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나치오의 왕이라 불리는 사나이가 후세에 남긴 것들은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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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테나치오의 왕이라 불리는 사나이가 후세에 남긴 것들은 무엇일까?

토르난테 2020. 4. 15. 0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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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방은 창조의 어머니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이란 책을 읽게 되면 모방이라는 말이 나온다.

그 책에서는 우리가 만드는 예술은 모방을 거쳐서 만들어야 한다는 것을 써 놓았다. 

그렇다고 남의 것을 그대로 베끼라는 게 아니다. 그가 말하는 모방이란 삶의 모습들을 예술이라는 창조 영역의 본바탕으로 쓰라는 것이다.

이상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모방의 정리이다.

기존에 높게 평가받는 예술품들이나 혹은 퀄리티에 비해 저평가받는 예술품들을 완벽하게 이해한다. 그 뒤 자신의 방식에 맞게, 또는 시간적, 공간적 배경에 맞게 결점을 보완하며 재창조하면 자신만의 새로운 예술품이 완성되는 것이다.

이는 축구계에서도 예외는 아니다. UEFA에서 축구계 역사상 가장 큰 영향력을 끼친 명감독 10명을 선정하는데 엘레니오 에레라를 선정하고서는 "카테나치오의 왕"이라는 평가를 남겼다.

그가 카테나치오의 창시자여서일까? 아니다. 카테나치오의 방향성인 선 수비 후 역습은 1930년대 스위스의 감독 칼 라판의 베로우 시스템에서 나왔다. 그리고 카테나치오의 상징과도 같은 최후방에 리베로를 두어 수비를 조율하는 전략은 1940년대 말 살레르니타나의 쥐세페 비아니 감독에 의해 만들어졌다.

그렇다면 이 시스템으로 가장 먼저 큰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한 감독이라서? 그것도 아니다. 에레라가 이끈 인터 밀란의 감독인 AC 밀란의 네레오 로코가 이미 1961-62 시즌에 세리에 A를 우승했으며 이듬해인 1962-63 시즌엔 유러피언 컵을 우승하며 카테나치오의 위력을 더 먼저 선보였다.

오히려 그때의 에레라는 인테르에서 우승을 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비판을 받고 있던 시절이었고 회장인 안젤로 모라티가 "한번 밀란의 전술을 모방해보는 건 어때?"라는 권유를 받고 카테나치오를 모방했던 비화도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테나치오 하면 라판이나 비아니, 그리고 로코가 아닌 에레라를 떠올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에레라가 카테나치오의 약점인 카테나치오가 카테나치오를 상대하는 상황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가장 완벽하게 보완했다. 그러한 철학을 앞세워 네라주리 군단을 이끌고 이탈리아와 유럽을 제패해 '그란데 인테르'의 시대를 열었다. 그리고 그의 카테나치오를 받아들인 아주리 군단은 오랜 침체기를 이겨내고 유럽 챔피언에 오르게 된다.

에레라의 카테나치오가 추앙받았던 이유는 무엇일까? 그리고 카테나치오로 어떻게 카테나치오를 상대할 수 있을까? 이제 그 껍데기를 벗겨내고 속살을 보여주겠다.

 

괄목상대 (刮目相對)

 

삼국지를 읽다 보면 여몽이란 장수의 일화가 나온다. 

용맹하지만 불학무식한 무장이었으나 그의 주군인 손권의 권유로 학문과 병법을 익히게 되며 당대 오나라 최고의 대전략가이자 현자이며 병권을 가진 대도독이란 직위에 있던 노숙에게 자신의 늘어난 식견을 보여줬다. 이에 노숙이 감탄하자 "선비는 서로 헤어진 뒤 사흘이 지나면 눈을 비비고 상대를 다시 봐야 하는 법입니다." 라며 노숙에게 이야기했던 일화이다.

물론 에레라는 여몽과 다르게 원래부터 이름값이 높던 감독이었다. 하지만 이 괄목상대를 조금 다르게 해석해보고자 한다.

