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의 주관적인 순위입니다.
*선수 사진은 대부분 플레이어스 유저인 법정스님의 소유님의 건조폼 입니다. 다만 법정님이 만들지 않은 선수들은 제가 만들었습니다.
*기록일은 2025년 4월 2일 기준입니다.
30위 프레드

생년월일: 1983년 10월 3일
A매치 기록: 39경기 18골
신체조건: 키 185cm / 몸무게 84kg
주 소속팀: 플루미넨시
2000년대 중반~2010년대 초반, 브라질 무대에서 이름을 날린 스트라이커로 날카로운 타이밍에 적절한 위치에 침투한 뒤에 정밀도 높은 슈팅으로 마무리하는 박스 안의 여우와 같은 스타일의 공격수로 슈팅 기술과 헤더 역시 준수했지만 연계에 강점을 보여주지는 못했다.
아메리카 미네이루에서 데뷔해 프로 데뷔 즉시 브라질 리그 역대 최단 시간 득점을 기록했고 크루제이루로 이적한 뒤에 첫 두각을 나타낸 프레드는 리그앙의 지배자 올림피크 리옹으로 이적해 리그앙 3연패를 이뤄냈으나 유망주인 벤제마와의 경쟁에서 패배했고 구단과의 불화도 증폭되며 플루미넨시로 이적했는데 그곳에서 전성기를 누리며 브라질 세리 A 2회 우승과 캄페오나투 카리오카 2회 우승을 이뤄냈고 브라질 세리 A 올해의 팀 2회 선정 및 득점왕 3회 수상은 물론 2012년에는 올해의 팀과 득점왕에 이어 브라질 세리 A 올해의 선수까지 수상했다.
브라질 대표팀에서도 백업으로 소집된 프레드는 2006 독일 월드컵에서는 호나우두와 아드리아누의 백업으로 대기했고 2007 코파 아메리카에서도 백업으로 우승을 경험하다가 경쟁자 파비아누가 무너진 2010년대 초반에는 주전으로 활약하며 2013 컨페더레이션스컵에서는 이탈리아전 멀티골과 우루과이전 선제골, 그리고 결승전 스페인전 멀티골로 조국의 우승을 이끌며 FIFA 컨페더레이션스컵 실버슈 수상 및 드림팀에 선정되었다. 그러나 2014 브라질 월드컵에서는 부상을 달고 뛰면서 부진했고 결국 미네이랑의 비극을 이끈 주범으로 몰려 불명예스럽게 대표팀에서 물러났다.
29위 왈테르 카사그란지

생년월일: 1963년 4월 15일
A매치 기록: 19경기 8골
신체조건: 키 191cm / 몸무게 82kg
주 소속팀: 코린치안스
1980년대 중반~90년대 초반 브라질 무대에서 명성을 떨친 장신의 타겟 스트라이커로 우수한 제공권 경합 능력은 물론 둔탁한 체구와 투박할 것 같은 겉모습과는 다르게 빠른 스피드와 우수한 드리블까지 겸비했으며 특히 상대방을 완벽하게 속이는 더미 플레이에 능해 오늘날의 카이 하베르츠와 유사하게 펄스 나인과 유사한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코린치안스에서 데뷔해 소크라치스와 함께 공격 듀오를 이끌었던 카사그란지는 캄페오나투 파울리스타 2회 우승을 이뤄냈음은 물론 1982년에는 리그 우승에 이어 카사그린지 개인도 28골을 터트리며 득점왕에 올랐다. 유럽 무대에서는 FC 포르투에서는 실패했지만 세리에 A의 중하위권 클럽인 아스콜리와 토리노에서는 준수한 모습을 보이며 2011년에 풋볼 이탈리아가 선정한 1980년대 이후 세리에 A 최우수 외국인 선수 50인 명단에 선정되기도 했다.
1985년부터 1986년까지 브라질 대표팀에서도 주축으로 활약한 카사그란지는 1986 멕시코 월드컵에서 카레카의 파트너로 3경기에 출전해 조국의 8강행에 기여했으나 포르투에서 실패한 이후에는 호마리우와 베베투, 뮬레르와 같은 후배들에게 카레카의 파트너 자리를 내줬다.
28위 발타자르 마리아 데 모라이스

