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7년생 최고의 축구선수 탑5

연생별 최고의 축구선수/1940년대생

1947년생 최고의 축구선수 탑5

토르난테 2023. 5. 24. 1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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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정일은 2023년 5월 24일 기준이며 선수 사진 출처는 플레이어스에서 활약하는 법정스님의 소유님 건조폼

여러 자료들을 검토한 작성자의 주관적인 평가.


5위 브란코 오블락

 


생일: 5월 27일
국적: 슬로베니아
포지션: 중앙 미드필더, 수비형 미드필더, 공격형 미드필더
신체조건: 키 178cm / 몸무게 76kg
주 소속팀: 하이두크 스플리트

발롱도르 노미네이트: 1회 (1975)
발롱도르 최고 성적: 1975년 11위

 

1970년대 유럽에서 이름을 날리던 정상급 미드필더로 지칠 줄 모르는 스테미너에서 나오는 왕성한 활동량은 물론 우수한 킥력을 바탕으로 한 중장거리 패스와 중거리 슈팅에 능했다.

유고슬라비아 리그와 분데스리가에서 이름을 날렸던 오블락은 전자의 리그의 하이두크 스플리트에서는 유고슬라비아 퍼스트 리그와 유고슬라비아 컵 2회 우승을 이뤄냈으며 분데스리가에서는 샬케와 바이에른 뮌헨에서 전성기를 보내며 1979-80 시즌에 바이에른 뮌헨의 분데스리가 우승을 도왔다.

유고슬라비아 대표팀에서도 팀의 엔진으로 활약하며 1974 서독 월드컵 8강과 유로 1976 4위라는 성적을 냈으며 특히 전자의 대회에선 우수한 퍼포먼스로 대회 올스타 팀 선정과 독일 언론 키커에서 주관한 투표에서 대회 최우수 선수 5위를 기록했다.

 

4위 카지미에시 데이나

 


생일: 10월 23일
국적: 폴란드
포지션:  공격형 미드필더
신체조건: 키 180cm / 몸무게 76kg
주 소속팀: 레기아 바르샤바

발롱도르 노미네이트: 4회 (1969, 1972, 1973, 1974)
발롱도르 최고 성적: 1972년 3위

 

폴란드 축구 역사상 최고의 축구선수 중 한 명으로 손꼽히는 선수로 드넓은 시야와 우수한 킥력에서 나오는 정교한 롱패스로 골 찬스를 만드는 능력과 과감한 1선 침투에 이은 득점에 능했으며 리더십도 뛰어나 팀원들에게 큰 귀감이 되었다.

레기아 바르샤바에서 활약하며 리그 2회 우승을 이뤄냈으며 폴란드 올해의 선수상을 2회 수상한 데이나는 1970년대 폴란드 대표팀의 황금기의 시작을 알리며 1972 뮌헨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목에 걸었고 1974 서독 월드컵에서는 3위라는 호성적을 냈으며 1976 몬트리올 올림픽에서도 은메달을 목에 걸었으며 1978 아르헨티나 월드컵에서도 뛰어난 활약을 펼치며 라 페세나 선정 아르헨티나 월드컵 베스트 일레븐에 선정되었다.

특히 1974 서독 월드컵에서 뛰어난 활약을 펼치며 대회 베스트 일레븐에 선정된 데이나는 발롱도르 10위 안에 3회 선정되었는데 월드컵에서의 활약이 반영된 1974년에는 발롱도르 3위에 올랐으며 1994년에는 폴란드 축구 협회가 선정한 역대 최고의 폴란드 축구 선수로 선정되었고 2019년에는 폴란드 축구협회 창립 100주년 기념 폴란드 역대 베스트 일레븐에 선정되었다.

 

 

3위 롭 렌센블링크

 

 

생일: 7월 3일
국적: 네덜란드
포지션: 레프트윙, 포워드
신체조건: 키 180cm / 몸무게 76kg
주 소속팀: 1971~1980

발롱도르 노미네이트: 3회 (1976, 1977, 1978)
발롱도르 최고 성적: 1976년 2위

 

1970년대 하반기 유럽 최고의 선수 중 하나로 뱀 인간이라고 불릴 정도로 유려한 드리블로 상대 수비를 벗겨냈으며 교묘한 탈압박 스킬과 좌우로 길게 벌려주는 패스에도 능했으며 득점력도 준수한 완성형 윙어였다.

