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의 주관적인 순위입니다.
*대상자는 우루과이 국가 대표팀으로 A매치 1경기 이상 출전한 선수를 대상자로 했습니다.
*선수 사진은 대부분 플레이어스 유저인 법정스님의 소유님의 건조폼 입니다. 다만 법정님이 만들지 않은 선수들은 제가 만들었습니다.
*기록 출처는 RSSSF와 트렌스퍼마크트이며 둘의 기록이 상충할 경우에는 전자를 우선적으로 따릅니다.
*기록일은 2023년 3월 1일 기준입니다.
20위 훌리오 모랄레스

생년월일: 1945년 2월 16일
A매치 기록: 24경기 11골
신체조건: 키 164cm / 몸무게 64kg
주 소속팀: 클루브 나시오날
1960년대와 70년대에 걸쳐 활약한 공격수로 중앙과 측면을 두루 소화할 수 있었으며 번개와 같은 빠른 순간스피드를 활용해 상대 공격수를 따돌렸으며 오른발을 잘 쓰진 못했지만 대포알을 연상시키는 왼발 슈팅으로 득점을 노렸다.
남미의 클루브 나시오날에서 전성기를 보내며 우루과이 프리메라 디비시온 6회 우승을 이뤄냈음은 물론 1971년에는 정규리그 우승은 물론 코파 리베르타도레스와 코파 인터아메리카, 그리고 인터콘티넨탈컵 제패를 이뤄내며 구단의 국제무대 트레블을 이뤄내는데 공헌했으며 중간에 오스트리아 무대의 아우스트리아 빈에서 6년간 활약하며 오스트리아 분데스리가와 오스트리안컵에서 각각 2회 우승을 이뤄냈고 1977-78 시즌에는 팀을 UEFA 컵 위너스컵 준우승을 이뤄내기도 했고 1980년에는 다시 돌아온 나시오날에서 정규리그,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인터콘티넨탈컵 트레블을 이뤄냈다.
우루과이 대표팀에서도 1970 멕시코 월드컵에서 백업 멤버로 4강 진출을 경험했으며 이후 주전으로 도약한 뒤에는 페르난도 모레나, 왈데마르 빅토리노, 베낭시오 라모스 등과 손발을 맞춰 활약했고 1980년에는 초대 월드컵 50주년 기념 대회인 문디알리토에서 우승을 차지하는데 기여했다.
19위 왈데마르 빅토리노

생년월일: 1952년 5월 22일
A매치 기록: 33경기 15골
신체조건: 키 167cm
주 소속팀: 클루브 나시오날
전성기는 짧지만 1980년 한 해에는 월드클래스의 기량을 선보였던 공격수로 오프 더 볼 상황에서의 천재적인 움직임과 온 더 볼 상황에서의 탁월한 테크닉을 바탕으로 손쉽게 득점할 수 있었으며 단신이었지만 용수철 같은 점프력을 선보이며 많은 득점을 자랑했다.
1979년 우루과이 프리메라 디비시온 득점왕에 오르며 득점력을 예열한 빅토리노는 상술했듯이 1980년에 대단한 활약을 펼쳤는데 소속팀 클루브 나시오날에서는 우루과이 프리메라 디비시온 우승을 시작으로 코파 리베르타도레스와 인터 코파 아메리카, 그리고 인터콘티넨탈컵에서 모두 우승을 차지했음은 물론 개인적으로도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득점왕과 인터콘티넨탈컵 MVP를 수상했다.
그리고 우루과이 대표팀에서도 초대 월드컵 50주년 기념으로 열린 문디알리토에서 조국의 우승을 견인하며 득점왕에 올랐다. 이런 활약을 바탕으로 빅토리노는 1980년 남미 올해의 선수 투표에서 마라도나와 지쿠의 뒤를 이어 3위를 차지하며 승승장구했으나 그 뒤로는 몇 수 아래로 평가받는 에콰도르 리그에서 득점왕에 오른 것을 제외하면 별다른 활약을 보여주지는 못했다.
18위 안토니오 알사멘디

생년월일: 1956년 6월 7일
A매치 기록: 32경기 8골
신체조건: 키 175cm / 몸무게 74kg
주 소속팀: 리버 플레이트
동시대의 엔조 프란체스콜리와 함께 아르헨티나 무대에서 이름을 날렸던 우루과이산 공격수로 세컨드 스트라이커와 라이트윙을 소화할 수 있었으며 강인한 정신력과 우수한 지구력을 바탕으로 왕성한 활동량을 바탕으로 넓은 지역을 돌아다니며 득점을 노렸을 정도로 근성이 대단해 개미라 불렸다.
인디펜디엔테에서 두각을 나타낸 뒤 클루브 나시오날과 페냐롤에서 각각 정규리그 우승을 이뤄냈으며 1986년 리버 플레이트에 입단했는데 해당 시즌 리버 플레이트의 아르헨티나 프리메라 디비시온 우승을 시작으로 코파 리베르타도레스와 코파 인터아메리카, 그리고 인터콘티넨탈컵을 모두 우승하며 팀이 아메리카 무대와 세계 무대를 모두 제패하고 쿼트러블을 이뤄내는데 큰 공을 새우며 엘 파이스 선정 남미 올해의 선수상과 인터콘티넨탈컵 MVP를 수상했다.
우루과이 대표팀에서도 1983년과 1987년에 코파 아메리카 우승을 이뤄내는데 공헌했으며 1986 멕시코 월드컵과 1990 이탈리아 월드컵에서는 조국을 대표해서 16강 진출을 이뤄내는데 공헌했다.
17위 로베르토 포르타