생년월일: 1959년 7월 17일
A매치 기록: 6경기 2골
신체조건: 키 178cm / 몸무게 73kg
주 소속팀: 그레미우
1970년대 후반~80년대에 활약했던 독실한 천주교인 스트라이커로 팬들로부터 신의 스트라이커라 불렸던 선수인데 부드러운 발밑 테크닉과 강인한 운동능력, 그리고 적절한 위치선정과 한 박자 빠른 오른발 슈팅력을 자랑했던 고전적인 9번 유형의 공격수였다.
아틀레치쿠 고이아니엔시에서 데뷔해 데뷔 첫 시즌부터 캄페오나투 고이아누에서 득점왕을 차지한 발타자르는 그레미우로 이적해서 첫 전성기를 누리며 캄페오나투 가우슈 2회 우승 및 1981년 브라질 세리 A 우승을 이뤄냈고 발타자르 개인도 캄페오나투 가우초 득점왕에 2년 연속으로 올랐고 이때 대표팀에도 종종 소집되었다. 그러나 이후 파웨이라스와 플라멩구, 보타포구에서는 돋보이는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
스페인의 셀타 비고에서 부활에 성공한 발타자르는 히우 데 자네이루주와 상파울루 주애서 겪은 부진을 완벽하게 씼어냈는데 비록 이적 첫 해에 팀은 강등당했지만 두 번째 시즌에는 44경기에 나서 34골을 득점하며 세군다리가 득점왕 및 팀의 라리가 승격을 이뤄냈고 1988-89 시즌에는 아틀레티코 마드리드로 이적해서 이적 첫 해에 라리가 36경기 35골을 기록하며 레알 마드리드의 우고 산체스와 바르셀로나의 훌리우 살리나스를 제치고 득점왕에 올랐고 말년에는 일본의 교토 퍼플 상가로 이적해 활약했다.
27위 누네스

생년월일: 1954년 5월 20일
A매치 기록: 6경기 2골
신체조건: 키 178cm / 몸무게 70kg
주 소속팀: 플라멩구
플라멩구의 최전성기에 활약했던 골잡이로 전성기는 길지 않았지만 전성기에는 빼어난 활약을 펼쳤는데 상대 뒷공간을 허무는 재빠른 스피드와 박스 안에서 상대의 예측을 불허하는 슈팅과 동물적인 골감각으로 이름을 날리며 팬들로부터 결정적인 포병이라 불렸다.
플라멩구에서 3회에 걸쳐 활약하며 구단 통산 득점 6위에 랭크된 누녜스는 지쿠, 주니오르 등과 함께 팀의 전성기를 이끌며 캄페오나투 카리오카 2회 우승 및 브라질 세리 A 2회 우승을 포함해 18회의 우승을 이뤄냈고 1981년에는 주립리그 우승은 물론 코파 리베르타도레스와 인터콘티넨탈컵 우승을 이뤄내며 한 해 동안 친선 대회 포함 총 7개의 대회에서 우승을 이뤄냈다.
특히 1981년에는 인터콘티넨탈컵에서는 붉은 제국 리버풀이 자랑하는 골키퍼 클레멘스를 완벽하게 농락하며 멀티골을 기록해 3-0 대승에 큰 공을 세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나미치와 슐리파라는 큰 산을 넘지 못해 브라질 대표팀에는 거의 소집되지 못했다.
26위 마리우 자르데우

