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벌에 가려졌던 밀란의 숨겨진 황금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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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벌에 가려졌던 밀란의 숨겨진 황금기

토르난테 2020. 11. 3. 15: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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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익 축구 우익 축구

 

좌익 축구와 우익 축구라는 책이 있다. 이 단어는 아르헨티나 국가대표팀 감독이었던 세자르 루이스 메노티가 처음 언급한 발언이었다.

좌익 축구는 관중을 위한 재미있는 축구, 즉 공격하며 점유하는 축구로 표현했으며 어떻게 이기느냐를 중요하게 생각했다.

반면 우익 축구는 승리 그 자체를 위한, 승리를 위해서는 한 골을 넣고 전원 수비만 할 수도 있으며 반칙도 서슴지 않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축구로 표현했으며 어떻게든 이긴다를 중요하게 생각했다.

 

도서 좌익 축구 우익 축구의 책 표지


이렇게 서로 축구를 다른 시각으로 보는 것을 좌익과 우익으로 표현한 것인데 예외는 일부 있지만 이분법 하여 편하게 분류해서 보는 방법이라 생각하면 편하겠다.

좌익 축구의 대표 주자는 바르셀로나다. 리누스 미헬스와 요한 크루이프가 감독으로 자리 잡은 이후 바르셀로나는 절대적으로 과정 중시의 팀이 되었으며 이런 철학을 유소년팀인 라 마시아에서부터 철저하게 주입한다. 상대가 누구든지 자신의 축구를 굽히지 않는 건 덤이다.
  
반면 우익 축구의 대표 주자로는 AC 밀란을 꼽는다. 압박과 점유 중 압박에 틀을 맞춘 사키가 자리 잡은 팀이며 사키 이전 1960년대에는 카테나치오의 선두 주자 중 하나로 이름을 날리기도 했다. 그리고 우익 축구의 선두주자답게 좌익 축구의 선두주자인 바르셀로나를 1994년에 아테네에서 4-0으로 완파하며 유럽 챔피언이 되기도 했다.

 

수비 축구인 우익 축구의 승리를 알린 1993-94 시즌 AC 밀란


많은 축구팬들은 저 시절 사키-카펠로 체제의 밀란을 밀란 제너레이션 1기라고 부르며 칭송한다. 하지만 밀란은 이전에도 우익 축구의 대가로 빛난 적이 있던 팀이었다. 하지만 후대의 밀란과 지역 라이벌이 같은 방법으로 더 큰 성공을 거두는 바람에 묻혔을 뿐이다.

오늘은 이 뭍혀버린 네레오 로코 시절의 밀란을 분석해보려고 한다.

 

공격 축구가 유행하던 시절에 수비 축구로 성공을 거두다.

 

1955-56 시즌 유러피언 컵이 출범한 이래 유럽 축구는 압도적인 공격력을 보이던 팀들이 성공을 거두던 시기였다.

유러피언 컵 5연패를 이뤘던 레알 마드리드는 디 스테파노를 중심으로 푸스카스, 리알, 헨토, 코파 같은 출중한 포워드들이 서로 자리를 바꿔가는 스위칭 플레이로 화려하게 상대를 압도했으며 1959-60 시즌 유러피언 컵 결승전에서는 프랑크푸르트를 7-3으로 대파했다.

레알 마드리드에게서 바통을 물려받은 벤피카도 마찬가지였다. 아우가스와 에우제비우가 공격을 이끄는 4-2-4 시스템은 측면 수비수들까지 공격에 가담하며 최대 여덟 명이 공격을 하는 상황까지도 만들었으며 이런 플레이를 보여주며 두 번의 유러피언 컵 우승을 이끌었다.

월드컵에서도 마찬가지였는데 브라질은 1958년과 1962년 대회를 모두 4-2-4 시스템을 사용해 우승했으며 압도적인 공격력을 보여줬다. 반면 수비축구를 앞세우던 우루과이와 스위스 같은 팀들은 과거의 영광을 유지하지 못하며 부진을 경험하기도 했다.

