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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돌아온 스타플레이어 열전 2편 - '경이로운 흑인' 호세 레안드로 안드라데

토르난테 2021. 1. 19. 1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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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이로운 흑인'이라 불렸던 호세 레안드로 안드라데 그는 누구인가?

 

출처: 에펨네이션 유저 법정스님의 소유

 

이름: 호세 레안드로 안드라데

생몰년: 1901년 11월 22일 ~ 1957년 10월 5일

신체조건: 키 179cm / 몸무게 77kg

포지션: 라이트 하프 (오늘날의 수비형 미드필더)


1. 올림픽에서 우루과이의 시대를 이끌다.

 

1901년 11월 22일, 우루과이의 살토라는 도시에서 아르헨티나인인 어머니와 흑인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안드라데는 가난한 형편으로 인해 본업인 축구를 하면서도 악기 연주와 춤을 추며 밴드에서 공연을 겸하며 돈을 벌었다.

베아 비스타라는 클럽에서 성인 경기에 데뷔하며 호세 나사치와 함께 준수한 모습을 보여 1923년에는 우루과이 대표팀에 뽑혔으며 이때 아르헨티나, 브라질, 파라과이와의 코파 아메리카에서 우승하는데 기여했으며 1924년에는 우루과이 최고의 명문 나시오날로 이적했다.

1924년 호세 레안드로 안드라데는 파리 올림픽 첫 경기에서 유고슬라비아를 무려 7-0으로 대파했으며 2차전에서는 미국을 3-0으로 대파했다. 이 과정에서 안드라데는 1차적인 수비 역할은 물론이고 탁월한 시야와 정교한 패싱력으로 공을 공격진영으로 운반하는 플레이메이킹 능력도 보여주며 경기를 지배했다.

8강에서는 개최국 프랑스를 5-1로 대파했으며 4강에서는 네덜란드를 상대로 2-1로 대파했고 결승에서는 스위스를 상대로 3-0으로 크게 이기며 첫 금메달을 획득하며 안드라데는 다른 우루과이 선수들과 함께 스타덤에 올랐다.

우루과이는 5전 전승을 거뒀으며 5경기에서 20 득점을 하면서 단 두골만 내주는 견고한 수비력을 보였으며 이에 오늘날의 수비수와 같은 개념의 풀백인 나사치와 하프백인 안드라데는 당시 주목받기 힘들었던 포지션임에도 주목을 받았다.

올림픽을 치르고 우루과이로 돌아와서는 1924년 코파 아메리카에서 아르헨티나, 칠레, 파라과이와의 리그에서 2승 1무로 1위를 차지해 우승했지만 안드라데는 컨디션 난조로 명단에만 올랐다. 그나마 소속팀 나시오날에서도 우루과이 프리메라 디비시온에서 우승했다.

 

레안드로 안드라데의 사진 (출처: 키커)



그러나 호사다마라고 좋은 일도 있으면 좋지 않았던 일도 있었는데 안드라데의 상황이 딱 그랬다. 1925년에는 재정 문제로 리그가 중단되고 1926년에는 대회를 개최하지 않아 안드라데는 다시 음악 활동 같은 부업으로 돈을 벌 수밖에 없었다.

더 대단한 것은 리그가 개최되지 않았고 부업 활동을 했음에도 안드라데는 우루과이 대표팀 소속으로 1926년 코파 아메리카에 출전해 아르헨티나, 칠레, 파라과이, 볼리비아와의 리그에서 4전 전승을 거두며 17 득점 2 실점을 기록하며 우승하며 압도적인 모습을 보여줬다. 특히 안드라데는 이 대회에서 MVP를 차지하며 자신이 남미 최고의 선수 중 하나임을 증명했다. 1927년에는 아르헨티나에 패해 준우승에 그쳤지만 이 준우승이 안드라데의 명성을 흠집 내진 못했다.

1928년 암스테르담 올림픽을 준비하는 도중 안드라데는 이번 올림픽에는 불참하려 했고 실제로 안드라데의 대체 선수인 에두아르도 마르티네스까지 선발했지만 안드라데가 갑자기 마음을 바꿔 참가했다.

