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의 주관적인 순위입니다.
*선수 사진은 대부분 플레이어스 유저인 법정스님의 소유님의 건조폼 입니다. 다만 법정님이 만들지 않은 선수들은 제가 만들었습니다.
*기록일은 2025년 3월 30일 기준입니다.
10위 에바리스투

생년월일: 1933년 6월 22일
A매치 기록: 14경기 8골
신체조건: 키 175cm / 몸무게 68kg
주 소속팀: FC 바르셀로나
1950년대와 60년대 유럽 무대를 풍미했던 브라질리언 공격수로 탄탄한 볼 컨트롤 능력과 드리블로 상대 수비진을 휘젓는데 능한 공격수였는데 우수한 슈팅 스킬도 가지고 있어 다양한 득점 루트를 보여줬던 선수였다.
플라멩구에서 캄페오나투 카리오카 4회 우승을 이뤄내는데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던 에바리스투는 브라질 대표팀에도 소집되어 1957 코파 아메리카에도 주전으로 나서 준우승을 이뤄냈고 1958 스웨덴 월드컵에도 주전으로 나설 예정이었으나 갑자기 스페인의 바르셀로나로 이적하며 대표팀과 멀어졌는데 그 자리를 채운 공격수가 바로 축구황제 펠레였다.
그래도 바르셀로나로 건너가서는 에레라 체제의 바르셀로나에서 공격의 핵 역할을 맡아 라리가 2연패와 인터시티 페어스컵 2회 우승을 이뤄냈으며 1958-59 시즌에는 라리가에 이어 코파 델 레이에서도 우승해 도메스틱 더블을 이뤄냈고 1960-61 시즌에는 구단 역사상 첫 유러피언 컵 결승전에 진출하기도 했다.
그러나 1962-63 시즌 여름 이적시장에서 바르셀로나에서 레알 마드리드로 넘어간 행정가 주젭 사미티에르의 설득으로 레알 마드리드로 이적했는데 이 이적은 악수가 되어 꾸레들에게는 금기시되는 존재가 되었음은 물론 에바리스투 본인도 레알 마드리드에서는 주전도약에 실패했다.
9위 호비뉴

생년월일: 1984년 1월 25일
A매치 기록: 100경기 28골
신체조건: 키 172cm / 몸무게 68kg
주 소속팀: FC 산투스
2000년대 중반에 명성을 떨쳤던 악마의 재능으로 엄청난 센스와 화려한 개인기는 물론 상대 수비수 두세 명은 따돌릴 수 있는 드리블로 이름을 날렸지만 불성실하고 게을러 자기 관리에 소홀해 자신의 잠재력을 완벽하게 만개시키지 못했던 비운의 재능이다.
산투스에서 어린 나이부터 두각을 나타내며 브라질 세리 A 2회 우승을 이뤄냈고 2004년에는 브라질 전국리그 MVP를 수상하며 제2의 펠레라는 별명으로 불렸던 호비뉴는 갈락티코 1기로 명성이 높았던 레알 마드리드로 이적해 라리가 2회 우승을 이뤄냈고 만수르 체제의 맨체스터 시티에 입단해 처음에는 군계일학의 모습을 보여줬으나 결국 주전 경쟁에서 밀려나며 AC 밀란으로 이적해 2010-11 시즌 세리에 A 우승을 이끌었다가 다시 산투스로 돌아가 캄페오나투 파울리스타 2회 우승을 이뤄냈다.
브라질 대표팀에서도 어린 나이부터 데뷔해 엘리트 코스를 밟았던 호비뉴는 2005 컨페드컵 우승과 2006 독일 월드컵 8강을 호나우지뉴의 백업 멤버로 대기하며 경험했고 2007년부터 주전으로 도약하기 시작해서 2007 코파 아메리카 우승을 이뤄내며 대회 MVP를 수상했고 주전으로 2009 컨페드컵 우승과 2010 남아공 월드컵 8강을 이끌었다. 그리고 2015 코차 아메리카에도 참가하며 A매치 100경기를 채워 센추리 클럽에 가입하는 영예를 누렸다.
8위 뮬레르

