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축구 국가대표팀 역대 올스타

국대 올스타 짜보기/서유럽

이탈리아 축구 국가대표팀 역대 올스타

토르난테 2025. 5. 25. 1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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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사항

 

2025년 5월 24일 기준입니다.

 

기존에는 대표팀 활약에 가산점을 더 부여했지만 이 부분을 제외하고 다시 선정했습니다. 다만 이탈리아 대표팀 기록이 다른 나라 대표팀 기록보다 현저하게 적은 경우에는 제외했습니다.

 

그러나 감독은 이탈리아 대표팀 감독으로서의 활약을 기준으로 뒀습니다. 고로 쟁쟁한 감독들을 제치고 비토리오 포초가 선정되었습니다.

 

최소한의 밸런스는 챙길 예정이며 더블 리베로를 내는 현상이나 스트라이커로만 세 명이 나서는 현상은 최대한 피할 예정입니다.

 

선수 사진은 에펨네이션에서 활동하고 계시는 법정스님의 소유님의 건조폼을 주로 활용했습니다.

 


1. 이탈리아 축구 국가대표팀

 

별칭: 아주리 군단

월드컵: 출전 18회 / 우승 4회

UEFA 유로: 출전 9회 / 우승 2회

컨페더레이션스컵: 출전 2회 / 3위 1회

하계 올림픽: 출전 15회 / 금메달 1회

최다 출전 선수: 지안루이지 부폰, 176경기

최다 득점 선수: 루이지 리바, 35골

 


2. 베스트 일레븐

 

골키퍼

 

 

이름: 지안루이지 부폰
생년월일: 1978년 1월 28일

포지션: 골키퍼
A매치 기록: 176경기 146실점 / 77클린시트
신체조건: 키 192cm / 몸무게 92kg
주 소속팀: 유벤투스 FC

 

슈퍼맨이라 불렸던 2000년대 최고의 골키퍼이자 이탈리아 축구계의 롱런의 상징으로 뛰어난 수비라인 지휘능력과 압도적인 선방 능력, 기복 없는 꾸준함으로 항상 팀에게 안정감을 제공했다.

파르마에서 1998-99 시즌에 UEFA컵과 코파 이탈리아 더블 우승을 이뤄낸 부폰은 2001-02 시즌, 당시 골키퍼 역대 최고 이적료인 5300만 유로에 유벤투스로 이적한 부폰은 그 이적료가 아깝지 않게 20년간 활약하며 구단 통산 출전 2위에 랭크되었을 정도로 롱런하며 파르마에 이어 유벤투스에서도 2011-12 시즌 무패 우승을 포함해 세리에 A 10회 우승 및 코파 이탈리아 4회 우승과 수페르코파 이탈리아나 6회 우승을 이뤄냈으며 유럽 무대에서도 UEFA 챔피언스리그 3회 준우승을 이뤄냈다.

이탈리아 대표팀에서도 기념비적인 활약상을 보여주며 이탈리아 국적 A매치 통산 최다 출전자에 랭크된 부폰은 1996 애틀랜타 올림픽에 참가한 이래 성인 대표팀인 1998 프랑스 월드컵부터 UEFA 유로 2016까지, 부상으로 낙마한 유로 2000을 제외하고는 모두 엔트리에 포함되었을 정도로 압도적인 롱런을 선보였는데 특히 006 독일 월드컵에서는 필드골을 단 한골도 실점하지 않았던 엄청난 퍼포먼스로 아주리의 카테나치오를 완성시키며 우승을 이뤄내 야신상까지 차지했고 UEFA 유로 2012에서도 이탈리아 대표팀을 이끌고 결승에 진출하는 공을 새웠다.

부폰 개인도 파르마와 유벤투스, 그리고 이탈리아 대표팀에서 수많은 영광을 누렸는데 세리에 A 올해의 골키퍼 12회 수상했고 FFHS 선정 세계 최고의 골키퍼에도 5회 선정 및 ESM 올해의 팀 2회 선정, 그리고 2002-03 시즌에는 UEFA 클럽 올해의 골키퍼와 올해의 선수를 동시에 수상했다. 그리고 2014-15 시즌과 2016-17 시즌에도 UCL 시즌의 스쿼드에 선정되었음은 물론 발롱도르 노미네이트에도 9회 선정되어 2006년에는 월드컵 우승에 큰 공을 세워 발롱도르 2위에 올랐고 불혹에 가까운 나이인 2017년에는 발롱도르 4위에 랭크되었다.

 

 

리베로

 

 

이름: 프랑코 바레시
생년월일: 1960년 5월 8일

포지션: 리베로, 센터백
A매치 기록: 81경기 1골
신체조건: 키 176cm / 몸무게 70kg
주 소속팀: AC 밀란

 

AC 밀란과 아주리의 위대한 캡틴이자 축구 역사상 최고의 중앙 수비수 중 한 명으로 뛰어난 수비라인 통솔 능력과 빠른 스피드, 정확한 롱패스, 몸을 사리지 않는 태클을 모두 겸비한 완벽한 수비수이자 로쏘네리의 심장이었다.

AC 밀란의 원 클럽맨이자 통산 출전 2위에 랭크된 프랑코 바레시는 암흑기 시절 세리에 B 우승을 두 번 이뤄내며 팀을 승격시키며 암흑기의 기둥으로 활약했고 이후 베를루스코니에게 인수된 이후 사키의 밀란 제너레이션 기간에는 무패 우승을 포함해 세리에 A 6회 우승과 UEFA 챔피언스리그 3회 우승을 이뤄냈다. 괴로우나 즐거우나 AC 밀란에서 우수한 활약을 펼친 바레시는 구단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음은 물론 그의 등번호 6번은 밀란의 영구결번으로 남았다.

어린 시절부터 두각을 나타낸 바레시는 이탈리아 대표팀에서는 가에타노 시레아라는 큰 벽에 의해 오랜 기간 벤치를 지켰고 주전 멤버로 월드컵 우승을 이뤄내지 못했지만 그가 은퇴하자 바로 주전으로 도약하며 1990 이탈리아 월드컵에서는 조국의 3위 및 월드컵 최장시간 무실점 행진을 이끌며 복수의 매체에서 대회 올스타팀에 선정되었고 1994 미국 월드컵에서도 결승전에서 말디니와 함께 호마리우, 베베투 라인을 완벽하게 봉쇄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등 대표팀에서도 시레아 못지않은 퍼포먼스를 충분히 보여주며 은퇴한 뒤에는 이탈리아 축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역대 최고의 수비수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 바레시는 수많은 개인상을 수상했는데 수비수임에도 1989-90 시즌 코파 이탈리아 득점왕을 차지했으며 옹즈 몽디알이 뽑은 유럽 베스트 일레븐에 3년 연속 선정되었고 발롱도르 노미네이트에 일곱 번 선정되어 1989년에는 개인 통산 최고 순위인 2위를 차지하며 포디움에 들었다. 은퇴한 뒤에는 1999년 AC 밀란 세기의 선수와 2000년 세리에 A 세기에 선수에 선정되었다.

 

 

센터백

 

 

이름: 파올로 말디니
생년월일: 1968년 6월 26일

포지션: 레프트백, 센터백
A매치 기록: 126경기 7골
신체조건: 키 186cm / 몸무게 85kg
주 소속팀: AC 밀란

 

AC 밀란과 아주리의 위대한 캡틴이자 축구 역사상 최고의 레프트백 중 한 명으로 빠른 스피드와 세밀한 볼 컨트롤, 우수한 피지컬 능력과 교묘한 대인 수비를 모두 겸비한 완벽한 풀백이자 센터백이었다.

선수생활을 오직 AC 밀란에서만 보낸 원 클럽맨 말디니는 구단에서 두 차례의 황금기를 이끌며 세리에 A 7회 우승과 챔피언스리그 5회 우승을 포함해 밀란에서만 스물다섯 개의 우승컵을 들었는데 특히 1993-94 시즌 챔피언스리그 결승에서 센터백으로 출전해 호마리우와 스토이치코프를 가볍게 무력화시킨 그의 수비력은 관중들을 경악하게하며 1993-94 시즌 UEFA 챔피언스리그 결승전 맨 오브 더 매치에 선정되었고 2002-03 시즌 UEFA 챔피언스리그에서도 유벤투스의 알레제게 라인을 상대로 철벽수비를 선보이며 결승전 맨 오브 더 매치에 재차 선정되었다.

이탈리아 대표팀에서도 큰 족적을 남긴 말디니는 UEFA 유로 1988부터 2002 한일 월드컵까지 일곱 번의 메이저대회에 참가해 월드컵에서 두 번, 유로에서 세 번 베스트 일레븐에 드는 우수한 활약을 펼쳤고 바레시, 베르고미와 함께 1990 이탈리아 월드컵에서는 최장시간 무실점 기록을 세웠으며 1994년 미국 월드컵에서도 레프트백과 센터백을 오가며 혼신의 수비를 했으며 결승전에서도 바레시와 짝을 이뤄 호마리우와 베베투를 괴롭히며 승부차기 끝에 팀이 패했음에도 결승전 맨 오브 더 매치에 오르는 활약을 보여줬다.

