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르난테 선정 스페인 축구계를 빛낸 명장 16인

축구계의 명장들/유럽 축구계의 명장들

토르난테 선정 스페인 축구계를 빛낸 명장 16인

토르난테 2023. 1. 24. 17:26
728x90
728x90

1. 명단 선정 및 순위 선정은 여러 데이터를 바탕으로 참조한 작성자의 주관적인 평가입니다.
2. 라리가에서 전성기를 맞은 순서로 작성했습니다.
3. 감독 커리어 목록에는 스페인 대표팀 및 스페인 클럽에서의 커리어만 기재했습니다.
4. 순위는 하단에 있습니다.
5. 선수 및 감독 건조폼 사진은 플레이어스에서 활동하는 법정스님의 소유님의 작품이며 라인업 양식은 제 개인 작품입니다.



1. 엘레니오 에레라

 


출생년도: 1910년 4월 10일

스페인 축구계에서의 커리어

1948-1949 레알 바야돌리드
1949-1952 아틀레티코 마드리드
1952 말라가
1953 데포르티보 라 코루냐
1953-1957 세비야 FC
1958-1960 FC 바르셀로나
1960-1962 스페인 대표팀 (인테르 밀란 감독직과 겸임)
1979-1981 FC 바르셀로나

'마법사와 분탕 유발자라는 이중적인 가면'

그란데 인테르의 시대를 이끌며 카테나치오의 왕이라 불렸던 인물이지만 그가 축구 감독으로서 처음 명성을 쌓은 장소는 스페인이었으며 그 당시에는 유기적인 공격 축구를 추구했던 감독이다.

바야돌리드에서의 준수한 활약을 바탕으로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의 지휘봉을 잡은 에레라는 레알 마드리드, 아틀레틱 빌바오, FC 바르셀로나 등 까다로운 상대들을 제치고 1949-50 시즌과 1950-51 시즌에 라리가 2연패를 이뤄냈으며 1951년에는 오늘날의 수페르코파 에스파냐인 코파 에바 두아르테에서 1950-51 시즌 코파 델 레이 우승팀인 바르셀로나를 상대로 공수 양면에서 완벽한 모습을 보여주며 2-0 완승을 거두었다.

그러나 1952-53 시즌 중반 선수 영입 관련해서 이사진과 마찰을 빚은 에레라는 홧김에 팀을 이탈했고 이후 이베리아 반도의 여러 팀을 떠돌다가 1958-59 시즌에 FC 바르셀로나는 저승사자 군단이라 불리며 유럽을 호령했던 레알 마드리드의 독주를 막아내기 위해 에레라를 영입했다. 그리고 에레라는 아틀레티코 마드리드 시절과 비슷한 기조의 전술을 선수단 실정에 맞게 최적화시키며 1958년 인터시티 페어스컵 우승을 시작으로 1958-59 시즌 라리가, 코파 델 레이 2관왕을 이뤄냈으며 이듬해에는 라리가와 인터시티 페어스컵에서 우승하며 2관왕을 이뤄냈으며 두 시즌간 60경기에서 46승 5무 9패를 기록, 76.67%라는 높은 승률을 기록했다.

하지만 FC 바르셀로나에서의 그의 감독생활은 순탄치 못했는데 보너스 지급 문제로 에레라가 회장의 이름을 팔아서 거짓말을 하자 자금난에 시달리던 회장과 불화가 생겼으며 경기 하루 전 팀원들과 티 타임을 가졌는데 그 차에서 암페타민이 검출되었는데 암페타민은 중추신경계를 흥분시키며, 기민성을 증가시키고, 말하는 능력과 전반적인 육체활동을 증가시키는 약물군으로 오늘날로 치면 금지 약물에 해당하는 약물이고 이를 알게 된 팀의 핵심 선수인 라슬로 쿠발라는 이에 반발했고 결국 에레라는 쿠발라를 배제하며 이사진에게 경고를 들었으며 1959-60 시즌 유러피언 컵 4강에서 레알 마드리드와의 엘 클라시코에서 패했다는 명분으로 경질되었다. 이후 인테르 밀란에서 유럽 무대와 세계 무대를 평정한 뒤 말년에 다시 바르셀로나로 돌아와서 1980-81 시즌 코파 델 레이 우승을 끝으로 축구 지도자 생활을 완전히 접는다.

전성기인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와 바르셀로나 시절의 에레라가 맡은 팀을 살펴보면 라리가에서 타 팀에 비해 압도적으로 많은 득점을 기록하며 화끈한 공격 축구를 구사했으면서도 득점이 한 선수에 편중되지 않아 아틀레티코 마드리드 공격수들이 득점 랭킹에는 많이 오르지 못했음에도 팀은 항상 다득점에 성공했는데 이는 다양한 공격루트를 통해 상대 수비수를 분산시키는 플레이에 능했음을 뜻한다.

 

엘레니오 에레라는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와 FC 바르셀로나에서 모두 공격적인 WM을 운용했다.



2. 페르디난트 다우치크

 


출생년도: 1919년 5월 30일

스페인 축구계에서의 커리어

1950-1954 FC 바르셀로나
1954-1957 아틀레틱 빌바오
1957-1959 아틀레티코 마드리드
1960-1962 레알 베티스
1963-1964 레알 무르시아
1964-1965 세비야 FC
1966-1967 레알 사라고사
1968 엘체
1968-1969 레알 베티스
1969-1970 UE 산트 안드레우
1970-1971 에스파뇰
1971 카디스
1973-1974 UE 산트 안드레우
1974-1975 레반테
1976–1977 UE 산트 안드레우

'다섯 대회를 정복한 슬라브인 사령관'

선수 시절 슬라비아 프라하의 리그 4회 우승을 이뤄낸 전설적인 풀백이었으며 지도자 시절에도 브라타슬라바, MTK 헝가리아 등 중유럽의 명문팀을 이끌며 명성을 떨쳤다.

그러나 반공주의자였던 다우치크는 그의 사위이자 당대를 호령한 스타플레이어였던 라슬로 쿠발라와 함께 공산주의 정권에서 탈출했고 FC 바르셀로나는 쿠발라를 영입하기 위한 조건으로 그를 사령탑으로 임명했다.

사령탑으로 임명된 과정이 다소 잘난 사위를 둔 덕으로 보였지만 다뉴브 학파의 직계로 훌륭한 커리어를 쌓았던 다우치크는 그 행운을 자신의 업적으로 전환할 수 있던 사람이었다. 다우치크는 첫 시즌부터 1950-51 시즌 코파 델 레이 우승을 이뤄냈으며 1951-52 시즌에는 라리가와 코파 델 레이, 라틴컵을 포함해 다섯 개의 우승 트로피를 차지하며 친코 코파스 바르셀로나라 불리는 시대를 이뤄냈고 이듬해에도 라리가, 코파 델 레이, 코파 에바 두아르테 3관왕을 이뤄내며 바르셀로나의 첫 전성기를 열었다.