엘레니오 에레라는 원래부터 수비 축구를 선호하는 감독이 아니었다. 라 리가에서 활동했으며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에서는 3년 동안 라 리가를 두 번이나 우승했다. 그리고 바르셀로나에서는 2년 동안 디 스테파노와 푸스카스를 앞세운 저승사자 군단 레알 마드리드를 제치고 라 리가를 두 번 우승했으며 특히 1958-59 시즌에는 라 리가와 코파 델 레이 더블을 이루기도 했다.

위에 있는 도표들을 보면 알 수 있듯이 화끈한 공격 축구를 구사했으면서도 득점이 한 선수에 편중되지 않아 아틀레티코 마드리드 공격수들이 득점 랭킹에는 많이 오르지 못했음에도 팀은 다득점을 했다. 즉 다섯 명의 공격수를 두고 다양한 공격 루트를 활용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바르셀로나에서도 마찬가지였는데 1958-59 시즌엔 30경기에서 96골을 넣으며 라 리가 우승과 동시에 최다 득점 팀이 되었고 다음 시즌에는 레알 마드리드에게 최다 득점 팀이라는 타이틀은 내줬지만 88골이나 넣고 팀을 우승시켰다.

1958-59 시즌 코파 델 레이 우승

다만 그는 다른 문제로 경질됐는데 이는 보너스 지급 문제로 에레라가 회장의 이름을 팔아서 거짓말을 하자 자금난에 시달리던 회장과 불화가 있었다. 그리고 경기 하루 전 팀원들과 티 타임을 가졌는데 그 차를 마시고 부작용이 있었던 엔릭 겐사나는 친구인 의사에게 차의 성분 분석을 요청했고 그 차에서 암페타민이 검출되었다.

암페타민은 중추신경계를 흥분시키며, 기민성을 증가시키고, 말하는 능력과 전반적인 육체활동을 증가시키는 약물군으로 오늘날로 치면 금지 약물에 해당하는 약물이고 팀의 핵심 선수인 라슬로 쿠발라는 이에 반발했고 결국 에레라는 쿠발라를 배제하다가 유러피언 컵 4강에서 레알 마드리드를 만나 엘 클라시코에서 패했다는 이유로 경질된다.

그가 경질되고 찾은 새 둥지는 인터 밀란이었다.

그는 인터 밀란에서도 자신의 방식을 고수했다. 하지만 1960-61 시즌에 벌어진 데르비 디탈리아에서 오마르 시보리에게만 여섯 골을 먹히며 1-9로 참패했으며 그 시즌을 3위로 끝냈다. 

안젤로 모라티와 엘레니오 에레라

2위와 3위를 거뒀지만 인터 밀란은 이 성적을 유지하려고 스페인 최고의 명장 엘레니오 에레라를 데려온 게 아니었다. 그렇게 자신의 방식은 실패하고 있었으며 참다못한 안젤로 모라티는 "다음 시즌에도 우승하지 못하면 경질하겠다."라고 통보했다.

결국 네레오 로코는 구단주 안젤로 모라티의 조언을 받아 카테나치오를 모방했다. 단 그는 그대로 모방하지 않았다. 그는 로코의 카네나치오에 자신만의 색채를 입혔다.

그리고 1962-63 시즌 스쿠테토를 시작으로 1963-64 시즌과 1964-65 시즌 유러피언 컵 2연패를 했으며 1964-65 시즌에는 빅 이어와 스쿠테토를 모두 들며 더블을 이뤄냈다.

인터 밀란에서만 세 번의 세리에 A 우승과, 두 번의 유러피언 컵 우승, 그리고 두 번의 인터콘티넨탈컵 우승을 이룬 엘레니오 에레라는 카테나치오의 왕으로 추앙받으며 그란데 인테르의 시대를 써냈다.

