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구장에서 일어난 신뢰의 종언 - (신뢰를 어긴 배신자들로 뽑은 베스트 같은 워스트 11)

동네 축덕 아저씨의 축구 썰/동축아썰 칼럼

축구장에서 일어난 신뢰의 종언 - (신뢰를 어긴 배신자들로 뽑은 베스트 같은 워스트 11)

토르난테 2020. 4. 20. 17: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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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가장 상처 받는 순간은 언제일까? 

여러 순간이 있지만 가장 뼈아프다고 느낄만한 순간은 신뢰하는 사람에게 배신당했을 때이다.

서양 로마 시대의 인물이자 세계 4대 성인 예수의 제자 유다는 원래 이름 자체는 '하느님을 찬양하다'라는 좋은 뜻을 지니고 있지만 행적을 보면 후일 예수를 로마 제국에 팔아넘김으로써 그를 죽음으로 몰아갔다.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린다는 베스트셀러인 성경에 이런 유다의 행적들이 기록되어 있으며 배신자의 대명사가 되었다.

그리고 동양 후한 시대의 인물인 여포는 자신이 주군으로 모시던 정원과 동탁을 손쉽게 죽였으며 자신이 이각과 곽사에게 패해서 떠돌아다닐때 은혜를 베푼 원소와 유비를 배신하고 원술과의 동맹도 일방적으로 파기하였으며 휘하 장수들의 처와 간통하는 등 부하들의 신뢰마저 배신하며 결국 부하들의 배신으로 조조와 유비에게 처형되는 신세가 되기도 했다. 이는 동양 최고의 고전인 삼국지연의에서도 상세하게 묘사됐으며 동양에서는 배신자를 두고 여포라는 대명사를 쓰기도 했다. 

축구계에도 팀의 주축 선수로 활약해 향후 팀의 레전드가 될 인재로 평가받았지만 감독이 바뀌므로 팀 전술에 맞지 않아 벤치를 지키거나 계약 과정에서 맞지 않아 다른 팀으로 이적하는 과정에서 상도덕을 심하게 어기거나 라이벌팀으로 이적하는 경우에는 팬들에게 큰 상처를 주고 팬들의 원망을 받는다.

이런 사람들이 여러 시대에 다양한 포지션에서 빈번한데 오늘은 이런 사람들을 소개해보고자 한다.

신뢰를 어긴 배신자들로 뽑은 워스트 같은 베스트, 베스트 같은 워스트 11

골키퍼

리카르도 사모라 (에스파뇰 → 바르셀로나 → 에스파뇰 → 레알 마드리드)

"스페인의 영웅이자 카탈루냐의 배신자"

1916년 만 15세의 어린 나이로 에스파뇰에 데뷔한 사모라는 4년간 카탈루냐 지역리그에서 최고의 모습을 보여줬다.

그러나 구단 임원과의 마찰로 이적한 팀은 지역 라이벌 바르셀로나였으며 코파 델 레이를 우승시켰으나 다시 에스파뇰로 이적했다.

그리고 1929년 라 리가가 첫 출범하고 그 뒤 1930년에 레알 마드리드로 이적했다.

1936년 코파 델 레이에서는 라이벌이자 사모라의 전 소속팀인 FC 바르셀로나를 만났고 사모라의 활약으로 2:1 승리를 거두었다. 특히 이 경기에서 그는 호셉 에스콜라의 결정적인 슈팅을 선방하는데 이 장면은 꾸레들을 화나게 했으나 마드리시모들에게는 최고의 기쁨이었다.

센터 백

솔 캠벨 (토트넘 핫스퍼 → 아스널)

"스퍼스의 유다"

1989년 토트넘 핫스퍼 유스팀에 입단한 캠벨은 1992년에 토트넘 소속으로 1군에 데뷔한다.

그는 베테랑 게리 매부트와 함께 스퍼스의 견고한 수비라인을 구축했으며 팬들의 사랑을 받으며 1998년에는 매부트의 은퇴로 주장 완장을 물려받는다.

