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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수용의 스타플레이어 열전 4편 - '우리들의 우베' 우베 젤러

토르난테 2021. 2. 17. 1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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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우베' 우베 젤러, 그는 누구인가?

 

출처: 법정스님의 소유

 

이름: 우베 젤러

출생년도: 1936년 11월 5일

신체조건: 키 170cm / 몸무게 76kg

포지션: 스트라이커


1. 북부 오베리가를 폭격하다.

 

1936년에 나치 독일 체제의 함부르크에서 태어난 젤러는 유년 시절을 세계 대전의 폭풍에서 보냈다.

그리고 1946년, 만 10세의 나이로 함부르크 유소년팀에 입단해서 1953년에는 만 16세의 나이로 성인 팀에 데뷔하게 된다.

1953-54 시즌에는 한 경기도 나오지 못했지만 재능을 인정받아 서독 U-18 국가대표팀에 소집되며 10경기에서 15골을 기록하며 가능성을 보였다.

이후 1954년에는 서독 대표팀이 베른에서 매직 마자르를 무찌르고 월드컵 우승을 차지하고 난 뒤인 1954-55 시즌에 정식으로 성인 무대에 데뷔했으며 데뷔전인 DFB-포칼에서 홀슈타인 킬을 상대로 4골을 넣고 8-2 대승에 공헌했다.

젤러는 데뷔 시즌에 북부 오베리가에서 26경기 28골을 기록했으며 북부 오베리가에서 우승을 차지했으며 이후 진출한 독일 챔피언쉽에서는 1조에서 2등을 거두었지만 프리츠 발터, 오트마어 발터, 호어스트 엑켈, 베르너 리브리히 등 베른의 기적을 이끈 선수를 여럿 보유한 카이저슬라우테른을 넘지 못하고 결승 진출에 실패했다.

그래도 서독 대표팀 감독 제프 헤어베르거는 우베 젤러의 오베리가에서의 활약을 눈여겨보고 월드컵 이후 오트마 발터의 후계자로 국가대표팀에 콜업시키며 차기 디 만샤프트를 책임질 공격수로 여겼다. 그리고 1955년에 처음 발표한 키커 랑리스테에서는 중앙 공격수를 평가하면서 우베 젤러를 국제적인 수준이라는 뜻의 'Internationale Klasse' 등급과 포지션 내 2등이라는 뜻의 IK-2의 랑리스테를 수여했다. 당대 서독 최고의 중앙 공격수 오트마어 발터를 넘진 못했지만 그래도 근접한 위치까지 간 것이다.

 

어린 시절의 젤러



이후로도 젤러는 꾸준히 득점포를 가동하며 함부르크의 주포로 활약하며 함부르크의 북부 오베리가의 우승을 공헌했으며 1957년에는 오베리가 우승 및 독일 챔피언쉽 결승에 진출했으나 카이저슬라우테른에 이어 새로운 강자로 떠오른 도르트문트에게 4-1로 패하는 아쉬운 모습을 보였으며 1958년에도 북부 오베리가 우승과 독일 챔피언쉽 결승에 진출했으나 이번에는 샬케에게 3-0으로 패하며 우승이 좌절되었다.

함부르크의 성적과는 별개로 젤러의 활약은 훌륭했으며 1958 스웨덴 월드컵의 서독 대표팀 멤버로 참가한다.

젤러는 1958 월드컵 첫 경기에서 1-1 상황의 균형을 무너트리는 결승골을 넣어 아르헨티나를 상대로 승리하는데 공헌했으며 조별 리그 마지막 경기인 북아일랜드전에서도 2-1로 패색이 짙었을때 동점골을 넣으며 팀을 1승 2무 조 1위로 8강에 진출시키는데 공헌했다.

젤러는 이후 8강에서 유고슬라비아를 꺾는데 일조했으나 4강에서 개최국 스웨덴에게 3-1로, 3,4위전에서는 퐁텐과 코파가 이끄는 프랑스한테 6-3으로 패하면서 첫 월드컵은 아쉽게 장식했다.

월드컵에서의 준수한 활약으로 젤러는 키커 랑리스테 평가에서 IK-1 등급을 받아 독일 리그에서 활약하는 최고의 중앙 공격수로 평가받았다.

1958-59 시즌에는 오베리가에서는 27경기에 출전해 29골을 득점해 팀을 우승시켰으며 독일 챔피언쉽에서는 4경기에서 5골을 넣으며 분투했으나 조별 리그에서 탈락했다. 하지만 경기당 1골을 넘는 젤러의 활약에 키커 랑리스테는 그에게 'Weltklasse' 등급과 포지션 내 1등이라는 WK-1의 랑리스테를 수여했다. 키커 랑리스테의 월드클래스 등급은 매우 짜서 포지션 내 세계 정상급 선수들에게만 수여됐는데 젤러는 이 무렵 세계적인 선수로 인정받았다.