생년월일: 1966년 1월 31일
A매치 기록: 56경기 12골
신체조건: 키 178cm / 몸무게 80kg
주 소속팀: 상 파울루
1980년대 하반기와 1990년대 상반기에 전성기를 누린 처진 공격수로 엄청난 스피드와 우수한 전진드리블 실력으로 역습 상황에서 많은 득점을 만들어냈으며 팀이 공격을 주도하는 상황에서도 동료들과의 우수한 패스워크로 득점 찬스를 만들어냈으며 중앙과 측면을 가리지 않고 소화했다.
상 파울루에서 데뷔해 빠르게 주전으로 도약해 활약하며 1987년에는 전국 리그 득점왕에 오르는 활약을 펼쳤던 뮬레르는 유럽 무대 도전을 위해 토리노로 이적했다가 다시 텔레 산타나 체제의 상 파울루로 돌아와 활약하며 상파울루에서 캄페오나투 파울리스타 4회 우승과 브라질 세리 A 2회 우승은 물론 1992년과 1993년에는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2연패와 인터콘티넨탈컵 2연패를 이뤄내는 과정에서 바르셀로나와 밀란을 각각 꺾었는데 특히 1993년에 밀란을 제압했을 때 말디니와 바레시, 코스타쿠르타를 상대로 결승골을 집어넣는 활약을 보여줬고 크루제이루에서도 1998년 캄페오나투 미네이루 우승을 이끌었다.
브라질 대표팀에서도 1986년 멕시코 월드컵에 데뷔한 뮬레르는 두 번의 코파 아메리카와 1990 이탈리아 월드컵에 주전으로 참가했으며 1994 미국 월드컵에서는 백업 멤버로 우승의 영광을 누렸다.
7위 레이비냐

생년월일: 1949년 9월 11일
A매치 기록: 21경기 7골
신체조건: 키 180cm / 몸무게 76kg
주 소속팀: 파우메이라스
리버풀에서 활약하던 루카스 레이바의 삼촌으로 펠레와 토스탕이 현역에서 은퇴한 뒤 브라질 무대에서 명성을 떨쳤던 세컨드 스트라이커로 플레이메이킹 능력이 뛰어나진 못했지만 기습적인 상대 페널티 박스로 침투한 뒤 과감하게 오른발로 해결했으며 점프력도 뛰어나 헤더로 득점하는 부분에도 능했다.
10대 시절에 포르투게사 소속으로 캄페오나투 파울리스타에서 31경기 36골을 득점하는 괴력을 보여주며 파우메이라스로 이적한 레이비냐는 파우메이라스에서는 1970년대 초반, 1970년대 초반, 제2의 아카데미아, 불멸의 소대라 불렸던 파우메이라스 구단 제2의 황금기의 공격을 이끌었는데 이때 캄페오나투 파울리스타 2회 우승과 브라질 세리 A 2회 우승을 이뤄내며 팬들로부터 오 헤이, 즉 왕이라고 불리며 늙었던 펠레와 실명으로 인해 조기에 은퇴한 토스탕의 후계자 중 한 명으로 명성을 떨쳤다.
그러나 클럽에서와는 다르게 브라질 대표팀에서는 큰 활약을 보여주지 못한 레이비냐는 1974 서독 월드컵 스쿼드에 소집되었지만 주 포지션이 라이트윙인 자이르지뉴와 중앙 공격수 자리를 두고 경쟁했으나 밀려나며 백업 멤버로 활용되었다. 그 대신 대회 이후 스페인의 아틀레티코 마드리드로 이적한 뒤에도 1976-77 시즌 라리가 우승을 이뤄내며 유럽에서도 명성을 떨쳤다.
6위 콰렌치냐

