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축구 역사상 최고의 센터백 Top 11~20

국가의 영웅들/독일

독일 축구 역사상 최고의 센터백 Top 11~20

토르난테 2025. 1. 13. 1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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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의 주관적인 순위입니다.
*대상자는 독일 국가 대표팀으로 A매치 1경기 이상 출전한 선수를 대상자로 했습니다.
*선수 사진은 대부분 플레이어스 유저인 법정스님의 소유님의 건조폼 입니다. 다만 법정님이 만들지 않은 선수들은 제가 만들었습니다.
*기준일은 2025년 1월 12일입니다.


20위 베른트 브란슈

 


생년월일: 1944년 9월 24일
A매치 기록: 64경기 3골
신체조건: 키 180cm / 몸무게 77kg
주 소속팀: 케미 할레

한스 위르겐 되르너와 함께 동독 축구의 황금기를 이끈 리베로로 초년에는 미드필더와 공격수를 오가던 선수였기에 수비수치고 볼을 다루는 부분과 공격적인 부분에서 뛰어났기에 공격형 리베로 역할을 맡았을 때 뛰어난 기량을 자랑했으며 실제로 동독 오베리가에서 43골을 기록했을 정도로 수비수치고는 득점력이 매우 우수했다.

1973-74 시즌에 카를 차이스 예나에서 잠시 뛰며 FDGB 포칼을 우승한 것을 제외하면 현재는 할레셔 FC라고 불리는 케미 할레에서만 선수생활을 이어나간 브란슈는 비록 리그우승을 이뤄내지는 못했지만 1965년 리그 득점왕에 올랐고 1968년에는 무관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개인의 활약으로만 동독 올해의 축구선수에 올랐을 정도로 뛰어난 퍼포먼스를 자랑했다.

동독 대표팀에서도 주축으로 활약하며 대표팀의 약진을 이끈 브란슈는 1972 뮌헨 올림픽 동메달 및 1974 서독 월드컵 8강에 올랐으며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에서는 조국의 우승을 이끌며 금메달을 수상했다. 여담으로 1974 서독 월드컵 조별리그에서 서독의 주장 베켄바우어와 경기 전 악수를 한 것은 독일 축구사에 가장 상징적인 장면이라 할 수 있었고 심지어 그의 활약으로 서독을 꺾고 조 1위로 올라갔기에 1974년에는 동독 올해의 선수상을 재차 수상했다.

 

19위 요제프 포지팔

 


생년월일: 1927년 6월 20일
A매치 기록: 32경기 1골
신체조건: 키 176cm / 몸무게 76kg
주 소속팀: 함부르크 SV

1950년대 독일 무대 최고의 수비수 중 한 명으로 WM 시스템의 센터하프와 라이트 풀백에서 주로 활약했으며 키가 큰 편은 아니었지만 완강한 대인 방어와 우수한 제공권 장악 능력과 헤딩 클리어링으로 지상전과 공중전에 모두 능숙했다.

1950년대 함부르크의 수비를 이끈 포지팔은 팀이 북독의 패자로 군림하는데 큰 공을 세우며 북부 오베리가 7회 우승을 이뤄내는데 큰 공을 세웠고 1955년, 첫 키커 랑리스테 평가에서 대표팀 파트너 베르너 리브리히와 함께 월드클래스 등급에 선정되는 영광을 누렸으며 이후에도 인터내셔널 클래스 등급에 3회 선정되었다.

독일 대표팀에서도 센터백과 라이트 풀백을 번갈아서 활약했던 포지팔은 1954 스위스 월드컵에서 주전으로 활약했는데 대회 초반에는 다소 아쉬운 퍼포먼스를 보였지만 결승전에서는 치보르와 푸스카스의 연계를 완벽하게 차단하며 조국의 우승에 큰 기여를 했다.