생년월일: 1973년 9월 18일
A매치 기록: 10경기 1골
신체조건: 키 188cm / 몸무게 76kg
주 소속팀: FC 포르투
1990년대와 2000년대 초반 유럽 무대에서 활약한 브라질 공격수로 특히 포르투갈 리그에서 우수한 활약을 보여줬으며 절묘하게 빈 공간을 파고드는 라인 브레이킹과 우수한 퍼스트 터치, 그리고 날카로운 양발 슈팅과 헤더를 앞세워 수많은 득점을 기록했다.
바스쿠 다 가마에서 백업 멤버로 캄페오나투 카리오카 3연패를 경험했지만 두각을 나타내지 못하고 그레미우로 임대를 떠나서야 첫 전성기를 누린 자르데우는 팀의 주포로 도약하며 캄페오나투 가우슈 2회 우승을 이뤄냈고 1995년에는 공식전 64경기에 출전해 42골을 기록하며 캄페오나투 가우슈에 이어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우승과 득점왕을 동시에 이뤄냈다.
그레미우를 거쳐 FC 포르투로 이적한 뒤에는 본격적으로 전성기를 누린 자르데우는 듀를로비치와 콤비 플레이로 포르투에서 활약하며 드라강스 군단의 프리메이라 리가 3회 우승과 타사 데 포르투갈 2회 우승과 슈퍼컵 3회 우승을 이뤄냈음은 물론 1999-2000 시즌에는 UEFA 챔피언스리그 득점왕에 올랐고 갈라타사라이를 거쳐 스포르팅 리스본에서도 두 시즌 동안 62경기 69골을 기록했는데 포르투와 스포르팅을 합쳐서 프리메이라 리가 득점왕 5회 수상, 타사 드 포르투갈 득점왕 3회 수상, 포르투갈 골든볼 3회 수상을 이뤄냈고 특히 1998-99 시즌과 2001-02 시즌에는 각각 정규리그 36골과 42골을 득점하며 유러피언 골든슈를 수상했다.
25위 와우두 마차도

생년월일: 1934년 9월 9일
A매치 기록: 5경기 2골
신체조건: 키 178cm / 몸무게 72kg
주 소속팀: 플루미넨시
1950년대에는 브라질 무대에서 이름을 날렸고 1960년대에는 스페인 무대에서 이름을 날렸던 스트라이커로 빠른 스피드와 환상적인 테크닉을 이용한 개인기는 물론이고 정밀도 높은 오른발 슈팅으로 득점에도 능했던 화려한 공격수였으며 주 포지션인 스트라이커 이외에도 인사이드 포워드와 양쪽 아웃사이드 포워드도 소화할 수 있었다.
마두레이라 EC에서 데뷔 첫 해에 주목받아 플루미넨시로 이적해 첫 전성기를 누린 마차도는 공식전에서만 319골을 기록하며 구단 통산 최다 득점자에 올랐음은 물론 1956년 캄페오나투 카리오카 득점왕 수상, 1959년 캄페오나투 카리오카 우승 및 토르네이우 히우상파울루 2회 우승을 이뤄냈으며 1960년에는 펠레의 파트너 중 한 명으로 브라질 대표팀에 부름을 받기도 했으나 최종적으로는 다시 브라질에 돌아온 바바에게 밀려났다.
브라질 대표팀과 멀어지자 스페인의 발렌시아로 이적한 마차도는 공식전에서만 160골을 터트리며 구단 통산 득점 2위에 랭크되었음은 물론 박쥐군단의 공격을 이끌며 인터시티 페어스컵 2회 우승과 1966-67 시즌 코파 델 레이 우승을 이뤄냈고 1966-67 시즌에는 라리가 득점왕에게 수상하는 피치치 트로피를 수상하며 1960년대 하반기 라리가를 대표하는 공격수로도 이름을 날렸다.
24위 툴리우 마라빌랴