하지만 1953-54 시즌, 레알 마드리드에게 우승컵을 내줬으며 일부 선수들과의 갈등으로 재계약이 불발되자 빌바오로 이적했으며 빌바오에서도 코파 델 레이 2연패와 1955-56 시즌에는 유럽 챔피언 레알 마드리드를 따돌리고 라리가와 코파 델 레이 더블 우승을 이뤄내며 전성기를 누렸으나 아틀레틱 빌바오를 떠난 이후에는 1965-66 시즌 레알 사라고사의 코파 델 레이 우승을 제외하고는 눈에 띄는 성과를 내지는 못했다.

 

친코 코파스(좌) 시절 바르셀로나의 지휘자는 다뉴브 학파의 적통 다우치크였다. 그리고 빌바오에선 유럽 챔피언을 물먹이고 스페인을 지배했다.



3. 호세 비야롱아

 


출생년도: 1919년 12월 12일

스페인 축구계에서의 커리어

1954-1957 레알 마드리드
1959-1962 아틀레티코 마드리드
1962-1966 스페인 대표팀

'마드리드 시장'

마드리드 연고의 두 팀에서 모두 성공적인 커리어를 보냈던 지도자로 구스타브 세베슈의 매직 마자르가 보여준 소셜리스트 풋볼을 동경했으며 전방 다섯 명의 공격진에게 유기적인 스위칭 플레이를 지시했다.

상술한 스티일을 적극적으로 활용해 레알 마드리드에서는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를 중심으로 공격진을 구성하며 1954-55 시즌 라리가와 라틴컵에서 우승하며 더블 크라운을 기록했고 1955-56 시즌에는 유러피언 컵 우승을 이뤄내며 최초의 유러피언 컵 우승 감독으로 역사에 이름을 남겼으며 1956-57 시즌에는 라리가와 유러피언 컵, 그리고 라틴컵을 우승하며 3관왕을 이뤄냈다.

마드리드에서 이뤄낼걸 다 이뤄낸 비야롱아는 스페인 대표팀이 월드컵 지역예선에서 2회 연속으로 탈락하자 이를 타개하기 위해 스페인 왕립 축구 연맹의 기술 위원회에 합류해 청소년 팀 업무를 담당하다가 1958-59 시즌을 앞두고 현장으로 복귀해 페르디난트 다우치크의 후임으로 아틀레티코 마드리드 감독을 맡아 로히 블랑코스의 코파 델 레이 2연패를 이뤄냈으며 1960-61 시즌에는 라리가 준우승을 이뤄냈으며 1961-62 시즌에는 UEFA 컵 위너스컵 우승을 이뤄내며 로히 블랑코 군단의 첫 유럽대항전 우승을 이뤄냈다.

레알 마드리드와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에서 모두 성공적인 감독생활을 보내며 마드리드 시장이라는 별명에 걸맞은 커리어를 가진 비야롱아는 1962년 이후에는 그동안 명성에 비해 성공을 이뤄내지 못한 스페인 대표팀을 맡았는데 나이가 많은 외국인 귀화선수들을 대거 제외하고 젊은 스페인 출신 선수들로 팀을 꾸리며 유로 1964 대회 결승전이 열리는 마드리드의 산티아고 베르나베우에서 디펜딩 챔피언 소련을 격파하고 앙리 들로네를 차지하며 마드리드 시장이라는 별명값을 확실하게 했다.

 

비야롱아의 축구에는 다뉴브 학파의 색채가 많이 들어있다. 레알 마드리드(좌) 시절에는 헝가리가 히데구티를 활용하는 방식과 비슷하게 디 스테파노를 펄스 나인으로 활용하며 유기적인 스위칭 플레이를 이뤄냈고 스페인 대표팀(우) 시절에는 헝가리가 자카리아스를 활용하는 방식처럼 소코에게 수비라인과 3선을 자유롭게 움직이게 지시했으며 소코의 움직임에 따라 수아레스도 따라 움직이며  WM 시스템과 4-2-4 시스템을 오갔다.



4. 미겔 무뇨스

 


출생년도: 1922년 1월 19일

스페인 축구계에서의 커리어

1959 레알 마드리드
1959-1960 플러스 울트라 (現 레알 마드리드 카스티야)
1960-1974 레알 마드리드
1975-1976 그라나다
1977-1979 라스 팔마스
1979-1982 세비야 FC
1982-1988 스페인 대표팀

'예예 마드리드의 무결점의 총사령관'

레알 마드리드가 스페인은 물론 세계에서도 독보적인 위치를 쌓는데 공헌했던 명장으로 저승사자 군단의 주장을 맡았을 정도로 우수한 전술안과 탁월한 리더십을 감독으로 부임한 뒤에도 보여줬다.

1958-59 시즌 잠시 감독 대행을 맡다가 새 감독이 부임하자 1년간 2군 팀에서 경험을 쌓았으며 1959-60 시즌 막바지에 다시 1군 감독직으로 복귀해 유러피언 컵 결승전에서 화끈한 공격력을 보여주며 프랑크푸르트를 7-3으로 대파하며 저승사자 군단의 대마를 장식했다.

유러피언 컵 우승 이후 저승사자 군단의 멤버들이 하나 둘 떠났음에도 점진적인 세대교체를 통해 스페인 국적 선수들을 중심으로 Yeye 마드리드 시대를 열며 라리가 9회 우승과 코파 델 레이 2회 우승, 그리고 유러피언 컵 2회 우승을 이뤄내며 갈락티코스에서 감독으로만 총 14개의 우승 트로피를 들었으며 그의 압도적인 리그 지배력 덕분에 바르셀로나에게 밀렸던 라리가 우승 횟수를 역전했으며 이 덕분에 레알 마드리드는 스페인은 물론 전 세계를 대표하는 축구구단이자 스포츠 구단으로 자리 잡게 되는 기반을 마련한다.

레알 마드리드를 떠난 뒤 1970년대 후반에는 라스 팔마스에서도 구단 역사상 최전성기를 누리며 1977-78 시즌 코파 델 레이 준우승을 이뤄냈으며 1982년에는 조국에서 열린 월드컵에서 영 좋지 못한 경기력을 보여준 스페인 대표팀의 지휘봉을 잡아 대표팀의 체질 개선을 이뤄내며 유로 1984 준우승과 1986 멕시코 월드컵 8강이라는 성적을 냈으며 유로 1988에서도 8강 본선에 진출했으나 조별리그에서 탈락하면서 노환을 이유로 축구계에서 은퇴했다. 2006년에는 스페인 언론사 마르카에서 상술한 무뇨스의 위대한 업적을 기리기 위해 시즌 최우수 감독에게 미겔 무뇨스상을 수상한다.

 

무뇨스는 저승사자 시절(좌)과 Yeye 시절(우)의 세대교체를 성공적으로 이끌며 레알 마드리드의 라리가 독주를 이뤄냈다.



