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수용의 스타플레이어 열전 7편- '비올라의 새' 쿠르트 함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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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수용의 스타플레이어 열전 7편- '비올라의 새' 쿠르트 함린

토르난테 2021. 4. 10. 17: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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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올라의 새' 쿠르트 함린 그는 누구일까?

 

출처: 법정스님의 소유

 

이름: 쿠르트 함린

출생년도: 1934년 11월 19일

신체조건: 키 170cm / 몸무게 70kg

포지션: 라이트 윙


1. 스웨덴 리그에서 활약하던 아마추어 선수 시절

 

1934년에 스웨덴의 수도 스톡홀름에서 태어난 그는 1946년부터 여러 유소년 클럽에서 뛰다가 1949년에 입단한 AIK 유소년팀에서 본격적으로 축구 선수의 꿈을 키우며 1952년에 AIK 1군 팀에 데뷔한다.

AIK 시절 쿠르트 함린 (출처: AIK 구단 공홈)


데뷔 시즌부터 주전 자리를 차지한 그는 1953년에는 국가대표팀에 소집되었다. 당시 스웨덴 리그는 아마추어 리그였으며 스웨덴 국가대표팀은 자국 리그에서 활약하는 아마추어 선수들만 소집했으며 해외 프로팀에서 뛰는 선수들을 소집하지 않았다.

이러한 이유로 이탈리아 무대를 제패하는 AC 밀란의 그레놀리 삼총사나 인테르의 레전드 스코그룬트, 로마의 핵심 하프백 수네 안데르손 같은 훌륭한 선수들이 국가대표팀에 소집되지 못했고 스웨덴은 전력이 약했다.

함린은 스웨덴 리그에서 활약은 했지만 1954년 스위스 월드컵 본선 진출에는 실패하게 된다. 실력이 좋은 프로 선수들은 모두 거액의 돈을 벌기 위해 해외로 나섰으며 스웨덴 국가대표팀은 아마추어리즘을 내세우며 그들을 소집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마추어리즘은 자신의 재능을 활용해 많은 돈을 벌기를 원하는 선수들의 마음을 돌리지 못했고 그들은 기꺼이 국가대표팀을 포기했다.

결국 쿠르트 함린도 아마추어리즘을 포기하고 1956년에 선배들의 발자취를 따라 이탈리아 무대로 진출했다.

 

AIK

1952~1955
62 Apps / 54 Goal


2. 스웨덴 대표팀 최초의 프로 선수로 팀을 월드컵 결승으로 이끌다.

 

유벤투스로 이적해 활약하던 도중 스웨덴 국가대표팀에는 큰 변화가 생긴다.

과거 스웨덴의 올림픽 금메달을 이끌었던 잉글랜드 출신의 감독인 조지 레이너가 1956년에 선임되었던 것이다. 스웨덴은 1958년 월드컵의 개최국이며 좋은 성적을 내기 위해 과거의 영광을 이끌었던 명장을 다시 선임했다.

조지 레이너는 스웨덴 축구협회를 설득했다. 아마추어리즘 때문에 소집되지 못한 이탈리아 세리에에서 활약하는 실력 있는 선수들이 없으면 월드컵에서 좋은 성적은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결국 스웨덴도 국가대표팀 선수들의 아마추어리즘을 포기했으며 해외파가 소집이 가능하게 했다.

이런 이유 때문에 함린은 해외파로서는 최초로 스웨덴 국가대표팀으로 소집된 선수 중 한 명으로 남았다.

하지만 국가대표팀이 잘 풀렸음에도 유벤투스에서는 상대적으로 좋은 성적을 내지는 못했으며 한 시즌만에 파도바로 떠난다. 파도바에서는 30경기에서 무려 20골을 넣으며 맹활약한다. 그리고 이러한 활약을 인정받아 1958 스웨덴 월드컵에 주전 멤버로 기용된다. 함린은 오른쪽 측면을 맡았으며 함린의 짝은 인테르의 레전드 스코그룬트가 맡았고 리드홀름과 그렌이 인사이드 포워드로 하프 스페이스 지역을 담당했다. 마지막 센터 포워드 자리에는 기량이 떨어져 은퇴한 노르달 대신 자국리그의 초신성 아케 시몬센이 맡았다.