 

1928년 바에서 음료를 만드는 안드라데

 

안드라데는 대회에서 8강전인 독일전을 제외한 전 경기에 출전했으며 4강전 이탈리아전에도 활약하며 3-2 승리에 기여하나 이 경기에서 안드라데는 골대와 충돌하여 눈에 부상을 입었으며 훗날 이 부상으로 인해 안드라데는 훗날 시력이 악화되게 된다.

결승에서는 라이벌 아르헨티나와 만나 1차전에서는 1-1로 무승부를 거두었으나 재경기에서는 2-1로 이기며 금메달을 획득했다. 남미 최고의 하프백은 몬티와 안드라데는 이 경기에서 희비가 갈렸는데 공격수를 따라다니며 맨 마킹에만 중점을 둔 몬티는 경기를 지휘하며 팀 전체에 영향력을 끼치는 안드라데에 비해 초라한 모습을 보여줬다.

 

Bella Vista

1921 ~ 1923
71 Apps / 7 Goal

 

Club Nacional

1924 ~ 1930
105 Apps / 29 Goal


2. 초대 월드컵 우승 멤버라는 영광을 경험한다.

 

안드라데를 포함한 1920년대 우루과이 축구 국가대표팀은 월드컵 이전 최고의 권위를 가진 대회는 두 번의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획득했으며 네 번의 코파 아메리카를 우승한 1920년대를 대표하는 팀이었다.

이러한 압도적인 활약과 1930년이 독립 100주년이 되는 우루과이의 상황이 맞물리며 줄 리메는 초대 월드컵 개최국으로 우루과이를 정했다.

이에 다수의 유럽 국가들이 불참했다. 특히 잉글랜드는 종주국인 자신들을 무시하는 행위라고 생각하고 월드컵을 평가절하하며 불참했으며 다른 유럽 국가들도 항공편이 없던 시절이라 배를 타고 가야 했던 현실적인 문제 때문에 가지 않았다.

그나마 FIFA 회장 줄 리메가 간청했고 우루과이 정부가 체류 비용을 전액 지원해준다는 조건으로 프랑스, 벨기에, 유고슬라비아, 루마니아가 참가했고 북중미의 미국과 멕시코도 참가하며 남미 팀들만 참가하는 대회라는 오명은 피했다.

 

월드컵의 아버지, 줄 리메의 사진


13팀이 참가해 3팀에서 4팀이 한 조가 되었으며 바로 준결승 토너먼트로 진출하는 방식을 채택했다.

3조에 배치된 우루과이는 페루를 1-0으로 이기고 루마니아를 4-0으로 이기며 무실점으로 조 1위를 달성한다.

4강 유고슬라비아전에서는 안드라데는 유고슬라비아의 인사이드 포워드들과 하프백들을 압도하며 엄청난 경기 영향력을 보여주었으며 6-1 대승에 공헌한다.

결승전에서는 최고의 라이벌 아르헨티나와 조우한다. 전반에는 아르헨티나 프리메라 디비시온의 공인구로, 후반에는 우루과의 프리메라 디비시온의 공인구로 경기하는 것으로 합의됐다.

 

초대 월드컵의 결승전을 앞둔 사진으로 가장 왼쪽의 흑인 선수가 안드라데이다.


전반에는 우루과이의 인사이드 레프트 도라도의 선제골로 앞서갔으나 페우셀레의 동점골과 스타빌레의 역전골로 전반전을 아르헨티나가 2-1로 앞선 상태에서 마친다.

그리고 후반전이 시작되고 57분에 세아의 동점골이 들어갔으며 이후 2-2 동점 상황에서 아르헨티나 측의 완벽한 골 찬스를 호세 레안드로 안드라데가 직접 몸을 던져 블로킹하며 무산시켜버렸다.