생년월일: 1969년 6월 2일
A매치 기록: 15경기 13골
신체조건: 키 175cm / 몸무게 70kg
주 소속팀: 보타포구
본명은 툴리우 움베르투 페헤이라 코스타였으나 공식 경기 통산 500골 이상 득점한 역사상 몇 안 되는 공격수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슈팅스킬과 정확한 위치선정으로 유명세를 떨쳤고 그림 같은 원더골을 많이 넣어 마라빌라, 즉 '경이로운'이라는 별명으로 불렸으며 골키퍼를 제치고 골라인 바로 앞에서 공을 한 번 띄운 뒤 힐킥으로 마무리하는 플레이로도 유명했는데 이때문에 '툴레타'라고도 불렸다.
브라질 무대의 여러 클럽을 떠돌아다는 마라빌라는 데뷔한 첫 클럽인 고이아스에서는 캄페오나투 고이아스 3연패를 이뤄냈고 보타포구에서는 1995년 세리 A 우승을 이뤄냈으며 코린치안스에서는 1997년 캄페오나투 파울리스타 우승을 이뤄냈고 크루제이루에서는 1998년 레코파 수다메리카나 우승을 이뤄내는 등 브라질 무대에서 주로 활약했다.
특히 득점왕과 인연이 깊었던 마라빌라는 1989년에는 고이아스에서, 1994년과 1995년에는 보타포구에서 득점왕에 올랐으며 브라질 세리 A 베스트 일레븐에 3회 선정되었고 3개의 주립 리그에서 7회 득점왕에 올랐으며 2000년대에는 하부리그에서도 득점왕에 오르며 세리 A부터 세리 C까지 모든 리그에서 득점왕을 차지하는 데 성공해 브라질 1~3부 리그에서 모두 득점왕을 차지한 역사상 유일한 선수가 되었다.
1990년대 상반기 브라질 대표팀에서도 호마리우에 이어 2옵션으로 종종 소집되던 마라빌라는 1995년 코파 아메리카에 참가해 콜롬비아, 아르헨티나, 그리고 결승전 우루과이전에서 모두 득점하며 조국의 준우승을 이끌었지만 호나우두, 호마리우, 히바우두, 베베투와 같은 기라성과도 같은 공격수들에 밀려났기에 월드컵과의 인연은 없었다.
23위 루이스 파비아누

생년월일: 1980년 11월 8일
A매치 기록: 45경기 28골
신체조건: 키 185cm / 몸무게 85kg
주 소속팀: 세비야 FC
2000년대 후반 브라질 대표팀의 최전방을 책임진 양발잡이 스트라이커로 화려함은 선배들에 비해 부족했지만 안정적인 볼 컨트롤과 우수한 양발 슈팅을 겸비했으며 동료들을 활용한 연계 플레이와 헌신적인 전방 압박으로 이름을 날렸다.
AA 폰치 프레타에서 데뷔해 스타드 렌에서는 부진했지만 다시 상파울루로 돌아와서 기량을 회복한 파비아누는 이곳에서 커리어의 첫 전성기를 보내며 2001 토르네오 히우상파울루 우승을 이뤄냈음은 물론 2002년에는 브라질 세리 A 득점왕을, 2003년에는 캄페오나투 파울리스타 득점왕과 브라질 세리 A 시즌 베스트 일레븐에 선정되었다.
상파울루에서 부활에 성공한 뒤에는 포르투를 거쳐 세비야에 입단하며 제2의 전성기를 누린 파비아누는 2005-06 시즌 UEFA컵 결승전에서 미들즈브러를 상대로 선제골을 기록해 4-0 대승을 이끌며 우승을 이뤄낸 것을 시작으로 2006년 UEFA 슈퍼컵에서는 바르셀로나를 격추해서 우승했고 2006-07 시즌에는 코파 델 레이와 UEFA컵 더블 우승을, 2007-08 시즌에는 파비아누 개인이 라리가 올해의 팀에 선정되었으며 2008-09 시즌에는 코파 델 레이 득점왕에 올랐고 2010년에는 통산 두 번째 코파 델 레이 우승을 이끌었다. 그리고 다시 상 파울루로 돌아온 파비아누는 2012년 코파 수다메리카나 우승을 이뤄내는데 공헌했으며 2012년 코파 데 브라질 득점왕에 올랐고 2014년에는 캄페오나투 파울리스타 득점왕에 올랐다.
브라질 대표팀에서도 2004 코파 아메리카에서 호나우두 대신 출전해 아드리아누와 환상의 호흡을 보여줬고 이후 아드리아누의 탈선으로 인한 슬럼프와 프레드의 부진으로 생긴 스트라이커의 공백을 잘 메워내며 2009 컨페드컵에서 득점왕에 오르는 등 조국의 우승에 큰 공을 세워 골든슈와 실버볼을 동시에 수상하며 다음 월드컵에 대한 기대감을 불태우게 했고 2010 남아공 월드컵에서도 중원의 부진에도 불구하고 파비아누는 제 역할을 다 하며 대회에서 3골을 기록했다. 그러나 브라질 팬들을 만족하게 만들지는 못해서 대표팀에서 활약하긴 어려워졌다.
22위 토니뉴 게헤이루