1958 월드컵 스웨덴 주전 라인업


이 5각 공격 편대는 스웨덴의 강력함을 보여줬으며 첫 경기에서 멕시코를 3-0으로 대파한데 이어서 두 번째는 매직 마자르 멤버들이 일부 이탈한 헝가리를 상대했다.

함린은 헝가리를 상대로 멀티 골을 넣으며 맹활약하고  매직 마자르는 구시대의 유물이란 것을 증명하며 팀의 8강 진출을 확정 지었다. 조별 리그 마지막 상대 웨일스전에서는 웨일스의 골키퍼 잭 켈시의 맹활약으로 0-0으로 끝났지만 2승 1무 5 득점 1 실점으로 스웨덴은 8강에 진출한다.

8강 상대는 1956 멜버른 올림픽 축구 종목 금메달 소련이었다. 명 수문장 야신이 버티고 있었으며 유럽 내에서도 좋은 전력을 보유한 팀이었다.

함린은 이 소련의 주전 수비수 블라디미르 케사레프를 농락했는데 패스를 하는 척하며 그의 몸에 볼을 맞췄으며 그의 몸을 맞고 튀어나온 볼을 헤딩해 득점했다. 천하의 야신도 손을 쓸 수 없었을 정도로 완벽한 골이었다. 그 이후로 후반 종료 직전에 시몬센도 추가 골을 넣어 동유럽의 신흥 강호 소련을 2-0으로 완파했다.

4강 서독전에서도 함린은 맹활약했는데 서독의 레프트 백이자 당대 유럽 최고의 레프트 백 에리히 유스코비악의 퇴장을 이끌어냈으며 팀의 쐐기골을 넣으며 팀의 결승 진출에 공헌한다.

결승전에서는 펠레, 디디, 가린샤라는 훌륭한 선수들이 포진한 브라질과 조우하게 된다. 함린의 스웨덴은 노장 리드홀름의 선제골로 앞서 나갔지만 펠레와 가린샤를 필두로 한 브라질의 공격에 스웨덴은 5-2로 패하면서 결승에서 도전을 멈춰야 했다.

함린은 아쉽게 준우승에서 멈춰야 했지만 대중들에게 활약을 인정받아 1958년 발롱도르 투표에서 4위를 기록한다. 그리고 당대 세리에의 우승 후보 중 한 팀인 피오렌티나로 이적했다.

 

Juventus

1956~1957
23 Apps / 8 Goal

Padova

1957~1958
32 Apps / 20 Goal


3. 비올라의 에이스로 전성기를 보내고 커리어의 마침표를 빅이어로 찍다.

 

피오렌티나는 월드컵에서 일약 스타덤에 오른 함린을 영입했다. 함린은 양발잡이었기에 또 다른 월드클래스급의 라이트 윙어인 줄리뉴, 인사이드 포워드인 몬투오리와 좋은 호흡을 자랑했다. 그러나 이 조합은 줄리뉴가 얼마 뒤 파우메리아스로 떠나면서 볼 수 없게 됬다.

쿠르트 함린은 1958-59 시즌에 적응기도 없이 피오렌티나의 리그 2위를 이끌며 32경기 26골을 기록하며 세리에 득점 3위에 올랐다. 함린의 포지션은 스트라이커가 아닌 윙어였음에도 그의 득점력은 경이로웠다.

그리고 그다음 시즌에도 34경기 26골을 기록하며 세리에 득점 2위에 올랐다. 그러나 팀은 또 준우승을 했으며 코파 이탈리아에서도 준우승을 했다. 다행히 코파 이탈리아 우승팀 유벤투스는 리그에서도 우승했기에 초대 UEFA 컵 위너스 컵 출전권을 피오렌티나가 양도받아서 유럽 대항전에 나서긴 했다.

1960-61 시즌에는 함린은 유럽 대항전에서 맹활약하게 된다. 컵 위너스 컵 8강에서 루체른을 상대로 홈과 원정에서 모두 멀티골을 넣었으며 레인저스와의 결승 2차전에서도 결승골을 기록하며 결승전에서 홈과 원정에서 모두 이기며 초대 UEFA 컵 위너스 컵을 우승한다. 그리고 함린은 코파 이탈리아 우승에도 기여한다.