카테나치오의 왕의 자리에 오르며 괄목상대에 성공한 그의 카테나치오는 다른 카테나치오와 무엇이 다를까?

 

지피지기 백전불태(知彼知己 百戰不殆)와 도광양회 (韬光养晦)

 

지피지기 백전불태란 손자병법 모공편에 나오는 말로 상대를 알고 나를 알면 백 번 싸워도 위태롭지 않다는 뜻으로, 상대편과 나의 약점과 강점을 충분히 알고 승산이 있을 때 싸움에 임하면 이길 수 있다는 말이다.

도광양회란 자신의 재능이나 명성을 드러내지 않고 때가 올 때까지 참고 기회를 기다린다는 뜻으로 1980년대 등소평 체제의 중국의 대외 전략이다.

갑자기 병법과 대외 전략이 나오는 이유가 궁금한 독자들이 있을 것이다. 그 이유는 저 두 격언이 아이러니하게도 엘레니오 에레라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일반적인 카테나치오라고 하면 최대한 많은 선수를 수비진에 두며 라인을 내리고 전략을 세울 때에도 수비 전술에 집중하고 공격은 훌륭한 트레콰르티스타와 스트라이커에게 전담시키며 역습 과정을 간략하게 하는 것이다.

인터 밀란도 표면적으로는 이와 다르지 않게 4-1-2-3과 유사한 모양의 포메이션을 두며 4-2-4나 WM이 유행하는 당시로서는 굉장히 수비적인 포지션을 보여줬다.

하지만 인터 밀란과 밀란은 환경에서 많은 차이가 있었다. 밀란은 지안니 리베라라는 천재적인 플레이메이커와 주제 아우타파니라는 세리에 A 최고의 스트라이커가 있었기에 수비 전술을 취하더라도 그들의 개인 역량을 이용한 다득점이 가능했다. 하지만 이는 역으로 리베라와 아우타파니가 컨디션의 난조를 보이면 공격력이 약화되는 문재를 야기했으며 에레라는 이것을 파악했다.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에서도 선수 개인의 역량이 아닌 팀의 조직력을 극대화한 공격 전술에 따른 공격진 다섯 명이 구사하는 다양한 루트로 득점을 시도했었는데 이는 인터 밀란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인터 밀란에서는 밀란은 물론이고 아틀레티코 마드리드보다도 공격진의 수준이 낮았으며 당대 유럽 최고의 공격형 미드필더 루이스 수아레스 미라몬테스를 영입했지만 이것으로는 밀란에 맞서기 부족했다. 결국 카테나치오를 재창조해서 공격에 대한 확신을 심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 않으면 카테나치오로 맞서는 다른 상대를 상대로 이긴다고 장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자신의 상황과 상대의 전력을 잘 파악한 에레라는 그를 극복하기 위한 준비를 한다.

에레라가 결국 생각한 건 공격적인 레프트 백 지아친토 파케티를 이용하는 것이었다. 리베로를 두는 포 백 시스템은 그대로 본받았지만 그는 레프트 백 파케티를 단지 측면을 수비하는 역할로 두지 않고 적극적인 공격 가담을 주문하며 왼쪽 측면 공격에 힘을 실어 레프트 윙 코르소를 중원이나 전방으로 침투시킬 수 있었다.

그리고 1962년에 브라질에서 영입한 젊은 라이트 윙 자이르 다 코스타는 윙어지만 뛰어난 지구력과 활동량을 가지고 있었으며 에레라는 이 선수를 단지 윙어가 아닌 '토르난테'라는 귀환자 역할을 맡아서 수비형 윙어 역할을 재창조시킨다. 그리고 자이르 코스타가 수비를 지원하면 라이트 백 부르니치가 중앙으로 이동하며 오늘날의 스리 백과 유사한 모습을 보여준다. 그 빈자리는 오른쪽 공격형 미드필더인 산드로 마촐라가 측면으로 이동하여 채운다.