그리고 1959-60 시즌에는 오베리가에서 26경기에 출전해 36골을 득점하며 북부 오베리가 우승을 이끌어냈으며 결승에서 쾰른을 상대로 동점골과 결승골을 넣으며 함부르크의 3-2 승리를 견인하면서 독일 챔피언쉽 7경기 13골을 기록하며 우승을 차지했다. 1959-60 시즌을 통틀어 34경기 49골을 기록했으며 랑리스테 평가에서는 당연히 WK-1을 유지했으며 1960년 발롱도르 투표에서도 3위를 기록하며 정상급 선수로 인정받았다.

 

1960년 잡지에 실린 우베 젤러



1960-61 시즌에는 유러피언 컵에 참가해서 4강에 진출했으나 마자르 삼총사가 버티는 바르셀로나에게 패하며 결승 진출은 좌절되었다.

1962 칠레 월드컵에서는 당당히 대표팀 주전으로 참가했다. 이탈리아를 상대로는 무득점을 기록했지만 이후 젤러는 스위스와 개최국 칠레를 상대로 연속 골을 기록했으며 서독의 8강 진출에 공을 세운다. 그러나 8강에서 유고슬라비아에게 탈락하며 지난 대회에 비해 월드컵에 비해선 좋지 않은 시즌을 보낸다.

이후 1962-63 시즌에도 북부 오베리가 우승과 DFB-포칼 우승을 기록했으며 포칼 결승전에서는 보루시아 도르트문트를 상대로 해트트릭을 기록하며 3-0 대승을 이끌며 우승한다.

젤러가 정식으로 데뷔한 1954-55 시즌 이래로 함부르크는 아홉 번 연속으로 북부 오베리가 우승을 기록했으며 독일 챔피언쉽과 DFB-포칼에서 각각 한 번씩 우승했다.

이후 독일은 지역리그와 독일 챔피언쉽을 대체하는 독일 전국의 1부 리그인 분데스리가가 등장한다.

 


2. 함부르크의 신이자 우리들의 우베

 

우베 젤러는 1963-64 시즌 초대 분데스리가에서도 훌륭한 모습을 보여줬다. 함부르크는 6위로 부진했지만 젤러는 30경기에서 30골을 기록하며 득점왕에 올랐으며 득점 2위인 도르트문트의 프리드헬름 코니에츠카와 10골이나 차이 났다.

중위권으로 전락한 함부르크에 있었던 월드클래스 젤러의 활약은 많은 팀들이 그를 원하게 했다. 특히 당시 유럽을 호령하던 인터 밀란과 레알 마드리드가 그를 영입하고자 했으나 젤러의 거절로 무산되었다.

이후 1960년대 중반에는 젤러도 부상 등이 겹치며 많은 경기에 나서지 못했고 득점도 10골을 간신히 넘기는 수준이었으나 팀의 사정을 생각하면 훌륭한 활약이라 1965-66 시즌 전반기를 제외하고는 계속 키커 랑리스테에서 월드클래스를 받았다.

어느덧 한스 셰퍼를 이어 헬무트 쇤 체제의 디 만샤프트에서 주장이 된 젤러는 1966 잉글랜드 월드컵에서도 중앙 공격수 자리에서 출전했다.

첫 경기 스위스전에서는 골을 넣지는 못했지만 후배인 헬트, 할러, 베켄바우어 등을 지원하며 경기에 큰 영향력을 끼쳤으며 아르헨티나 전에서는 무승부를 거두었고 최종전 스페인전에서는 결승골을 넣어 2-1로 이기면서 2승 1무로 조 1위로 8강에 진출했다.

8강 우루과이를 상대로는 수비수 슈넬링어가 골라인으로 향하는 공을 쳐내는 게 심판에게 걸리지 않는 등 행운이 작용했으며 우루과이는 오라시오 토르체와 엑토르 실바의 퇴장으로 4-0으로 붕괴되었다. 젤러는 세 번째 골을 넣었으나 퇴장 판정에 불만을 가진 우루과이의 주장 토르체에게 뺨을 맞는 수모도 겪었다.

4강에서는 치슬렌코의 퇴장으로 수적 열세에 빠진 소련을 몰아붙여 2-1로 승리했으며 젤러는 주장 완장을 차고 잉글랜드와 결승전을 치르러 웸블리로 갔다.

 

1966 잉글랜드 월드컵 결승전에서 상대팀 주장 바비 무어와 함께



잉글랜드와는 치열한 경기를 벌였다. 특히 2-1로 패색이 짙은 와중에 볼프강 베버가 동점골을 넣으며 연장전을 갔다. 그러나 101분에 터진 허스트의 유령 골로 사기를 잃어 서독 대표팀은 잉글랜드한테 총합 4-2로 패했다.

아쉽게 우승은 놓쳤지만 우베 젤러는 경기에서의 활약을 인정받아 대회 올스타 팀에 선정되었다.

이후에는 노쇠화하며 신예 공격수 게르트 뮐러에게 득점력에서 밀리면서 독일 내에서도 최고의 공격수 자리에서는 내려오는 듯했으나 여전히 훌륭한 활약과 공격형 미드필더의 자리를 겸비해서 플레이를 하며 살아남았다.