생년월일: 1933년 9월 15일
A매치 기록: 13경기 14골
신체조건: 키 177cm
주 소속팀: 보타포구
1950년대부터 1960년대까지 브라질 무대에서 활약했던 공격수로 민첩한 몸놀림과 엄청난 반응속도를 지녔으며 벼락같은 왼발 슈팅과 우수한 볼 컨트롤까지 겸비해 상대 수비수들을 쥐락펴락했던 공격수였다.
1962년 6관왕을 달성했던 보타포구에서 전성기를 보내며 442경기에 출전해 313골을 득점한 콰렌치냐는 캄페오나투 카리오카 3회 우승과 리우상파울루컵 2회 우승을 이뤄냈고 콰렌치냐 본인도 캄페오나투 카리오카 득점왕을 3회 연속으로 수상했고 전선기가 지난 뒤에도 비토리아에서도 캄페오나투 바이아누 4회 우승을 이뤄내며 이름을 날렸다.
그러나 클럽에서의 대단한 퍼포먼스에도 불구하고 콰렌치냐는 셀레상에서 중용되지 못했는데 동일한 포지션에 주전으로는 펠레가 대기했으며 백업으로도 아마리우두, 주제 아우타피니 등 전설적인 공격수들이 여럿 있었기에 나올 때마다 좋은 활약을 펼쳐도 중용되지는 못했다.
5위 아마리우두

생년월일: 1939년 6월 29일
A매치 기록: 22경기 7골
신체조건: 키 169cm / 몸무게 68kg
주 소속팀: 보타포구
1960년대 브라질과 이탈리아 무대에서 이름을 날렸던 공격수로 작은 몸집에서 착안해 꼬마라는 별명으로 불렸으며 작고 마른 체구로 몸싸움에는 약했지만 대단한 순간 스피드와 민첩한 몸놀림을 화려한 빠른 방향전환 능력을 바탕으로 상대의 접촉을 피하며 상대 수비수를 따돌렸으며 감각적인 볼 컨트롤 능력과 우수한 슈팅 스킬까지 장착해 마무리와 연계에도 강점을 드러냈다.
보타포구에서 전성기를 보내며 리우 데 자네이루 주 최고의 공격수 중 한명으로 이름을 날린 아마리우두는 캄페오나투 카리오카 2회 우승을 이뤄냈으며 1961년에는 캄페오나투 카리오카 득점왕에도 올랐고 1962년에는 전국 리그 득점왕에 올랐으나 파우메이라스와 산투스에 밀려 전국리그 우승은 이뤄내지 못했다. 셀레상에서도 1962 칠레 월드컵에서 펠레의 백업으로 참가했으나 펠레의 부상으로 인해 주전으로 활약하며 가린샤, 자갈루, 지지, 니우통 산투스 등 보타포구 출신의 선수들과 함께 월드컵 우승을 이뤄냈다.
그러나 펠레의 존재 때문에 대표팀에서 그의 입지는 한계가 있었기에 브라질 무대에서 커리어를 이어나가는 것을 포기하고 이탈리아 무대로 향한 아마리우두는 AC 밀란에서는 1966-67 시즌 코파 이탈리아 우승을 이뤄냈으며 피오렌티나에서는 1968-69 시즌 세리에 A 우승을 이뤄내 구단에게 현재 기준으로 마지막 스쿠테토를 선사했고 이후 다시 브라질로 돌아와서는 바스쿠 다 가마에 머물며 전국리그 우승을 이뤄냈다.
4위 베베투