그러나 2001년 계약 만료가 눈앞에 다가온 캠벨은 토트넘 핫스퍼와 계약 문제로 재계약에 실패했으며 많은 이탈리아 팀들이 그를 노렸다.

캠벨은 "내가 토트넘의 영원한 주장이다.",  "어딜 가든 절대 아스널로는 안간다." 라고 언론 플레이를 했으나 정작 그의 행선지는 아스널이었다. 그것도 자유계약으로 말이다.

팀 유스출신 주장이자 에이스가 지역 라이벌로 가자 스퍼스는 분노했으며 캠벨은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2003-04 시즌 무패 우승에 공헌하는 등 토니 아담스의 후계자로 변하며 아스널의 성공시대를 열었다.

센터 백

마츠 훔멜스 (바이에른 뮌헨 → 보루시아 도르트문트 → 바이에른 뮌헨 → 보루시아 도르트문트)

"독일산 왕복 비행기"

1995년 7살의 나이에 바이에른 뮌헨 유스팀에 입단한 훔멜스는 2006년 1군 데뷔를 하지만 루시우, 데미첼리스, 반 부이텐 같은 기라성 같은 선배들에 밀리며 경기 출장을 하지 못했으며 동년배 최고의 유망주 브레누의 영입까지 더해지며 바이에른 뮌헨에서 자리를 잃었다.

그래서 2008-09 시즌 도르트문트로 임대 이후 2009년에 보루시아 도르트문트로 완전이적했으며 위르겐 클롭 체제에서 수비라인 지휘와 빌드업의 시작점 역할을 맡으며 리가 우승과 챔피언스리그 준우승 등의 성적을 내며 보루시아 도르트문트의 전성기를 이끌었다.

2015-16 시즌에 이적설이 돌자 ''저는 단지 상대적으로 타이틀을 따낼 가능성이 높다는 이유로 굳이 세계 최강의 팀에서 뛸 필요는 없어요. 저는 다른 클럽에서 6번의 챔피언스 리그 우승을 하는 것보다 1번을 BVB에서 이루는 것이 더 좋습니다. " 라며 잔류 의사를 내비쳤지만 시즌 막바지에 갑자기 이적 요청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훔멜스는 팬들의 야유를 받았으며 여기에 대고 "나를 야유한 팬들은 진짜 팬들이 아니다." 라고 언론 플레이를 하며 바이에른 뮌헨으로 이적했으며 세 시즌 동안 분데스리가 우승 3회와 포칼 1회 우승을 이뤄냈다.

그러나 그의 배신 행각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는데 코바치 체제의 바이에른 뮌헨이 젊은 센터백인 뤼카 에르난데스를 영입하자 이적을 결심하고 보루센 팬들한테 했던 행동들은 다 잊은 건지 다시 보루시아 도르트문트로 향하는 패기를 보여줬다.

라이트 백

비르지니오 로제타 (프로 베르첼리 → 유벤투스)

"세계 최초의 이적 파동의 주인공"

로제타는 후방에 수비수인 풀 백을 단 두 명만 두던 시절인 1920년대 최고의 라이트 풀백이었다.

당시 이탈리아의 강호 프로 베르첼리에서 활약한 로제타는 아마추어 팀인 프로 베르첼리에서의 대우를 견디지 못하고 1923년에 그를 노리는 유벤투스로 이적했다.

그러나 당시 이탈리아에는 특별한 규정이 있었는데 그 규정의 내용은 "팀을 옮기려면 새로운 팀의 연고지에서 거주해야 된다는 것." 이었다. 로제타의 동료 게이는 밀라노에 거주하겠다는 약속을 받고 북부 리그 사무국의 허가를 받아 밀란으로 이적했으나 유벤투스 이적을 한 로세타는 게이의 사례와는 다르다고 판결이 연기되었다.

그 와중에도 로세타는 유벤투스 소속으로 리그 4경기에 출전해 3승 1무의 성적을 거두었고 상대팀을은 이 문제에 대해 북부 리그 측에 항소하기 시작한다.