 


18위 마티아스 헤어게트

 


생년월일: 1955년 11월 14일
A매치 기록: 39경기 4골
신체조건: 키 178cm
주 소속팀: 바이어 위어딩겐

1980년대를 풍미했던 공격형 리베로로 광활한 시야와 창의적이면서도 정교한 패싱력을 통해 경기장 전체에 영향력을 끼쳤으며 날카로운 공격력을 통해 상대 수비진을 교란하는 부분에도 능통했기에 수비형 미드필더 역시 소화할 수 있었다.

바이어 위어딩겐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선수로 평가받는 헤어게트는 1984-85 시즌에는 DFB포칼 결승전에서 바이에른 뮌헨을 꺾고 구단의 유일한 메이저 대회 우승을 차지하는데 큰 역할을 했으며 1985-86 시즌에는 분데스리가 3위를 기록하며 구단 역사상 최고의 성적을 기록했음은 물론 유럽 무대에서도 UEFA 컵 위너스컵 준결승 진출에 자타공인 1등 공신으로 평가받았다. 헤어게트 개인도 키커 랑리스테 평가에서 인터내셔널 클래스 등급 6회 선정 및 1983-84 시즌 키커 선정 분데스리가 베스트 일레븐에 선정되었다.

훌륭한 선수들이 차고 넘치던 1980년대 독일 대표팀에서도 주전자리가 유력한 선수 중 한 명이었던 헤어게트는 1986 멕시코 월드컵에서는 백업 멤버로 참가했고 UEFA 유로 1988에 주전으로 참가해 팀의 수비라인의 리더로 디 만샤프트의 준결승 진출에 공헌했다.

 

 

17위 베른하르트 쿨만

 


생년월일: 1949년 11월 1일
A매치 기록: 40경기 6골
신체조건: 키 181cm / 몸무게 78kg
주 소속팀: FC 쾰른

1970년대 하반기에 전성기를 누린 리베로이자 수비형 미드필더로 한때 프란츠 베켄바우어의 후계자로 거론되었을 정도로 공격력만큼은 뛰어났는데 전방으로부터 활강 드리블로 상대 중원과 수비를 붕괴시키며 우수한 패싱력으로 빌드업 과정에서 큰 역할을 하는 부분은 베켄바우어를 닮았다는 평가를 받았으며 수비형 미드필더도 능숙하게 볼 수 있었다.

쾰른에서 선수 생활 전부를 보낸 원 클럽맨인 쿨만은 1972-73 시즌에 디 가이스버커의 분데스리가 준우승을 이뤄내는데 큰 공을 세워 키커지 선정 분데스리가 베스트 일레븐에 선정되며 이름을 알렸고 1977-78 시즌 쾰른의 분데스리가와 DFB포칼 더블 우승을 이뤄냈으며 이후에도 1981-82 시즌 분데스리가 준우승과 DFB포칼 2회 우승을 추가하는 활약을 펼치며 팀의 약진을 이끌었다.

쾰른에서는 뛰어난 활약을 펼치며 키커 랑리스테 평가에서 인터내셔널 클래스 등급에 7회 선정된 쿨만은 클럽에서의 우수한 활약에도 불구하고 경쟁자들이 너무나도 대단해 디 만샤프트에서는 중용을 받지 못했는데 1974 서독 월드컵에서는 베켄바우어와 라이너 본호프의 백업 멤버로 대기하며 우승을 경험했고 1978 아르헨티나 월드컵에서는 본 포지션이 라이트백인 만프레트 칼츠와의 경쟁에서 밀렸으며 1980 유로에서는 울리 슈틸리케의 백업으로 우승을 경험했다.

 

16위 디트마어 야콥스

 


생년월일: 1953년 8월 28일
A매치 기록: 20경기 1골
신체조건: 키 180cm / 몸무게 73kg
주 소속팀: 함부르크 SV

다재다능한 대기만성형 수비수로 주로 소화하는 역할은 스토퍼지만 스토퍼와 리베로를 모두 소화할 수 있으며 리베로로 활약할 시에는 공격적인 베켄바우어 류의 역할과 수비적인 체사레 말디니 류의 역할을 모두 소화할 수 있었다.