생년월일: 1913년 6월 7일
A매치 기록: 34경기 14골
신체조건: 키 166cm / 몸무게 60kg
주 소속팀: 클루브 나시오날
1930년대 우루과이 무대를 빛낸 인사이드 레프트로 창의적이면서 민첩한 몸놀림을 활용한 드리블과 날카로운 킬패스를 사정없이 뿌리며 득점 찬스를 만들어내는 플레이메이커였으며 특유의 다재다능함과 높은 수준의 전술안을 토대로 주 포지션 인사이드 레프트 이외에도 공격 진영의 모든 포지션을 소화할 수 있었다.
클루브 나시오날에서 데뷔했지만 월드컵 우승을 이뤄낸 선배들과의 주전 경쟁에서 밀려나며 우루과이 무대를 떠나 중간에 아르헨티나의 인디펜디엔테와 이탈리아의 인테르 밀란에서 활약했으나 1936년에 유럽에 전운이 감돌기 시작하자 조국으로 귀향하며 다시 클루브 나시오날로 이적해 활약하며 아니발 치오카와 함께 인사이드 포워드 라인을 구성해 활약하며 트리콜로리스의 우루과이 프리메라 디비시온 6회 우승과 코파 알다오 2회 우승을 포함해 국내외의 크고 작은 공식 대회에서 17번의 우승을 이뤄내며 구단의 전성시대를 이끌었다.
특이하게도 우루과이 태생이지만 이탈리아 대표팀에 먼저 데뷔했으며 우루과이 대표팀에는 1937년부터 소집되었는데 네 번의 코파 아메리카에 출전해 1942년 대회에서 우승을 이뤄냈다.
16위 아니발 치오카

생년월일: 1915년 7월 23일
A매치 기록: 21경기 7골
신체조건: 키 183cm / 몸무게 72kg
주 소속팀: 클루브 나시오날
1930년대 우루과이 무대를 빛낸 인사이드 라이트로 창의적인 개인기와 탄탄한 기본기를 겸비해 드리블로 상대 수비수를 제침은 물론 날카로운 패스로 득점 찬스를 만들어내는 플레이메이커였으며 우아한 플레이로 클루브 나시오날의 팬들에게 왕자라는 별명을 얻었을 정도로 큰 사랑을 받았으며 득점력도 준수했다.
몬테비데오 원더러스에서 데뷔했지만 데뷔 시즌을 제외하면 선수 커리어를 전부 클루브 나시오날에서 보낸 치오카는 로베르토 포르타와 함께 인사이드 포워드 라인을 구성해 활약하며 트리콜로리스의 우루과이 프리메라 디비시온 8회 우승을 포함해 국내 무대의 크고 작은 대회에서 17회의 우승을 경험했으며 1940년에는 아르헨티나 챔피언과의 슈퍼컵인 코파 알다오에서 보카 주니어스를 상대로 우승을 이뤄냈고 리그 득점왕을 2회 수상했다.
우루과이 대표팀에서도 센터 포워드와 인사이드 라이트에서 활약하며 세 번의 코파 아메리카에 나와 1935년과 1942년 대회에서는 우승을 이뤄냈으며 1939년 대회에서는 준우승을 이뤄냈다.
15위 왈테르 고메스

생년월일: 1927년 12월 17일
A매치 기록: 4경기 0골
신체조건: 키 170cm / 몸무게 70kg
주 소속팀: 리버 플레이트
1950년대 리버 플레이트의 부흥을 이끈 우루과이 출신의 공격수로 키는 작았지만 기술적으로 우수했음은 물론 신체 밸런스가 뛰어나 몸싸움에서 쉽게 밀리지 않았음은 물론 그의 빠른 가속력과 숄더 페인팅 스킬 및 터닝 스킬을 활용한 드리블은 도저히 어떤 패턴으로 나올지 예측을 불허했으며 골 결정력도 뛰어났음은 물론 라브루나와의 연계플레이도 훌륭했다.
클루브 나시오날에서 처음 두각을 나타내며 우루과이 프리메라 디비시온 2회 우승을 이뤄냈으나 월드컵에서 우루과이를 대표하는 대신 리버 플레이트에서 뛰는 것을 선택한 고메스는 라싱 클루브에게 빼앗겼던 아르헨티나 프로 무대의 패권을 다시 리버 플레이트로 가져오는데 공헌하며 아르헨티나 프리메라 디비시온 3회 우승을 이뤄내며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 호세 마누엘 모레노의 공백을 훌륭하게 메웠으나 오마르 시보리의 성장으로 인해 주전 경쟁에서 밀려나며 다시 우루과이로 돌아갔다.
팀을 승리로 이끌었음은 물론 화려한 드리블과 볼 컨트롤로 팬들에게 보는 맛 또한 확실하게 제공했던 고메스를 두고 호사가들은 "사람들은 왈테르 고메스를 보기 위해 끼니를 거르는 것도 감수한다."라고 말했을 정도로 그의 인기는 대단했다.
14위 아틸리오 가르시아