축구사 최고의 레프트백답게 개인 커리어도 훌륭한 말디니는 발롱도르 10위 안에 여섯 번 들었고 1994년과 2003년에는 3위에 오르며 포디움에 들었는데 발롱도르 포디움에 두 번 든 유일한 측면 수비수이며 옹즈 몽디알이 뽑은 유럽 베스트 일레븐에 8회 선정, ESM 올해의 팀에 4회 선정되었다. 그리고 1994년에는 월드 사커지가 뽑은 올해의 선수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라이트백

 

 

이름: 주세페 베르고미
생년월일: 1963년 12월 22일

포지션: 라이트백, 센터백
A매치 기록: 81경기 6골
신체조건: 키 185cm / 몸무게 78kg
주 소속팀: 인테르 밀란

 

1980년대 초반부터 90년대 후반까지 20년 가까이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라이트백이자 스토퍼로 우수한 수비 지능과 강인한 체력과 빠른 발 그리고 터프한 수비와 안정적인 볼 배급 능력을 모두 겸비했으며 두 포지션에서 모두 당대 최고의 활약을 펼쳤다. 공격력보다는 수비력이 부각되는 선수였음에도 공격 상황에서는 정교한 크로스로 득점 찬스를 만들기도 했다.

선수 생활을 인테르에서만 보낸 원 클럽맨 베르고미는 인테르에 20년간 헌신하며 20세기 마지막 세리에 A 우승을 드는데 큰 공을 세웠고 세 번의 UEFA 컵 제패에 공헌해 구단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다. 은퇴한 뒤인 2020년에는 네라주리들의 투표로 인테르 밀란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아주리 군단에서도 빛나는 활약을 이어간 베르고미는 만 19세의 어린 나이로 1982 스페인 월드컵에서 로테이션 멤버였지만 큰 경기에서 선발로 나와 활약하며 우승을 차지하는데 크게 기여했다. 이후에도 UEFA 유로 1988과 1990 이탈리아 월드컵에서는 주장으로 준결승에 진출하는데 공헌했다. 그러나 새로 부임한 사키와의 갈등으로 인해 대표팀 일선에서 물러났다가 1998 프랑스 월드컵 때 로테이션 멤버로 복귀했으며 대회 도중 부상당한 네스타의 공백을 메웠으나 8강 프랑스전 승부차기에서 아쉽게 패했다.

 

 

레프트백

 

 

이름: 지아친토 파케티
생년월일: 1942년 7월 18일

포지션: 레프트백
A매치 기록: 94경기 3골
신체조건: 키 191cm / 몸무게 82kg
주 소속팀: 인테르 밀란

 

인테르와 아주리의 위대한 캡틴이자 유럽 최초로 오버래핑을 시도하며 카테나치오의 매서운 역습을 상징하는 선수였다. 빠른 스피드와 탄탄한 기본기를 활용해 공격에 적극 가담하며 상대 수비진을 교란했으며 강력한 피지컬을 앞세운 대인 수비에도 능했다.

선수생활을 오직 인테르에서만 보낸 원 클럽맨 파케티는 그런데 인테르라 불리던 1960년대 중후반 전성기를 이끌며 세리에 A 4회 우승과 코파 이탈리아 1회 우승, 그리고 유러피언 컵과 인터콘티넨탈컵 2연패를 이뤄냈고 인테르의 대약진과 축구 전술사에 큰 영향을 끼친 공로를 인정받아 인테르는 그가 선수 시절에 달고 활약했던 등번호 3번은 영구결번 처리되었다.

이탈리아 대표팀에서는 첫 메이저 대회인 1966 잉글랜드 월드컵에서는 소련과 북한에게 패해 조기 탈락하는 굴욕을 겪었던 파케니는 UEFA 유로 1968에서는 주장이자 공격의 시발점 역할을 맡아 우승을 이뤄냈으며 1970 멕시코 월드컵에서도 개최국 멕시코와 난적 서독을 이기고 결승에 진출했다. 언급한 두 대회에서 모두 대회 베스트 일레븐에 들었다.

이탈리아 축구 명예의 전당과 인테르 명예의 전당에 동시에 헌액된 파케티는 월드 사커지 선정 세계 베스트 일레븐에 6회 선정되었고 발롱도르 노미네이트에도 총 7회 선정되어 그중 1965년에는 2위, 1968년에는 5위에 올랐다.

 

 

수비형 미드필더

 

 

이름: 안드레아 피를로
생년월일: 1979년 5월 19일

포지션: 수비형 미드필더, 중앙 미드필더, 공격형 미드필더
A매치 기록: 116경기 13골
신체조건: 키 177cm / 몸무게 72kg
주 소속팀: AC 밀란

 

레지스타의 대명사이자 현대적인 후방 플레이메이커의 시조로 불리던 선수로 전통적으로 포백 보호를 겸하던 후방 플레이메이커와는 다르게 수비 가담은 메짤라에게 맡기고 드넓은 시야와 마에스트로가 생각나는 템포 조절, 그리고 치명적인 롱패스 능력으로 그라운드를 자신의 뜻대로 쥐락펴락하는 천재였다.

21세기 세리에 A 최고의 선수 중 하나인 피를로는 AC 밀란에서는 세리에 A 2회 우승과 UEFA 챔피언스리그 2회 우승을 이뤄냈고 세대교체 문제로 밀란을 떠나 유벤투스로 이적한 뒤에는 2011-12 시즌 무패 우승을 포함한 세리에 A 4회 연속 우승은 물론 2014-15 시즌에는 코파 이탈리아에서도 우승해 도메스틱 더블을 이뤄냈으며 챔피언스리그에서도 준결승에서 레알 마드리드를 물리치고 결승에 진출했다.

아주리에서 피를로의 활약도 위대했는데 2006년 독일 월드컵에서 중원을 이끌며 대회 어시스트 1위를 달성해 팀의 우승에 크게 공헌해 월드컵 브론즈볼과 대회 올스타 팀에 선정되었으며 유로 2012 때는 전력이 약화된 이탈리아를 결승에 올려놓으며 맹활약했다. 비록 스페인에게 대패했지만 그의 활약은 인정받아 대회 베스트 일레븐과 MVP 선정에서 2위에 올랐다.

피를로 개인도 세리에 A 올해의 팀 4회 연속으로 선정되었으며 2012년부터 2014년까지 3년 연속으로 세리에 A 올해의 선수상을 수상했으며 특히 2011-12 시즌에는 ESM 올해의 팀과 2012 구에린 도르를 수상했으며 발롱도르 노미네이트에 4회 선정되어 네 번 모두 10위 안에 들었으며 밀란에 머물던 2007년에 5위에 오르며 개인 통산 최고 성적을 기록했다.

 

 

수비형 미드필더

 

 

이름: 루이스 몬티
생년월일: 1901년 5월 15일

포지션: 수비형 미드필더, 중앙 미드필더, 센터백
A매치 기록: 18경기 1골
신체조건: 키 169cm / 몸무게 73kg
주 소속팀: 유벤투스 FC

 

이탈리아계 아르헨티나인을 뜻하는 '오리운디'로 왕성한 활동량을 보여주며 팀원들로부터 두 개의 날개란 뜻의 도블레 안초라 불렸으며 잔혹한 태클로 상대 공격수를 무너트리는 거친 플레이를 앞세워 상대팀에게는 도살자라 불렸는데 당대 언론으로부터 "게임의 엔진. 몬티는 무섭도록 단단한 수비와 롱패스로 공격의 물꼬를 틀 수 있는 선수이다. 메아차와 페라리의 공격 라인업이 되는 것보다는 그를 보좌한다."라고 불렸으며 대표팀 감독 포초로부터 "아웃사이드 플레이어를 어떻게 보좌하는지, 다이렉트 패스는 어떻게 하는지 등 열린 시야를 가지고 있다."라고 불렸다.

아르헨티나에서는 산 로렌초에서 전성기를 누렸으며 이탈리아로 귀화한 뒤에는 유벤투스에서 활약한 몬티는 유벤투스의 황금기 도중에 합류했는데 선배 비가토의 공백을 완벽하게 메워내며 세리에 A 4연패를 이끌었으며 1937-38 시즌에는 코파 이탈리아를 우승하며 소속팀 유벤투스를 이탈리아의 국민구단으로 올리게 하는데 큰 공을 세웠는데 이때 유벤투스 멤버 다수와 함께 이탈리아 대표팀에서도 황금기를 이끌었고 몬티는 진델라, 네예들리와 같은 중유럽 최고의 공격수들을 삼켜버리며 역대 최고의 수비형 미드필더 중 하나로 평가받게 했다.

아르헨티나와 이탈리아 대표팀에서 모두 큰 성과를 낸 몬티는 아르헨티나에서도 1927 코파 아메리카 우승과 1928 암스테르담 올림픽 은메달, 그리고 1930 우루과이 월드컵 준우승을 이뤄냈으며 이탈리아로 귀화한 뒤에는 아주리 군단의 1934 이탈리아 월드컵과 1933-1935 중유럽컵 우승을 이뤄내며 각기 다른 국적으로 월드컵 결승 무대를 밟는 진기록은 물론 각기 다른 국적으로 대회 올스타 팀에 드는 진기록도 세웠다.

당대에는 우루과이의 안드라데와 함께 최강의 하프백이었음은 물론 역대 최고의 수비형 미드필더 중 하나로 평가받는데 이러한 배경에는 그의 엄청난 자기 관리 능력이 있다. 아르헨티나에서 이탈리아로 선박으로 오는 기간에 살이 찌자 혹독한 수준으로 다이어트를 하며 폼을 빠르게 찾았을 정도로 프로의식이 대단했다.