5. 루이스 아라고네스

 


출생년도: 1938년 7월 28일

스페인 축구계에서의 커리어

1974-1980 아틀레티코 마드리드
1981 레알 베티스
1982-1987 아틀레티코 마드리드
1987-1988 FC 바르셀로나
1990-1991 에스파뇰
1991-1993 아틀레티코 마드리드
1993-1995 세비야 FC
1995-1996 발렌시아 CF
1997-1998 레알 베티스
1999-2000 레알 오비에도
2000-2001 레알 마요르카
2001-2003 아틀레티코 마드리드
2004-2008 스페인 대표팀

'아르마다 군단과 로히 블랑코의 철혈제독'

1970년대 중반부터 2000년대 후반까지 롱런했던 감독으로 기본적으로 화끈하면서도 조직적인 공격력을 보여주며 이름을 날렸다

선수 은퇴 직후에 아틀레티코 마드리드 감독으로 부임해서 뛰어난 지도력으로 1974년 인터콘티넨탈컵 우승, 1975-76 시즌 코파 델 레이 우승을 이뤄냈으며 1976-77 시즌에는 로히 블랑코의 라리가 우승을 이끌며 돈 발롱 선정 라리가 최우수 감독상을 수상했다.

이후에도 35년의 감독 생활 중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에만 여섯 번 부임했는데 라리가 1회 우승과 코파 델 레이 3회 우승을 포함해 총 여섯 개의 메이저 트로피를 들었으며 2001년에는 아틀레티코 마드리드가 방만한 운영으로 강등당하자 손수 감독으로 부임해 팀을 이끌며 2001-02 시즌 세군다리가 우승을 이뤄내며 팀을 승격시켰으며 2002-03 시즌에도 팀의 라리가 잔류에 성공했다.

아틀레티코 마드리드 이외에 다른 클럽에서는 다소 좋지 못한 모습을 보여줬지만 1987-88 시즌 FC 바르셀로나에서는 코파 델 레이 우승을 이끌었으며 2000년대 중후반에는 스페인 대표팀의 지휘봉을 잡으며 라울, 살가 등 노장들을 제외하는 등 대표팀의 세대교체를 이뤄냈고 그 결과로 스페인은 유로 2008에서 압도적인 퍼포먼스를 보여주며 우승했다. 이후 아라고네스는 대표팀 감독직에서 물러났고 그 뒤를 이어받은 델 보스케가 메이저 대회 3연패를 완수했다.

 

감독생활 초년과 말년에 전성기를 누린 아라고네스는 특히 스페인 대표팀(우) 시절의 화끈한 공격력으로 감독생활의 정점을 찍었다.



6. 알베르토 오르마에체아

 


출생년도: 1939년 4월 7일

스페인 축구계에서의 커리어

1978-1985 레알 소시에다드
1986 에르쿨레스

'에스타디오 아노에타를 지키는 남자'

1959년 레알 소시에다드 2군 팀인 산 세바스티안에 입단했고 1962년부터 1974년까지 오직 레알 소시에다드에서만 활약한 풀백이었으며 1974년부터 1978년까지는 레알 소시에다드의 수석 코치로 안도니 엘리손도와 호세 안토니오 이룰레기, 두 감독을 모셨으며 1978년부터 1985년까지는 레알 소시에다드의 감독으로 7년간 팀의 황금기를 이끌며 추리 우르딘의 일원으로 에스타디오 아노에타에서 26년간 머물며 헌신했다.

특히 그의 감독시절의 업적은 대단했는데 레알 소시에다드를 견고한 수비와 중원에서의 높은 점유율을 유지를 동시에 이뤄내면서 공격진은 찬스를 잘 살리는 삼박자가 잘 맞는 팀으로 키워내며 이를 바탕으로 라리가 38경기 무패, 라리가 2연패, 1982 수페르코파 에스파냐 우승 및 1982-83 시즌 유러피언 컵 4강 진출을 이뤄내며 구단 역사상 최고의 황금기를 이끌었다.

소시에다드 감독에서 은퇴한 뒤에는 에르쿨레스에 잠시 머물다 지도자 생활에서 떠나며 그의 감독 커리어는 짧게 끝났지만 그럼에도 레알 소시에다드 구단측은 오르마에체아의 위대한 업적과 열정적인 충성심을 기리기 위해 홈구장 에스타디오 아노에타 앞에 그의 흉상을 건립했다.

 

오르마에체아는 레알 소시에다드 시절, 짧지만 강력한 임팩트를 보여줬던 감독이며 이때 추리 우르딘은 특히 중원 장악력에 강점을 보였다.



7. 하비에르 클레멘테

 


출생년도: 1950년 3월 12일

스페인 축구계에서의 커리어

1975-1976 아레나스 클루브 데 게초
1976-1978 CD 바스코니아
1979-1981 빌바오 아틀레틱 (아틀레틱 빌바오 2군)
1981-1986 아틀레틱 빌바오
1986-1989 에스파뇰
1989-1990 아틀레티코 마드리드
1991-1992 에스파뇰
1992-1998 스페인 대표팀 (1992-1996 스페인 U-21 대표팀 감독 겸직)
1998-1999 레알 베티스
1999-2000 레알 소시에다드
2002 CD 테네리페
2002-2003 에스파뇰
2005-2006 아틀레틱 빌바오
2008 레알 무르시아
2010 레알 바야돌리도
2012 스포르팅 히혼

'80년대 바스크의 독설가'

팬들에게 바라칼도의 금발이라 불렸던 클레멘테는 선수 시절에도 잠시 빌바오에서 뛰었지만 그다지 인상 깊은 선수는 아니었던 클레멘테는 바스크 지방의 하부리그에서 활약하다가 아틀레틱 빌바오의 2군을 훌륭하게 이끈 지도력을 주목받아 1981-82 시즌에 1군 감독으로 부임했다.

당시 빌바오는 라리가 초창기의 영광을 뒤로하고 1955-56 시즌에 마지막 라리가 우승을 이룬 뒤 리그 우승을 이뤄내지 못했으며 설상가상으로 지역 라이벌 소시에다드가 라리가 2연패를 이뤄내는 강세를 지켜보는 처지에 있었으나 클레멘테가 잡은 뒤 로스 레오네스의 감독직을 잡으며 팀을 재수습했고 이후 1982-83 시즌과 1983-84 시즌에 라리가 2연패를 이뤄냈고 특히 1983-84 시즌에는 코파 델 레이에서도 우승하며 도메스틱 더블을 이뤄내며 빌바오 시절에 돈 발롱 선정 라리가 올해의 감독상을 2년 연속으로 수상했다.