생년월일: 1914년 8월 26일
A매치 기록: 5경기 5골
신체조건: 키 178cm
주 소속팀: 스트라이커
클루브 나시오날의 게르트 뮐러라고 불릴만한 스트라이커로 뛰어난 테크틱과 적절한 위치선정에 이어 높은 수준의 테크닉과 정확성을 겸비한 슈팅을 바탕으로 골 넣는 것을 주머니 속에 물건 빼듯이 쉽게 했다.
클루브 나시오날 구단 통산 최다 득점 및 통산 출전 6위에 랭크된 가르시아는 우루과이 프리메라 디비시온 8회 우승과 아르헨티나 챔피언과의 슈퍼컵 코파 알다오 3회 우승을 포함해 국내외의 크고 작은 공식 대회에서 22회의 우승을 이뤄냈음은 물론 우루과이 프리메라 디비시온 득점왕을 무려 8회 차지하며 리그 역사상 가장 많이 득점왕을 수상한 선수로 기록되었다.
득점왕뿐만이 아니라 우루과이 클라시코에서도 35골을 기록하며 페냐롤과 클루브 나시오날 양 팀을 합쳐서 가장 많은 득점을 기록하며 구단 역사상 최고의 골잡이에 오른 가르시아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클루브 나시오날 구단은 홈구장인 에스타디오 그란 파르케 센트럴에 그의 이름을 딴 아틸리오 세페리노 가르시아 스탠드를 만들기도 했다.
다만 이런 활약에도 불구하고 무슨 이유에서인지 대표팀에는 거의 소집되지 못했다.
13위 오스카 미구에스

생년월일: 1927년 12월 5일
A매치 기록: 39경기 27골
신체조건: 키 176cm / 몸무게 78kg
주 소속팀: CA 페냐롤
1950 브라질 월드컵에서 우루과이의 우승을 이끈 스트라이커로 슈팅 능력이 특히 뛰어났는데 강력한 중장거리 슈팅과 정밀도 높은 피니시는 물론 종종 아크로바틱한 슈팅으로도 득점했을 정도로 슈팅 스킬이 뛰어났음은 물론 연계 플레이에도 능했다.
페냐롤에서 전성기를 보낸 미구에스는 우루과이 프리메라 디비시온 6회 우승을 포함해 국내의 크고 작은 대회에서 18회의 우승을 이뤄냈으며 1949 시즌에는 리그에서 16승 2무의 성적으로 무패 우승을 이뤄내는데 큰 공을 세웠음은 물론 개인적으로도 리그에서만 20골을 득점하며 프리메라 디비시온 득점왕에 올랐다.
우루과이 대표팀에서도 주전 스트라이커호 활약한 미구에스는 1950 브라질 월드컵에서 5골을 득점하며 우승에 기여했으며 1954 스위스 월드컵에서도 3골을 득점하며 조국을 4강에 올렸음은 물론 1956 코파 아메리카에서는 조국의 우승을 이끌며 대회 MVP를 수상했다.
12위 에딘손 카바니

생년월일: 1987년 2월 14일
A매치 기록: 136경기 58골
신체조건: 키 184cm / 몸무게 80kg
주 소속팀: 파리 생제르맹
2010년대 정상급 스트라이커 중 한 명으로 저돌적인 돌파력으로 수비라인을 뚫어내며 호쾌한 슈팅력으로 득점했으며 뛰어난 피지컬과 우수한 헤더, 그리고 성실한 멘탈은 물론 왕성한 활동량을 바탕으로 수비와 전방압박에도 적극적으로 가담했던 컴플리트 포워드였다.
나폴리와 파리 생제르맹에서 전성기를 누린 카바니는 전자의 구단에서는 마렉 함식, 에세키엘 라베시와 함께 삼각편대를 이뤄 2010-11 시즌 코파 이탈리아 우승과 세리에 A 3위를 이뤄냈음은 물론 카바니 개인도 카바니 개인적으로도 세리에 A 올해의 팀에 3회 선정되었으며 2011-12 시즌 코파 이탈리아 득점왕과 2012-13 시즌 세리에 A 득점왕과 평점왕에게 주는 구에린 도르를 동시에 수상하며 2010년대 초반 세리에 A 최고의 선수 중 하나로 군림했다.
파리 생제르맹에서는 즐라탄에게 밀려나며 주 포지션에서 뛰지 못한 기간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좋은 활약을 펼치며 구단 통산 최다 득점자에 올랐음은 물론 팀의 리그앙 6회 우승을 포함해 21개의 트로피를 들어냈으며 개인적으로도 리그앙 득점왕 2회를 포함해 프랑스의 각종 대회에서 여섯 번의 득점왕을 차지했는데 특히 2016-17 시즌에는 리그앙과 리그컵에서 모두 득점왕에 오르며 리그앙 올해의 선수상과 ESM 올해의 팀에 선정되었고 리그앙 올해의 팀에도 총 3회 선정되었다.
우루과이 대표팀에서도 네 번의 월드컵과 다섯번의 코파 아메리카에 출전한 카바니는 2010 남아공 월드컵 4강, 2011 코파 아메리카 우승을 이뤄냈으며 특히 2018 러시아 월드컵에서는 에이스로 활약하며 조국의 8강 진출을 이뤄냈다.
11위 루벤 소사