기본적으로 4명의 수비수를 두는 인터 밀란이자만 상대가 인터 밀란의 공격력을 과소평가하면 그 즉시 숨겨왔던 강력한 공격력을 보여주며 파케티와 자이르 다 코스타가 모두 공격에 가담하며 최대 6명이 공격에 참가하기도 했던 공격적인 카테나치오이다.

즉 수비가 필요할 때에는 4명에서 5명이 되는 수비수를 기본적으로 배치하고 수비형 미드필더 베딘도 수비에 전념하게 하며 롱 볼로 역습하며 발 빠른 공격수를 이용해 뒷공간을 노리는 스타일을 고수하지만 상대도 같은 카테나치오를 들고 나오면 그동안 숨겨둔 공격력을 보여주며 도광양회를 끝내고 공격 시에는 3명의 수비수만 후방을 지키고 최대 7명의 선수가 공격에 가담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포진은 4-1-2-3이지만 때에 따라 5-4-1이 되기도 하고 3-1-4-2가 되기도 했다.

어리지만 다재다능하고 재능이 있는 선수들로 구성된 인터 밀란의 선수들은 두 명의 베테랑인 리베로 아르만도 피키와 공격형 미드필더이자 플레이메이커 역할을 맡은 루이스 수아레스를 축으로 삼았고 그들의 훌륭한 지휘 능력 덕분에 어렵고 복잡한 역할을 충분히 수행했으며 에레라가 원하는 스트라이커인 우베 젤러 영입에 실패했음에도 불구하고 같은 카테나치오 전술을 상대함에도 안정적인 공격력을 유지했다.

게다가 항상 방심하지 않고 내부적으로는 강도 높은 훈련과 강력한 기강을 잡아 팀의 결속력을 다졌으며 상대에 대한 전력 분석도 확실히 했던 에레라는 공격과 수비의 강도를 굉장히 잘 조절했다. 그렇게 스쿠테토를 세 번이나 들었으며 유러피언 컵 결승전에서도 WM의 선두주자 레알 마드리드와 4-2-4의 선두주자 벤피카를 모두 무찌르고 두 번의 빅 이어를 들 수 있었다.

인터 밀란은 공격력을 숨기고 상대를 방심시키는 도광양회와 이를 적절한 상황에서 발휘할 수 있게 충분한 준비를 하며 상대와 자신을 정확히 파악하는 엘레니오 에레라의 능력 덕분에 자신의 시대를 열 수 있었다.

엘레니오 에레라는 사전 준비부터 자신의 의도와 능력을 숨길 줄 아는 심리전의 달인이었으며 자신과 상대를 철저하게 비교하며 준비할 수 있었다. 그렇게 지피지기 백전불태와 도광양회를 앞세워 시대를 제패하고 영원히 카테나치오의 왕으로 추앙을 받을 수 있었다.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지만 온고지신(溫故知新)이 남는다.

 

하지만 에레라의 인터 밀란도 유럽 축구의 영원한 강자로 남진 못했다.

1966-67 시즌 인터 밀란은 또다시 유러피언 컵 결승전에 올랐으며 이번에는 스코틀랜드의 명가 셀틱을 상대했다.

조크 스타인 감독과 엘레니오 에레라 감독

그의 전술을 간파한 셀틱의 감독 조크 스타인의 4-4-2는 기존의 4-2-4와는 다르게 최전방 두 명의 스트라이커가 보다 낮은 위치로 내려오는 것과 양 쪽 측면 윙어가 중앙 쪽으로 좁혀 주는 것, 그리고 그 사이드 공간을 양쪽 윙백의 활발한 오버래핑으로 메워주는 것을 강조했다.

수비 숫자를 수시로 바꾼다 해도 결국은 대인 마크에 의존했던 한계를 지닌 카테나치오 전술을 상대로 셀틱은 40회에 육박하는 어마어마한 슈팅 숫자를 날리며 2-1로 인터 밀란을 제압하며 승리했다. 결국 에레라의 인터 밀란은 셀틱의 5관왕의 제물이 되고 그 뒤로 인터 밀란의 사이클은 하향곡선을 타게 된다.