치열한 법정 공방 끝에 1924년 2월 17일 로세타는 게이와 달리 북부 리그와의 원만한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이에 프로 베르펠리 선수가 맞으며 잔여 시즌을 뛸 수 없으며 그가 출전한 3승 1무의 전적은 모두 유벤투스의 패배로 처리되었고 결국 유벤투스는 1924년 6월 28일에 5만 리라의 이적료를 지급하고 다시 로세타를 데려왔다.

이후 유벤투스는 카실레의 에이스 풀백인 칼리가리스를 데려왔으며 남미에서 오리운디들을 끌어모아 1930년대 상반기에 리그 5연패를 달성하게 되며 로세타는 칼리가리스와 함께 수비 조합을 구성하며 당대 최고의 풀백 조합으로 맹활약했다.

레프트 백

애슐리 콜 (아스널 → 첼시)

"자본주의가 낳은 괴물"

아스널에서 데뷔하며 팀의 최전성기와 무패우승을 이끈 주역인 애슐리 콜은 아스날 수비의 현재이자 미래였으며 당대 프리미어리그 최강의 레프트 백이었다.

주급 인상 문제로 불화를 겪고 결국 첼시로 이적했다. 이 과정에서 첼시와 불법 접촉 논란까지 일었으며 실제로 첼시가 불법 접촉을 하기에 이른다. 게다가 콜은 아스날과 재계약한 지 얼마 안 된 상황이었다.

그렇게 첼시로 이적한 콜은 자서전에 아스널을 비난했으며 아스날 팬들은 그를 돈에 미쳤다며 캐슐리 콜(Cashley Cole)이라고 조롱하게 된다.

하지만 콜은 첼시에서 호날두 잡는 저승사자로 맹활약했으며 한 번의 리그 우승과 네 번의 FA컵 우승, 그리그 한 번의 챔피언스리그 우승을 이루게 된다.

수비형 미드필더

주젭 사미티에르 (바르셀로나 → 레알 마드리드, 감독 및 구단 경영진으로는 아틀레티코 마드리드 → 바르셀로나 → 레알 마드리드 → 바르셀로나)

"원조 왕복비행기"

바르셀로나와 카탈루냐 리그를 넘어 스페인 최고의 하프백으로 유명했으며 바르셀로나의 프랜차이즈 스타였다.

1919년부터 13년 동안 12회의 카탈루냐 지역 리그 우승과 5번의 코파 델 레이 우승, 그리고 1928-29 시즌 초대 라 리가 우승을 이끌었으며 그 과정에서 무려 333골이나 득점했다.

그러나 급여 문제로 1933년 1월에 레알 마드리드로 이적했으며 엘 클라시코에도 득점하며 바르샤 팬들에게 배신자가 되었다.

그의 배신 행각은 은퇴한 뒤에도 이루어졌는데 아틀레티코 마드리드 감독을 맡았다가 다시 바르셀로나의 감독을 맡았다가 은퇴하며 이사가 되어 구단을 경영했고 라슬로 쿠발라를 영입하여 라 리가의 패권을 쥐기도 했었다.

그러나 1959년 다시 레알 마드리드의 이사로 이직했으며 1962년에는 바르셀로나에서 맹활약한 브라질 출신 스트라이커 에바리스투를 레알 마드리드로 이적시키는 일을 주도하자 또다시 바르셀로나 팬들의 분노를 샀으나 이후에도 바르셀로나 이사로 복직해서 레알 마드리드의 팬들에게도 미움을 받았다.

이러한 이력으로 스페인 사람들은 그를 두고 바르셀로나와 마드리드를 오가는 왕복 비행기라며 조롱했다.

중앙 미드필더

베른트 슈스터 (바르셀로나 → 레알 마드리드 → 아틀레티코 마드리드)

"마우로 이카르디의 롤모델"

쾰른과 유로 80 당시 독일 국가대표팀에서의 활약을 바탕으로 바르셀로나로 이적하며 암흑기에도 발롱도르 포디움에 드는 등 맹활약을 하며 팀의 에이스로 활약한다.