생년월일: 1966년 4월 25일
A매치 기록: 46경기 15골
신체조건: 키 175cm / 몸무게 72kg
주 소속팀: 인테르 밀란
1980년대 후반과 90년대 초중반에 활약한 우루과이의 스타 공격수로 골 찬스를 만들어내는 효율적인 원터치플레이와 좁은 공간에서의 세밀한 드리블로 이름을 날렸으며 양발을 자유자재로 활용하며 강한 커브를 날려 팀 내에서 프리킥을 전담했음은 물론 아크로바틱한 득점으로 골의 시인이라 불리기도 했다.
중소 구단 다누비오에서의 활약을 바탕으로 일찍이 유럽 무대에 진출한 소사는 레알 사라고사에서 1985-86 시즌 코파 델 레이 결승전에서 바르셀로나를 상대로 결승골을 터트리며 대회 우승을 이뤄냈고 라치오를 거쳐 인테르 밀란에서는 전성기를 구가하며 1993-94 시즌 UEFA컵 우승을 이뤄냈고 베르캄프, 판체프 같은 유럽 무대 정상급 공격수들을 상대로 주전 경쟁에서 우위를 점하기도 했으나 1995년 기점으로 폼이 급격하게 떨어졌다.
우루과이 대표팀에서도 1987년과 1995년 코파 아메리카 우승을 이뤄냈으며 1989년에는 준우승에 그쳤지만 우승팀 브라질의 호마리우와 베베투를 제치고 대회 MVP를 수상했으며 1990 이탈리아 월드컵에도 참가했다.
10위 페드로 세아

생년월일: 1900년 9월 1일
A매치 기록: 26경기 13골
신체조건: 키 172cm / 몸무게 73kg
주 소속팀: 센트럴 아틀레티코 리토
1920년대 중후반과 1930년대 초반 남미 무대 최고의 인사이드 레프트로 우수한 볼 테크닉을 활용한 교묘한 드리블로 상대 수비수를 교란시키는데 능했다.
전성기는 중소 구단인 센트럴 아틀레티코 리토에서 보낸 세아는 우승에 대한 열망으로 1929년 클루브 나시오날로 이적해 활약하며 우루과이 프리메라 디비시온 2연패를 이뤄낸 것을 포함해 다수의 친선 대회에서 우승을 이뤄냈다.
1920년대와 30년대 초반 우루과이 대표팀의 전성시대를 이어간 세아는 1923 코파 아메리카에서 데뷔해 우승을 차지했으며 1924 코파 아메리카에서도 우승했으며 파리 올림픽에서는 4강전이던 네덜란드전에서 동점골을 넣으며 2:1 역전승의 발판을 마련했고 결승전에서도 득점포를 가동해 금메달을 목에 거는데 큰 공을 세웠으며 1928 암스테르담 올림픽에서도 활약하메 금메달을 목에 걸었으며 초대 월드컵에서는 4강전에서의 해트트릭과 결승전에서의 동점골을 포함해 총 5골을 득점하며 팀의 우승에 공헌했다.
올림픽 결승전과 월드컵 결승전에서 모두 골을 기록한 유이한 선수였던 세아는 똑같이 월드컵 결승전과 올림픽 결승전에서 모두 득점해본 푸스카스는 맛보지 못한 월드컵 우승도 맛봤다.
9위 엑토르 카스트로

생년월일: 1904년 11월 29일
A매치 기록: 25경기 18골
신체조건: 키 169cm / 몸무게 69kg
주 소속팀: 클루브 나시오날
우루과이 축구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전천후 공격수로 13살 때 전기톱을 다루다 사고로 오른손을 잃어 외팔이라는 별명으로 불렸으며 전방에서의 뛰어난 연계 플레이와 문전 앞에서의 효율적인 원터치 플레이와 침착한 슈팅으로 이름을 날렸다.
클루브 나시오날에서 데뷔해 활약하며 중간에 1년 동안 에스투디안테스를 다녀온 것을 제외하면 선수 생활의 대부분을 나시오날에서 보낸 카스트로는 초년에는 페드로 페르토네의 백업에 머물렀지만 그와 주전 경쟁을 이기며 주전을 차지해 우루과이 프리메라 디비시온 3회 우승을 포함해 비공식전 초함 13개의 트로피를 들어 올리며 구단의 황금기를 이뤄내는데 공헌했다.
우루과이 대표팀에서는 페드로 페트로네와의 치열한 주전 경쟁으로 유명했던 카스트로는 1926년 코파 아메리카에서 데뷔해 6골을 득점하며 팀의 우승을 이끌었으나 1927 코파 아메리카와 금메달을 차지한 1928 암스테르담 올림픽에서는 주전 경쟁에서 밀려났다.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고 노력한 결과 1930년 초대 월드컵에서는 다시 주전 자리를 차지하는데 큰 공을 세웠는데 두 골밖에 넣지 못했음에도 절륜한 플레이메이킹 능력을 인정받아 대회 올스타 팀에 올랐으며 1935년 코파 아메리카에서도 우승에 기여했다.
8위 디에고 포를란