 

 

공격형 미드필더

 

 

이름: 프란체스코 토티
생년월일: 1976년 9월 27일

포지션: 공격형 미드필더, 포워드, 레프트윙, 스트라이커
A매치 기록: 58경기 9골
신체조건: 키 180cm / 몸무게 82kg
주 소속팀: AS 로마

 

2000년대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트레콰르티스타이자 펄스 나인롤 공격수로 우수한 원터치 패스로 찬스를 만드는 능력과 넓은 시야와 창의적인 패싱력에서 나오는 플레이메이킹 능력은 물론 피지컬과 볼 컨트롤을 겸비한 탈압박 능력은 물론 득점력까지 공격형 미드필더에 필요한 모든 덕목을 갖추었으며 2007-08 시즌에는 펄스 나인으로도 활약하기도 했던 다재다능한 선수였다.

자타공인 AS 로마 역사상 최고의 선수이자 최강의 선수로 선수생활을 모두 AS 로마에서만 보낸 토티는 구단 역대 최다 출전과 최다 득점자를 랭크하고 있으며 2000-01 시즌 세리에 A 우승을 이뤄내며 발롱도르 5위에 랭크되었으며 두 번의 코파 이탈리아와 수페르코파 이탈리아나 우승을 이뤄냈다.

아주리 군단에서는 UEFA 유로 2000떄 훌륭한 활약을 보여주며 팀을 결승에 올려놓으며 대회 베스트 일레븐에 선정되었으나 이후로는 기대에 못 미치는 모습을 보여주다가 2006 독일 월드컵에서 도움왕에 오르며 팀의 우승에 기여하고 화려하게 대표팀에서 은퇴했다.

토티 개인도 수많은 영광을 누렸는데 1999년 세리에 A 영 플레이어를 시작으로 세리에 A 올해의 이탈리아 선수 5회 수상, 세리에 A 평점왕인 구에린 도르 2회 수상, ESM 올해의 팀 3회 선정, 세리에 A 올해의 선수 2회 수상과 도움왕 2회 수상은 물론 2006-07 시즌에는 이브라히모비치, 카카, 아드리아누, 루카 토니 등 훌륭한 공격수들을 제치고 세리에 A 득점왕을 이뤄내기도 했으며 빅리그의 다른 득점왕에 앞서며 유러피언 골든슈를 수상하기도 했다.

 

 

라이트 포워드

 

 

이름: 로베르토 바조
생년월일: 1967년 2월 18일

포지션: 포워드, 공격형 미드필더, 스트라이커
A매치 기록: 56경기 27골
신체조건: 키 174cm / 몸무게 73kg
주 소속팀: 유벤투스 FC

 

1990년대를 대표하는 슈퍼스타 중 한 명이자 아주리의 판타지스타 계보를 이끈 장본인으로 현란한 발재간과 창의적인 패싱력과 뛰어난 슈팅 스킬을 보여주며 뛰어난 온 더 볼 능력을 보여준 1990년대를 대표하는 판타지스타였다.

피오렌티나에서 데뷔해 유벤투스에서 전성기를 누린 바조는 1992-93 시즌 UEFA컵 우승과 1994-95 시즌 세리에 A와 코파 이탈리아 더블 우승을 이뤄냈고 1990-91 시즌에는 UEFA 컵 위너스컵 득점왕을 수상했으며 1993년에는 UEFA컵과 세리에 A에서 보여준 압도적인 퍼포먼스로 인해 발롱도르와 옹즈도르, 피파 올해의 선수상을 휩쓸었다. 심지어는 기량이 쇠퇴했다고 비판받았던 1995-96 시즌에도 세리에 A 도움왕에 올랐는데 델 피에로에게 밀려난 뒤에도 AC 밀란, 인테르  밀란, 그리고 브레시아 칼초에서도 리그 정상급 선수로 활약하며 2000-01 시즌 구에린 도르와 가에타노 시레아 경력모범상을 동시에 수상했다.

1990 이탈리아 월드컵에서 경쟁자 만치니의 부진으로 주전으로 도약하며 스킬라치와 함께 조국을 3위에 올린 바조는 1994 미국 월드컵에서는 거의 혼자의 힘으로 공격진을 이끌며 5골을 득점하며 팀을 결승에 올려놓았지만 승부차기 마지막 키커로 나가 실축함으로써 팀은 패했고 월드컵 실버볼과 실버슈를 수상 받은 것과는 다르게 대중들에게 그간의 공을 인정받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외 팬들 사이에서는  1994년에 그가 결승전 직전까지 보여줬던 활약상은 축구계로부터 인정받아 1994년 발롱도르와 옹즈도르에서 모두 2위를 차지했으며 피파 올해의 선수상에서도 3위에 올랐다.

 

 

센터 포워드

 

 

이름: 루이지 리바
생년월일: 1944년 11월 7일

포지션: 스트라이커, 레프트윙
A매치 기록: 42경기 35골
신체조건: 키 180cm / 몸무게 78kg
주 소속팀: 칼리아리

 

1960년대 후반~1970년대 초반을 빛낸 스트라이커로 강력한 왼발 슈팅으로 인해 천둥번개란 별명으로 불렸는데 키가 큰 편이 아니었음에도 헤딩에도 능했고 스피드마저 빨라 레프트윙도 소화할 수 있었다.

선수 생활 대부분을 칼리아리에서 보낸 리바는 1969-70 시즌에는 모두의 예상을 뒤엎고 칼리아리의 세리에 A 우승을 이뤄내는데 큰 공을 세웠음은 물론 리바 자신도 득점왕에 올랐는데 이 시즌을 포함해 세리에 A 득점왕을 3회 수상된 리바는 발롱도르 노미네이트에 2회 선정되어 1969년 2위와 1970년 3위에 오르며 포디움에 2회 선정되었다.

아주리 군단 통산 A매치 최다 득점자의 자리를 아직도 지키고 있는 리바는 UEFA 유로 1968 우승을 이뤄내는데 큰 공을 세워 베스트 일레븐에 들었으며 1970 멕시코 월드컵에서는 준우승이란 우수한 성적을 거두는데 큰 공을 세웠다.

 

 

레프트 포워드

 

 

이름: 주세페 메아차

생년월일: 1910년 8월 23일

포지션: 포워드, 스트라이커, 공격형 미드필더 
A매치 기록: 53경기 33골
신체조건: 키 169cm / 몸무게 73kg
주 소속팀: 인테르 밀란

 

이탈리아 역대 최고의 축구선수로 추앙받는 선수로 뛰어난 드리블 능력과 창의적이며 정확한 패스에서 나오는 찬스 메이킹, 그리고 직접 슈팅하거나 헤딩을 활용한 득점력도 우수했다.

인테르 밀란에서 전성기의 대부분을 보낸 주세페 메아차는 어린 나이에 데뷔해 처음에는 선배들의 무시를 당했지만 압도적인 실력으로 선배들을 승복시켰는데 세리에 A 3회 우승과 코파 이탈리아 우승을 이뤄냈으며 메아차 개인도 리그와 미트로파컵, 코파 이탈리아를 포함해 무려 일곱 번이나 득점왕에 올랐다. 이러한 활약을 인정한 인테르 밀란은 자신의 홈 구장의 이름을 주세페 메아차 스타디움으로 명명했다.

1930년대 이탈리아의 성공시대를 이끌었던 주세페 메아차는 인사이드 포워드 파트너 지오반니 페라리와 함께 1934 이탈리아 월드컵과 1938 프랑스 월드컵에서 모두 선발로 뛰며 우승한 유이한 선수였으며 1934 이탈리아 월드컵에서는 골든볼을 수상했으며 후자의 대회에서는 주장으로 팀을 지휘하며 월드컵에서 우승했다.

 

 

감독

 

 

이름: 비토리오 포초
출생일: 1886년 3월 2일
주 소속팀: 이탈리아 축구 국가대표팀

'쥘리메 컵의 사나이'

축구사 최고의 국가대표팀 감독 중 한 명으로 기존의 2-3-5 시스템에 비해 중원에서 안정적인 볼 소유와 그를 통해 최종적으로는 수비의 안정성까지 꾀해 인사이드 포워드들을 오늘날의 공격형 미드필더  또는 메짤라의 위치까지 내린 메토도 시스템을 새롭게 재창했고 1938 프랑스 월드컵에서는 플레이메이커 성향의 센터하프 미켈레 안드레올로를 적극 기용해 후방 플레이메이킹의 프로토 타입을 제시하는 등 축구 전술사의 발전에 큰 힘을 보탰다.

지미 호건, 퍼버트 채프먼, 후고 마이슬과 함께 다뉴브 학파의 중심으로 활약했던 포초는 1912년 스톡홀름 올림픽에서 아주리의 지휘봉을 잡은 것을 시작으로 토리노와 AC 밀란의 감독직을 맡으면서도 간간히 이탈리아 대표팀 감독을 겸직하다가 1929년, 다시 아주리의 지휘봉을 잡아 20년 가까이 집권했는데 1927-30 중유럽컵 우승을 시작으로 1934 이탈리아 월드컵과 1933-35 중유럽컵 우승에 성공했다.

보통의 감독이면 이 스쿼드에 만족해 계속 끌고 가려고 했겠지만 포초는 여기에 안주하지 않고 노장이 된 우승 멤버들 대부분을 리빌딩하고도 1936 베를린 올림픽 금메달과 1938 프랑스 월드컵 우승을 이뤄내며 과감한 세대교체의 정석이 무엇인지 확실히 보여줬다. 축구 역사상 유일하게 월드컵을 2회 우승했던 포초 감독은  2011년에 이탈리아 축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고 독일의 라디오 방송국 베를린브리츠가 선정한 1930년대 최고의 감독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베스트 일레븐

 

 


3. 서브 14인 포함 1군 스쿼드

 

 

이름: 디노 조프
생년월일: 1942년 2월 28일

포지션: 골키퍼
A매치 기록: 112경기 83실점 / 62클린시트
신체조건: 키 182cm / 몸무게 78kg
주 소속팀: 유벤투스 FC

 

1970~80년대 세계 최고의 골키퍼이자 이탈리아 축구계의 롱런의 상징으로 후배 부폰과 함께 이탈리아 축구사 최고의 골키퍼 중 한 명으로 이름을 날리며 엄청난 선방 능력과 거침없는 카리스마로 수비라인을 이끌었던 위대한 주장이었고 40세까지 기량을 유지했는데 조프는 이를 두고 "골키퍼는 와인처럼 시간이 오래 지나야만 숙성된 맛을 낼 수 있다."라는 명언을 남기기도 했다.