그러나 1988년에 자신의 아내이자 에이전트인 가비와 짜고 "바르셀로나 시절 부상을 입었는데 클럽에서 제대로 조치 시켜주지 않았다"라고 하며 언론 플레이를 하며 레알 마드리드로 이적하며 꾸레들의 원한을 산다.

레알 마드리드에서도 준수한 모습을 보여줬으나 구단과 계약 문제로 충돌하자 아틀레티코 마드리드로 이적하며 마드리시모들의 원한도 사고 말았다.

이러한 만행을 디 만샤프에서도 했는데 브라이트너가 대표팀에 복귀하자 주전 경쟁에서 패한 슈스터가 브라질과의 친선전에서 페널트 킥을 실축하자 "유능한 나 대신 저런 꼰대를 쓰니 못이기지." 라며 데어발 감독을 욕했으며 그는 국가대표팀에 뽑히지 못했다.

1984년에 부임한 프란츠 베켄바우어 감독은 슈스터를 디 만샤프에 복귀시키려고 했으나 그때도 가비와 짜고 소집의 대가로 거액의 돈을 요구하자 베켄바우어도 슈스터란 카드를 포기하고 마테우스와 마가트를 축으로 삼는 플랜을 구성했다.

마누라 가비에 대해 디 만샤프 동료들과 팀 동료들의 원망도 많이 받았지만 항상 아내를 두둔하며 문제를 일으키는 것을 보면 마우로 이카르디의 1980년대 버전이란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공격형 미드필더

안드레아스 묄러 (보루시아 도르트문트 → 샬케 04)

"밀란이나 마드리드나, 중요한 건 이탈리아라는 것이다."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에서 기대하던 유망주였으나 도르트문트로 이적해 활약했으나 독일 구단들이 통일 이후 경제적으로 어려워지자 이탈리아의 유벤투스로 이적해서 활약했다.

이후 보루시아 도르트문트로 재이적해 히츠펠트 감독 체제의 플레이메이커로 활약하며 잠머, 콜러, 사퓌자와 함께 리그를 우승하고 그 다음해에 챔피언스리그에서 지단과 델 피에로를 앞세운 친정팀 유벤투스를 꺾으며 팀의 빅이어를 선물하기도 했다.

그러나 2000년, 묄러는 이적설에 휘말리는데 인터뷰에서 "밀란이나 마드리드나, 중요한 건 이탈리아라는 것이다." 라며 세리에로 이적할 것처럼 말하고는 더비 라이벌인 샬케로, 그것도 자유계약으로 이적해버린다.

샬케에서도 에이스로 활약한 묄러의 활약에 레비어 더비는 더욱 과열되었으며 로열 블루스의 서포터들은 레만 이적에 대한 복수로 인한 통쾌함을 느꼈고 보루센의 서포터들은 자신들보다 부진하던 라이벌에 에이스가 넘어간 배신감과 모욕감을 철저하게 느꼈다.

라이트 윙

루이스 피구 (바르셀로나 → 레알 마드리드)

"팬덤 명칭 변경까지 생각했어"

스포르팅 리스본과 청소년 월드컵에서 맹활약한 피구는 1995년 더 성장한 기량으로 바르셀로나에 입단한다.

바르샤에서 다섯 시즌을 활약하며 히바우두, 호나우두, 클루이베르트, 데 부어 등과 함께 리그 2회 우승과 컵 위너스 컵 우승을 이끈 에이스로 성장했으며 바르샤 팬들은 팬클럽 이름을 꾸레에서 피구로 바꾸자는 농담을 할 정도로 신뢰받았다.

그러나 레알 마드리드에서 회장 플로렌티노 페레스가 부임하고 상황이 바뀌었는데 그는 값싼 주급으로 피구를 부리려고 계획한 바르셀로나 구단의 사정을 이용해 바르셀로나에게 피구의 바이아웃인 6000만 유로를 지불했다.

피구는 이에 레알 마드리드로 향했으며 바르셀로나의 팬들에 대한 신뢰의 종언은 증오로 변했으며 엘 클라시코는 더욱 뜨겁게 달궈졌으며 피구에게는 돼지머리가 날아오기도 하는 등 험난한 엘 클라시코를 치렀다.