생년월일: 1979년 5월 19일
A매치 기록: 112경기 36골
신체조건: 키 180cm / 몸무게 75kg
주 소속팀: 아틀레티코 마드리드
우루과이 축구의 부흥을 이끈 스타플레이어로 탁월한 슛 테크닉과 파괴력 넘치는 중거리 슈팅을 앞세워 엄청난 득점력을 보여주던 선수로 국가대표팀에서는 득점에 집중하던 소속팀에서와는 다르게 플레이메이킹 능력도 보여주기도 했다.
스페인의 비야레알과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에서 전성기를 보낸 포를란은 두 구단에서 모두 라리가 득점왕과 유러피언 골든슈를 수상했으며 전자의 구단에서는 2005-06 시즌 리켈메와 함께 비야레알 구단 역사상 최초로 UEFA 챔피언스리그 4강 진출을 견인했으며 후자의 구단에서는 2009-10 시즌 유로파리그 우승을 이뤄내는데 공헌했다.
우루과이 대표팀에서도 오랜 세월 동안 활약했던 포를란은 2002 한일 월드컵에서 대표팀에 데뷔했고 이후 세 번의 코파 아메리카와 한 번의 컨페드컵, 그리고 2010 남아공 월드컵과 2014 브라질 월드컵에서 활약했는데 2010 남아공 월드컵에서는 공격형 미드필더로 출전해 그동안 보여주지 못했던 플레이메이킹 능력과 우수한 공격수들도 다루기 어려워하는 자볼라니를 신기에 가깝게 다루며 자볼라니 마스터라 불렸으며 그 대회에서 4위를 차지한 디에고 포를란은 공동 최다 득점자와 대회 베스트 일레븐은 물론 대회 MVP인 골든볼을 수상했다.
7위 페르난도 모레나

생년월일: 1952년 2월 2일
A매치 기록: 53경기 22골
신체조건: 키 177cm / 몸무게 75kg
주 소속팀: CA 페냐롤
1970년대 우루과이를 대표하는 스트라이커로 왼발을 잘 썼으며 골을 찾아 들어가는 저돌적인 움직임으로 인해 팬들로부터 종마라고 불렸다. 특히 슈팅 스킬이 우수했고 2선으로 내려와 플레이메이킹을 하며 찬스를 만들어가는 능력도 우수한 전천후 공격수였다.
에콰도르 출신의 알베르토 스펜세르와 함께 페냐롤 역사상 최고의 공격수라 불린 모레나는 구단의 우루과이 프리메라 디비시온 6회 우승을 이뤄냈으며 특히 1982년에는 리그 우승은 물론이고 코파 리베르타도레스와 인터콘티넨탈컵도 연달아 제패하며 트레블을 이뤄냈고 그 과정에서 리그와 코파 리베르타도레스에서 모두 득점왕에 오르는 퍼포먼스를 보여주며 그 해 남미 올해의 선수상 투표에서 월드컵에 나가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지쿠, 파우캉, 마라도나에 이어 4위에 랭크되는 맹활약을 펼쳤다.
우루과이 대표팀 소속으로는 1974 서독 월드컵에 참가했으나 조국의 조별리그 탈락을 막지는 못하는 등 부진했으나 1983 코파 아메리카에서는 우승을 차지하는데 성공하며 명예회복을 했다.
우루과이 프리메라 디비시온 통산 최다 득점자였음에도 그가 전성기를 누리던 시절에 국가대표팀이 암흑기에 빠진 탓에 남미 대륙 밖에서는 다소 인지도가 떨어지며 저평가를 받는 선수지만 모레나 개인의 활약은 대단해 우루과이 프리메라 디비시온 득점왕을 7회 수상했으며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득점왕도 3회 수상했다. 그리고 페냐롤에 머무는 동안 남아메리카 올해의 선수상 10등 안에 8회 선정되었으며 1975년에는 개인 통산 최고 순위인 3위에 랭크되었다.
6위 페드로 페트로네