그의 빌바오 시절에는 강력한 수비력과 탁월한 역습으로 명성을 떨쳤지만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과격한 몸싸움과 거친 태클을 서슴지 않아 많은 이들의 지탄을 받았고 특히 1984-85 시즌 코파 델 레이 결승전에서는 바르셀로나를 상대로 과격한 플레이를 보이자 이에 격노한 마라도나는 주먹을 휘둘렸고 곧 두 팀 선수들 간의 격렬한 패싸움이 벌어졌다. 이에 당시 바르셀로나의 감독인 세사르 루이스 메노티는 경기 종료 후 클레멘테의 수비적 전술과 거친 경기 운영 방식, 그리고 선수들을 대하는 태도를 비판하며 "이건 축구가 아니다. 빌바오 선수들은 마치 깡패처럼 플레이했다."라고 거세게 비판하자 이에 클레멘테는 메노티를 '노망난 히피', '오입쟁이'라고 지칭하는 것으로 맞받아쳤다. 그리고 실제로 팀의 주전 스트라이커였던 마누엘 사라비아와 극심한 불화를 겪었으며 그를 비판하자 사라비아와 가까운 팀동료들과의 갈등으로 인해 구단의 중재도 거부하면서 경질당했다.

이후 에스파뇰에서 1986-87 시즌에서는 리그 3위를 기록했는데, 이는 에스파뇰 역사상 가장 높은 순위였으며 다시 한 번 돈 발롱 선정 올해의 감독을 수상했고 1987-88 시즌에는 UEFA컵 결승을 이끌었지만 첫 경기를 3-0으로 이겼음에도 결승 2차전에서 레버쿠젠에게 3-0으로 패하며 승부차기까지 갔으며 승부차기에서는 상대 골키퍼 폴보른의 신들린 선방으로 인해 준우승에 만족해야 했으며 1988-89 시즌에는 핵심 선수들을 빅클럽에 보내면서 팀의 순위가 떨어지자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몇몇 선수들의 재능이 형편없다고 비난했다가 선수들의 반발을 샀고 보드진으로부터 경질되었다. 이후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에서는 팀을 리그 2위에 올리며 우승 경쟁을 벌이던 도중에 아틀레티코 마드리드 회장이었던 헤수스 길이 그의 수비적인 전술을 싫어해 "골은 이기기 위해 필요한 것이다. 우리는 잘못된 길로 가고 있으며 변화가 반드시 필요하다"라며 그를 경질했으나 아틀레티코 마드리드는 그를 경질한 뒤 성적이 더 떨어져 4위에 머물렀다. 이후 스페인 대표팀 감독을 맡았으나 월드컵 8강 이상의 성과를 내지 못하며 커리어의 내리막길을 걸었다.

이상주의 감독의 대표주자였던 메노티가 비판한 대로 거칠고 수비적인 운영과 선수단을 대하는 태도로 인해 감독 생활의 굴곡을 겪었지만 전성기에는 효율적이며 투지 넘치는 축구로 항상 기대 이상의 성적을 냈던 스페인의 실리주의 감독이다.

 

아틀레틱 빌바오(좌)와 에스파뇰(우) 시절을 모두 우르키아가와 함께했다. 루자의 대회에서는 차범근의 레버쿠젠에게 결승에서 패했다.



8. 요한 크루이프

 


출생년도: 1947년 4월 25일

스페인 축구계에서의 커리어

1988-1996 FC 바르셀로나

'점유의 미학과 라마시아를 바탕으로 바르셀로나를 재탄생시킨 축구계의 미켈란젤로'

선수 시절에 이미 토털 풋볼을 구사한 미헬스의 페르소나로 활약해 토털 풋볼에 능했으며 점유와 압박으로 이뤄진 토털 풋볼을 훌륭하게 계승했으며 우수한 볼 포제션에서 나오는 압도적인 점유를 보여주며 현대 바르셀로나가 추구하는 축구를 처음으로 제시했으며 이를 완벽하게 하기 위해 유소년 정책을 재정비해 라 마시아를 출범해서 선수들이 어린 시절부터 구단 철학을 완벽하게 이해할 수 있게 판을 깔았다.

크루이프는 이미 아약스 시절에 컵 위너스컵 우승을 이뤄냈으며 FC 바르셀로나로 이적한 뒤에는 라리가 4연패와 1988-89 시즌 컵 위너스 컵 우승, 그리고 1991-92 시즌 유러피언 컵 우승을 이끌며 구단에게 총 11개의 메이저 트로피를 선사했으며 그의 정신을 바탕으로 바르셀로나가 유럽 최고의 클럽이 되었던 근간이 되었다.

비록 1993-94 시즌 챔피언스리그 결승에서 파비오 카펠로에게 4-0으로 패한 이후 하락세가 뚜렷하게 와서 커리어를 길게 가져가진 못했어도 그가 이뤄낸 업적과 대단한 영향력을 생각하며 그를 축구 역사상 최고의 감독 중 하나로 부를 수 있는 이유다. 펩이 유에서 풍요를 창조했다면 크루이프는 무에서 유를 창조했고 그 정신을 바탕으로 바르셀로나가 21세기 유럽 최고의 클럽 중 하나로 성장한 근간이 되었으며 1선에서 물러난 뒤에도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하며 팀의 성장을 도왔는데 실제로 그가 별세한 뒤 바르셀로나는 무너졌다.

 

크루이프의 이상향은 좌측의 3-3-1-3 포지션인데 미카엘 라우드롭은 펄스나인으로 경기를 지배했다. 훗날 트러블이 있었지만 이들은 최고의 콤비였다.

 

 

9 하비에르 이루레타

 


출생년도: 1948년 4월 1일

스페인 축구계에서의 커리어

1984-1988 세스타오 스포르트 클루브
1988-1989 CD 로그로녜스
1989-1993 레알 오비에도
1993-1994 라싱 산탄테르
1994-1995 아틀레틱 빌바오
1995-1997 레알 소시에다드
1997-1998 셀타 비고
1998-2005 데포르티보 라 코루냐
2006 레알 베티스
2008 레알 사라고사

 

'4-2-3-1 시스템의 아버지이자 리아소르의 영웅'

투톱 전술이 유행하던 시절부터 라파엘 베니테스와 함께 4-2-3-1 시스템의 유행을 선도했으며 미드필더에서 공격수 사이 간격의 문제로 공이 잘 연결되지 않으면 공격의 효율성이 떨어진다는 단점을 인식해서, 미드필더와 공격수 사이에서 공을 연결해주는 중간 배달부로서의 공격형 미드필더 개념을 전술에 접목시키며 공격수가 많아야 공격 축구를 할 수 있다는 당대의 고점관념을 깨는데 큰 기여를 했다.

이루테타는 1990-91 시즌 오비에도 역사상 처음으로 UEFA컵 진출을 이뤄냈으며 여러 팀을 방랑하다가 1998-99 시즌부터 신흥 강호 데포르티보 라 코루냐의 지휘봉을 잡아 정착하며 1999-2000 시즌 라 리가 우승과 2001-02 시즌 코파 델 레이 우승을 이뤄냈으며 이 두 대회 우승팀 자격으로 출전한 두 번의 수페르코차 에스파냐에서 우승을 이뤄냈으며 2003-04 시즌에는 UEFA 챔피언스리그 8강에서 AC 밀란을 만나 첫 경기에서 4-1로 대패했음에도 불구하고 선수단을 잘 독려하며 홈에서 4-0으로 역전승을 거두며 준결승에 진출하는 기염을 토했다.