생년월일: 1942년 8월 10일
A매치 기록: 2경기 4골
신체조건: 키 170cm / 몸무게 71kg
주 소속팀: 산투스 FC
펠레의 파트너를 두고 코치뉴와 로테이션으로 활약했던 스트라이커로 효율적인 원터치 플레이와 높은 수준의 공간 지각력을 바탕으로 상대의 페널티 박스로 효율적으로 침투했으며 우수한 슈팅 테크닉을 바탕으로 다양한 원더골을 보여줬다.
산투스에서 전성기를 누리며 구단 통산 득점 4위에 오른 게헤이루는 파강의 대체자로 입단해 1963 코파 리베르타도레스와 인터컨티넨탈컵 우승을 경험한 것을 시작으로 캄페오나투 파울리스타 5회 우승과 토르네이오 리우상파울루 컵 3회 우승, 그리고 전국 리그 3회 우승을 이뤄냈으며 개인적으로도 1966년 캄페오나투 파울리스타와 브라질 전국리그 득점왕에 올라 팀 동료 펠레의 캄페오나투 파울리스타 10회 연속 득점왕의 대기록을 세우는 것을 막아내기도 했다.
상 파울루 FC로 이적한 뒤에도 뛰어난 퍼포먼스를 보인 게헤이루는 캄페오나투 파울리스타 2회 우승을 이뤄내며 13년 만에 무관에서 탈출을 도왔고 게헤이루 개인도 두 차례 주립 리그 득점왕에 올랐으며 1972년 코파 리베르타도레스에서는 6골을 득점하며 득점왕에 올랐다.
21위 세르지뉴 슐라파

생년월일: 1953년 12월 23일
A매치 기록: 20경기 8골
신체조건: 키 191cm / 몸무게 82kg
주 소속팀: 상 파울루
1970년대와 80년대에 걸쳐 브라질 무대에서 이름을 날린 장신 스트라이커로 비록 오른발을 거의 쓰지 못했지만 압도적인 피지컬을 바탕으로 포스트 플레이에 능해 헤더로 직접 득점하거나 머리로 공을 떨궈주며 다른 공격수에게 기회를 만들어주는 역할에 모두 능했으며 강력하면서도 정확한 왼발 슈팅으로도 이름을 날렸다. 오늘날의 선수와 비교하면 올리비에 지루와 유사한 플레이스타일을 보여줬다.
상파울루 FC에서 데뷔해 10년간 활약하며 구단 통산 최다 득점자에 오른 슐라파는 트리컬러 파울리스타에 머무는 동안 캄페오나투 파울리스타 3회 우승과 1977 브라질 세리 A 우승을 이뤄냈음은 물론 1983년에는 브라질 세리 A 득점왕을 차지하기도 했고 같은 주의 산투스로 이적한 뒤에도 전성기를 이어나가며 1984년 캄페오나투 파울리스타 우승을 이뤄냈음은 물론 해당 대회 득점왕에 올랐는데 상 파울루에서 3회, 산투스에서 1회로 총 4회의 캄페오나투 파울리스타 득점왕에 올랐다.
브라질 대표팀에서도 지나미치와 치열하게 경합한 슐라파는 1979 코파 아메리카와 1982 스페인 월드컵에 출전했는데 특히 1982 스페인 월드컵에서는 1970년의 셀레상 이후로 가장 강한팀이라는 평가를 받았던 팀에 주전 공격수로 활약하며 1차 조별리그 뉴질랜드 전과 2차 조별리그 아르헨티나전에서 득점했지만 4강 진출이 걸린 이탈리아와의 경기에서는 지쿠, 파우캉, 소크라치스가 만든 수많은 찬스를 날려 비판받기도 했는데 심지어 브라질 국내에서는 1982 스페인 월드컵에서의 실패를 온전히 그의 탓으로 돌리는 사람들도 있을 정도로 한동안 민심이 좋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