생년월일: 1905년 5월 11일,
A매치 기록: 28경기 24골
신체조건: 키 173cm / 몸무게 74kg
주 소속팀: 클루브 나시오날
포병이라 불렸던 막강한 슈팅력의 소유자로 20년대 최고의 센터 포워드로 이름을 날렸다. 슈팅력 이외에도 당시의 센터 포워드들과는 달리 드물게 후방으로 내려와 인사이드 포워드들과 연계에도 힘쓰기도 했다. 그럼에도 그의 아이덴티티는 득점력이라서 경기당 1골 이상을 득점하는 괴력을 발휘하는 파르토네를 두고 공격 파트너인 엑토르 스카로네는 그를 두고. "페르토네에게 공을 넘기고 코트 중앙을 바라보기만 하면 골입니다."라고 말한 적이 있었다.
클루브 나시오날에서 스카로네, 로마노 등과 호흡을 맞추며 제1의 전성기를 누린 페트로네는 1924년 우루과이 프리메라 디비시온 우승을 포함해 친선전 포함 6개 대회에서 우승을 이뤄냈지만 1925년에 유럽 투어에서 무릎 부상을 당했으며 한 때 다리를 절단해야 될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있기도 했지만 결국 8월 1일에 돌아왔고 복귀전에서 2골을 넣었지만 1924년에 보여준 기량을 다시 보여주지는 못할 것으로 보였다.
그러다가 1931-32 시즌 피오렌티나로 이적해 활약하며 첫 시즌에 득점왕에 올랐으며 두 번째 시즌에는 피오렌티나 역사상 최초로 유벤투스를 꺾는데 성공하는 등 승승장구했으며 회장에게 피아트 508 바릴라를 선물받았을 정도로 사이가 좋았지만 포지션 문제로 갈등을 빚자 사이가 급격하게 나빠지며 다시 클루브 나시오날로 돌아와 리그우승을 이뤄냈다.
우루과이 대표팀에서도 황금기를 이끈 페트로네는 두 번의 올림픽 금메달과 두 번의 코파 아메리카 우승에 크게 기여했으며 우승한 1923년과 1924년 대회에서는 모두 득점왕에 오르는 맹활약을 펼쳤지만 초대 월드컵에서는 주전 경쟁에서 밀려 백업으로 우승을 경험했다.
5위 세베리노 바렐라

생년월일: 1913년 9월 14일
A매치 기록: 24경기 19골
신체조건: 키 175cm / 몸무게 70kg
주 소속팀: CA 페냐롤
베레모를 쓰고 경기하는 것을 즐겨 유령 베레모라 불렸던 선수로 1930년대 하반기 페냐롤의 전성기를 이끈 공격수로 인사이드 포워드와 스트라이커를 겸했으며 우수한 볼 컨트롤을 바탕으로 상대 수비수의 견제로부터 볼을 잘 지켜냈으며 특히 엄청난 점프력에서 나오는 강력한 헤더로 상대의 골망을 가르는 게 주특기였으며 킥력도 우수해 프리킥을 통한 득점에도 능숙했으며 무엇보다도 경기를 뛸 때에는 항상 투지가 넘치는 모습을 보여주며 팬들의 사랑을 받았다.
리버 플레이트 몬테비데오에서 데뷔했으나 팀은 우승권과 거리가 멀었고 1935년에 페냐롤에 입단한 바렐라는 1935년부터 1938년까지 우루과이 프리메라 디비시온 4회 연속 우승을 이뤄냈으며 이후 새로운 도전을 위해 아르헨티나의 보카 주니어스로 이적했고 보카에서도 라 마키나를 제치고 아르헨티나 무대를 평정하며 아르헨티나 프리메라 디비시온 2연패를 이뤄냈는데 특히 리버 플레이트와의 수페르클라시코에서 6경기 5골을 기록하며 강한 면모를 보여 팬들의 사랑을 받았으나 1945년에 다시 페냐롤로 떠나 리그 2연패를 이뤄냈다.
특히 보카 주니어스 그를 잡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했는데 아르헨티나에서 경기를 뛰고 우루과이에서 다른 일을 하는 투잡을 뛰는 그가 뛰어난 활약을 펼치자 보카는 급여를 대폭 인상해 재계약을 하려 했지만 그는 우루과이의 직장을 그만둘 수 없다면서 거절했으며 1945년에 CA 페냐롤로 돌아갈 때 보카는 그를 잡기 위해 계약금으로 백지수표를 내놓기도 했지만 바렐라는 내가 벌 수 없는 돈을 받고 싶지 않다고 거절했다.
바렐라는 우루과이 대표팀 소속으로도 세 번의 코파 아메리카에 참가해 1939년 대회에서 준우승을 기록했으며 1942년 대회에서는 옵둘리오 바렐라, 치오카, 포르타와 함께 우승을 이뤄냈다.
4위 호세 피엔디베네