 

1958 월드컵 결승전 브라질 명단


이탈리아 역시 과거 수페르가의 참사 이전에는 공격적인 축구로 세계를 호령하던 팀이었다. 하지만 1940년대 후반 아주리 군단의 주축이던 토리노 선수들이 비행기 사고로 모두 죽음을 맞이하면서 이탈리아 축구는 암흑기를 맞았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에서 등장한 것이 칼 라판이 고안했던 베로우 시스템을 개량하며 리베로를 둔 카테나치오 시스템이다. 

최후방에 리베로를 두는 전술은 1940년대 말 약체 살레르니타나의 쥐세페 비아니 감독에 의해 만들어졌다. 그리고 이탈리아의 명 축구 기자인 지안니 브레라는 이 전술을 높게 평가하며 신체적으로 북유럽에 비해 약하며 남미 선수들만큼 개인기에 능하지 못한 이탈리아의 축구 선수들이 앞으로 지향해야 할 축구라며 극찬했다.

 

카테나치오의 배경이 되는 라판의 베로우 시스템이다.

 

브레라의 주장을 일리가 있다고 받아들인 로코는 파도바를 맡았던 시절 이러한 시스템을 보여줬다. 로코는 세리에 B에서 하부리그로 강등될 위기에 몰려 있던 파도바의 감독으로 부임했었으나 팀을 잔류시키고 다음 시즌에는 세리에 A로 승격시키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기갑 군단이라 불리며 강력한 수비력을 보여주며 유벤투스와 피오렌티나의 뒤를 이어 3위에 오르기도 했다.

1961년에는 그레놀리 삼총사의 은퇴로 인한 세대교체로 어려움을 겪고 있던 AC 밀란의 지휘봉을 맡았는데 그는 체사레 말디니를 리베로로 삼아 수비진을 구축하고 당시 18세에 불과한 어린 천재 리베라와 브라질에서 건너온 용병 아우타파니에게 공격을 맡겼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로코는 부임한 해에 리그 우승을 했으며 이듬해에는 리그 우승에는 실패했지만 유러피언 컵에서 벤피카의 3연패를 막고 우승했다. 그렇다면 로코의 밀란은 전술적으로 어떠한 축구를 구사했을까?

 

같이 수비하는 팀을 상대로 득점하는 신형 카테나치오

 

베로우 시스템부터 전통적인 카테나치오가 사라지고 두줄 수비가 수비축구의 거장 역할을 하는 지금까지도 수비 축구의 기본 개념은 선 수비 후 역습이다. 그리고 수비 축구를 하는 팀들은 이러한 상황에서 문제를 겪는다. 같은 수비 축구를 구사하는 팀을 상대로 어떠한 모습을 보일까?

이 문제를 해결한 감독들은 수비 축구를 함에도 불구하고 명장이란 타이틀과 챔피언이라는 타이틀을 획득하지만 이에 실패하면 상대적으로 평가가 많이 깎이게 된다. 로코는 이 문제를 해결한 최초의 감독이었으며 그의 카테나치오를 설명하면서 같이 설명해보려고 한다.

 

로코의 카테나치오 시스템


일단 최후방에 커버 능력과 수비라인 지휘 능력이 뛰어난 체사레 말디니가 포진해있으며 그 앞에 W-M 체제에서 측면 수비수였던 트레비 다비드를 측면에 배치하고 중앙에는 수비형 미드필더로 1차 저지선 역할을 했던 페루 출신 빅토르 베니테즈를 스토퍼로 배치했다. 그리고 베니테즈, 다비드, 트레비 이 세명의 스토퍼는 상대의 스트라이커와 아웃사이드 포워드들을 상대로 대인 수비를 했다.

그리고 트라파토니를 수비형 미드필더로 배치했으며 유사시에는 베니테즈와 함께 수비에 가담하며 5백을 구성했으며 트라파토니가 수비진으로부터 볼을 받아 박스 투 박스 미드필더인 디노 사니에게 볼을 전달하면 사니는 리베라에게 빠르게 전달했고 이후에는 리베라의 지휘로 네 명의 공격진이 압도적인 속도로 역습해서 상대 수비진을 붕괴시켰다.