나폴리에서 세리에 A 정상급 골키퍼로 명성을 떨쳐 유벤투스에 합류한 디노 조프는 유벤투스 역사상 최고의 황금기의 초석을 다지며 세리에 A 6회 우승과 코파 이탈리아 2회 우승을 이뤄냈고 유럽 무대에서도 1976-77 시즌 UEFA컵 우승 및 1972-73 시즌과 1982-83 시즌에는 유러피언 컵 준우승을 이뤄내 구단을 이탈리아 최고의 인기 팀으로 올라서는데 큰 공을 세웠는데 특히 1973년에는 유벤투스에서 세리에 A 우승 및 유러피언 컵 결승으로 이끌었고 A매치 전 경기 클린시트라는 대기록을 달성했기에 발롱도르 투표에서 2위를 차지했다.

이탈리아 대표팀에서도 유일무이하게 UEFA 유로 1968과 1982 이탈리아 월드컵을 모두 석권하며 아주리의 기념비라 불렸던 디노 조프는 특히 UEFA 유로 1968에서는 주전 알베르토시의 부상을 틈타 주전으로 도약해 뛰어난 퍼포먼스를 선보여 우승에 공헌하며 대중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고 1978 아르헨티나 월드컵과 UEFA 유로 1980에서도 조국의 준결승행을 이뤄내는데 공헌했고 1982 스페인 월드컵에서도 조국의 우승에 일조했다.

세리에 A 1142분 무실점 기록과 세리에 A 통산 클린시트 기록 역시 가지고 있는 디노 조프는 발롱도르 노미네이트에도 상술한 1973년 2위를 포함해 6회 선정되었고 월드 사커 올해의 팀에 2회 선정되었다. 은퇴한 뒤에도 유벤투스 명예의 거리와 이탈리아 축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이름: 지안피에로 콤비
생년월일: 1902년 11월 20일

포지션: 골키퍼
A매치 기록: 47경기 63실점 / 13클린시트
신체조건: 키 174cm / 몸무게 72kg
주 소속팀: 유벤투스 FC

 

유벤투스와 이탈리아 역사상 최고의 골키퍼 중 한 명으로 엄청난 유연성과 놀라운 반사신경을 자랑해 팬들에게 고무인간이라 불렸던 1920년대 세계 최고의 골키퍼였는데 대표팀 동료이자 라이벌 클럽의 에이스 주세페 메아차로부터 "내가 기억하는 콤비는 특별한 능력의 소유자였다. 그는 누구보다도 쉽게 골을 막아냈고, 이것은 게임에서 완벽한 위치를 선점하는 것에서 시작되었다."라고 호평받았다.

세리에 A 출범 이전 지역리그 시절부터 유벤투스에 헌신한 원 클럽맨인 콤비는 대표팀에서도 호흡을 맞춘 칼리가리스와 로제타의 풀백 라인과 함께 명성을 떨치며 1925-26 시즌 북부 리그 우승과 세리에 A 4연패를 비안코네리에게 선물했는데 이때의 성공으로 유벤투스는 세계 최초로 지역 단위를 넘어 전국구 구단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아주리 군단에서 초년에는 지오반니 드 프라의 백업 역할을 맡았으나 1928 암스테르담 올림픽때부터 주전자리를 차지한 콤비는 중유럽컵 2회 우승을 이뤄냈고 조국에서 열린 1934년 이탈리아 월드컵에서는 이탈리아 대표팀 주장 완장을 차고 팀을 우승으로 이끌며 화려하게 은퇴했다.

 

 

 

이름: 가에타노 시레아

생년월일: 1953년 5월 25일

포지션: 리베로, 센터백
A매치 기록: 78경기 2골
신체조건: 키 178cm / 몸무게 75kg
주 소속팀: 유벤투스 FC

유벤투스의 황금기를 이끈 리베로로 뛰어난 통솔력과 정확한 커버 플레이는 물론 롱패스와 중거리 슈팅 같은 공격적인 재능에도 능했으며 냉정한 성격으로 돌발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팀을 잘 수습했기에 후배 카브리니도 "베켄바워를 제외하면 우리 팀 리베로들이 최고였다. 원래 리베로들은 극도로 수비 지향적이지만, 그들은 모두 진화하기 시작했고 결국 경기를 조절하는 선수들이 되었다. 가에타노 시레아가 그 첫 번째 진화를 거친 선수였는데, 그는 항상 공이 있는 곳에서 경기했다."라고 호평했다.

아탈란타에서 데뷔했지만 선수 생활 대부분을 유벤투스에서 보내며 유벤투스 구단 통산 출전 4위에 랭크된 시레아는 트라파토니 체제에서 유벤투스의 리베로를 맡아 구단의 세리에 A 7회 우승과 각 한 차례의 UEFA컵, 유러피언 컵 위너스 컵, 유러피언컵을 모두 우승해 3대 유럽 대항전을 모두 석권하는 등 구단 역사에 가장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선수가 되었다. 이런 업적을 바탕으로 2011년에 유벤투스 명예의 거리 및 이탈리아 축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아주리 군단에서도 눈부신 활약을 펼친 시레아는 팀의 리베로이자 수비라인의 중심으로 활약하며 1978 아르헨티나 월드컵과 UEFA 유로 1980에서 4위를 기록했고 1982 스페인 월드컵에서는 탄탄한 수비로 팀의 우승을 이끌며 파올로 로시, 디노 조프와 함께 팀 우승의 일등 공신으로 평가받았고 UEFA 유로 1980에서는 팀 오브 더 토너먼트에 들었으며 1982년 스페인 월드컵에서의 활약으로 발롱도르 투표에서 12위에 랭크되었으며 구에린 스포르티보 선정 세계 베스트 일레븐에 선정되었고 이탈리아 축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시레아와 함께 이탈리아 대표팀과 유벤투스의 대약진을 이끌었던 조프는 그를 두고 "가에타노는 확실한 스타일과 함께 모든 면에서 예외적인 사람이었다."라고 평가했고 라이벌 프랑코 바레시는 그에게 "상대가 알아차리지도 못하게 공을 걷어내던 우아함"이라고 감탄했음은 물론 80년대 세계 최고의 선수 디에고 마라도나조차 그를 세계 최고로 평가하며 "모든 수비수들은 시레아의 '그것'을 배울 필요가 있다."라고 호평했다.

 

 

 

이름: 알레산드로 네스타
생년월일: 1976년 3월 19일

포지션: 센터백, 리베로
A매치 기록: 78경기 0골
신체조건: 키 187cm / 몸무게 79kg
주 소속팀: SS 라치오

 

2000년대 세계 최고의 센터백 중 한 명으로 우아하고 지능적인 수비수로 아름다우면서도 실용적인 태클과 뛰어난 수비 지능으로 유리한 위치를 먼저 선점하며 상대방의 슈팅 각도를 좁혔으며 빌드업 능력도 뛰어난 우아한 수비수였다.
 
라치오에서 데뷔해 제만 체제에서 세계 최고 레벨의 센터백으로 성장한 네스타는 소위 세리에 7공주 시절에 구단의 황금기를 이끌며 1997-98 시즌 코파 이탈리아 우승을 시작으로 1998-99 시즌에는 컵 위너스 컵 우승을 이뤄내며 구단 역사상 최초로 유럽 대항전에서 우승했고 여름에는 UEFA 슈퍼컵에서 퍼거슨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를 상대로 승리했다. 그리고 1999-2000 시즌에는 세리에 A와 코파 이탈리아를 모두 제패하며 자타공인 리그 최고의 수비수로 군림했고 1998년 세리에 A 올해의 영 플레이어에 선정되었고 2000-01 시즌 ESM 올해의 팀에 선정되었다.

라치오의 재정난으로 AC 밀란으로 이적해서도 세계 최고의 수비수로 군림한 네스타는 세리에 A 2회 우승 및 2002-03 시즌 코파 이탈리아 우승을 이뤄냈고 UEFA 챔피언스리그에서도 3회 결승에 진출해 2002-03 시즌과 2006-07 시즌에는 우승을 이뤄냈고 네스타 개인도 라치오 시절부터 밀란 시절까지 세리에 A 올해의 수비수에 2000년부터 2003년까지 4년 연속으로 선정되었으며 UEFA 올해의 팀 4회 선정 및 2010-11 시즌 세리에 A 올해의 팀에 선정되었고 은퇴한 이후에는 AC 밀란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다만 이탈리아 대표팀에서는 국가대항전 도중 부상으로 자주 낙마하는 등 운이 나쁜 편이었던 네스타는 그럼에도 UEFA 유로 2000에서는 칸나바로와 함께 짠물 수비의 진수를 보여주며 팀을 결승에 올리며 대회 올스타 팀에 선정되었고 발롱도르 투표에서도 5위에 올랐으며 대회 도중 부상으로 이탈했지만 2006 독일 월드컵에서도 우승 메달을 목에 걸었다. 은퇴한 뒤에는 이탈리아 축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이름: 파비오 칸나바로
생년월일: 1973년 9월 13일

포지션: 센터백, 라이트백
A매치 기록: 136경기 2골
신체조건: 키 176cm / 몸무게 73kg
주 소속팀: 파르마

 

아주리를 대표하는 수비수 중 한 명으로 작은 키임에도 용수철과도 같은 점프력을 보여주며 제공권 장악에 강했고 터프한 대인 수비와 날카로운 슬라이딩 태클, 그리고 지능적인 수비라인 통솔 능력을 겸비한 우수한 수비수였으며 베테랑이 된 뒤에는 수비라인 지휘 능력도 발군이었다.