인테르는 1968년에 성적 5위로 부진하고 인테르를 떠나 로마로 이적했다. 연봉 15만 파운드로 당대 감독들 중 가장 많은 급료를 받았으며 코파 이탈리아를 우승하는 성과를 보여주기도 했다. 그러나 1969년 3월, 에레라는 로마의 주전 공격수 줄리아노 타촐라의 갑작스러운 사망에 연관, 팀 닥터와 감독의 사이가 벌어지면서 구단과 감독의 관계가 틀어졌다. 그리고 다음 시즌에는 성적이 10위권 내에도 들지 못하자 결국 경질되고 말았다.

그 뒤로 인테르와 바르셀로나에 잠시 부임했지만 이전만큼 성공하지는 못했으며 1980-81 시즌에 코파 델 레이에서 우승에 성공하고 유종의 미는 거두며 감독직에서 은퇴한다.

1980-81 시즌 코파 델 레이 우승 후 유종의 미를 거두며 은퇴하다.

인터 밀란도 그 이후로 1971-72 시즌 유러피언 컵 결승에 진출했지만 요한 크루이프가 이끄는 아약스의 토털 풋볼을 당해내지 못하고 2-0으로 완패했으며 그 뒤로 유럽 대항전 결승에 올라가기까지 19년이 걸렸으며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에 올라가기까지는 38년이나 걸렸다.

하지만 엘레니오 에레라의 전술은 많은 이들의 연구대상이 되었다.

세리에 클럽들의 성공과는 다르게 이탈리아 국가대표팀은 항상 실패를 거듭했으며 특히 소련만 만나면 패배하는 굴욕을 당하기도 했다.

그러자 이탈리아 국가대표팀에서도 카테나치오를 받아들였으며 페루치오 발카레지 감독은 엘레니오 에레라의 수비적인 면인 5백과 공격적인 면인 4백을 모두 받아들여 대표팀을 정비해 1968년에는 유럽 챔피언이 되었으며 1970 멕시코 월드컵에서도 준우승을 하는 기염을 토하며 팀을 부활시키고 이후 오랜 기간 동안 카테나치오는 아주리의 정체성으로 자리 잡는다.

유로 68에서 30년 만에 메이저 대회 우승을 달성한 이탈리아

그리고 유벤투스의 감독으로 부임한 밀란의 전설적인 수비형 미드필더 지오반니 트라파토니는 에레라의 카테나치오의 변화무쌍함을 토털 풋볼에 적용시키며 조나 미스타라는 비대칭 포메이션을 만드는 데에도 영향을 주었다.

그가 남긴 유산인 사이드 백의 공격과 윙어의 수비 가담은 현대 축구에서도 유산으로 남아있다. 이를 통해서 온고지신을 이룬 아주리 대표팀의 감독들과 세리에 클럽의 감독들은 훌륭한 커리어를 쌓으며 결국 세리에 A가 최고의 리그가 되는데 큰 영향을 미쳤다.

그리고 그의 정신은 현대의 감독들도 본받아야 할 점이 있는데 인터 밀란에 처음 와서 스페인과는 다른 환경에 고전했던 엘레니오 에레라는 결국 이탈리아 축구를 수용하면서도 자신을 잃지 않고 카테나치오를 모방 후 재창조해서 위기를 극복하고 자신의 시대를 열었다.

현대 축구 전술의 빠른 변화에 따라가지 못하고 도태되거나 새로운 무대에 대한 도전을 했다가 다른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는 수많은 과거에 잘 나갔던 감독들에게 에레라가 남긴 정신을 본받을 것을 권유하면서 이 글을 마친다.

 

이상 박수용의 토르난테 - 동네 축덕 아저씨의 축구 썰 관리자

박 수용 적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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