하지만 데포르티보는 이런 황금기를 위해 구단 재정을 다소 무리하게 썼으며 이를 상쇄하기 위해선 적어도 리그 우승 내지 챔피언스 리그 우승이 있어야만 했다. 그러나 더 이상의 트로피는 없었고 부채가 심각해지는 바람에 파산 직전에 몰려 선수를 팔 수 밖에 없었으며 데포르티보는 8위로 추락하고 챔피언스리그에서도 조별 예선에서 광탈하고 말았다. 그후 이루레타는 성적 부진의 책임을 지고 사임했으며 이후 레알 베티스와 레알 사라고사에서는 좋은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고 떠났다.

말년이 썩 좋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4-2-3-1은 전술사의 한 획을 그었으며 데포르티보 팬들의 유일한 자랑거리인 90년대 후반과 2000년대 황금기를 선사하며 팬들의 마음속에도 이름을 남겼다.

 

데포르티보의 황금기를 이끈 4-2-3-1 시스템은 이루레타의 아이덴티티다. 처진 공격수 자우밍야를 공격형 미드필더로 배치하며 라리가 우승을 이뤄냈으며(좌), 2003-04 시즌에는 본래 최전방 스트라이커를 선호하는 루케를 레프트윙으로 변칙 기용하는 전술로 리아소르의 기적을 이뤄냈다.



10. 비센테 델 보스케

 


출생년도: 1950년 12월 23일

스페인 축구계에서의 커리어

1987-1990 레알 마드리드 카스티야
1994 레알 마드리드 (감독대행)
1996 레알 마드리드 (감독대행)
1999-2003 레알 마드리드
2008-2016 스페인 대표팀

'아르마다 군단과 갈락티코스의 소프트 파워'

클럽과 대표팀에서 모두 성공을 거둔 명장으로 스타군단을 지휘하는데 특화되었으며 세부 전술은 선수들에게 맡기고 큰 틀의 전술만 짜낸다는 비판을 받기도 하지만 시대의 흐름과 팀의 현 사정을 잘 읽고 거기에 최적화된 전술로 틀을 쌓은 뒤 세세한 부분은 스타플레이어에게 맡기는 전술로 강팀에서 좋은 성과를 냈다.

임대 시절을 제외하면 레알 마드리드와 2군 팀인 플루스 울트라에서만 활약한 원 클럽맨으로 레알 마드리드에서 은퇴한 지 3년 만에 2군 감독으로 다시 돌아왔으며 몇 차례의 감독 대행을 하다가 1999-2000 시즌에 감독 대행 신분으로 UEFA 챔피언스리그 우승을 이뤄냈는데 그 과정에서 8강전에서는 3M의 일원이자 작년에 트레블을 이뤄냈던 퍼거슨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를 1승 1무, 스코어합 3-2로 꺾었으며 4강에서는 역시 3M의 일원이자 2차 조별리그에서 레알 마드리드를 상대로 8-3 대승을 거둔 바이에른 뮌헨을 상대로 1승 1패, 스코어합 3-2로 승리하며 결승에 진출하며 복수에 성공했으며 결승에서 만난 발렌시아를 3-0으로 대파해 빅이어를 타내며 3M의 수장이자 유럽 챔피언의 자리를 공고히 했다.

빅이어를 든 공로를 인정받아 정식 감독으로 부임해 다국적의 스타를 영입하는 갈락티코 정책 속에서도 스타들을 잘 통솔하면서도 팀의 밸런스를 잘 잡으며 라리가 2회 우승과 2001-02 시즌 UEFA 챔피언스리그 우승에 이어 2002년에는 UEFA 슈퍼컵과 인터콘티넨탈컵 우승을 이뤄내며 갈락티코 1기를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그러나 클럽은 새 플랜인 지단-파본 정책을 위해 그에 방해되는 존재들을 밀어냈으며 델 보스케도 매니저로서는 훌륭하지만 전술가로서의 역량은 부족하다는 혹평을 받으며 밀려났고 델 보스케를 잃은 마드리드는 챔피언스리그에서의 경쟁력을 상실하며 다년간 암흑기를 겪었다. 

델 보스케도 베식타스에서 감독직을 수행하며 부진한 모습을 보이며 이대로 몰락하는가 싶었지만 스페인 대표팀의 감독으로 부임했으며 전임자 아라고네스의 색채를 잘 유지함과 동시에 대표팀 선수 다수가 포함된 FC 바르셀로나의 펩 과르디올라 감독의 전술도 적절하게 받아들이면서 2010 남아공 월드컵 우승을 이뤄냈으며 특히 유로 2012에서는 주전 공격수 비야의 부상과 서브 공격수 토레스의 부진으로 인해 2011-12 시즌 펩 과르디올라가 선보였던 파브레가스 펄스 나인을 적극 활용하며 결승전에서 데 로시의 포어 리베로를 앞세운 이탈리아를 4-0으로 대파하며 정점에 오른다.

부드러운 리더십으로 스타들을 잘 아우르는 동시에 헌신적인 선수들을 이용해 밸런스를 잡는 부분에도 능한 델 보스케를 내치며 실패를 맛본 페레스 회장 역시 2009-10 시즌에 구단에 복귀한 뒤로는 더 이상 소프트 파워와 밸런스의 가치를 인정했고 이는 마드리드의 성공시대를 이끌었다.

 

레알 마드리드 시절(좌)에는 카를루스의 공격력과 마켈렐레 혼자 책임졌던 포백 보호를 지구력이 좋고 높은 수준의 전술안을 가진 솔라리를 토르난테로 기용하며 팀의 밸런스를 잡았고 실제로 마드리드는 마켈렐레 이탈 하나로 팀의 밸런스가 깨진것이 아니라 솔라리까지 팔아버리면서 수비력이 제로에 가까운 구티를 기용했기에 카를루스의 오버래핑을 채우지 못하며 팀 밸런스가 깨진것에 가깝다. 스페인 대표팀 시절(우)에는 주포 비야의 부상과 토레스의 부진으로 공격진에서 공백이 생기자 펩이 시도했던 세스크 펄스나인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며 포어 리베로를 앞세운 이탈리아를 대파했다.



11. 라파엘 베니테스

 


출생년도: 1960년 4월 16일

스페인 축구계에서의 커리어

1993-1995 레알 마드리드 카스티야
1995-1996 레알 바야돌리드
1996-1997 CA 오사수나
1997-1999 CF 에스트레마두라
2000-2001 CD 테네리페
2001-2004 발렌시아
2015-2016 레알 마드리드

'초년에는 지성적인 축구교수, 말년에는 실리를 겸하지 못한 고집쟁이'

2010년대 이후로는 대체로 나쁜 활약을 보였으며 여러 선수와의 불화로 인해 현시대 팬들에게는 저평가를 받지만 2000년대의 베니테스는 데포르티보의 이루테타와 함께 4-2-3-1 체제의 발전과 유향에 큰 역할을 했던 감독으로 중원에서의 우수한 점유와 강력한 수비를 겸비했으며 로테이션의 중요성을 빠르게 인식했던 감독이었다.