나폴리에서 데뷔했다가 팀의 재정난으로 인해 1995-96 시즌을 앞두고 파르마로 이적했으며 센시니, 튀랑과 함께 강력한 수비라인을 구축하며 1996-97 시즌에는 창단 이후 세리에 A 최고 성적인 준우승을 이뤄냈고 1999년에는 코파 이탈리아, UEFA컵, 그리고 수페르코파 이탈리아나에서 모두 우승하며 3관왕을 차지하는데 큰 공을 세웠으며 팀 수비의 주축인 부폰과 튀랑이 떠난 2001-02 시즌에도 코파 이탈리아 우승을 이뤄내는 과정에서 힘을 보탰지만 정작 부상으로 결승전에는 출전하지 못했다.

파르마의 재정난으로 인테르로 이적했으나 부상과 그로 인한 컨디션 난조가 겹치면서 부진에 빠졌던 칸나바로는 돌파구를 마련하기 위해 유벤투스로 이적했는데 튀랑과 함께 세리에 A 1위를 2년 연속으로 달성했고 칸나바로 개인은 세리에 A 올해의 수비수 2회 연속 수상 및 2004-05 시즌 ESM 올해의 팀에 선정되었고 2005-06 시즌 세리에 A 올해의 선수와 올해의 이탈리아 선수에 선정되었다. 그러나 칼치오폴리로 인해 두 번의 리그우승이 취소되었음은 물론 팀도 대규모의 승점 삭감과 함께 세리에 B로 강등되자 레알 마드리드로 떠났으나 그곳에서 전성기는 끝났다.

클럽에서의 활약도 대단하지만 아주리에서의 활약이 백미인 칸나바로는 1996년 올림픽을 시작으로 1998 프랑스 월드컵부터 2010 남아공 월드컵까지 부상으로 빠진 UEFA 유로 2008을 제외하곤 모두 참가했다. 특히 UEFA 유로 2000에선 짠물 수비의 진수를 보여주며 팀을 결승에 진출시킨 공로로 대회 베스트 일레븐에 올랐고 2006 독일 월드컵에서는 부폰과 함께 수비라인을 이끌고 아예 필드골은 내어주지 않았을 정도로 경악할만한 퍼포먼스를 보인 칸나바로는 실버볼과 올스타 팀에 선정되었고 발롱도르를 수상하며 그의 아주리 경력에 방점을 찍었다.

 

 

 

이름: 클라우디오 젠틸레
생년월일: 1953년 9월 27일

포지션: 라이트백, 레프트백, 센터백
A매치 기록: 71경기 1골
신체조건: 키 178cm / 몸무게 71kg
주 소속팀: 유벤투스 FC

1970년대 후반~80년대 초반 유럽무대 최고의 라이트백 중 한 명으로 거친 플레이 스타일로 리비아의 독재자인 "카다피"라는 별명으로 불렸으며 이런 거친 수비 방식과는 별개로 오른발로 올리는 정교한 크로스는 그가 속한 팀의 공격 루트 중 하나로 활용되기도 했다.

유벤투스 구단 역사상 최고의 황금기를 이끈 젠틸레는 비안코네리의 유니폼을 입고 세리에 A 6회 우승과 코파 이탈리아 2회 우승을 이뤄냈으며 1976-77 시즌에는 UEFA컵을 우승하며 팀의 첫 유럽 대항전 우승에 공헌했고 1983-84 시즌에는 컵 위너스컵 우승에도 기여했다. 그러나 1984-85 시즌에 피오렌티나로 떠나며 유러피언컵 우승은 이루지 못한 아쉬운 부분도 있었다.

아주리 군단에서도 대단한 활약을 펼친 젠틸레는 1978 아르헨티나 월드컵과 UEFA 유로 1980에서는 조국의 준결승 진출을 견인했고 1982 스페인 월드컵에서는 마라도나, 지쿠, 루메니게 등 당대 최고의 선수들을 틀어막으며 우승에 크게 기여했음은 물론 젠틸레 개인도 복수의 매체에서 대회 올스타 팀에 선정되었다.

 

 

 

이름: 미켈레 안드레올로
생년월일: 1912년 9월 6일

포지션: 수비형 미드필더, 중앙 미드필더, 공격형 미드필더, 포워드
A매치 기록: 26경기 1골
신체조건: 키 169cm / 몸무게 71kg
주 소속팀: 볼로냐 FC

 

1930년대 세계 최고의 하프백 중 한 명으로 견고한 수비력은 물론 양질의 패싱력을 모두 겸비했으며 드넓은 시야로 3선에서 플레이메이킹을 보여주며 후방 플레이메이커의 시조 격의 선수가 되었으며 우수한 기본기와 공격적인 재능으로 인사이드 포워드도 소화할 수 있었다.

우루과이 태생으로 원래는 우루과이의 명문 클루브 나시오날에서 활약하다가 이탈리아로 건너와 볼로냐의 주축으로 전성기를 이끌며 로쏘블루의 세리에 A 4회 우승을 이뤄내며 이탈리아의 패권을 장악해 구단의 황금기를 이끌었다.

우루과이 대표팀에서는 백업으로 1935 코파 아메리카 우승을 경험한 안드레올로는 이탈리아로 귀화해서는 아주리 군단의 센터 하프 자리를 차지한 뒤 우수한 퍼포먼스를 보여줘 아주리 군단이 1938 프랑스 월드컵에서 우승하는데 큰 기여를 했다.

 

 

 

이름: 마르코 타르델리
생년월일: 1954년 9월 24일

포지션: 중앙 미드필더, 수비형 미드필더, 라이트윙, 라이트백
A매치 기록: 81경기 6골
신체조건: 키 178cm / 몸무게 70kg
주 소속팀: 유벤투스 FC

 

이탈리아 축구 역사상 최고의 박스 투 박스 미드필더로 불리며 강철 같은 지구력을 바탕으로 공수 양면에서 왕성한 활동량을 보여주며 큰 영향력을 끼쳤으며 뛰어난 축구 지능과 특유의 다재다능함을 앞세워 라이트백, 수비형 미드필더, 공격형 미드필더, 측면 미드필더로도 활약할 수 있었다.

유벤투스에서 파비오 카펠로를 밀어내고 주전 자리를 차지한 뒤에 구단 역사상 최고의 전성기를 이끌며 세리에 A 5회 우승과 코파 이탈리아 2회 우승, 그리고 UEFA컵과 컵 위너스컵, 그리고 유러피언 컵을 모두 우승하며 비안코네리의 세계 최초 3대 유럽 대항전 석권에 공헌했고 타르델리 개인도 구에린 스포르티보 평점 기반 세리에 A 최우수 미드필더에 3회 선정되었다.

이탈리아 대표팀에서도 베네티의 뒤를 이어 주축으로 활약한 타르델리는 UEFA 유로 1980 4위와 1982 스페인 월드컵 우승에 공헌하며 두 대회에서 모두 대회 베스트 일레븐에 들었을 정도로 공수 양면에서 우수한 모습을 보여줬는데 특히 1982년에는 월드컵에서의 활약으로 인해 옹즈 몽디알이 뽑은 유럽 베스트 일레븐과 발롱도르 투표에서도 15위에 올랐다.

후배 클라우디오 마르키시오가 제2의 타르델리라 불리자 그는 "제가 제2의 타르델리라니, 영광스럽네요."라고 말했을 정도로 구단에서 대단한 위상을 지니고 있는 타르델리는 1982년 옹즈 몽디알 선정 유럽 베스트 일레븐에 선정되었고 2011년 유벤투스 명예의 거리 헌액 및 2015년 이탈리아 축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이름: 지안니 리베라
생년월일: 1943년 8월 18일

포지션: 공격형 미드필더
A매치 기록: 60경기 14골
신체조건: 키 175cm / 몸무게 69kg
주 소속팀: AC 밀란

 

이탈리아 축구를 대표하는 트레콰르티스타로 신기에 가까운 볼 컨트롤을 가진 것은 물론 양발을 자유자재로 사용하며 창의적인 패싱력과 정교한 드리블로 유명했으며 1972-73 시즌 세리에 A 득점왕 및 코파 이탈리아 득점왕도 2회 수상한 적도 있었을 정도로 득점력도 훌륭했다.

AC 밀란에서 선수 생활의 대부분을 보내며 구단 통산 출전 4위 및 통산 득점 3위에 랭크된 골든 보이 지안니 리베라는 AC 밀란에서 19년간 활약하며 세리에 A 3회 우승 및 코파 이탈리아 우승 4회를 이뤄내 그란데 인테르와 양립하는 이탈리아의 또 다른 왕조를 만들었고 유럽 무대에서도 1962-63 시즌과 1968-69 시즌에 유러피언 컵 우승을 이뤄냈고 1967-68 시즌과 1972-73 시즌에는 UEFA 컵 위너스컵 우승을 이뤄냈음은 물론 1969년에는 남미의 패자 에스투디안테스의 거친 플레이를 뚫고 인터컨티넨탈컵 우승을 이뤄냈다.