1970 멕시코 월드컵에서도 젤러는 주장 완장을 차고 출전했으며 모로코전에서는 측면 공격수로 출전하며 동점골을 득점해 승리의 발판을 마련했으며 불가리아전에서는 처진 공격수로 출전해 동료 게르트 뮐러의 해트트릭을 돕다가도 한 골을 추가했으며 페루전에서도 도움을 주며 3전 전승을 거두며 조 1위로 8강에 진출하는 공을 세운다.

8강에서는 지난 결승전에서 악연이 있었던 잉글랜드를 만났다. 잉글랜드는 당대 최강 고든 뱅크스가 식중독으로 빠지고 첼시의 레전드 피터 보네티가 골키퍼로 출전했다.

그래도 당대 유럽 최강의 팀 중 하나인 잉글랜드답게 서독은 굉장히 고전했는데, 31분에는 머레리에게, 후반 초반에는 피터스에게 먹히며 2-0으로 밀렸다. 하지만 베켄바우어에게 동점 골을 먹혔으며 찰튼이 빠진 이후 콜린 벨이 나오자 베켄바우어는 자신이 마킹해야 할 찰튼이 없어지자 더 자유로워졌으며 결국 76분에는 젤러가 천금 같은 동점골을 터트렸으며 연장전에서는 게르트 뮐러가 결승골을 넣으며 서독은 잉글랜드에게 복수하고 준결승전으로 간다.

서독은 이탈리아와의 혈투 끝에 베켄바우어의 쇄골 부상으로 인한 경기 영향력의 감소로 연장 끝에 이탈리아에게 패했지만 3-4 위전에서 우루과이를 1-0으로 이기면서 젤러는 월드컵 마지막 경기에서 유종의 미를 거두었다.

 

1970 월드컵에서의 게르트 뮐러와 우베 젤러 (출처: DFB)


이후 1971-72 시즌에 젤러는 현역에서 은퇴했는데 은퇴한 마지막 시즌에도 리그에서만 26경기 11골을 기록하며 1954-55 시즌 데뷔 이후에 은퇴 직전까지 한 번도 두 자릿수 득점을 기록하지 못한 적이 없었다.

이후 젤러는 은퇴한 지 수년 이후인 1977-78 시즌에는 아일랜드 리그의 코크 셀틱에서 한 경기 출전해서 두 골을 기록하기도 했다. 물론 그게 아일랜드 리그에서의 마지막 경기였다.

젤러는 자신이 충성한 함부르크에서는 물론이고 독일 전체에서 범국민적인 인기를 누렸던 축구 스타로 우리들의 우베라 불렸다.

 

Hamburger SV

1953 ~ 1972
587 Apps / 507 Goal

 

West Germany National team

1954 ~ 1970
72 Apps / 43 Goal

 

Cork Celtic

1978
1 Apps / 2 Goal

 


3. 그의 플레이 스타일

 

'원조 무결점의 스트라이커'

 

공격수로서 결점이 없는 완벽한 공격수이다. 170cm의 작은 키에도 불구하고 점차 뛰어난 점프력과 타이밍으로 헤딩의 명수로 이름을 날렸으며 오른발과 왼발 모두 훌륭한 모습을 보여줬다.

양발을 모두 잘 썼으며 뛰어난 창의성을 갖추고 있었으며 백 헤더와 백힐 패스, 바이시클 킥 등 고급적인 기술들을 실전에서 자유자재로 선보였으며 천둥과도 같은 강력한 슈팅으로 엄청난 득점력을 보여줬다.

발도 빨라 공격형 미드필더와 처진 공격수나 측면 공격수도 소화할 수 있었으며 훌륭한 성품과 강력한 리더십을 보여주며 디 만샤프트와 함부르크의 선수들을 통송했다. 프리츠 발터에 이어 독일 축구 국가대표팀의 역대 두 번째 명예 주장이다.

우베 젤러의 다이빙 헤딩 (출처: HSV 공홈)

 


4. 수상 이력

 

클럽

1954-55 북부 오베리가 우승
1955-56 북부 오베리가 우승
1956-57 북부 오베리가 우승
1957-58 북부 오베리가 우승
1958-59 북부 오베리가 우승
1959-60 북부 오베리가 우승
1959-60 독일 챔피언쉽 우승
1960-61 북부 오베리가 우승
1961-62 북부 오베리가 우승
1962-63 북부 오베리가 우승 (통산 9회 우승)
1962-63 DFB-포칼 우승

 

서독 국가대표팀

 

1958 스웨덴 월드컵 4위
1966 잉글랜드 월드컵 준우승
1970 멕시코 월드컵 3위

 

개인 수상

 

1960 발롱도르 3위
1960 독일 올해의 축구 선수상
1963 피파 XI 리저브 선정
1963-64 분데스리가 득점왕
1964 독일 올해의 축구 선수상
1966 잉글랜드 월드컵 올스타 팀
1970 독일 올해의 축구 선수상 (통산 3회 수상)
2004 FIFA 100
독일 스포츠 명예의 전당 멤버

 

1964년에 독일 올해의 선수상을 받는 우베 젤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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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수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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