여기에 기세가 오른 우루과이 대표팀은 아웃사이드 레프트 이리아스테의 역전골과 부상으로 손목을 잃어 외팔이 카스트로라 불렸던 인사이드 라이트 엑토르 카스트로의 쐐기골을 더하며 4-2로 재역전하며 초대 월드컵의 우승을 영예를 누렸다.

 

1930 월드컵 우루과이의 우승 멤버들.


골든 볼은 대회 내내 완벽한 카리스마와 견고한 대인 수비 능력을 보여준 나사치가 수상했지만 결승전에서 위급한 순간 팀을 구했으며 엄청난 경기 영향력을 발휘한 호세 레안드로 안드라데도 그 공로를 인정받아 브론즈볼과 대회 베스트 일레븐에 선정되며 월드컵 역사에 이름을 남기며 정상에서 대표팀 은퇴를 선언하며 박수받으며 떠난다.

월드컵 이후 1931년에는 페냐롤로 이적해서는 우루과이 대표팀에서 호흡을 맞춘 헤스타도와 로렌조 페르나데스와 중원을 구성하며 1932년에 리그 우승의 영광을 누렸으며 이후 여러 팀을 임대로 돌다가 1935년에 다시 돌아와 리그 우승을 차지하고는 몬테비데오 원더러스로 떠났다가 1936 시즌 후반기를 아르헨티노 후니오스에서 보내며 은퇴했다.

 

Penarol

1931 ~ 1935
71 Apps / 7 Goal

 

Uruguay National team

1923 ~ 1930
33 Apps / 1 Goal


3. 그의 플레이 스타일

 

'경이로운 야전 사령관'

 

호세 레안드로 안드라데는 훌륭한 운동 능력과 왕성한 지구력, 빠른 스피드와 흑인의 탄력성을 가진 뛰어난 운동선수였으며 이러한 운동 능력을 활용한 대인 수비 능력은 당대 최고를 자랑했다. 그뿐만이 아니라 경기의 흐름을 읽는 탁월한 전술안과 헌신적인 플레이를 이루는 팀 플레이 정신을 고루 가졌으며 창의적인 패스에도 능해 인사이드 포워드나 아웃사이드 포워드에게 볼을 배급하는 능력도 훌륭했다. 특히 킥 기술마저 훌륭해서 클럽에서는 바이시클 킥을 활용한 득점 빈도도 높았다.

거기다가 중요한 순간에 빛을 발하는 능력도 대단한데 1924년 파리 올림픽 결승에서도 중요한 순간마다 엄청난 태클을 보여주며 상대의 득점 기회를 저지했으며 초대 월드컵에서도 2-2 상황에서 몸을 던지는 블로킹으로 아르헨티나의 득점 기회를 무산시켰다. 우루과이 축구 국가대표팀 엠블럼에는 별이 네 개가 달려있는데 월드컵 이전 두 번의 올림픽 우승이 포함된 기록이었으며 이 네 개의 별 중 세 개를 다는데 안드라데는 크게 공헌했다.

이러한 압도적인 모습을 보이며 동시대의 라이벌 하프백인 루이스 몬티보다도 우수한 선수로 평가받았으며 역대 최고의 수비형 미드필더를 가리는 논쟁에도 자주 거론되는 인물이다.


4. 수상 이력

 

클럽

 

1924 우루과이 프리미어 디비시온 (클루브 나시오날)
1932 우루과이 프리미어 디비시온 (페냐롤)
1935 우루과이 프리미어 디비시온 (페냐롤)

 

우루과이 국가대표팀

 

1923 코파 아메리카 우승
1924 파리 올림픽 금메달 (★)
1924 코파 아메리카 우승
1926 코파 아메리카 우승
1927 코파 아메리카 준우승
1928 암스테르담 올림픽 금메달 (★★)
1930 우루과이 월드컵 우승 (★★★)

 

개인 수상

 

1926 코파 아메리카 MVP
1930 우루과이 월드컵 브론즈 볼
1930 우루과이 월드컵 대회 올스타 팀
1994 프랑스 풋볼 선정 월드컵 탑 100 (1930~1990) 10위
2000 IFFHS 선정 세기의 선수 29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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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수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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