오랑예 군단의 에이스지만 에레데비시보다는 벨기에 무대에서 더 이름을 날렸던 선수로 특히 파트비스 군단에서의 그의 활약은 발군이었는데 주필러리가 2회 우승과 벨기에컵 4회 우승과 리그컵 2회 우승은 물론 유럽 무대에서도 UEFA 컵 위너스컵에서 3회 연속 결승에 진출해 그중 두 번 우승했으며 UEFA 슈퍼컵에서도 당대 최강이라 불리는 바이에른 뮌헨과 리버풀을 모두 꺾었고 그 과정에서 렌센블링크는 1975-76 시즌 컵 위너스컵 결승전에 웨스트햄을 상대로 멀티골을 득점해 4-2 대승을 이끌었으며 1976 슈퍼컵에서는 유러피언 컵 챔피언 바이에른 뮌헨을 상대로 멀티골을 득점했으며 1977-78 시즌에도 오스트리아 빈을 상대로 멀티골을 득점했고 UEFA 슈퍼컵에서 리버풀을 상대로도 득점하며 유럽 무대 우승이 걸린 결승전에서는 그가 득점하면 안더레흐트는 우승했다.

안더레흐트 통산 득점 3위에 랭크된 렌센블링크는 안더레흐트 소속으로 개인적으로도 많은 영광을 누렸는데 1972-73 시즌 주필러리가 득점왕에 올랐으며 1975-76 시즌에는 유러피언 컵 득점왕에 올랐으며 벨기에 주필러리가 MVP를 수상했고 옹즈 몽디알에서 뽑은 유럽 베스트 일레븐에 1976년부터 1979년까지 4년 연속으로 선정되었으며 1976년 옹즈도르를 수상했고 발롱도르 투표에서도 1976년 2위, 1977년 7위, 1978년 3위에 오르며 유럽 최고의 선수 중 하나로 군림했다.

오랑예 군단에서도 렌센블링크의 활약상은 절정에 달했는데 오랑예 군단의 유니폼을 입고 1974 서독 월드컵과 유로 1976, 그리고 1978 아르헨티나 월드컵에서 활약했으며 서독 월드컵에서는 크루이프를 보좌하며 결승 진출에 공헌했고 크루이프가 빠진 아르헨티나 월드컵에서는 주최 측의 편파판정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힘으로 직접 네덜란드를 결승에 올려놓는 맹활약을 펼쳤다.

 

2위 토스탕

 


생일: 1월 25일
국적: 브라질
포지션: 포워드, 스트라이커, 공격형 미드필더
신체조건: 키 170cm / 몸무게 69kg
주 소속팀: 크루제이루

남미 올해의 선수 노미네이트: 1회 (1971)
남미 올해의 선수 최고 성적: 1971년 1위

하얀 펠레라 불렸던 1970년대 초반 세계 최고의 선수 중 한 명으로 유럽의 크루이프에 대한 남미의 대답으로 평가받았으며 경기 흐름을 완벽하게 파악하는 완벽한 전술안과 경기장 전체를 망라하는 드넓은 시야에서 나오는 창의적인 패스로 수많은 골 찬스를 만들었으며 상대 마킹맨을 농락하는 탈압박 능력과 화려한 드리블 실력을 겸비한 공격수였다.

크루제이루에서 전성기를 보낸 크루제이루의 왕 토스탕은 캄페오나투 미네이루 5회 우승 및 1966년 브라질 전국 리그 우승을 이뤄냈고 토스탕 개인도 1970년에는 브라질 전국리그 득점왕과 베스트 일레븐에 선정되었으며 1971년에는 브라질 전국리그 MVP를 수상했다.

셀레상에서도 1970 브라질 월드컵 우승에 크게 공헌한 토스탕은 왕이라 불린 펠레의 뒤를 이어 부왕이라는 칭호로 불렸는데 히벨리누, 자이르지뉴, 카를루스 아우베르투, 제르손 등 전설적인 선수가 다수 포진했음을 감안하면 토스탕의 위상이 얼마나 높았는지 알 수 있다. 다만 망막박리라는 치명적인 안구 질환으로 인해 26세라는 어린 나이에 은퇴했는데 이는 브라질 축구계의 큰 손실이었다. 토스탕은 짧은 기간 굵은 활약을 보여줬기에 이를 인정받아 브라질 축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는 영예를 누렸다.