생년월일: 1964년 2월 16일
A매치 기록: 75경기 39골
신체조건: 키 178cm / 몸무게 68kg
주 소속팀: 데포르티보 라 코루냐
1990년대 브라질을 풍미한 정상급 공격수로 피지컬이 우수하진 못했지만 뛰어난 볼 컨트롤 능력과 재빠른 몸놀림, 그리고 우수한 골 결정력을 앞세워 팀의 공격을 이끌었다.
플라멩구에서 데뷔해 커리어 역사상 첫 전성기를 누린 베베투는 1986 캄페오나투 카리오카 우승과 캄페오나투 브라질 세리 A 2회 우승, 그리고 타사 과나바라 3회 우승을 이뤄내며 명성을 떨쳤고 같은 주의 바스쿠 다 가마로 이적해서도 상승세를 이어나가며 바스쿠 다 가마에서도 1989년 브라질 세리 A 우승을 이뤄내는데 큰 공을 세웠고 개인도 캄페오나투 카리오카 득점왕을 2회 수상했는데 특히 1989년에는 후술할 국대 활약이 더해지며 남아메리카 올해의 선수에 선정되기도 했다.
브라질 무대를 평정하고 유럽 무대에서 도전을 천명한 뒤에 모두의 예상을 깨고 라리가의 작은 팀 데포르티보에 입단한 베베투는 1992-93 시즌에 라리가 득점왕에 올랐으며 팀 역사상 최초로 코파 델 레이를 우승하는데 기여하며 수페르 데포르티보 시대의 기틀을 쌓는데 큰 공을 세워 구단 역사상 최고의 선수 중 한 명으로 추앙받았으며 구단 외국인 통산 최다 득점자이자 구단 역사상 첫 라리가 득점왕 및 첫 유럽 대항전 진출과 첫 메이저 대회 우승에 가장 큰 공을 세워 1990년대 라리가를 빛낸 스타 중 하나로 평가받았다.
브라질 대표팀에서도 1983년 U-20 월드컵에서 조국의 우승을 이뤄내며 혜성같이 등장한 베베투는 소속팀에서는 라이벌이이자 앙숙이었던 호마리우와 함께 명성을 떨치며 1989 코파 아메리카에서 득점왕에 오르며 팀의 우승에 크게 공헌했고 1994 미국 월드컵에서는 호마리우의 조력자로 팀의 우승에 공헌했다. 전성기가 지난 1996년에는 애틀랜타 올림픽에 와일드카드로 참가해 득점왕을 수상했고 1998 프랑스 월드컵에서도 호나우두, 히바우두와 함께 공격진을 구성하며 조국의 결승에 진출했다. 은퇴한 뒤에는 상술한 업적을 인정받아 브라질 축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3위 토스탕

생년월일: 1947년 1월 25일
A매치 기록: 54경기 32골
신체조건: 키 170cm / 몸무게 69kg
주 소속팀: 크루제이루
하얀 펠레라 불렸던 1970년대 초반 세계 최고의 선수 중 한 명으로 유럽의 크루이프에 대한 남미의 대답으로 평가받았으며 경기 흐름을 완벽하게 파악하는 완벽한 전술안과 경기장 전체를 망라하는 드넓은 시야에서 나오는 창의적인 패스로 수많은 골 찬스를 만들었으며 상대 마킹맨을 농락하는 탈압박 능력과 화려한 드리블 실력을 겸비한 공격수였다.
크루제이루에서 전성기를 보낸 크루제이루의 왕 토스탕은 캄페오나투 미네이루 5회 우승 및 1966년 브라질 전국 리그 우승을 이뤄냈는데 이 과정에서 전국리그 5연패를 이뤄냈던 펠레의 산투스를 상대로 1차전 6-2 대승 및 2차전 3-2 역전승을 이뤄내는 과정에서 모두 득점포를 가동했고 토스탕 개인도 1970년에는 브라질 전국리그 득점왕과 베스트 일레븐에 선정되었으며 1971년에는 브라질 전국리그 MVP를 수상했음은 물론 남미 올해의 선수상도 수상했다.
브라질 대표팀에서도 1970 브라질 월드컵 우승에 크게 공헌한 토스탕은 왕이라 불린 펠레의 뒤를 이어 부왕이라는 칭호로 불렸는데 히벨리누, 자이르지뉴, 카를루스 아우베르투, 제르손 등 전설적인 선수가 다수 포진했음을 감안하면 토스탕의 위상이 얼마나 높았는지 알 수 있다. 다만 망막박리라는 치명적인 안구 질환으로 인해 26세라는 어린 나이에 은퇴했는데 이는 브라질 축구계의 큰 손실이었다. 토스탕은 짧은 기간 굵은 활약을 보여줬기에 이를 인정받아 브라질 축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는 영예를 누렸다.
2위 히바우두