레알 마드리드의 유스 출신이지만 선수 생활은 별볼일 없었던 베니테스는 1982년 마드리드 공과대학에서 체육교육학 학위를 취득했으며 은퇴 후 레알 마드리드 카스티야 CF에서 코치 경력을 쌓은 뒤, 감독으로 정식 부임하여 우승을 이끌었지만 바야돌리드와 오사수나에서는 좋지 못한 모습을 보이며 그저 그런 감독이 되나 싶었지만 이후 에스트레마두라의 감독을 맡아 라리가 승격을 이끌었으며 CD 테네리페에서도 라리가 승격을 이끌어내며 하부리그의 승격전도사로 명성을 떨치며 인정받는다.

하부리그 무대에서 인정받아 상위 레벨의 클럽인 발렌시아의 감독을 맡으며 전성기를 누렸는데 2001-02 시즌 발렌시아의 라리가 우승을 이끌며 돈발롱 선정 라리가 최우수 감독으로 선정되었으며 2003-04 시즌에는 라리가와 UEFA컵을 동시에 우승하며 포르투의 챔피언스리그 우승을 이끈 주제 무리뉴와 함께 유럽 올해의 감독에 선정되며 자타공인 세계구급 감독으로 인정받았다.

이후 스페인 무대를 떠나 리버풀의 챔피언스리그 우승을 이끌기도 하고 인테르와 나폴리에서 부진한 활약을 펼치며 많은 비판을 받기도 하는 등 굴곡있는 감독생활을 보내면서 평가가 엇갈렸으며 2015-16 시즌 레알 마드리드 감독직을 맡아 최악의 모습을 보이고 경질되었는데 후임 지단이 같은 선수단을 이끌고 팀을 챔피언스리그 우승과 라리가 2위까지 끌어올리자 평가가 더욱 나빠졌다. 물러날 때 물러났으면 더 좋은 평가를 받았을 감독이다.

 

이루레타와 함께 4-2-3-1 시스템의 발전을 이뤄낸 베니테스는 이때까지만 하더라도 원톱의 발전을 이끌던 축구계의 선구자였다.



12. 마누엘 펠레그리니

 


출생년도: 1953년 9월 16일

스페인 축구계에서의 커리어

2004-2009 비야레알 CF
2009-2010 레알 마드리드
2010-2013 말라가
2020-현재 레알 베티스

'신흥 강호의 기틀을 다지는 명재상'

비록 라리가 무대에서 많은 트로피를 들어올리진 못했지만 갓 승격했거나 중하위권에 머물던 구단을 맡아 팀의 구조를 개편하며 중상위권을 거쳐 상위권에 안착시키는 능력이 뛰어난 감독으로 온화한 성격을 바탕으로 폼이 떨어진 선수들을 다시 재활시키는데 일가견이 있는 덕장임과 동시에 빠르고 공격적으로 운용하는 4-2-2-2 시스템을 선호했다.

칠레와 에콰도르, 아르헨티나에서 성공적인 감독생활을 한 뒤 2004-05 시즌에 비야레알의 지휘봉을 잡고 인터토토컵 우승을 시작으로 2004-05 시즌 라리가 3위를 기록하며 당시 시준 구단 역사상 최고의 성적을 냈으며 2005-06 시즌에는 UEFA 챔피언스리그 4강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이후 리켈메 중심의 전술에서 카솔라 중심으로 체제를 바꾼 뒤 2007-08 시즌 라리가 준우승을 이끌며 미겔 무뇨스 트로피를 수상했으며 2008-09 시즌에는 UEFA 챔피언스리그 8강에 진출하는 등의 좋은 성적을 내며 비야레알 라리가의 강호로 발돋움시키는데 큰 역할을 했다.

레알 마드리드에서는 비록 펩 바르셀로나에게 막혀 무관으로 끝났지만 2010년 당시 기준으로 레알 마드리드의 라리가 단일 시즌 역대 최다 승점을 기록했으며 이후 말라가의 지휘봉을 잡은 뒤에도 2011-12 시즌 라리가 4위를 이끌며 구단 역사상 최고의 성적을 이끔과 동시에 2012-13 시즌에는 방만한 운영으로 다수의 선수가 이탈했음에도 불구하고 UEFA 챔피언스리그 8강 진출을 이뤄냈다. 이후 맨체스터 시티와 중국의 허베이, 그리고 웨스트햄을 거쳐 레알 베티스로 돌아온 뒤에는 중하위권에 머물던 팀을 라리가 중상위권으로 올렸으며 2021-22 시즌 코파 델 레이에서도 우승을 이뤄냈다.

 

페예그리니의 이상형은 본인이 밝히길 텔레 산타나식 공격형 4-2-2-2 시스템이라 밝혔지만 팀의 사정에 맞게 전술을 다시 짤 줄 아는 감독이었다. 하지만 4-2-2-2가 이상향인 점은 곳곳에서 남는데 2005-06 시즌 비야레알(좌)은 좌측 메짤라 소린은 전진하고 우측 메짤라 세냐는 후진하며 4-2-2-2 처럼 운용되었다. 이후 전술적 제약이 큰 리켈메를 매각하고 2선을 측면과 중앙을 아우르는 노장 피레스와 젊은 카소를라를 중심으로 개편하면서 더 선전했다.



13. 펩 과르디올라

 



출생년도: 1971년 1월 18일

스페인 축구계에서의 커리어

2007-2008 FC 바르셀로나 B
2008-2012 FC 바르셀로나

'점유의 미학을 완성시킨 혁명가'

2000년대 수비 축구의 유행을 부수고 공격 축구의 유행을 선도한 선구자로 요한 크루이프의 크루이프즘을 계승, 발전시키며 높은 라인에서의 짧고 빠른 패스로 점유율을 가져가며 상대의 공격할 틈을 주지 않으며 주도권을 가져가는 축구를 펼치며 세계 축구계를 뒤흔들었다.

펩은 바르셀로나에서 첫 1군 감독으로 데뷔한 2008-09 시즌에 몰락한 팀을 빠르게 수습하며 트레블을 이뤄냈으며 이 기세를 몰아 2009년 하반기에 UEFA 슈퍼컵, 수페르코파 데 에스파냐, 그리고 FIFA 클럽 월드컵을 모두 우승해 6관왕을 이뤄냈으며 이 6관왕을 포함해 라 리가 3연패, UEFA 챔피언스리그 2회 우승을 포함해 4년 동안 14개의 트로피를 들며 FC 바르셀로나 역사상 최고의 황금기를 구가했다/ 특히 2010-11 시즌 FC 바르셀로나는 두 번의 트레블 시즌이나 친코 코파스 시대를 제치고 FC 바르셀로나 역사상 최고의 시즌으로 평가받는다.