1980년대 함부르크에서 활약하며 구단의 중흥기를 이끄는데 큰 역할을 한 야콥스는 분데스리가 2연패와 1982-83 시즌 분데스리가와 유러피언 컵을 우승하며 더블을 이뤄내는데 큰 공을 세웠으며 이후에는 1986-87 시즌 포칼 우승에 기여하기도 했다. 야콥스 개인도 키커 랑리스테 평가에서 인터내셔널 클래스 등급에 7회 선정되었다.

독일 대표팀에서는 뛰어난 수비수가 많아 오랫동안 중용되지 못했던 야콥스는 1986 멕시코 월드컵에서 주전 리베로 아우겐탈러가 조별 리그에서 부진하자 온 기회를 놓치지 않고 주전자리를 차지하며 팀이 결승에 진출하는데 공을 세운다. 그러나 1989-90 시즌 초반에 베르더 브레멘과의 북독 더비에서 골과 다름없는 슈팅을 태클로 걷어내다가 골망을 땅에 고정시키는 갈고리가 제대로 잠겨져 있지 않았던 이유로 갈고리가 등이 박히는 대형 부상을 당하며 허무하게 은퇴했다.

 

15위 베르너 리브리히

 


생년월일: 1927년 1월 18일
A매치 기록: 16경기 0골
신체조건: 키 176cm / 몸무게 75kg
주 소속팀: 카이저슬라우테른

독일 축구사에서는 베른의 기적을 이끈 영웅 중 한 명으로 기억되지만 나치 독일 시절에는 독일 사회민주당 당원이었던 이유로 집안이 나치의 박해를 받았던 수비수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서독 무대를 대표하는 센터하프로 거칠면서 집요한 대인 마킹으로 상대 공격수를 괴롭혔으며 특히 날카로운 슬라이딩 태클은 완벽에 가까웠다.

19년의 선수생활을 오직 카이저슬라우테른에서만 보낸 원 클럽맨 리브리히는 팀의 수비를 이끌며 오베리가 주트베스트 10회 우승을 이뤄내며 남서부 독일 무대를 평정하는데 큰 공을 세웠고 전국 대회에서도 결승에 5회 진출해 2회 우승을 이뤄냈으며 1960-61 시즌에는 DFB포칼 준우승을 이뤄냈다. 리브리히 개인도 1955년에 초대 키커 랑리스테 평가에서 월드클래스 등급을 받았다.

디 만샤프트에서도 포지션 경쟁자 포지팔을 라이트 풀백으로 밀어내며 1954 스위스 월드컵에 주전 센터하프로 참가한 리브리히는 조별리그 2차전에서는 팀의 대패를 막지 못했지만 서독의 푸스카스에게 부상을 입혔는데 이는 다시 만난 결승전에서도 부상의 여파로 제 기량을 발휘하지 못한 푸스카스를 거세게 몰아붙이며 뛰어난 활약을 펼쳐 베른의 기적이라 불리는 우승에 공헌했다.

 

14위 클라우스 아우겐탈러

 


생년월일: 1957년 9월 26일
A매치 기록: 27경기 0골
신체조건: 키 182cm
주 소속팀: FC 바이에른 뮌헨

1970년대의 리베로 베켄바우어의 후계자로 평가받았던 선수지만 베켄바우어와는 플레이 스타일이 다른, 철저하게 후방 수비를 커버하는 이탈리아식 리베로에 가까웠으며 제공권 능력이 우수해 헤더로 득점하는데 능했음은 물론 초년에는 스토퍼 역할을 맡았을 정도로 대인 수비에도 능통했다.