생년월일: 1972년 4월 19일
A매치 기록: 74경기 35골
신체조건: 키 186cm / 몸무게 73kg
주 소속팀: FC 바르셀로나
1990년대 후반~2000년대 초반 세계 최고의 선수 중 하나로 악마의 왼발이라고 불렸을 정도로 강력하면서도 정확한 왼발 킥력과 뛰어난 득점력과 찬스 메이킹 능력을 모두 겸비했으며 공이 발에 붙어 다닌다는 말이 나왔을 정도로 드리블과 볼 컨트롤 능력이 발군이었는데 피지컬마저 강했다. 종합하자면 공격수로서의 기량과 플레이메이커로서의 기량이 모두 뛰어난 완성형 선수였다.
중소 클럽인 산타크루스에서 데뷔한 히바우두는 파우메이라스에서 첫 전성기를 누리며 1994 시즌 브라질 전국 리그 우승 및 브라질 세리 A 시즌 베스트 일레븐에 2회 선전되었고 데포르티보에서는 라리가 정상급 선수로 올라섰으며 바르셀로나에서는 라리가 2회 우승을 이뤄냈고 1997-98 시즌 라리가 올해의 선수상을 수상하며 당대 라리가 최고의 선수로 군림했고 AC 밀란에서는 개인의 활약은 아쉬웠지만 2002-03 시즌 UEFA 챔피언스리그 우승을 경험했다.
브라질 대표팀에서도 파트너 호나우두와 함께 더 화려한 활약을 펼쳤던 히바우두는 1997 컨페드컵 우승을 시작으로 1998 프랑스 월드컵 준우승이라는 성적을 이뤄냈고 1999년 코파 아메리카에서는 팀의 에이스로 활약해 득점왕과 MVP를 석권하며 우승에 크게 공헌해 트레블 팀 에이스인 베컴을 제치고 발롱도르와 피파 올해의 선수상, 그리고 월드 사커지 선정 올해의 선수상을 모두 수상했다. 그리고 2002 한일 월드컵에서는 호나우두, 호나우지뉴와 삼각 편대를 구성해 월드컵 우승을 이뤄냈으며 대회 올스타 팀과 실버슈를 수상했다.
1위 펠레

생년월일: 1940년 10월 23일
A매치 기록: 92경기 77골
신체조건: 키 173cm / 몸무게 75kg
주 소속팀: FC 산투스
명실상부 축구 역사상 최고의 선수로 압도적인 운동신경과 훌륭한 축구 지능은 물론 공격수로서 필요한 모든 능력을 가지고 있었던 역대 최고의 스코어러이자 플레이메이커였다.
산투스를 구단 역사 최고의 황금기로 이끈 펠레는 팀의 에이스로 주립리그인 캄페오나투 파울리스타에서 10번이나 우승했으며 전국리그에서도 5연패를 포함한 6회 우승을 달성했다. 코파 리베르타도레스와 인터콘티넨탈컵에서도 2연패를 기록하며 당대 최강의 팀으로 군림했다. 특히 1962년에는 주립리그인 캄페오나투 파울리스타와 전국리그를 모두 석권함은 물론 코파 리베르타도레스는 당대 남미 최강의 팀인 페냐롤을 꺾으며 트레블을 달성했고 추가로 인터콘티넨탈컵에서는 유럽 최강의 팀인 에우제비우의 벤피카를 꺾는 기염을 토했다.
1958 스웨덴 월드컵에서 팀을 월드컵 우승으로 이끌고 신인상과 실버볼을 차지했다. 이후 1970 멕시코 월드컵에서는 절륜한 플레이메이킹을 보내며 역대 최고의 대표팀이라는 수식어와 함께 예선과 본선에서 전승 우승하며 대회 MVP를 수상하며 우월함이 무엇인지 만천하에 보여줬다.
펠레는 프랑스 풋볼이 추산한 명예 발롱도르를 7회 수상했으며 1959년에는 공식전과 비공식전을 합쳐 127골을 득점하며 FIFA 집계 한 해 최다 득점으로 기록되었으며 월드컵 3회 우승을 달성한 유일한 선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