화려한 공격 축구로 역대급 결과를 가져온 펩의 능력은 이 당시 축구계에 선전한 충격으로 다가왔으며 이런 활약을 인정받아 미겔 무뇨스 트로피 2회 연속 수상과 월드 사커지 선정 올해의 감독과 UEFA 올해의 감독 2회 수상 등 각종 감독상을 휩쓸었으며 독일 무대의 위르겐 클롭, 유프 하인케스와 함께 2000년대에 유행했던 수비 축구의 시대를 끝내고 라인을 올리는 공격적인 축구의 시대를 열었으며 이후 바이에른 뮌헨과 맨체스터 시티에서도 수많은 트로피를 들었다.

 

첫 시즌인 2008-09 시즌(좌)에는 아직 라 마시아의 유스들이 다 성장하지 못했으며 팀의 급격한 내리막으로 리빌딩을 구사하는 부분에도 한계가 있었기에 앙리, 에투, 투레 등 일부 자원들을 잔류시켜 최적으로 활약하며 6관왕을 이뤄냈고 2009-10 시즌에는 이전 체제에서 활약하던 선수들 대부분 내보내고 자신이 직접 육성한 부스케츠, 페드로를 중용하기 시작했고 2010-11 시즌에는 비야까지 영입하며 자신의 축구를 한층 더 완벽하게 구사했다.



14. 우나이 에메리

 


출생년도: 1971년 11월 3일

스페인 축구계에서의 커리어

2004-2006 르로카 데포르티바
2006-2008 UD 알메리아
2008-2012 발렌시아 CF
2013-2016 세비야 FC
2020-2022 비야레알 CF

'유로파 리그 마스터'

상대방의 메인 전술을 파악하고, 그에 맞는 전술을 준비하는데 강점을 보인 감독으로 본인은 공격 축구를 선호하지만 팀의 상황에 맞는 운영을 우선하기에 이 부분이 잘 보이지 않으며 역으로 실리적인 축구를 바탕으로 중상위권 팀에서 최대한 좋은 성과를 이뤄내는 스타일이며 그렇기에 2티어 유럽대항전인 유로파 리그에서 개인 통산 4회 우승을 이뤄내며 유로파 리그에서 가장 많은 트로피를 든 감독으로 이름을 날렸다.

선수 시절 커리어는 일천하지만 훌륭한 지도자로 성공한 케이스로 3부 리그에 있던 로르카 데포르티바의 선수로 뛰다 부상으로 은퇴하자 클럽 회장의 제안으로 지도자 커리어를 시작했는데 철저한 분석 능력을 바탕으로 로르카 데포르티바를 세군다 리가로 승격시켰으며 2005-06 시즌에는 세군다 5위까지 올리며 라리가 승격까지 노렸다. 이후 에메리가 팀을 떠나 알메리아의 지휘봉을 잡자 로트카는 강등되었으며 알메리아는 에메리의 지도 아래 2006-07 시즌 세군다리가 준우승을 이뤄내며 라리가로 승격했으며 2007-08 시즌에는 라리가에서도 8위에 오르며 구단 역사상 최고의 성적을 냈다.

하부리그에서 뛰어난 역량을 보여준 에메리는 로날드 쿠만이 경질된 발렌시아의 러브콜을 받아 박쥐군단의 지휘봉을 잡았으며 2009-10 시즌부터 2011-12 시즌까지 세 시즌 연속으로 라리가 3위에 오르며 신계라 불리는 레알, 바르셀로나 다음가는 성적을 낸다며 인간계 최강이라는 별명으로 불렸으나 2011-12 시즌에는 라리가 3위를 기록했음에도 서로 만족하지 못하며 재계약할 의사를 보이지 않았으며 계약 만료로 팀을 떠났다. 이후 스파르타크 모스크바의 지휘봉을 잡았으나 7개월 만에 경질되었다.

2013년 1월 14일에 경질된 미첼 감독을 대신해 세비야와 계약했으며 비록 리그 우승과는 인연이 없었지만 세비야에 머무는 동안 유로파리그 3연패의 금자탑을 쌓으며 화려하게 부활했다. 이후 파리 생제르맹, 아스날 같은 해외 클럽에서 뛰었지만 언어 문제로 인한 라커룸 장악 문제와 다소 수동적인 전술로 부진한 모습을 보였다. 스페인으로 돌아와 비야레알의 지휘봉을 잡자 다시 뛰어난 역량을 펼치며 19경기 무패 행진으로 비야레알 역사상 최장기간 무패행진의 기록까지 쓰며 승승장구했으며 해당 시즌 유로파리그에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를 꺾고 우승을 차지했으며 2021-22 시즌에는 UEFA 챔피언스리그 8강에서 강력한 우승후보 바이에른 뮌헨을 적절한 맞춤 전술로 잡아내며 4강 진출을 이뤄냈다.

 

프리미어리그 팬들은 2010년대와 20년대 라리가를 두고 마드리드의 두 팀과 바르셀로나만 강한 삼두체제고 나머지는 별 볼일 없다고 평가절하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 주장을 완벽하게 논파하는 사례가 에메리가 이끌던 라리가 중상위권 클럽인 세비야와 비야레알의 업적이다. 세비야에서는 유로파리그 3연패를 이뤄냈고 비야레알에서는 유로파 리그에서 맨체스터 유나티디드를 제압하먀 2021-22 시즌 챔피언스리그에 진출했으며 해당 시즌의 비야레알(우)은 16강에서는 이탈리아의 강자 유벤투스를 격파했고 8강에서는 우승후보 바이에른 뮌헨을 꺾고 4강 진충을 이루며 라리가가 건재함을 보여줬다.



15. 디에고 시메오네

 


출생년도: 1970년 4월 28일

스페인 축구계에서의 커리어

2011-현재 아틀레티코 마드리드

'두줄 수비의 반란을 이끈 연봉 600억의 사나이'

현대 축구에서 수비축구의 대가로 평가받는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의 시메오네는 4-4-2 시스템을 수비적으로 재해석해 라리가 중하위권 클럽들에게 새로운 패러다인을 제시하며 또 다른 바람을 불러왔다.

선수 시절에도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의 라리가 우승을 이끌었던 시메오네는 2011년, 몰락한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에 감독으로 부임해 빠른 속도로 팀을 수습하며 2011-12 시즌 유로파 리그 우승을 이뤄냈으며 2013-14 시즌에는 두줄 수비 바탕의 4-4-2 시스템을 한층 더 업그레이드하며 메시의 바르셀로나와 호날두의 레알 마드리드가 양분하던 라리가 무대에서 양강을 밀어내고 라리가 우승과 UEFA 챔피언스리그 준우승을 차지했으며 그 외에도 유로파리그 2회 우승을 포함해 총 8개의 트로피를 들어냈으며 챔피언스리그 결승에도 2회 진출하는 등 가시적인 성과를 지속적으로 내며 라리가 삼분지계를 이끌었다.