클럽 커리어 전부를 바이에른 뮌헨에서만 보낸 원 클럽맨인 아우겐탈러는 1980년대 바이에른의 수비라인 리더로 활약하며 분데스리가 7회 우승과 포칼 3회 우승, 그리고 유러피언 컵 결승전에 두 번 진출하며 바이에른 뮌헨이 독일의 국민 구단으로 자리잡는데 공헌한 업적을 인정받아 바이에른 뮌헨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으며 아우겐탈러 개인도 분데스리가 올해의 팀에 2회 선정되었으며 키커 랑리스테 평가에서 인터내셔널 클래스 등급에 6회 선정되었다.

주 포지션이 센터백이 아닌 울리 슈틸리케와 만프레트 칼츠를 비롯해 리베로 역할을 수행할 수 있던 선수들이 많았던 디 만샤프트에서는 오랫동안 중용받지 못했던 아우겐탈러는 1986 멕시코 월드컵에서 조별 리그 두 경기에 선발 출전했으나 부진한 퍼포먼스를 보였기에 이후에는 야콥스 주전 경쟁에서 밀렸고 UEFA 유로 1988에서는 대표팀에 선발되지 못했으나 1990 이탈리아 월드컵에서는 다시 주전 리베로 자리를 되찾으며 위르겐 콜러, 기도 부흐발트와 함께 후방에서 안정적인 수비력을 선보이며 우승을 이뤄냈다.

 

13위 한스게오르크 슈바르첸벡

 


생년월일: 1948년 4월 3일
A매치 기록: 44경기 0골
신체조건: 키 183cm / 몸무게 78kg
주 소속팀: FC 바이에른 뮌헨

베켄바우어와 함께 바이에른 뮌헨의 전성기를 이끈 영혼의 파트너로 베켄바우어의 오버래핑을 넓은 커버 능력과 훌륭한 대인 수비력으로 바이에른 뮌헨의 뒷문을 확실히 책임지던 선수였으며 베켄바우어와의 콤비 플레이로 명성을 얻으며 황제의 기사라고 불렸다.

바이에른 뮌헨에서만 선수 생활을 보낸 황제의 기사 슈바르첸벡은 데어 카이저와 함께 팀의 첫 분데스리가 우승과 컵 위너스컵 우승을 이뤄낸 것은 물론 분데스리가 3연패와 유러피언 컵 3연패를 이룬 것을 포함해 분데스리가 6회 우승을 이뤄냈으며 특히 첫 유러피언 컵 결승전인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와의 경기에서 동점골을 기록하며 팀을 재경기로 이끌었고 재경기에서 승리하는 발판을 마련하며 첫 빅이어 획득에 공헌했다. 슈바르첸벡 개인도 키커 랑리스테 평가에서 인터내셔널 클래스 등급에 7회 선정된 것은 덤이다.

디 만샤프트에서도 황제의 기사로서 데어 카이저 베켄바우어를 보좌한 슈바르첸벡은 UEFA 유로 1972 우승과 1974 서독 월드컵 우승, 그리고 유로 1976 준우승의 대업을 이루는데 공헌했는데 그중 UEFA 유로 1972에서 보여준 절륜한 수비력으로 인해 월드 사커가 선정한 베스트 일레븐에 선정되었다. 그러나 프란츠 베켄바우어가 대표팀을 은퇴한 뒤로는 제 기량을 펼치지 못하며 대표팀 주전에서 멀어졌는데 1978 아르헨티나 월드컵에서는 롤프 뤼스만의 백업으로 대기했다.

 

12위 클라우스 피히텔

 


생년월일: 1944년 11월 19일
A매치 기록: 23경기 1골
신체조건: 키 176cm / 몸무게 65kg
주 소속팀: FC 샬케 04

23년의 현역 시절을 이어간 리베로로 프란츠 베켄바우어의 라이벌 중 하나로 평가받았으며 빠른 스피드와 지능적인 위치 선정과 수비 조율은 물론 우수한 볼 테크닉과 교묘하면서도 깔끔한 맨 마킹에 능해 23년의 프로생활 중 그가 받은 레드카드는 단 1장에 불과했다.

