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구사를 빛낸 50개의 왕조들- 31편 잉글랜드 클럽의 유러피언 컵 7연패를 저지한 북독의 강호

동네 축덕 아저씨의 축구 썰/축구사를 빛낸 50개의 왕조들

축구사를 빛낸 50개의 왕조들- 31편 잉글랜드 클럽의 유러피언 컵 7연패를 저지한 북독의 강호

토르난테 2023. 10. 15. 13:38
728x90
728x90

 

1975~1983 함부르크 SV

『황금 세대』 함부르크 SV

남독의 바이언에 이어 두 번째로 유러피언 컵 챔피언에 오른 북독의 강자

 


성적

분데스리가: 3회 우승 (1978–79, 1981–82, 1982–83)

DFB포칼: 1회 우승 (1975-76)

유러피언 컵: 1회 우승 (1982-83)

UEFA 컵 위너스컵: 1회 우승 (1976-77)

 


소개

분데스리가 출범 이전에는 북독의 지배자였으며 분데스리가 출범 이후에도 우베 젤러와 빌리 슐츠를 앞세워 꾸준히 경쟁력을 보였던 함부르크지만 분데스리가 우승을 이뤄내지는 못했었다.

그러다 1973-74 시즌, 쿠노 클뢰처가 함부르크의 지휘봉을 잡았고 1975-76 시즌 DFB포칼 우승 및 1976-77 시즌 유러피언 컵 위너스컵 우승을 이뤄내며 두각을 나타냈지만 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의 강세를 막지 못했다. 이에 함부르크는 리버풀에서 잉글랜드와 유럽 무대를 평정한 케빈 키건을 영입했으며 이듬해에는 바이에른 뮌헨의 첫 분데스리가 우승을 이끈 브란코 제베치를 감독으로 모셨다.

분데스리가 적응을 마친 키건의 뛰어난 퍼포먼스와 칼츠의 크로스-흐루베쉬의 헤딩을 노리는 전략을 바탕으로 한 브란코 제베치의 지략을 바탕으로 함부르크는 1978-79 시즌 개편 이후 구단 역사상 첫 분데스리가 우승을 이뤄냈고 1979-80 시즌에는 레알 마드리드를 상대로 홈에서 만프레트 칼츠의 활약상을 바탕으로 5-1 대승을 거두며 유러피언 컵 결승에 진출했으나 노팅엄 포리스트의 돌풍을 막지 못하고 아쉽게 준우승에 머물렀다. 그리고 키건은 향수병으로 다시 잉글랜드로 돌아갔으며 브란코 제베치 감독도 알콜중독으로 인해 경기에 소홀해지자 경질당했다.

제베치의 후임으로는 우승 청부사라 불리는 에른스트 하펠이 함부르크의 지휘봉을 잡았고 부임 첫 해에 당시 세계 최고의 리그로 불리던 서독 분데스리가를 제패하며 세계 최강의 팀 중 하나로 올라섰으며 첫 시즌부터 그러나 분데스리가에서의 함부르크는 달랐다. 많은 경기를 이기고 질 경기를 비기며 난적 바이에른 뮌헨, 쾰른, 카이저슬라우테른 등을 누르고 34전 18승 12무 4패, 95득점 45실점이라는 성적으로 우승을 차지했다. 특히 95득점이라는 경이로운 득점 행진을 보여주었다. 여기에 홈 무패는 덤이었다.

1982-83 시즌에는 지역 라이벌 베르더 브레멘과의 치열한 경합 끝에 분데스리가 2연패에 성공했음은 물론 유러피언 컵에서도 BFC 디나모, 올림피아코스, 디나모 키이우, 레알 소시에다드를 꺾고 결승에 진출하였으며 결승에서는 명장 지오반니 트라파토니가 이끄는 조나 미스타의 팀 유벤투스를 만났으나 에른스트 하펠 감독의 지략과 펠릭스 마가트의 환상적인 골로 함부르크가 1-0 승리를 거두며 유럽의 왕좌에 올랐다.

 


주요 감독

 



에른스트 하펠

무리뉴, 카펠로 이전 원조 우승 청부사이자 세계 최초로 4개국에서 우승컵을 들어낸 사나이로 강력한 카리스마와 뛰어난 용병술, 그리고 파격적이면서도 구단의 상황에 적합한 전술 운용 능력을 토대로 언더독 팀 위주로 맡았음에도 커리어 통산 17개의 우승 트로피를 들었다.

이미 페예노르트와 클뤼프 브뤼허, 그리고 스탕다르 리에주에서 우승 청부사로 이름을 떨치던 명장으로 함부르크를 지휘하는 동안 분데스리가 2연패는 물론 1981-82 시즌에는 UEFA컵 결승에 올랐고 1982-83 시즌에는 분데스리가에 이어 유러피언 컵에서도 우승하며 세계 최초로 각자 다른 구단으로 빅이어를 든 첫 감독이 되었다.

페예노르트 시절에는 4-3-3 포메이션의 아버지로 축구사에 족적을 남긴 하펠은 함부르크에서도 3-4-1-2, 4-1-2-1-2 등 당시에는 생소한 포메이션을 활용해 많은 경기를 승리했다.