2017-18 시즌 이후로 슬럼프를 겪다가 2020-21 시즌에 자신의 아이덴티티인 4-4-2 시스템을 버리고 나겔스만과 휘터가 발전시킨 독일식 3-5-2 시스템을 부분적으로 채용해 2020-21 시즌 라리가 우승을 이뤄낸 시메오네는 보드진의 무한한 신뢰를 받으며 축구 감독으로서는 역대 최고의 연봉인 4000만 유로를 수령하는 등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의 알렉스 퍼거슨의 길을 밟았으나 2022-23 시즌에 단점들이 강하게 부각되며 좋지 못한 성과를 내자 절대적이었던 팀 내 위치를 강하게 위협받고 있다.

 

시메오네는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에서만 12년간 머물면서 두 번의 라리가 우승을 이뤄냈다. 첫 번째 우승(좌)은 90년대 카펠로식 4-4-2 시스템을 현대 축구에 맞게 적용하며 양강을 꺾고 우승을 이뤄냈으며 다수의 라리가 중하위권 클럽들은 기존의 점유율 축구를 버리고 시메오네식 4-4-2 시스템을 모방했을 정도로 라리가에 큰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시메오네식 4-4-2가 시간이 지나면서 파훼되자 나겔스만과 휘터가 독일 중상위권에서 유행시킨 비대칭 3-5-2 시스템을 도입하며 2020-21 시즌 라리가 우승(우)을 이끈다. 이젠 이 시스템도 파훼되었는데 이를 극복해야 알레띠의 퍼거슨이 될 수 있다.



16. 지네딘 지단

 


출생년도: 1972년 6월 23일

스페인 축구계에서의 커리어

2014-2016 레알 마드리드 카스티야
2016-2018 레알 마드리드
2019-2021 레알 마드리드

'갈락티코스에서 가장 빛나는 별'

선수 시절에도 화려한 커리어를 쌓았던 지단은 다소 클래식한 전술에도 불구하고 그 커리어와 강력한 카리스마를 앞세워 스타 선수들을 훌륭하게 장악했으며 짜인 적절한 맞춤 전술과 훌륭한 임기응변 능력으로 특히 토너먼트에 강한 모습을 보여줬다.

지단은 레알 마드리드를 이끌고 UEFA 챔피언스리그 3연패와 라리가 2회 우승을 포함해 레알 마드리드에서만 총 11개의 크고 작은 트로피를 따냈으며 개인적으로도 2017년에는 피파 올해의 감독을 수상했으며 2019-20 시즌에는 미구엘 무뇨스 트로피를 받으며 라 리가 최우수 감독으로 이름을 올렸으며 2020-21 시즌에는 선수단이 1년 동안 64회의 부상을 겪는 와중에도 라리가 준우승과 UEFA 챔피언스리그 4강 진출을 이뤄내며 속칭 팀빨이라는 비판을 어느 정도 벗어던졌으나 지속적인 스트레스로 인한 번아웃과 보드진과의 견해 차이로 인해 감독직을 내려놓았다.

지네딘 지단은 라리가에서의 지배력에서는 상대적으로 좋지 못한 평가를 받지만 UEFA 챔피언스리그 우승을 많이 이룬 감독은 카를로 안첼로티 한 명뿐이었을 정도로 챔피언스리그에서 강한 모습을 보여줬다.

 

베일은 2014년 당시 세계 역대 최고 이적료를 경신하며 레알 마드리드에 입단했지만 부상이 잦은 선수였기에 이에 대한 해결책이 항상 필요했다. 지단은 이를 여러가지 임기응변으로 넘었는데 2016-17 시즌에는 중앙 공격형 미드필더 자리를 선호하는 이스코를 베일의 자리에 기용하는 이른바 이스코 시프트(좌)로 라리가와 챔피언스리그를 모두 제패했으며 다시 돌아온 지단 2기(우)에서는 3선 미드필더 발베르데를 우측에 기용해 좋은 성과를 냈다.

 

 


스페인 축구계 역사상 최고의 감독 Top 5

 

5위 호세 비야롱아

다뉴브 학파의 선진적인 전술을 받아드려 레알 마드리드와 아틀레티코 마드리드가 전성기를 구가하는 기반을 마련했으며 항상 기대 이하의 성적을 낸 스페인 대표팀을 이끌며 당대 유럽 최강의 팀 소련을 상대로 승리하며 유럽 챔피언의 자리에 오르는 등 스페인 축구계에 기여한 바가 크다. 다만 후술할 감독들에 비해 전성기가 다소 짧았다.

4위 비센테 델 보스케

부드러운 리더십을 바탕으로 레알 마드리드를 3M의 선두로 올렸으며 명성 높은 감독이었음에도 자신의 자존심을 굽히고 전술적으로 자신보다 우수한 감독들의 전술을 적극 수용하며 스페인 대표팀의 성공신화에도 큰 역할을 했고 본인도 2001-02 시즌 UEFA 올해의 감독을 수상함과 동시에 IFFHS 세계 최우수 클럽 감독으로 선정되었고 IFFHS 세계 최우수 국가대표 감독 4회 선정 및 2010 남아공 월드컵 드림팀, 2012 FIFA 올해의 감독 등 여러 개인상을 수상하며 영광을 누렸다. 다만 베식타스에서의 경우와 같이 완성된 팀이 아니먄 철저하게 한계를 드러내는 감독이었기에 4위로 고정시켰다.

3위 미겔 무뇨스

라리가에서 가장 롱런한 감독 중 한 명으로 라리가 최다 우승 및 최다 승리를 거두며 스페인을 지배했으며 유럽 무대에서도 막강한 공격력을 보여주며 두 번이나 유럽 정상에 올랐다. 그의 업적도 대단하지만 후술한 두 명의 감독에 비해서는 자신의 철학이 옅다는 단점이 있으며 1970년대 라리가는 세계 최고라는 위상과는 많이 동떨어진 리그였다는 부분에서 밀려났다.

2위 펩 과르디올라

4년 동안 라리가는 물론 축구 역사에서도 다시 세우기 어려운 역사를 썼으며 그 과정에서 수비축구에 기운 헤게모니를 공격축구로 전환하는데 가장 큰 역할을 하며 2010년대 축구계를 이끈 선구자였으며 특히 그의 전술을 받아들인 델 보스케가 월드컵과 유로를 석권하는 성과를 이뤄낸 점에서 클럽을 넘어 대표팀에도 자신의 영향력을 끼쳤다. 다만 그의 철학은 그보다 상위에 있는 감독의 영향력에서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했기에 2위로 올렸다.

1위 요한 크루이프

종합적으로는 펩이 크루이프보다 뛰어난 감독이라고 생각하지만 FC 바르셀로나의 감독으로서는 무에서 유를 창조한 요한 크루이프의 업적을 높게 산다. 펩의 최전성기가 바르셀로나 시절이 분명하다. 하지만 그 시절에는 현재와 다르게 철저하게 크루이프의 영향력 아래에 있었다.

728x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