게다가 피구는 이적한 2000년에 지단을 이기고 발롱도르를 수상했는데 이는 꾸레들의 분노라는 불에 기름을 끼얹은 격이 되었으며 이로 인해 라 리가의 다른 팀들은 에이스의 바이아웃을 비정상적으로 높게 책정하는 데에도 한몫 단단히 했다.

앙투안 그리즈만 (아틀레티코 마드리드 → 바르셀로나)

"구단 역대 최고의 선수에서 구단 역대 최악의 선수이자 관심종자로 전락하다."

소시에다드에서 처음 맹활약했으며 이후 리그 우승에 성공하며 상승세를 타던 시메오네 감독의 아틀레티코 마드리드로 이적해 구단 역사상 최고의 선수라 불릴 만한 활약을 펼친다.

시메오네의 부족한 공격 전술을 모조리 해결해주는 플레이메이커이자 주포로서 팀의 공격을 지휘하며 레알 마드리드나 바르셀로나와의 경쟁을 이어가게 했다.

특히 2017-18 시즌이 끝나고는 바르샤로 이적하는 상황과 아틀레티코로 잔류하는 상황을 모두 다큐멘터리 영상으로 찍는다고 밝혔으나 결국 구단과 잔류를 선언하는 영상을 업로드했다.

그러나 "팀이 어려울 때 떠나는 것은 비겁한 짓이다."라는 말과는 달리 이미 2018-19 시즌 챔피언스리그 16강 유벤투스 전을 앞두고 바르셀로나에게 역제의를 하며 불법적인 접촉을 했으며 2019-20 시즌에는 결국 바이아웃으로 떠나면서도 다큐멘터리를 찍으려 하다가 바르셀로나와 아틀레티코 모두의 거부로 그만두는 추태도 보였다.

이적 과정에서 보인 그의 위선과 관심종자적인 행태로 인해 그는 누구에게도 환영받지 못했으며 그 대가인지 현재 부진한 시즌을 보내는 중이다.

로빈 반 페르시 (아스널 →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내 안의 작은 아이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라고 속삭였다."

페예노르트에서 2004년에 영입했으며 앙리가 떠나고 베르캄프가 은퇴한 이후 아데바요르와 함께 강력한 투 톱을 구성하며 좋은 활약을 보였으나 부상이 잦아 시즌을 소화하지 못해 半페르시라고 불렸다. 그럼에도 2011-12 시즌 세스크 파브레가스가 떠나자 주장을 맡았다.

그러나 2011-12 시즌 팀이 시즌 초에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게 2-8로 패하면서 어려운 시즌을 보낼 것이라 예상했던 아스널은 부상을 당하지 않는 반 페르시 한 명이 리그 30골을 넣는 맹활약으로 인해 예상보다 훨씬 윗순위인 리그 3위를 이뤄냈다.

그러나 2012-13 시즌 유벤투스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영입 제안을 받았으나 결국 "내 안의 작은 아이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라고 속삭였다."라며 2400만 파운드의 이적료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로 이적했다.

그리고 2012-13 시즌에도 퍼거슨의 마지막 시즌을 루니와 함께 하며 팀의 리그 우승과 개인의 득점왕을 모두 차지하며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마지막 전성기를 이끌어 레드 데빌즈에게는 사랑을 받았고 구너에게는 증오와 배신의 아이콘이 되었다.


그 외 후보들

골키퍼

옌스 레만 (샬케 → AC 밀란 → 보루시아 도르트문트)

샬케에서 엄청난 기량을 보이며 팀의 UEFA컵 우승을 하드캐리한 골키퍼였으나 밀란으로 이적해서는 부진해 독일로 리턴했으나 하필 이적한 팀이 샬케의 라이벌 도르트문트여서 레비어 더비를 불타게 했다.