 


ACE Card

 

 

이름: 만프레트 칼츠
출생년도: 1953년 1월 6일
포지션: 라이트백, 리베로
신체조건: 키 186cm / 몸무게 77kg


1970년대 후반 세계 최고의 측면 수비수로 역대 최고의 오른발 크로서로 손꼽힐 정도로 뛰어난 크로스 실력을 보여 이를 두고 바나나 크로스라 불렸으며 실제로 함부르크와 디 만샤프트에서 칼츠의 크로스와 흐루베쉬의 헤딩은 중요한 공격 루트로 자리 잡았으며 함부르크 통산 100 득점을 넘게 득점했을 정도로 직접 득점에도 대단한 모습을 보여줬다.

함부르크 구단 통산 최다 출전자의 자리에 올라있는 칼츠는 디 로토센 군단의 에이스로 활약하며 분데스리가 3회 우승, DFB포칼 2회 우승을 이뤄내며 바이에른과 묀헨글라트바흐에 이어 독일 무대를 평정했다. 칼츠 개인도 키커지 선정 분데스리가 시즌 베스트 일레븐 6회 선정, 키커 랑리스테 평가에서 월드클래스 등급 3회 선정, 인터내셔널 클래스 등급 13회에 선정되는 영예를 누린다.

유럽 무대에서도  1976-77 시즌 UEFA 컵 위너스컵 우승과 1981-82 시즌 UEFA컵 준우승을 이뤄냈으며 유럽 최고의 팀들이 참가한 유러피언컵에서도 1979-80 시즌 4강 2차전에서는 레알 마드리드를 상대로도 2골 1도움을 기록하는 등 뛰어난 활약을 펼쳐 5-1 대승을 거두며 원정에서의 2-0 패배를 완벽하게 역전하며 결승에 진출했으나 결승전에서 노팅엄의 돌풍에 휘말리며 준우승에 그쳤으며 3년 뒤인 1982-83 시즌에는 분데스리가 우승에 이어 유러피언 컵에서도 우승하며 함부르크를 1983년을 대표하는 구단으로 올렸다.

 

 

 

이름: 케빈 키건
출생년도: 1951년 2월 14일
포지션: 포워드, 공격형 미드필더, 라이트윙
신체조건: 키 173cm / 몸무게 73kg

마이티 마우스라 불렸던 1970년대 하반기 유럽 최고의 축구 선수로 체격은 작았으나 단단한 근육질 몸매로 몸싸움을 잘했으며 공격수로서 부족함이 없는 만능 공격수였으며 우수한 헤더와 득점력은 물론 천재적인 플레이메이킹 능력마저 겸비했다.

키건은 함부르크에 머무는 동안 뛰어난 퍼포먼스를 보여주며 1978-79 시즌 분데스리가 우승과 1979-80 시즌 유러피언컵 준우승을 이뤄내는데 큰 공을 세웠으며 개인적으로도 함부르크에 머문 3년 동안 키커지 선정 분데스리가 시즌 베스트에 3회 연속으로 선정되었으며 여섯 번의 키커 랑리스테 평가에서 네 번이나 월드클래스 등급을 받았으며 1978년과 1979년에는 모두 발롱도르를 수상하며 1970년대 후반 세계 최고의 축구선수로 군림하며 영광을 누렸으나 고향 잉글랜드에 대한 그리움 때문에 잉글랜드로 돌아갔다.

키건과 함께 함부르크의 공격을 이끈 펠릭스 마가트는 케빈 키건에 대해 "그가 왔을 때, 함부르크의 위대한 시대가 시작됐다."라고 평가했을 정도로 마이티 마우스가 함부르크에 끼친 영향력은 대단했다.

 

 

이름: 펠릭스 마가트
출생년도: 1953년 7월 26일
포지션: 공격형 미드필더, 레프트윙, 중앙 미드필더
신체조건: 키 172cm / 몸무게 74kg

23세에 처음 프로 무대에 진출한 대기만성형 선수로 1970년대 후반과 1980년대 중반까지 함부르크의 전성기를 이끈 다재다능한 미드필더로 창의적인 롱패스 능력과 강력한 중거리 슈팅을 겸비했으며 뛰어난 스테미너를 기반으로 왕성한 수비 가담 능력도 겸비했다.

함부르크 구단 통산 출전 11위에 랭크된 마가트는 디 로토센의 플레이메이커 역할을 맡아 활약하며 분데스리가 3회 우승을 이뤄내며 독일 무대를 평정했고 유럽 무대에서도 1976-77 시즌 UEFA 컵 위너스 컵 우승과 1981-82 시즌 UEFA컵 준우승을 이뤄냈고 유러피언컵에서도 1979-80 시즌 유러피언 컵 준우승과 1982-83 시즌 유러피언 컵 우승을 모두 이뤄냈는데 특히 1982-83 시즌 유러피언 컵 결승전에서는 유벤투스의 명 골키퍼 디노 조프를 상대로 벼락같은 중거리 슈팅으로 결승골을 터트리며 디 로토센의 첫 빅이어에 일등 공신이 되었다.

키커지 선정 분데스리가 시즌 베스트 일레븐에 2회 선정된 펠릭스 마가트는 함부르크에 머물면서 키커 랑리스테 평가에서 인터내셔널 클래스 등급에 8회 선정되었으며 1982-83 시즌 후반기 평가에서는 월드클래스 등급에 선정되었고 그 해 연말에 열린 발롱도르 투표에서는 5위를 기록했고 같은 해에 아르헨티나의 저명지 엘 그라피코에서 뽑은 세계 최우수 선수 투표에서도 6위에 올랐다.


베스트 일레븐


이전 회차: 30편 과학 축구의 유행을 선도한 소련 축구계의 절대강자

다음 회차: 32편 침체기 세리에 A의 부흥을 이끈 이탈리아의 국민구단

728x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