 

1위 요한 크루이프

 


생일: 4월 25일
국적: 네덜란드
포지션: 포워드, 공격형 미드필더
신체조건: 키 180cm / 몸무게 70kg
주 소속팀: AFC 아약스

발롱도르 노미네이트: 12회 (1967, 1968, 1969, 1970, 1971, 1972, 1973, 1974, 1975, 1976, 1977, 1978)
발롱도르 최고 성적: 1971, 1973, 1974년 1위

 

"크루이프 너는 역대 최고의 선수가 될 자질이 있어. 그러니 담배를 끊고 나를 따라라. 제대로 훈련을 해! 내가 널 최고의 선수로 만들어주마! 당대 최고가 아니라 그 이상, 펠레를 뛰어넘는 역대 최고의 선수가 될 수 있다고!"
- 리누스 미헬스

"크루이프는 유럽이 낳은 최고의 축구선수였다."
- 프란츠 베켄바우어

"네덜란드에서는 영웅이었고 거의 신적인 존재였다. 지금 '크루이프 턴'으로 불리는 턴 동작이 기가 막혔다. 굉장히 스피드가 빠른데다 방향전환도 좋아 따라잡기가 힘든 선수였다. 개성이 뚜렷하고 우수한 기량을 지녔을 뿐 아니라 그라운드 위에서 보여주는 리더십으로 감독 이상의 영향력을 발휘했다. 내가 현역시절에 당대 최고의 선수들로 꼽혔던 프란츠 베켄바워, 디에고 마라도나와도 경기를 해봤는데 경기장에서 흐름을 잡고 동료들을 이끄는 능력은 크루이프가 그 누구보다 최고였다."
- 허정무

"그는 비전, 태도, 존재감 등 모든 것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또한 매우 융통성이 있어서 상대가 그를 걷어차려고 할 때 그는 항상 무슨 일이 일어날지 예상하고 때맞춰 움직였다. 수비수들은 그를 건드릴 수 없었다. 메인 스트라이커의 제공자였지만 그 자신도 다산적인 골잡이였다."
- 뤼트 굴리트

 

토털 풋볼을 추구하는 미헬스 감독의 페르소나였던 그는 최전방 공격수의 위치에서 유기적인 스위칭 플레이를 지휘하며 토털 풋볼을 구현하는 데 가장 큰 역할을 했다.

아약스의 통산 출장 9위와 통산 득점 2위에 랭크된 크루이프는 미헬스와 함께 일명 '신의 아들들'을 이끌며 구단의 전성시대를 열었으며 1971-72 시즌 트레블을 포함해 유러피언 컵 3연패와 에레데비시 8회 우승을 이뤄냈으며 크루이프 개인도 1971-72 시즌에는 에레데비시와 유러피언 컵, 그리고 KNVB컵 득점왕에 오르며 득점왕 트레블을 이뤄냈고 그의 아약스 시절 등번호 14번은 그가 은퇴하면서 영구결번으로 남았다.

FC 바르셀로나에서도 들어올린 우승컵은 리그 우승 한 번과 코파 델 레이 우승 한 번에 불과했지만 미헬스의 토털 풋볼을 처음 구현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던 크루이프는 이후 바르샤는 토털 풋볼을 기초로 다시 성장하게 되는 계기를 마련했다. 크루이프 개인도  돈 발롱이 선정한 라리가 올해의 선수에 두 번 선정되었다.

오랑예에서도 불후의 업적을 쌓은 크루이프는 1970년대 네덜란드의 전성시대를 열었으나 1974 서독 월드컵과 UEFA 유로 1976에서 우수한 활약을 펼쳤으며 특히 서독 월드컵에서는 남미의 3대 강호인 우루과이, 브라질, 아르헨티나를 모두 잡아내는 기염을 토하며 대회 베스트 일레븐과 대회 MVP를 수상했다. 그러나 1978 아르헨티나 월드컵을 앞두고 가정사가 생겨 참가하지 못한 부분은 다소 아쉬움을 남겼다.

 


선외 명단

흐리스토 보네프

브워지미에시 루반스키

다닐로 포피보다

엠린 휴즈

카를 도비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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