수비수

풀비오 콜로바티 (AC 밀란 → 인터 밀란)

토토네로 스캔들로 인해 강등될 때 주장으로서 팀에 남아 바레시, 에바니와 함께 팀의 승격을 이끌어냈으나 부진한 성적으로 재 강등당하고 그 와중에 팬에게 돌팔매질을 당하자 시즌 종료 후 1982 월드컵에서 맹활약 이후 인터 밀란으로 이적해버린다.

롤프 뤼스만 (FC 샬케 → 보루시아 도르트문트)

샬케 역대 최고의 스토퍼로 꼽히는 선수로 포칼 우승과 두 번의 리그 준우승을 이끌었으며 디 만샤프에서도 1978 월드컵에서 슈바르첸벡과의 경쟁을 이기고 주전 센터백으로 뛰었을 정도로 실력도 확실했으나 1980년 도르트문트와 계약하며 로열 블루스에게 큰 상처를 주기도 했다.

막시 페레이라 (벤피카 → 포르투)

2007-08 시즌 벤피카에 활약하며 8 시즌 동안 팀의 핵심 라이트 백으로 활약하며 총 333경기에 나와 21골을 터트리며 팀의 주장직까지 역임한 선수가 재계약을 포기하고 자유계약으로 라이벌 포르투로 입단해 활약하며 벤피카 팬들의 원망을 한 몸에 받았다.

윌리엄 갈라스 (첼시 → 아스널 → 토트넘 핫스퍼)

첼시의 역대 최소 실점의 수비 멤버로 맹활약했으나 등번호 13번을 발락에게 양보해야 하는 상황이 오자 팀에서 자책골을 넣겠다고 위협한 후 콜의 딜에 포함되어 아스날에 갔으나 아스날에서도 토트넘으로 재이적하며 구너와 블루스 모두의 원망을 받았다.

미드필더

폴 인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 인터 밀란 → 리버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중원의 핵이었고 총독이라 불렸지만 퍼거슨은 그를 배제하지 않는다면 그를 중심으로 한 파벌이 형성되어 두고두고 화를 불러올 것이라고 판단했으며 그를 홀대하고 스콜스를 주전 멤버로 기용했다. 그러던 1995년 어느 날 감독실에 들이닥쳐서 퍼거슨을 향해 권총을 들이대고 협박했으나 퍼거슨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그를 인테르로 이적시켰다. 2년 후 인스는 아들의 교육문제로 잉글랜드로 돌아가길 원했고 인스는 리버풀로 이적하며 레드 데빌즈의 지탄을 받았다.

루이스 엔리케 (레알 마드리드 → FC 바르셀로나)

히혼의 UEFA컵 진출을 이끈 이 어린 전천후 선수를 레알 마드리드에서 영입했다. 본 포지션이 아닌 수비형 미드필더에서 뛸 땐 부족했지만 호르헤 발다노 체제에서는 라이트 윙을 소화하며 핵심 선수로 대접받았음에도 재계약에 실패해 자유 계약으로 바르셀로나로 가서 마드리시모에게 큰 지탄을 받는 선수가 되었다.

페데리코 베르나데르스키 (피오렌티나 → 유벤투스)

키에사와 함께 피오렌티나의 미래로 평가받은 베르나데르스키는 자신의 포지션에 불만을 드러내긴 했으나 "나는 피오렌티나를 사랑하고 다음 시즌 플랜에서 내가 중심이 돼서 기쁘다."라고 잔류 의사를 내비친 다음에 피오렌티나와는 모종의 사건들로 사이가 매우 나쁜 유벤투스로 이적해버린다.

마리오 괴체 (보루시아 도르트문트 → 바이에른 뮌헨 → 보루시아 도르트문트)

괴체는 클롭의 보루시아 도르트문트에서 핵심 선수의 역할을 수행했으나 바이에른 뮌헨이 펩에게 네이마르 영입이 불가능한 대신 영입해준 선수로 바이아웃 조항으로 영입한 선수다. 문제는 발표 시기가 하필 하필이면 이적설을 터뜨린 시기가 바이에른 뮌헨의 회장인 울리 회네스가 돈을 횡령했다는 소리가 나온 다음에 나왔기 때문에 오비이락이라고 그럴 의도가 없었음에도 오해받기 딱 좋은 시기에 이적을 발표해 바이에른 뮌헨과 회네스는 다른 분데스리가 구단의 구단주와 단장에게 비난을 당했다. 그리고 입단한 괴체도 주전 경쟁 실패와 잦은 부상으로 기량이 떨어져 보루시아 도르트문트로 재복귀했다.