소속팀에서는 뛰어난 활약을 펼쳤지만 아주리에선 다소 아쉬웠던 리베라는 19세에 데뷔해 주전 자리를 차지한 것과는 대조적으로 그의 전성기 때에는 전술상의 이유로 전반전을 포지션 라이벌 산드로 마촐라에게 양보해야 했으며 후반전에 주로 기용되었다. 그래도 조커 역할을 훌륭하게 수행하며 UEFA 유로 1968 우승과 1970 멕시코 월드컵 준우승을 이뤄냈다.

은퇴 후 AC 밀란의 부구단주가 된 리베라는 AC 밀란에서 많은 영예를 누렸는데 FUWO 선정 유럽 올해의 팀에 2회 선정되었고 발롱도르 노미네이트에도 9회 선정되어 1963년에는 2위, 1969년에는 1위를 기록하며 발롱도르를 수상해 명실상부 유럽 최고의 선수로 군림했다. 그리고 은퇴한 이후에는 AC 밀란 명예의 전당 헌액 및 1999년 20세기 최고의 AC 밀란 선수로 선정되었고 이탈리아 축구 명예의 전당 및 이탈리아 스포츠 명예의 전당에도 헌액되었다.

 

 

 

이름: 산드로 마촐라
생년월일: 1942년 11월 8일

포지션: 공격형 미드필더, 라이트윙, 포워드
A매치 기록: 70경기 22골
신체조건: 키 179cm / 몸무게 74kg
주 소속팀: 인테르 밀란

 

아버지 발렌티노 마촐라와 라이벌 지안니 리베라와 함께 이탈리아 역사상 최고의 공격형 미드필더로 손꼽히며 훌륭한 슈팅 스킬과 창의적인 패싱력, 탄탄한 볼 컨트롤과 같은 공격형 미드필더의 필수적인 덕목은 물론 기동력도 탁월했으며 측면과 중앙을 오가는 왕성한 활동량도 그의 트레이드 마크였다.

인테르 밀란 역대 통산 득점 4위에 올라있으며 선수 생활을 오직 인테르 밀란에서만 보낸 원 클럽맨 산드로 마촐라는 세리에 A 4회 우승과 유러피언 컵 2연패, 그리고 인터콘티넨탈컵 2연패를 이루며 그란데 인테르의 시대를 열었는데 이 과정에서 마촐라는 훌륭한 퍼포먼스를 보여줘 레알 마드리드의 푸스카스로부터 "너의 아버지 발렌티노 마촐라 못지않구나."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왕성한 활동량으로 중앙과 측면을 오가며 상대 수비진을 압박해주는 스타일 덕분에 아주리 군단에서는 리베라보다 더 중용되었으며 자주 선발로 출전했다. 특히 UEFA 유로 1968에서는 대회 우승을 이끌며 대회 베스트 일레븐에 선정되었고 1970 멕시코 월드컵에서도 주전으로 활약하며 조국의 결승행을 도왔다.

인테르와 아주리의 전설인 산드로 마촐라 개인도 여러 영예를 누렸는데 1963-64 시즌에는 유러피언 컵 득점왕에 올랐으며 1964-65 시즌에는 세리에 A 득점왕에 오르기도 했고  월드 사커지 선정 월드 일레븐에 5회 선정되었음은 물론 발롱도르 노미네이트에도 9회 선정되어 1971년 투표에서 2위를 차지했다.

 

 

 

이름: 발렌티노 마촐라
생년월일: 1919년 1월 26일

포지션: 공격형 미드필더, 포워드, 중앙 미드필더
A매치 기록: 12경기 4골
신체조건: 키 170cm / 몸무게 75kg
주 소속팀: 토리노 FC

 

이탈리아 역사상 최고의 공격형 미드필더 중 한 명으로 추앙받는 선수로 우수한 시야와 탄탄한 기본기를 앞세워 경기를 조립하고 팀의 플레이메이킹을 주도하는 역할을 해 팀 동료 마리오 리가몬티로부터 "마촐라는 팀의 절반이다. 나머지 절반은 남은 우리 10명에 의해 이루어진다."라고 말했을 정도로 경기 영향력이 컸으며 득점력도 우수했다.

1940년대 유럽 최강의 팀이라 불렸던 엘 그란데 토리노의 전성시대를 이끈 마촐라는 엘 토로의 세리에 A 5연패와 1942-43 코파 이탈리아 우승을 이뤄냈으며 마촐라 개인도 1942-43 시즌 코파 이탈리아 득점왕과 1946-47 시즌 세리에 A 득점왕을 수상하며 당대 유럽 축구계 최고의 선수 중 한 명으로 평가받으며 많은 이들의 존경을 받았으나 1949년, 벤피카와의 친선 경기 이후 리스본에서 돌아오는 길에 발생한 수페르가 비행기 참사로 인해 숨을 거뒀고 그들의 죽음으로 인해 토리노의 전설적인 신화는 비극적으로 막을 내렸다.

아주리에서도 핵심으로 활약했지만 수페르가의 비극이라는 비행기 사고로 팀원 전원이 사망하며 이탈리아 축구는 큰 타격을 입었고 발렌티노 마촐라의 신화는 비극적으로 마감했다. 그럼에도 실력은 사후에도 회자되어 푸스카스 페렌츠가 그의 아들 산드로 마촐라와 유러피언 컵 결승을 치른 이후에 "난 네 아버지와 경기를 했었지. 너도 그 못지않구나."라고 산드로 마촐라를 칭찬함과 동시에 발렌티노 마촐라를 추억했다.

 

 

 

이름: 브루노 콘티
생년월일: 1955년 3월 13일

포지션: 라이트윙, 레프트윙, 중앙 미드필더, 공격형 미드필더
A매치 기록: 47경기 5골
신체조건: 키 169cm / 몸무게 65kg
주 소속팀: AS 로마

이탈리아 축구 역사상 최고의 라이트윙으로 평가받으며 빠른 스피드와 교묘한 드리블로 상대 수비를 교란했으며 뛰어난 양발 능력을 바탕으로 날렵한 크로스로 공격수를 지원했으며 적극적인 수비 가담 능력을 통해 수비형 윙어인 토르난테 역할도 수행 가능했다.

선수 생활을 모두 AS 로마에서만 보낸 원 클럽맨 브루노 콘티는 1982-83 시즌 세리에 A 우승과 코파 이탈리아 5회 우승을 이뤄냈으며 1983-84 시즌에는 구단 역사상 최초로 유러피언 컵 결승에 진출하는 등 전성기를 누렸다.

이탈리아 대표팀에서도 카우시오를 밀어내고 주전으로 군림한 브루노 콘티는 1982 스페인 월드컵과 1986 멕시코 월드컵에서 주전으로 활약했으며 특히 전자의 대회에서는 공수 양면에서 훌륭한 활약을 펼치며 우승에 기여하며 발롱도르 투표에서 5위에 올랐다.

 

 

 

이름: 라이문도 오르시
생년월일: 1901년 12월 2일

포지션: 레프트윙
A매치 기록: 35경기 13골
신체조건: 키 168cm / 몸무게 68kg
주 소속팀: 유벤투스 FC

1920년대와 30년대 당시 최고의 아웃사이드 레프트로 빠른 스피드와 교묘한 드리블을 겸비해 상대 수비수를 속이며 크로스를 올려 공격수를 지원하는 능력과 왼발 슈팅으로 직접 마무리하는 능력 모두 훌륭했으며 중요한 경기에서 강한 면모를 보였다

아르헨티나의 인데펜디엔테에서 데뷔해 정규리그 우승 3회를 이뤄낸 라이문도 오르시는 이탈리아로 건너가서는 유벤투스의 공격진 핵심으로 세리에 A 5연패에 큰 공을 세워 구단을 전국구급 인기 구단으로 만들었고 다시 남미로 돌아가서는 페냐롤에서 우루과이 프리미어 디비시온 우승을 했으며 플라멩구에서 캄파오네투 카리오카 우승을 이뤄냈다.

아르헨티나 대표팀 시절에는 1927 코파 아메리카 우승컵을 들어냈고 1928 암스테르담 올림픽 은메달을 목에 걸었던 오르시는 이탈리아로 귀화한 뒤에는 1927-30 중유럽컵과 1933-35 중유럽컵 우승에 기여했으며 1934 이탈리아 월드컵에서는 결승전에서 1-0으로 뒤지던 와중 구아이타의 크로스를 받아 골대를 등진 채로 오른발로 공을 받았고 골대 쪽으로 몸을 돌리면서 바로 왼발로 터닝 슈팅을 날려 동점골을 기록하며 승부를 연장전까지 끌고 갔으며 결국 아주리의 우승에 기여했다.

 

 

 

이름: 실비오 피올라

생년월일: 1913년 9월 29일

포지션: 스트라이커
A매치 기록: 34경기 30골
신체조건: 키 178cm / 몸무게 75kg
주 소속팀: SS 라치오

1930년대 후반과 1940년대 유럽 최고의 스트라이커 중 한 명으로 강력한 힘과 빠른 스피드, 냉정한 침착성과 뛰어난 골 결정력을 모두 겸비했으며 특히 체조선수들을 상회하는 유연성을 바탕으로 바이시클 킥 같은 당시의 장비로는 실전에서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는 플레이를 종종 보여줬다.

세리에 A 역대 최다 득점자 타이틀을 가지고 있음에도 세리에 A 우승과는 인연은 없었던 피올라는 그래도 1937년에는 세리에와 당대 최고 권위의 대륙 대회인 미트로파 컵에서는 동시에 우승을 도전했지만 리그에서는 볼로냐에 밀렸고 미트로파 컵 결승전에서는 사로시 죄르지가 이끄는 페렌츠바로시에 밀려 준우승에 머물렀다. 그래도 라치오 개인 통산 득점 2위에 올랐으며 세리에 A 득점왕을 2회 수상했다.