이렇듯 피오렌티나에서 함린은 승승장구했지만 스웨덴 국가대표팀은 세대교체의 실패로 번번이 지역예선에서 떨어졌다. 그리고 1966 잉글랜드 월드컵 본선 진출에 실패하자 함린은 국가대표팀을 은퇴하고 소속팀에 전념한다.

함린은 피오렌티나에서 1964-65 시즌을 제외하고 매 시즌 리그 두 자릿수 득점을 기록했다. 그러나 166-67 시즌 세대교체를 이유로 피오렌티나를 떠난다. 함린은 피오렌티나에서 208골을 기록하며 피오렌티나 구단 최고 득점자로 이름을 남겼다. 207골을 득점한 바티스투타보다도 많은 수치이다. 윙어에 외국인임에도 최다 득점자를 기록했을 정도로 그의 득점력은 세리에 팀들의 카테나치오마저도 무릎을 꿇렸다.

피오렌티나 역대 최고의 레전드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 쿠르트 함린


함린은 피오렌티나를 떠나 밀란에 둥지를 틀었으며 1967-68 시즌 컵 위너스 컵에서 4골을 기록하며 컵 위너스 컵 우승을 기록했으며 로테이션 멤버로 리그 우승도 기록하며 더블 우승을 달성했다. 그리고 1968-69 시즌에는 주전에서는 밀려났으나 유러피언 컵 결승에 선발로 뛰며 프라티와 소르마니를 도우며 아직 어렸던 크루이프의 아약스를 4-1로 대파하며 유러피언 컵을 우승한다.

이후 나폴리에서 잠시 뛰다가 1972년에 IFK 스톡홀름에서 선수 생활을 마감한다.

 

Sweden National team

1953~1965
32 Apps / 17 Goal

Fiorentina

1958~1967
362 Apps / 208 Goal

AC Milan

1967~1969
61 Apps / 17 Goal

Napoli

1969~1971
29 Apps / 3 Goal

IFK Stockholm

1971~1972
10 Apps / 5 Goal


4. 그의 플레이 스타일

 

'양발의 컴플리트 윙어'

 

함린은 굉장히 빠른 발을 지녔으며 양발을 모두 잘 썼으며 기술적으로도 훌륭했고 축구 지능도 뛰어난 라이트 윙어였다.

빠른 스피드와 넓은 시야를 바탕으로 한 창의적인 패스와 교묘한 드리블을 보여줬으며 왼발로 직접 슈팅을 하기도 했고 오른발로 크로스를 올리기도 했다.

영리한 지능과 빼어난 볼 컨트롤 능력을 바탕으로 한 교묘한 페인팅으로 상대 수비수를 잘 속였으며 상대 다리 사이로 볼을 빼내며 돌파하는 속칭 '알까기'라 불리는 기술에도 능했다. 그 외에도 상대 수비수를 다양한 기술로 벗겨내는데 능했다. 1958 월드컵 8강 소련전에서도 블라디미르 케사레프에게 패스를 하는 척하며 그의 몸에 볼을 맞췄으며 그의 몸을 맞고 튀어나온 볼을 헤딩해 득점했다.

그리고 슈팅 능력과 골 결정력도 훌륭해서 피오렌티나 역대 최다 득점자로 기록될 정도로 많은 득점을 기록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도 잔부상을 자주 당하는 선수이기도 했다.

밀란 소속으로 득점하는 쿠르트 함린


정리하자면 잔부상이 많은 것을 제외하고는 결점이 없는 윙어였다.


5. 수상 이력

 

클럽

1960-61 코파 이탈리아 우승
1960-61 UEFA 컵 위너스 컵 우승
1965-66 코파 이탈리아 우승
1966 미트로파 컵 우승 (이상 피오렌티나)
1967-68 세리에 A 우승
1967-68 UEFA 컵 위너스 컵 우승
1968-69 유러피언 컵 우승 (이상 AC 밀란)

 

국가대표팀

1958 스웨덴 월드컵 준우승

 

개인 수상

1955 스웨덴 알스베스칸 득점왕
1960-61 UEFA 컵 위너스 컵 득점왕
1967 FIFA XI 선정
2006 스웨덴 축구 명예의 전당 선정
2012 피오렌티나 명예의 전당 선정
2014 UEFA 회장상
2016 피오렌티나 역대 베스트 일레븐 선정
피오렌티나 역대 최다 득점자

코파 이탈리아 우승컵을 받는 쿠르트 함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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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수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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