미카엘 라우드럽 (FC 바르셀로나 → 레알 마드리드)

유벤투스에서 크루이프의 바르셀로나로 이적해 오랜 기간 에이스로 활약했으나 크루이프는 호마리우를 영입하고는 외국인 용병 쿼터 3명에서 그를 배제하고 대신 스페인의 중앙 미드필더인 아모르를 중용하며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에도 출전하지 못하자 미카엘 라우드롭은 계약을 연장하지 않고 레알 마드리드로 입단해서 활약해 꾸레들에게 큰 비난을 받았다.

공격수

마이클 오웬 (리버풀 → 레알 마드리드 → 뉴캐슬 유나이티드 →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리버풀 소속으로 2000-01 시즌 3개 컵 대회를 우승하며 2001년 발롱도르까지 탔던 선수가 먼 훗날에는 라이벌 팀으로 이적하며 "이길 수 없으면 합류하라"는 망언을 남겼다.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우고 산체스 (아틀레티코 마드리드 → 레알 마드리드)

1980년대 상반기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의 에이스 공격수였으나 레알 마드리드로 이적하지 않기로 한 약속들을 어기고 맥시코에서 몰래 계약을 맺어 레알 마드리드로 이적해버린 케이스다. 그리고 그는 알레띠의 팬들을 비웃듯 레알 마드리드의 역사에 남을 전설적인 공격수가 된다.

번외

알렉상드르 빌라플란 (프랑스 → 나치 독일)

프랑스 국가대표팀 주장이자 자국 최고의 하프 백으로 이름을 날렸다. 하지만 은퇴 이후 프랑스가 나치 독일에게 점령당하자 앙리 라퐁트, 피에르 보니와 함께 BNA라는 조직을 만들어 강도, 방화, 살인, 강간을 저지르며 나치에게 부역했고 유대인들을 공격하다가 1944년에 사로잡혀 총살형에 처해졌다.

주제가 축구 클럽 내의 배신이라서 넣지는 않았지만 이 자는 조국을 배신한 민족 반역자였다. 그것도 적극적으로.

마우로 이카르디 (인터 밀란 → ?)

아직 이적을 감행하진 않아서 넣진 않았다. 하지만 그와 완다가 인테르에 끼친 해악은 구단의 위신을 추락시켰으며 파리 생제르망 임대 때에도 투헬과의 갈등으로 결국 임대 조기 해지라는 강수를 뒀다. 

어디든 이적하면 최소한 후보에는 들 것이고 만약 유벤투스로 이적하면 반 페르시를 후보로 밀어내고 당당히 이 배신자 팀의 주전 자리를 차지할 선수다.

신뢰는 사람과 사람간에 정말 중요한 약속이다.

이 신뢰를 어겨 구단의 레전드로 대접받지 못하고 한때 응원을 해줬던 팬들에게 죄를 짓는 행동은 배신의 대가로 우승컵을 얻어도 마음 한 구석에 아쉬움을 남기고  심지어 배신을 한 뒤 결과까지 좋지 못하면 땅을 치고 후회할 일이다.

우승과 개인 수상은 축구 선수를 하는 입장에서는 최고의 꿈이다. 그리고 돈은 프로 선수에게 매우 중요한 요소이며 그의 자존심이다. 그렇기에 전력이 강력한 팀이나 부유한 팀으로 떠나는 걸 막을 수 없는 상황이 올 수도 있다.

그러나 문제는 팀을 떠나는 과정이다. 트로피를 위해 다른 팀으로 이적하더라도 최대한 원만하고 신사적인 이적을 했으면 하는 바램이다. 유종의 미는 거두어야 하지 않겠는가?

박수용의 토르난테 - 동네 축덕 아저씨의 축구 썰 관리자

박 수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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