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구사를 빛낸 50개의 왕조들 23편- 토털 풋볼의 상징성을 삼킨 네덜란드의 축구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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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사를 빛낸 50개의 왕조들 23편- 토털 풋볼의 상징성을 삼킨 네덜란드의 축구왕조

토르난테 2023. 9. 10. 1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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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5~1973

『토털 풋볼』 아약스 FC

(The Total Football Ajax)

축구의 근대화를 이끈 네덜란드의 명문

 


성적

에데레비시: 6회 우승 (1965-66, 1966–67, 1967–68, 1969–70, 1971–72, 1972–73)

KNVB 컵: 4회 우승 (1966–67, 1969–70, 1970–71, 1971–72)

유러피언 컵: 3회 우승 (1970–71, 1971–72, 1972–73)

유러피언 슈퍼컵: 2회 우승 (1972, 1973)

인터콘티넨탈컵: 1회 우승 (1972)

 


소개

아약스는 예전부터 네덜란드의 강호 중 하나였다. 그러나 네덜란드 프로축구리그는 지금의 위상과는 다르게 철저하게 변방이었다. 심지어 1964-65 시즌에는 아약스는 과거의 작은 영광마저 잃고 리그 16팀 중 13위라는 최악의 부진을 겪는다.

그러나 1965-66 시즌, 선수시절 아약스의 원 클럽맨이었던 리누스 미헬스가 감독으로 온 뒤 아약스는 다른 운명을 걷는다. 헝가리의 소셜리스트 풋볼에 영감을 받은 미헬스는 훗날 '토탈풋볼'로 불리게 될 자신의 철학을 클럽에 심으려고 노력했다.

미헬스는 기존 선수들 중 수준이 낮은 선수들은 방출하고 유스팀에서 천재 크루이프를 콜업했음은 물론 네덜란드 무대 최고의 선수들이라 평가받던 겡크 그로트, 코 프린스, 헤르트 발스를 첫 시즌부터 영입했다. 미헬스 체제의 아약스는 정규리그 3연패라는 금자탑을 세웠음은 물론 크루이프의 대활약으로 1968-69 시즌 유러피언 컵에서는 결승에 올랐다.

하지만 유럽식 4-2-4 시스템에서는 유기적인 플레이에 한계가 있었기에 AC 밀란에게 대패했으며 4-3-3 시스템을 앞세운 에른스트 하펠의 페예노르트에게 밀리기도 했다. 그리고 포진을 하펠과 같이 4-3-3으로 바꾼 결과 미헬스의 토탈 풋볼은 한수 더 강해졌고 1970-71 시즌에는 리그의 왕좌는 페예노르트에게 내줬지만 유러피언 컵과 KNVB 컵을 우승하며 더블을 달성했다. 특히 유러피언 컵에서는 바젤, 셀틱, 아틀레티코 마드리드를 꺾고 결승에서 그리스의 파나티나이코스까지 무너트리며 구단 역사상 첫 빅이어를 들었다.

이후 미헬스가 바르셀로나로 떠난 뒤 후임 스테판 코바치는 1971-72 시즌에는 전설적인 시즌을 보내는데 리그에서는 34경기에서 무려 30승 3무 1패, 104득점 20실점이라는 충격적인 성적을 기록하였고 승점은 63점으로 2위 페예노르트에 8점 앞섰다. 이 시대에는 승리 시 얻는 승점이 2점이었기에 매우 압도적인 차이로 따낸 우승이었으며 KNVB 컵에서는 다른 강호들인 페예노르트와 PSV가 모두 16강에서 탈락하는 이변과, 유럽 대항전과 병행하는 바쁜 일정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으며 우승을 차지했음은 물론 유러피언 컵에서는 그야말로 토탈풋볼이 무엇인지를 전 세계에 알렸으며, 만만치 않은 강력한 상대들인 디나모 드레스덴, 마르세유, 아스날, 벤피카, 인테르를 차례로 격파하며 범접할 수 없는 경지에 올랐다. 1972-73 시즌 트레블을 이뤄내는 과정에서 고작 1패만 기록했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인터콘티넨탈 컵에서는 돌아온 남아메리카 챔피언 인디펜디엔테를 무려 합산 스코어 4-1로 부수며 세계 챔피언의 왕좌에 올랐다. 비공식적으로 최초로 치러진 유로피언 슈퍼컵에서는 유로피언 컵 위너스 컵 우승팀인 레인저스를 합산 스코어 6-3으로 대파하였고 5개 메이저 대회 전관왕이라는 위대한 업적에 종지부를 찍었다. 그리고 1972-73 시즌에도 유러피언 컵 우승을 달성하며 3연패를 달성해 빅이어를 영원히 소장하게 되었다.

