는 일도 가능했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결국 1993년에 국가대표팀에 복귀한다.

아쉬움을 뒤로하고 미카엘 라우드루프는 1992-93 시즌에도 팀의 핵심 선수로 활약하며 리가 3연패를 이뤄냈으며 발롱도르 투표에서도 5위를 기록한다. 하지만 1993-94 시즌을 앞두고 감독 크루이프와의 사이에 균열이 일어나고 있었다.

크루이프는 호마리우를 영입하면서 라 리가의 용병 쿼터로 미카엘 라우드루프 대신 크루이프와 스토이치코프, 그리고 쿠만을 주력으로 사용했으며 라우드루프는 그들의 로테이션 멤버로 기용되었다. 그래도 라우드루프와 스토이치코프, 호마리우는 같이 공존하는 경기에서는 엄청난 파괴력을 보여줬지만 이는 소수에 지나지 않았다.

1993-94 시즌에도 라 리가를 우승하고 챔피언스리그 결승에서 AC 밀란과 만났으나 크루이프는 라우드루프를 결승전 명단에서 제외했다. 바르셀로나와 크루이프는 주력 일부가 빠진 밀란을 얕봤으나 밀란은 바르셀로나를 완벽하게 공략하며 4-0으로 대승을 거뒀다. 라우드루프는 이 경기를 관중석에서 지켜보는 굴욕을 경험하기도 했다.

이후 라우드루프는 크루이프가 세대교체를 단행하면서 바르셀로나에서 방출되었으며 크루이프에게 복수하기 위해 레알 마드리드로 입단했다. 이 일로 꾸레들에게 영웅이었던 그는 꾸레들에게 배신자, 유다라며 비난받았다. 꾸레들의 비난과는 상관없이 레알 마드리드에서의 첫 시즌에서 라 리가에서 우승하며 크루이프에게 복수하기도 했으며 본인은 라 리가 5연패라는 금자탑을 쌓기도 했으나 1995-96 시즌 팀이 리그 6위로 최악의 부진을 맛보자 라 리가를 떠났다.

라 리가의 시절은 첫 시작은 창대했지만 끝은 미약했다. 하지만 이때 라우드루프가 보여준 활약은 1990년대 최고의 수준이었으며 프란츠 베켄바우어는 그를 두고 이렇게 말했다.

"1960년대 최고의 선수는 펠레였고, 1970년대는 크루이프, 1980년대는 마라도나였다. 그리고 1990년대의 최고는 미카엘 라우드루프다."

 

Barcelona

1989 ~ 1994
217 Apps / 55 Goal

 

Real Madrid

1994 ~ 1996
76 Apps / 15 Goal


3. 마지막 불꽃과 유종의 미

 

라우드루프는 일본의 빗셀 고베에서 1년 반 동안 활약하다가 1997-98 시즌 아약스로 이적해 다시 유럽으로 돌아와 활약했으며 덴마크 국가대표팀의 1998 프랑스 월드컵 본선 진출에 크게 공헌한다.

지역 예선에서 크로아티아, 그리스, 보스니아, 슬로베니아를 꺾고 올라온 덴마크는 본선에서는 개최국 프랑스, 아시아의 강호 사우디 아라비아, 그리고 남아프리카 공화국과 한 조에 배정되었다.

라우드루프는 자신의 A 매치 100번째 상대인 사우디 아라비아를 손쉽게 제압했으나 두 명이 퇴장당하는 경기 끝에 남아프리카 공화국과 무승부를 기록했으며 미카엘 라우드루프의 페널티 킥 득점에도 불구하고 프랑스에게 패했으나 사우디 아라비아가 남아프리카 공화국과 무승부를 기록하면서 간신히 16강에 진출할 수 있었다.

1998 프랑스 월드컵을 수놓은 라우드루프 형제


라우드루프의 절륜한 공격 지휘와 깔끔한 패스는 여전했으며 그가 공격을 전개하자 브라이언 라우드루프, 묄러, 에베 산, 헬베그의 연속 골을 바탕으로 스페인을 제압한 나이지리아를 제압했으며 8강에서는 브라질을 상대로 분투했지만 호나우두에 온 신경을 쓰다가 히바우두에게 두 골을 내주며 3-2로 아쉽게 패하게 된다. 그리고 미카엘 라우드루프는 이 경기를 끝으로 현역에서 은퇴한다.

 

Vissel Kobe

1996 ~ 1997
24 Apps / 8 Goal


Ajax

1997 ~ 1998
30 Apps / 13 Goal


Denmark National team

1982 ~ 1998
104 Apps / 37 Goal


4. 그의 플레이 스타일

 

'완벽한 공격형 미드필더이자 팬텀 드리블의 마스터'

 

온 더 볼 상황에서는 당대에 감히 적수가 없었던 공격형 미드필더로 라 크로케타, 일명 팬텀 드리블의 달인으로 불렸으며 우월한 볼 컨트롤 능력으로 인해 여러 가지 화려함과 실용성을 겸비한 기술들을 자유자재로 구사했다.

빠른 스피드와 화려한 발재간을 겸비했으며 마라도나의 패스 능력에 가장 근접한 선수로 불렸을 정도로 공격 진영에서 정교한 킬 패스에 능했으며 노룩 패스에도 능했을 정도로 센스가 뛰어난 선수였다. 그리고 슈팅 기술도 당대 정상급으로 불렸던 선수였으며 시원시원한 롱 패스에도 능했다. 적어도 온 더 볼 상황에서만큼은 챠비나 이니에스타에 뒤지는 선수가 아니었다.

더 대단한 것은 이런 화려한 기술들을 적은 연습량으로도 구사한다는 점이다. 게으른 천재라 불렸으며 이 때문에 크루이프는 그를 두고 "항상 최선을 다하지 않는다."라고 재능을 아쉬워하기도 했다.

라우드루프의 팬텀 드리블


5. 수상 이력

 

클럽

1985 인터콘티넨탈 컵 우승
1985-86 세리에 A 우승 (이상 유벤투스)
1989-90 코파 델 레이 우승
1990-91 라 리가 우승
1991 수페르코파 데 에스파냐 우승
1991-92 라 리가 우승
1991-92 유러피언 컵 우승
1992 수페르코파 데 에스파냐 우승
1992 UEFA 슈퍼 컵 우승
1992-93 라 리가 우승
1993-94 라 리가 우승 (이상 바르셀로나)
1994-95 라 리가 우승 (이상 레알 마드리드)
1997-98 에레디비시에 우승
1997-98 KNVB 컵 우승 (이상 아약스)

라 리가 통산 5회 우승이자 5회 연속 우승

 

개인 수상

1982 덴마크 올해의 선수상
1985 덴마크 올해의 선수상
1986 발롱도르 26위
1990 발롱도르 18위
1991 발롱도르 11위
1991-92 라 리가 최우수 외국인 선수상
1992 발롱도르 7위
1993 발롱도르 5위
1994 발롱도르 13위
1994-95 ESM 올해의 팀
1995 발롱도르 10위
1996 FIFA XI Reserve team
1998 프랑스 월드컵 올스타 팀
1998 발롱도르 20위
1999 지난 25년간 라 리가 최우수 외국인 선수상
2003 UEFA 골든 플레이어
2004 FIFA 100
2006 덴마크 올 타임 베스트 플레이어
2015 Scandinavia Best Player Ever:
덴마크 축구 명예의 전당

빅이어를 드는 라우드루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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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수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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