생년월일: 1890년 6월 5일
A매치 기록: 49경기 22골
신체조건: 키 181cm / 몸무게 75kg
주 소속팀: CA 페냐롤
우루과이 축구 초창기 최고의 스타플레이어로 높은 수준의 테크닉을 보여줬기에 팬들로부터 마법사라 불렸지만 정작 피엔디베네는 효율적인 플레이를 강조해 효율적인 드리블과 패스로 경기를 풀어나갔으며 득점포를 가동하는 부분에도 뛰어났음은 물론 공격지역 전 포지션에서 활약할 수 있었으며 당시로서는 드물게 볼을 잃은 상황에서는 바로 상대 수비수로부터 볼을 다시 빼앗는 수비적인 플레이를 선보이기도 했다.
클럽 커리어 전체를 페냐롤에서만 보낸 원 클럽맨인 피엔디베네는 20년 동안 팀에 머물며 라이벌 구단 클루브 나시오날의 에이스 앙헬 로마노, 엑토르 스카로네, 페드로 페르토네 등과 라이벌리를 이뤄 활약하며 아우리네그로스의 우루과이 프리미어 디비시온 6회 우승을 포함해 크고 작은 대회에서 13개의 트로피를 들었으며 그 과정에서 팬들의 대단한 지지를 받아 아우리네그로스 최초의 아이콘으로 등극했다.
페냐롤의 마법사 피엔디베네는 우루과이 대표팀에서도 센터 포워드와 인사이드 포워드에서 활약하며 코파 아메리카에서 1916년 초대 대회부터 총 4회 출전해 1916년과 1917년, 그리고 1919년에 우승을 조국의 이뤄냈으며 특히 1920년 대회에서는 대회 MVP에 선정되는 기염을 토했다.
우루과이의 축구 기자 디에고 로세토는 그를 두고 "신이 내린 마스터, 공격의 지배자, 패스의 왕, 헤딩의 군주, 감베타의 황제, 드리블의 제왕, 작은 나무토막의 왕 만세"라고 호평했다.
3위 루이스 수아레스

생년월일: 1987년 1월 24일
A매치 기록: 137경기 68골
신체조건: 키 182cm / 몸무게 83kg
주 소속팀: FC 바르셀로나
레반도프스키와 함께 2010년대 최고의 스트라이커로 불렸으며 각종 기행으로 더 유명하지만 실력도 우수했는데 우수한 골 결정력은 물론 다이나믹한 드리블과 뛰어난 패싱력을 활용한 찬스 메이킹에도 능했으며 전성기 시절에는 하프 라인부터 직접 골라인까지 몰고 가서 득점을 하는 퍼포먼스를 보이기도 했다.
아약스에서 처음 두각을 나타낸 뒤, 리버풀에서 첫 전성기를 보낸 수아레스는 비록 리그 우승을 이뤄내진 못했지만 2013-14 시즌에 득점왕과 리그 MVP를 수상하며 ESM 올해의 팀, PFA 올해의 팀, 유러피언 골든슈, FWA 올해의 선수, PFA 올해의 선수 등 여러 상을 독식했으나 2014 브라질 월드컵 조별리그 마지막 경기에서 키엘리니를 물어버리며 반년 간 축구계 모든 행사 참가 금지를 받아 발롱도르 후보에 들지 못했다.
2014-15 시즌 바르셀로나로 이적한 뒤에는 상술했던 징계로 반 년을 쉬었지만 복귀하고 나서 메시, 네이마르와 함께 MSN 라인을 구축해 활약하며 2014-15 시즌 트레블을 포함해 라리가와 코파 델 레이 4회 우승을 이뤄냈으며 2015-16 시즌에는 40골을 득점하며 득점왕에 올랐으며 해당 시즌에 코파 델 레이 우승도 이뤄냈다. 수아레스 개인도 ESM 올해의 팀에 2회 연속 선정된 것과 2015년 발롱도르 5위, 2016년 발롱도르 4위에 올랐다.
우루과이 대표팀 A매치 통산 최다 득점자인 수아레즈는 2010 남아공 월드컵에서 포를란을 보좌하며 팀의 4강 진출에 공헌했으며 2011 코파 아메리카에서는 팀을 우승으로 이끌며 대회 MVP를 수상했으며 2018 러시아 월드컵에서도 8강에 진출했으나 카타르 월드컵에서는 안타깝게도 세월의 흔적을 이겨내지 못하고 부진했다.
2위 앙헬 로마노