하지만 요한 크루이프가 새로운 도전을 위해 바르셀로나로 떠나고 팀의 기둥이던 양 날개인 스야크 스바르트와 피터 카이저가 차례로 은퇴하면서 아약스의 첫 전성기는 끝났다.

 


주요 감독

 


리누스 미헬스

현대 축구의 기조인 토털 풋볼을 집대성하며 축구 전술사의 패러다임을 바꿔버린 천재로 숏패스를 바탕으로 높은 점유율을 유지했으며 전방부터 후방까지 조직적인 압박과 전원 공격, 전원 수비라 불리는 선수들의 유기적인 움직임을 체계화시켰으며 현시대의 두 기조로 불리는 크루이프즘과 사키이즘도 모두 토털 풋볼의 해석 방식의 차이일 뿐 모체는 같았다.

FIFA에 의해 20세기 최고의 축구 감독이라 칭해졌으며 자신의 패러다임을 실현시킨 크루이프와의 만남 이후에는 에레데비시 4회 연속 우승과 유러피언 컵 우승을 이뤄낸다.

 


ACE Card

 

 

이름: 요한 크루이프
출생년도: 1947년 4월 25일
포지션: 포워드, 공격형 미드필더
신체조건: 키 180cm / 몸무게 70kg


1970년대 세계 최고의 선수였던 크루이프는 토털 풋볼을 추구하는 미헬스 감독의 페르소나였는데 아약스에서는 최전방 공격수의 위치에서 유기적인 스위칭 플레이를 지휘하며 토털 풋볼을 구현하는 데 가장 큰 역할을 했다.

아약스의 통산 출장 9위와 통산 득점 2위에 랭크된 크루이프는 미헬스와 함께 일명 '신의 아들들'을 이끌며 구단의 전성시대를 열었으며 1971-72 시즌 트레블을 포함해 유러피언 컵 3연패와 에레데비시 8회 우승을 이뤄냈음은 물론 크루이프 개인도 1971-72 시즌에는 에레데비시, KNVB컵, 그리고 유러피언컵에서 모두 득점왕에 오르며 득점왕 트레블을 이뤄냈고 1971년과 1973년에는 발롱도르를 수상했다.

크루이프의 아약스 시절 등번호 14번은 그가 은퇴하면서 영구결번으로 남았으며 그가 사망하자 아약스는 홈구장 이름을 요한 크루이프 아레나로 변경했다.

 

 

 

이름: 피트 카이저
출생년도: 1943년 6월 14일
포지션: 레프트윙
신체조건: 키 184cm

1970년대 상반기 정상급 레프트 윙어로 정교한 드리블 돌파와 크로스 능력, 그리고 첨예한 왼발 슈팅으로 이름을 날렸다.

선수 생활을 오직 아약스에서만 보냈으며 팀의 황금기를 이끌며 1971-72 시즌 트레블을 포함해 에레데비시 우승 6회와 KNVB 컵 우승을 5회를 이뤄냈으며 유러피언 컵 3연패를 이뤄냈다. 특히 1972년에는 팀의 주장으로 상술했던 트레블을 이뤄내는데 공헌하며 발롱도르 투표에서 5위를 차지한다.

 

 

이름: 벨리보르 바소비치
출생년도: 1939년 10월 3일
포지션: 리베로, 센터백
신체조건: 키 180cm

아약스 구단 역사상 최고의 용병이자 미헬스의 토털 풋볼을 실현시키는데 큰 공헌을 한 리베로로 '죽기 아니면 살기'라고 불리는 강인한 정신력과 정교한 빌드업 능력과 뛰어난 전술 이해도를 자랑했으며 특히 훌륭한 리더십으로 외국인 용병임에도 아약스의 주장으로 활약했다.

아약스 구단의 황금기 초석을 닦은 인물로 평가받는 바소비치는 '신의 아들들'의 일원으로 에레디비시와 KNVB컵을 각각 3회 우승했으며 1970-71 시즌에는 유러피언 컵 결승에서 파나티나이코스를 꺾고 유러피언 컵 우승을 이뤄냈지만 고질적인 지병인 천식으로 인해 이 시즌이 끝나고 다소 아쉽게 은퇴했다.

여담으로 바소비치가 활약하던 시기의 아약스는 능수능란한 오프사이드 트랩 활용으로 유명했는데 이에 대해 바소비치는 "난 미헬스와 함께 공격적인 수비를 창조해 낸 설계자다. 내가 맡은 부분은 오프사이드 반칙을 유도하거나 골을 넣기 위해 벽 가운데 서있는 역할을 했을 뿐이지만 경기장 위에서 훌륭한 선수의 모습을 지켜보는 게 훈련보다 100배는 도움이 된다. 그런 측면에서 난 아약스에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라며 자신의 영향력에 대해 자랑하기도 했다.


베스트 일레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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