상대 수비수가 같이 잠그면 원래 인사이드 포워드 출신이었던 사니도 공격에 가담시켰으며 리베라와 아우타파니가 서로 중앙을 집중 공격할 때 측면 공격수들이 측면 수비수들을 견제하면서 수비라인을 무너트리고 무너진 공간으로 리베라가 패스해서 공격수들이 침투하여 득점하는 구도였다.

 

아우타파니와 리베라는 최고의 파트너였다.


이런 플레이로 밀란은 무려 1961-62 시즌에 34경기에서 24승 5무 5패를 기록했으며 리그에서 무려 83 득점을 기록했다. 2위인 인테르가 57 득점이며 최다 득점 2위인 로마가 61 득점인 것을 감안하면 공격력에도 무게를 둔 카테나치오였음을 부정할 수는 없다.

유러피언 컵 결승에서도 벤피카를 상대로 에우제비우에게 선제골을 먹히며 계획이 틀어지나 싶었지만 바로 공세로 바꿔 아우타파니의 멀티골로 승기를 잡고 다시 극한의 수비축구를 선보였다.

수비 축구를 우선시했지만 얼마든지 많은 골을 넣을 수 있던 강팀 AC 밀란은 이렇게 유럽을 지배하나 했지만 예상치 못한 변수가 발생한다.

 

농사는 라판이 짓고, 밥은 로코가 짓더니, 그 밥을 에레라가 먹다.

 

하지만 로코는 자신의 우상의 팀 토리노를 부활시키고 싶다고 토리노로 직장을 옮겼고 로코를 잃은 밀란은 이탈리아에서 리베로를 최초로 활용한 주세페 비아니를 사령탑으로 임명했지만 중위권으로 추락했다. 인터콘티넨탈컵에서도 펠레의 산투스에게 공격 축구 vs 수비 축구의 자존심을 걸고 붙었으나 지고 말았다. 

로코의 시스템을 자신의 기존 시스템과 결합해 새로운 카테나치오를 만들어 낸 엘레니오 에레라에게 그 명성을 빼았겼으며 팬들은 로코와 밀란이 만든 짧았던 밀란 제너레이션은 잊어버리기 시작했다. 

에레라의 이야기는 아래 링크를 참조

dongneazesoccer.tistory.com/16

 

카테나치오의 왕이라 불리는 사나이가 후세에 남긴 것들은 무엇일까?

모방은 창조의 어머니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이란 책을 읽게 되면 모방이라는 말이 나온다. 그 책에서는 우리가 만드는 예술은 모방을 거쳐서 만들어야 한다는 것을 써 놓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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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코는 그 뒤 밀란으로 부임해 유러피언 컵 결승에서 미헬스와 크루이프의 아약스를 대파하며 유러피언 컵 우승을 다시 차지하지만 이미 카테나치오라는 브랜드는 인테르에게 빼앗긴 뒤였으며 UEFA에서도 로코의 라이벌 에레라를 카테나치오의 왕이라 부르며 인정했다.

그리고 1979년 로코가 사망했으며 먼 훗날인 1987년에 부임해 미헬스가 제시한 압박이라는 페러다임을 완성시킨 사키의 대단한 성공에 의해 밀란을 대표했던 로코의 밀란은 팬들의 기억속에서 잊혀지며 밀란 제너레이션이란 칭호마저도 빼앗기며 묻히게 된다.

 

사키의 밀란 (출처:유로스포츠)


하지만 라판이 최초로 수비적인 축구의 이념을 제시했으며 이 수비 축구의 이념에서 같이 수비를 하는 상대를 공략하는 방식의 패러다임을 제시한 로코의 공로는 잊기에는 밀란과 이탈리아 축구의 정체성에 밑거름을 부정하는 것과 다를 바 없지 않을까?

로코에 관해서도 한 번 들어줬으면 하는 바람이다.

동네 축덕 아저씨의 축구 썰
관리자 박 수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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