생년월일: 1893년 8월 2일
A매치 기록: 70경기 28골
신체조건: 키 174cm / 몸무게 73kg
주 소속팀: 클루브 나시오날
1910년대와 20년대 우루과이의 황금기를 이끈 핵심 선수 중 한 명으로 드리블과 찬스 메이킹에 능했으며 주 포지션은 인사이드 레프트 및 아웃사이드 레프트였지만 골키퍼를 포함해 모든 포지션을 소화할 수 있었을 정도로 다재다능했으며 축구라는 스포르에 대한 이해도도 높았던 천재적인 토탈 플레이어였다.
클루브 나시오날 통산 득점 5위에 랭크된 로마노는 스카로네와 함께 트리콜로리스의 공격을 이끌며 1915년 5관왕을 포함해 프리메라 디비시온 우승 8회, 코파 데 아너 우승 3회, 그리고 코파 데 캄페텐시아 4회 우승, 그리고 아르헨티나 챔피언과의 슈퍼컵인 코파 알다오 3회 우승을 포함해 도합 24회의 크고 작은 공식전 우승을 이뤄내며 구단의 황금기를 이끈 핵심 선수 중 한 명으로 평가받았다.
로마노는 1925년 우루과이 리그가 페냐롤이 주축이 되어 창설한 우루과이 연합으로 인해 리그가 쪼개졌으며 이견차를 좁히지 못해 리그가 취소되자 나시오날은 유럽투어에 나섰는데 이때 로마노는 유럽 무대에서 자신의 실력을 보여주며 9개의 나라를 돌아다니며 38개의 팀과 친선경기에서 26승 7무 5패의 성적을 거두었는데 FC 바르셀로나, 제노아, 스포르팅 리스본, 라피드 빈, 스파르타 프라하 등 1920년대 유럽 최고의 팀들과 경기를 하면서도 로마노는 뛰어난 퍼포먼스를 보였다.
우루과이 대표팀의 황금기 초반부를 이끈 로마노는 코파 아메리카에서만 여섯 번 우승했으며 특히 1917년 대회와 1920년 대회에는 득점왕을 달성하기도 했고 올림픽에서도 1924 파리 올림픽과 1928 암스테르담 올림픽에서 두 번이나 우승하며 한번 걸기도 힘들다는 금메달을 두번이나 걸었음은 물론 개인적으로도 세계 최초로 A매치 70경기를 달성하며 당시 A매치 출전 횟수 세계 신기록을 달성했었다.
1위 엑토르 스카로네

생년월일: 1898년 11월 26일
A매치 기록: 51경기 31골
신체조건: 키 171cm / 몸무게 73kg
주 소속팀: 클루브 나시오날
브라질엔 펠레와 호나우두, 아르헨티나엔 마라도나와 메시가 있다면 우루과이엔 스카로네가 있었다. 인사이드 포워드에게 필요한 모든 덕목에서 우수했으며 특히 골 결정력과 동료들을 활용하는 플레이가 일품이었기에 1920년대 최고의 인사이드 포워드로 이름을 날렸으며 마법사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클루브 나시오날 통산 득점 2위에 랭크된 스카로네는 로마노와 함께 트리콜로리스의 공격을 이끌며 우루과이 프리메라 디비시온 8회 우승과 아르헨티나 챔피언과의 슈퍼컵인 코파 알다오 3회 우승을 포함해 국내외의 크고 작은 대회에서 도합 22개의 우승 트로피를 따내며 구단의 황금기를 누리는데 큰 역할을 했으며 1926-27 시즌에는 스페인의 FC 바르셀로나로 임대를 다녀오기도 했다.
우루과이 대표팀의 황금기를 이끈 가장 중요한 인물로 1917 코파 아메리카에서 팀의 우승을 견인하며 득점왕과 MVP를 모조리 석권했으며 총 네 번의 코파 아메리카에서 우승했고 두 번의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그리고 초대 월드컵에서 우승을 거뒀으며 대회 베스트 일레븐에 선정되었다. 1927 코파 아메리카에서는 득점왕에 오르기도 했다.
여담으로 스카로네는 부업으로 집배원을 하기도 했으며 그의 열 살 터울의 친형 카를로스 스카로네 역시 엑토르에 앞서 활약하며 클루브 나시오날의 전성기를 이끌기도 했다.
선정 인원 외 추가할 수 있는 명단
카를로스 스카로네

생년월일: 1888년 11월 10일
A매치 기록: 25경기 17골
신체조건: 미상
주 소속팀: 클루브 나시오날
호세 페레스

생년월일: 1897년 11월 30일
A매치 기록: 20경기 3골
신체조건: 미상
주 소속팀: CA 페냐롤
후안 페예그리노 안셀모

생년월일: 1902년 4월 30일
A매치 기록: 8경기 3골
신체조건: 키 170cm / 몸무게 72kg
주 소속팀: CA 페냐롤
후안 호베르

생년월일: 1926년 10월 8일
A매치 기록: 8경기 3골
신체조건: 키 178cm / 몸무게 73kg
주 소속팀: CA 페냐롤
카를로스 아길레라

생년월일: 1964년 9월 21일
A매치 기록: 64경기 22골
신체조건: 키 166cm / 몸무게 68kg
주 소속팀: 제노아 CFC
다니엘 폰세카

생년월일: 1969년 9월 13일
A매치 기록: 31경기 10골
신체조건: 키 183cm / 몸무게 77kg
주 소속팀: SSC 나폴리
다리오 실바

생년월일: 1972년 11월 2일
A매치 기록: 49경기 14골
신체조건: 키 175cm / 몸무게 74kg
주 소속팀: 말라가 CF
세바스티안 아브레유

생년월일: 1976년 10월 17일
A매치 기록: 70경기 26골
신체조건: 키 193cm / 몸무게 84kg
주 소속팀: 보타포구
마르셀로 살라예타

생년월일: 1978년 12월 5일
A매치 기록: 32경기 10골
신체조건: 키 190cm / 몸무게 93kg
주 소속팀: 유벤투스 FC
다르윈 누녜스

생년월일: 1999년 6월 24일
A매치 기록: 16경기 3골
신체조건: 키 187cm / 몸무게 81kg
현 소속팀: 리버풀 F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