리그 우승이 없는 대신 아주리에서는 우승컵과 인연이 있었던 피올라는 1933-35 중유럽컵 우승은 물론 1938 프랑스 월드컵에서도 우승했는데 이때 5골을 넣으며 팀의 에이스로 우승을 이루는데 공헌했다.

 


이탈리아 역대 올스타 1군 25인 팀

 

 


4. 리저브

 

 

이름: 발테르 젱가
생년월일: 1960년 4월 28일

포지션: 골키퍼
A매치 기록: 58경기 21실점 / 40클린시트
신체조건: 키 188cm / 몸무게 84kg
주 소속팀: 인테르 밀란

 

1980년대 중반~1990년대 초반 세계 최고의 골키퍼 중 한 명으로 행글라이더, 거미인간 등의 별칭으로 불렸을 정도로 뛰어난 유연성과 재빠른 반사신경, 그리고 가공할만한 점프력을 선보였다.

인테르에서 전성기를 누린 젱가는 사키와 오렌지 삼총사가 버티는 AC 밀란을 제치고 1988-89 시즌 세리에 A 우승을 차지했으며 UEFA 컵 2회 우승을 기록하기도 했다. 그리고  IFFHS 월드 베스트 골키퍼 3회 선정되었으며 1987년에는 구에린 도르를 수상했고 1990년 UEFA 올해의 골키퍼에 선정되는 영광을 누렸으며 은퇴한 뒤인 2018년에 팬투표로 진행된 인터 밀란 명예의 전당 초대 헌액자로 이름을 남겼다.

이탈리아 대표팀에서도 58회의 A매치에 나서 40번의 클린시트를 기록하며 카테나치오의 방점을 찍은 젱가는 UEFA 유로 1988과 1990 이탈리아 월드컵에서 주전 골키퍼로 맹활약하며 두 대회에서 모두 준결승에 진출했는데 특히 후자의 대회에서는 518분 무실점을 달성해 월드컵 역대 최장시간 무실점 타이틀을 가지고 있다.

 

 

 

이름: 피에트로 비에르코보드
생년월일: 1959년 4월 6일

포지션: 센터백
A매치 기록: 45경기 2골
신체조건: 키 180cm / 몸무게 76kg
주 소속팀: UC 삼프도리아

 

위르겐 콜러와 함께 1980년대와 90년대를 풍미한 우크라이나계 혈통의 스토퍼로 굉장히 빠른 스피드와 강력한 피지컬, 그리고 뛰어난 지능과 예측력도 겸비해 상대를 압도적으로 찍어 누르는 플레이를 펼쳐 그의 소련계 혈통과 엮어 차르라고 불렀으며 마라도나와 리네커가 밝힌 자신들이 가장 상대하기 힘들었던 수비수로 뽑았다.

AS 로마에서 1982-83 시즌 세리에 A 우승을 이뤄내고 세리에 A 평점왕인 구에린 도르를 수상한 비에르코보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정적으로 주전자리를 보장받지 못하자 삼프도리아로 이적해 전성기를 누렸는데 이탈리아 무대에서는 코파 이탈리아 4회 우승 및 1990-91 시즌에는 삼프도리아 역사상 유일한 스쿠테토를 드는데 큰 공을 세웠고 유럽 무대에서는 1989-90 시즌 UEFA 컵 위너스컵 우승과 1991-92 시즌 UEFA 챔피언스리그 준우승을 이뤄냈다. 심지어 30대 후반의 나이에 유벤투스로 입성한 뒤에도 주전으로 활약하며 1995-96 시즌 UEFA 챔피언스리그 우승을 이뤄냈다.

세 구단에서 활약하며 구에린 스포르티보 선정 세리에 A 최우수 스토퍼에 6회 선정된 비에르보코드는 의외로 이탈리아 대표팀에서는 소속팀에서의 실력을 다 보여주지는 못했는데 백업 멤버로 1982 스페인 월드컵 우승을 경험했으나 이후 1986 멕시코 월드컵에서는 주전으로 출전했음에도 부진했기에 1990 이탈리아 월드컵에서는 리카르도 페리의 백업 멤버로 참가했다.

 

 

 

이름: 렌초 데 베키
생년월일: 1894년 2월 3일

포지션: 센터백, 레프트백, 수비형 미드필더
A매치 기록: 43경기 0골
신체조건: 키 163cm / 몸무게 62kg
주 소속팀: 제노아

 

헝가리의 휘글 형제와 함께 1920년대 유럽 최고의 수비수로 이름을 날렸던 선수로 키와 덩치가 작았지만 덩치와 다르게 힘이 좋았으며 뛰어난 예측력과 세련된 태클을 겸비해 세련된 수비를 보여줬고 수비수임에도 볼 컨트롤과 드리블에 능해 하프백에서도 뛸 수 있었음은 물론 페널티 킥에 능했고 리그에서 통산 47골을 기록했을 정도로 득점력도 제법 뛰어났다고 전해진다.

AC 밀란에서 1909년, 만 15세의 어린 나이에 데뷔했음에도 출중한 실력을 보여준 데 베키를 두고 밀라니스타들은 신의 아들이라는 별명을 지어주었으며 그 별명에 걸맞게 AC 밀란의 최연소 득점 기록 보유자로 이름을 날렸다. 그러다가 전성기 시절에는 2만 4천 리라에 제노아로 이적한 뒤에는 제노아에서 16년간 활약하며 이탈리아 풋볼 챔피언십 3회 우승을 이뤄내며 제노아가 1920년대 이탈리아 최고의 팀 중 하나로 군림하는데 기여한다.

만 16세 3개월이라는 어린 나이에 아주리에 소집되는 영예를 누린 데 베키는 이후 국가를 대표해 세 번의 올림픽에 나섰으며 그가 은퇴하기 전까지 이탈리아 대표팀은 그가 확고한 주전으로 자리잡았으며 칼리가리스와 로제타가 경쟁하는 구도였다.

 

 

 

이름: 타르치시오 부르니치
생년월일: 1939년 4월 25일

포지션: 라이트백, 리베로, 센터백
A매치 기록: 66경기 2골
신체조건: 키 175cm / 몸무게 81kg
주 소속팀: 인테르 밀란

 

그란데 인테르 시대에 활약했던 라이트백으로 자이르 다 코스타의 위치에 따라 라이트백과 스토퍼로 자유자재로 변했으며 당대 최고의 대인 마킹 실력을 자랑하며 에우제비우나 푸스카스 같은 훌륭한 공격수들을 마킹하며 명성을 쌓았다.

그란데 인테르라 불렸던 시절의 황금기를 이끈 카테나치오의 한 축을 담당한 부르니치는 바위처럼 상대 공격수를 짓누르며 세리에 A 4회 우승과 유러피언 컵 2회 우승을 이루는데 공을 세워 1964년 월드 사커지 선정 월드 베스트 일레븐에 선정되었고 말년에는 나폴리에서 활약하며 리베로로 포지션을 변경하기도 했다.

이탈리아 대표팀에서도 파케티와 함께 최고 레벨의 사이드백 라인을 구성한 부르니치는 1966 잉글랜드 월드컵에서는 북한과 소련에게 밀려나는 굴욕을 당했지만 이를 잘 극복하고 UEFA 유로 1968 우승과 1970 멕시코 월드컵 준우승을 이뤄내며 명예회복에 성공한다.

 

 

 

이름: 안토니오 카브리니
생년월일: 1957년 10월 8일

포지션: 레프트백, 레프트윙
A매치 기록: 73경기 9골
신체조건: 키 178cm / 몸무게 72kg
주 소속팀: 유벤투스 FC

잘생긴 외모로 인해 아름다운 안토니오라 불렸던 선수로 1980년대 상반기를 빛낸 레프트백으로 윙어가 연상될 정도로 빠른 스피드와 정확한 크로스, 왕성한 활동량으로 왼쪽 측면을 지배했으며 이는 트라파토니의 조나 미스타를 효과적으로 구현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유벤투스에서 전성기를 보내며 비안코네리 군단의 세리에 A 6회 우승, 1982-83 시즌 유러피언 컵을 포함해 3대 유럽 대항전을 모두 우승한 진기록을 보유하고 있는 카브리니는 개인으로도 옹즈 몽디알이 뽑은 유럽 베스트 일레븐에 3회, 구에린 스포르티보가 선정한 세계 베스트 일레븐에 2회 선정되며 당대 수위급 레프트백으로 인정받았다.

아주리에서도 약관의 나이에 주전으로 도약해 맹활약을 펼친 카브리니는 1978 아르헨티나 월드컵에서 신인상을 수상하면서 대중들에게 자신의 이름을 알려 발롱도르 투표에서 13위에 올랐으며 1982 스페인 월드컵에서는 아주리의 통산 세 번째 월드컵 우승에 크게 기여했다.

 

 

 

이름: 지아코모 불가렐리
생년월일: 1940년 10월 24일

포지션: 중앙 미드필더, 수비형 미드필더
A매치 기록: 29경기 7골
신체조건: 키 176cm
주 소속팀: 볼로냐 FC

 

20세기 이탈리아 최고의 레지스타로 꼽혔던 인물로 우수한 판 짜기 실력과 드넓은 시야, 그리고 정확한 롱 패스를 활용한 우수한 플레이메이킹은 물론 교묘한 탈압박 능력과 파워풀한 수비와 왕성한 활동량 또한 겸비해 파비오 카펠로에 의해 이탈리아 역사상 가장 위대한 미드필더로 평가받기도 했다.