독일 무대에서 23년간 활약하며 키커 랑리스테 평가에서 인터내셔널 클래스 등급에 14회 선정된 피히텔은 비록 분데스리가 우승을 거두진 못했지만 뤼스만과 조합해 분데스리가 2회 준우승 및 1971-72 시즌 DFB포칼 우승을 이뤄냈고 피히텔 개인도 키커지 선정 분데스리가 시즌 베스트 일레븐에 4회 선정되었다. 그리고 FC 샬케 구단 통산 최다 출전자이자 분데스리가 통산 출전 4위에 랭크된 업적을 인정받아 1999년에 선정된 샬케의 세기의 일레븐에 선정되기도 했다.

독일 대표팀에서도 빌리 슐츠의 후계자로 평가받았던 클라우스 피히텔은 1970 멕시코 월드컵에서 주전 수비수로 나서며 디 만샤프트가 3위에 오르는데 공을 세웠으나 프란츠 베켄바우어가 리베로로 포지션을 변경함에 따라 역할이 겹치며 중용받지 못했다.

 

11위 안토니오 뤼디거

 


생년월일: 1993년 3월 3일
A매치 기록: 77경기 3골
신체조건: 키 190cm / 몸무게 85kg
주 소속팀: 레알 마드리드

2020년대 초반 세계 최고의 수비수 중 하나로 평가받는 인물로 단단한 피지컬과 최고 속력이 무려 시속 36.7km에 달하는 빠른 주력을 겸비해 발 빠른 공격수들을 잘 막기로 유명했으며 집중력은 다소 아쉽지만 교묘한 심리전으로 상대를 도발하는 능력은 물론 현세대 메타에 맞게 뛰어난 패싱 능력으로 빌드업에도 능했음은 물론 양 사이드백 자리에서도 준수한 모습을 보이는 다재다능한 수비수다. 

슈투트가르트에서 데뷔해 2012년에 프리츠 발터 메달 U19 금메달을 타며 주목받았던 뤼디거는 주로 해외에서 좋은 퍼포먼스를 보였는데 AS 로마에서는 마놀라스와 함께 수비라인의 축으로 활약했고 첼시에서는 부상으로 고전하던 시절도 있었지만 2020-21 시즌에는 팀의 UEFA 챔피런스리그 우승 및 UEFA 슈퍼컵:과 FIFA 클럽 월드컵 우승을 이뤄냈고 레알 마드리드에서는 빠르게 수비라인의 핵심으로 자리잡아 2022-23 시즌 코파 델 레이 우승 및 2023-24 시즌 라리가와 UEFA 챔피언스리그 우승을 포함해 2024년 5관왕을 이뤄내는데 주축으로 활약했다.

첼시와 레알 마드리드에서 주축으로 활약하며 두 팀에서 수많은 영예를 누린 뤼디거는 첼시 소속으로 2021 FIFA 클럽 월드컵 결승전에서 MOTM에 선정되었고 첼시에서는 2021-22 시즌 PFA 올해의 팀을, 레알 마드리드에서는 2023-24 시즌 라리가 올해의 팀에 선정되었다. 그리고 양 팀을 통틀어서 ESM 올해의 팀 2회 선정 및 UEFA 챔피언스 리그 시즌의 스쿼드에 3회 선정되었음은 물론 2024년에는 FIFA 더 베스트 일레븐과 FIFPro 월드 일레븐, 그리고 IFFHS 월드팀에 동시에 선정되며 2024년 최고의 센터백 중 한 명으로 자리잡았다. 그러나 독일 대표탐에서는 2017 컨페더레이션스컵 우승 이후로는 좋은 모습을 보이지 못하다가 UEFA 유로 2024에서는 이전 대회보다는 나은 모습을 선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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