볼로냐 구단 통산 최다 출전자에 랭크된 불가렐리는 1963-64 시즌에는 유럽 최강의 팀으로 불리던 인테르 밀란과 승점 동률을 이룬 뒤 플레이오프에서 승리를 거두며 스쿠테토를 따냈고 이외에도 코파 이탈리아와 2회 우승과 1961 미트로파 컵 우승과 1970년 이탈리아-잉글랜드 리그컵 우승을 이뤄내는데 큰 공을 세웠다.

다만 대표팀 활약은 아쉬운데 1962 칠레 월드컵과 1966 잉글랜드 월드컵에 참가했으나 모두 조별 리그에서 탈락했으며 특히 1966 잉글랜드 월드컵 북한전에서는 불가렐리가 박승진을 태클로 저지하려다 오히려 박승진의 몸이 불가렐리에 다리로 떨어지면서 부상을 당해 이탈하며 탈락의 원흉이 되기도 했다. 이후 유로 1968에선 백업 멤버로 우승을 경험했다. 이토록 대표팀 활약이 다소 좋지 않음에도 피를로가 등장하기 이전까지 이탈리아인 최고의 미드필더라는 수식을 들었을 정도로 세리에 A에서의 활약이 우수했다.

 

 

 

이름: 지오반니 페라리
생년월일: 1907년 12월 6일

포지션: 공격형 미드필더, 중앙 미드필더, 포워드
A매치 기록: 44경기 14골
신체조건: 키 172cm / 몸무게 70kg
주 소속팀: 유벤투스 FC

 

1930년대 이탈리아 축구를 빛낸 인사이드 포워드로 왕성한 활동량을 앞세워 중앙과 측면을 오가 메짤라라는 단어의 시조조가 되며 득점 찬스를 만드는 창조적인 패싱력과 직접 중거리 슈팅으로 득점하는 능력까지 겸비했다.

초년에는 유벤투스에서 전성기를 누린 페라리는 유벤투스 시절에는 레나토 체사리니와 함께 2선에서 활약하며 세리에 A 5연패를 이뤄냈고 인테르에서는 대표팀에서도 영혼의 듀오로 이름을 날린 주세페 메아차와 함께 2선에서 경기를 지배하며 세리에 A 2회 우승을 이뤄냈고 말년에 볼로냐에서도 스쿠테토를 들었다.

이탈리아 대표팀에서도 대단한 업적을 이뤄낸 페라리는 인사이드 포워드 자리에서 영혼의 파트너로 불렸던 주세페 메아차와 함께 두 번의 중유럽컵에 나와 우승 1회, 준우승 1회를 이뤄냈고 파트너 메아차와 함께 1934 이탈리아 월드컵과 1938 프랑스 월드컵에서 모두 우승하며 주전으로 월드컵 2연패를 이룬 유이한 이탈리아 선수라는 대기록을 남겼는데 이 두 대회에서 페라리는 9경기 3골 5도움을 기록했다.

 

 

 

이름: 지안카를로 안ㅌ뇨니
생년월일: 1954년 4월 1일

포지션: 공격형 미드필더, 중앙 미드필더, 레프트윙
A매치 기록: 73경기 7골
신체조건: 키 177cm / 몸무게 70kg
주 소속팀: 피오렌티나

 

1970년대 하반기와 1980년대 상반기에 이름을 날리던 공격형 미드필더로 왕성한 활동량과 드넓은 시야, 그리고 정확한 패스를 모두 겸비했으며 트레콰르티스타 자리에 위치하다가도 포백 앞으로 내려가서 빌드업을 주도하기도 하는 바비 찰튼 스타일의 현대적인 미드필더였다.

피오렌티나에서 무려 15년간 활약한 안토뇨니는 1974-75 시즌에 코파 이탈리아를 우승했으며 1981-82 시즌에는 승점 1점 차이로 아쉽게 준우승을 거두었다. 안토뇨니 개인도 1980년 구에린 스포르티보 선정 월드 베스트 일레븐과 세계 최우수 선수 5위에 올랐으며 발롱도르 노미네이트에도 4회 선정되어 1982년에는 최고 성적인 11위에 랭크되었다.

아주리에서도 핵심적인 역할을 맡았던 안토뇨니는 상술했던 헌신적인 플레이 스타일이 베아르초트 감독의 눈에 들어 1978 아르헨티나 월드컵과 UEFA 유로 1980에서 주전으로 활약하며 조국을 4위에 올렸고 1982 스페인 월드컵에서도 주전으로 활약하며 아주리의 세 번째 월드컵 우승에 기여했다.

 

 

 

이름: 로베르토 베테가
생년월일: 1950년 12월 27일

포지션: 포워드, 스트라이커, 라이트윙, 레프트윙
A매치 기록: 42경기 19골
신체조건: 키 184cm / 몸무게 78kg
주 소속팀: 유벤투스 FC

1970년대 후반을 풍미한 백발 미남의 공격수로 우수한 피지컬을 활용한 헤더와 부드러운 유연성을 활용한 발리 슈팅은 물론 동료들과의 연계 플레이와 킬 패스로 골 찬스를 만들어냈으며 축구 지능도 높아 윙 포워드나 스트라이커, 공격형 미드필더 역할도 맡을 수 있었다.

선수 생활 대부분을 유벤투스에서 보낸 베테가는 7회의 세리에 A 우승과 1976-77 UEFA 컵 우승, 그리고 1978-79 코파 이탈리아 우승을 이뤄내며 구단의 황금기를 이끌었고 베테가 개인도 1977년과 1978년에는 발롱도르 투표에서 4위에 올랐으며 1979-80 시즌에는 세리에 A 득점왕에 올랐다.

이탈리아 대표팀에서도 루이지 리바 세대 이후 공격진의 에이스로 군림한 베테가는 1978 아르헨티나 월드컵과 UEFA 유로 1980에서 4위라는 호성적을 이뤘다. 다만 부상으로 1982 스페인 월드컵에 불참해서 우승 기회를 놓친 건 아쉬운 부분이다.

 

 

 

이름: 알레산드로 델 피에로
생년월일: 1974년 11월 9일

포지션: 포워드, 공격형 미드필더, 레프트윙, 스트라이커
A매치 기록: 91경기 27골
신체조건: 키 174cm / 몸무게 73kg
주 소속팀: 유벤투스 FC

1990년대 하반기와 2000년대를 대표하는 유벤투스의 판타지스타로 훌륭한 드리블 실력과 우수한 찬스 메이킹 능력, 그리고 정교한 슈팅으로 유명했으며 특히 프리킥에 능해 델 피에로 존이라 불리는 신조어가 나오기도 했다.

유벤투스에서 선수 생활의 대부분을 보낸 구단 역사상 최고의 선수 중 한 명인 델 피에로는 1994-95 시즌 도메스틱 더블을 포함해 세리에 A 6회 우승을 이뤄냈고 UEFA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에 3회 진출해 1995-96 시즌에는 우승을 이뤄냈다. 그리고 유벤투스가 칼치오폴리로 세리에 B로 강등당했을 때도 "신사는 숙녀가 원할 때 떠나지 않는 법입니다."라는 말을 남기고 잔류하며 결국 구단 역사상 최다 출전자가 되었다.

유벤투스에서 팀 커리어도 화려하지만 델피에로는 개인이 세운 커리어도 대단했는데 ESM 올해의 팀에 3회 선정되었고 1997-98 시즌 UEFA 챔피언스리그 득점왕, 1999-2000 시즌 세리에 A 도움왕, 2005-06 시즌 코파 이탈리아 득점왕, 2007-08 시즌 세리에 A 득점왕을 수상했고 1998년과 2008년에는 세리에 A 올해의 이탈리아 선수상을 수상했으며 1995년과 1996년에는 발롱도르 투표에서 4위에 올랐다.

이탈리아 대표팀에서는 명성에 비해 좋은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지만 2006 독일 월드컵 4강전 독일전에서 연장전에서 승부의 쐐기를 박는 득점을 기록하며 우승에 기여하며 대표팀에서의 한을 풀어냈다.

 

 

 

이름: 안젤로 스키아비오
생년월일: 1905년 10월 15일

포지션: 스트라이커, 포워드
A매치 기록: 21경기 15골
신체조건: 키 178cm / 몸무게 69kg
주 소속팀: 볼로냐 FC

 

1920년대 하반기와 1930년대 상반기에 이름을 날렸던 이탈리아 출신의 스트라이커로 단단한 피지컬에서 나오는 헤딩과 절묘한 위치 선정을 겸비한 전형적인 유럽식 스트라이커였다.

선수 커리어의 전부를 볼로냐에서 보낸 원 클럽맨인 스키아비오는 볼로냐의 전성기를 이끌고 북부리그 그룹 B 우승과 세리에 A 3회 우승을 이끌어냈으며 1931-32 시즌에는 스키아비오 개인도 득점욍에 올랐으며 당시 중유럽 지역의 챔피언스리그였던 미트로파 컵에서도 2회 우승했다.

볼로냐에서의 활약을 바탕으로 아주리 군단에서도 핵심 공격수로 활약했던 스키아비오는 중유럽컵 2회 우승과 1928 암스테르담 올림픽 은메달에 이어 1934 이탈리아 월드컵에서는 앙숙이었던 몬티와 화해하는 등 팀의 화합을 위해 노력했고 좋은 퍼포먼스도 보이며 조국의 첫 우승을 이뤄내는데 경기장 내외에서 큰 공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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