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의 주관적인 순위입니다.
*선수 사진은 대부분 플레이어스 유저인 법정스님의 소유님의 건조폼 입니다. 다만 법정님이 만들지 않은 선수들은 제가 만들었습니다.
*기록일은 2025년 3월 23일 기준입니다.
10위 지르세우

생년월일: 1952년 6월 15
A매치 기록: 44경기 7골
신체조건: 키 172cm / 몸무게 68kg
주 소속팀: 아틀레티코 마드리드
1970년대 중반부터 80년대 초반까지 브라질과 스페인, 그리고 이탈리아에서 이름을 날렸던 공격형 미드필더로 양발을 자유자재로 쓸 수 있었던 양발잡이로 양발 모두를 사용하는 중거리 슈팅은 물론 온 더 볼 상황에서 빠른 드리블로 상대 수비를 교란했으며 정확한 판단력에서 나오는 날카로운 패스로 찬스를 만드는 부분에도 뛰어났으며 데드볼 상황에서도 득점으로 곧잘 연결시키는 데드볼 스페셜리스트이기도 했다.
코르티바에서 캄페오나투 파라나엔세 2회 연속 우승을 이뤄내며 명성을 얻은 지지뉴는 플루미넨시와 바스쿠 다 가마에서는 캄페오나투 카리오카에서 각각 1회 우승과 2회 우승을 이뤄냈고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에서는 비록 우승을 이뤄내지는 못하지만 절정의 기량을 과시하며 팀의 에이스로 3년간 군림했으며 이탈리아 무대에서는 베로나에서 활약하던 시절인 1982-83 시즌과 코모에서 활약하던 1985-86 시즌에 구에린 스포르티보가 채점한 세리에 A 외국인 선수 평점 5위 안에 들었을 정도로 개인의 실력을 인정받았다.
클럽 무대에서보다도 셀레상에서 더 큰 존재감을 보여준 지르세우는 황금 세대 멤버들 다수가 대표팀에서 물러난 시점에서 1974 서독 월드컵에서 팀의 4위라는 성적을 이끌었고 1978 아르헨티나 월드컵에서는 팀이 무패로 3위를 하는데 크게 공헌해 브론즈볼을 타냈는데 특히 페루전에서 멋진 프리킥골을 보여줬기에 이 대회에서의 활약을 바탕으로 1978 남미 올해의 선수상 투표에서 3위를 차지했다. 그리고 1982 스페인 월드컵에서도 황금의 사중주의 백업으로 활약했다.
9위 파울루 세자르 카주

생년월일: 1949년 6월 16일
A매치 기록: 57경기 10골
신체조건: 키 174cm / 몸무게 74kg
주 소속팀: 보타포구
특유의 큰 코로 인해 강철 코, 못생긴 독수리라 불렸던 선수로 1960년대 후반과 70년대 브라질 무대에서 이름을 날렸는데 우수한 축구 지능을 토대로 다양한 포지션에서 자유자재로 활약할 수 있었으며 공격 진영에서 다른 공격자원들과의 환상적인 연계 플레이는 물론 상대 수비수의 혼을 빼놓은 화려한 드리블과 완벽한 득점 찬스를 만드는 킬러 패스로도 이름을 날렸다.
보타포구, 플라멩구, 그리고 플루미넨시에서 모두 전성기를 누린 카주는 보타포구에서는 캄페오나투 카리오카 2회 우승과 1968 시즌 브라질 전국 리그 우승을 이뤄냈으며 플라멩구에서도 캄페오나투 카리오카 2회 우승을 추가했고 플루미넨시에서도 캄페오나투 카리오카 2회 우승을 이뤄내며 개인 통산 캄페오나투 카리오카 6회 우승을 이뤄냈다. 카주 개인도 브라질 세리 A 대회 베스트 일레븐에 4회 선정되었고 그레미우에서도 캄페오나투 가우초 2회 우승을 이뤄냈으며 유럽 무대의 마르세유에서도 한 시즌 머물렀지만 좋은 모습을 보이며 다양한 팀에서 큰 족적을 남겼다.
1970 멕시코 월드컵의 셀레상에 백업 멤버로 참가한 카주는 에두와 함께 펠레, 자이르지뉴, 토스탕, 히벨리누를 받치는 백업으로 예선과 본선 전승 우승에 기여했고 1974 서독 월드컵에서는 주전 선수로 도약해 뛰어난 퍼포먼스를 선보이며 대회 4위라는 성적을 이뤄냈다.
8위 아데미르 다 기아

생년월일: 1942년 4월 3일
A매치 기록: 9경기 0골
신체조건: 키 180cm / 몸무게 74kg
주 소속팀: 파우메이라스
브라질 축구 역사상 최고의 센터백인 도밍구스 다 기아의 아들이자 1960년대 남미 최고의 공격형 미드필더 중 한 명으로 유려한 볼 컨트롤 능력과 세련된 패싱력과 간결한 연계 능력을 바탕으로 골 찬스를 만드는데 능했다.
파우메리아스에서 선수생활의 대부분을 보내며 구단 통산 최다 출전자로 902경기에 출전해 153골을 기록한 아데미르 다 기아는 구단의 전성기를 이끌며 캄페오나투 파울리스타 5회 우승과 브라질 전국리그 4회 우승, 그리고 타사 브라질 1회 우승과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준우승을 이뤄내며 팬들로부터 O Divino, 신이라고 불렸으며 1972년 남미 올해의 선수상 투표에서 5위를 랭크했다.
다만 셀레상에서는 전술 문제로 인해 오랜 기간 주전 자리를 차지하지 못했던 아데미르 다 기아는 1974 서독 월드컵에서 주전으로 활약하며 팀을 4위로 이끌며 호부호자의 명성을 이어갔다.
7위 하이

생년월일: 1965년 5월 15일
A매치 기록: 49경기 17골
신체조건: 키 189cm / 몸무게 87kg
주 소속팀: 상 파울루
브라질의 황금의 사중주의 일원인 소크라치스의 동생으로 형 소크라치스와 마찬가지로 키가 컸으나 마른 체형이었던 형과 다르게 다부진 체형으로 몸싸움에서 장점을 드러냈으며 형보단 못했지만 그래도 브라질 대표팀 주전 경쟁 정도는 거뜬한 수준의 세련된 볼 컨트롤과 전진드리블 능력의 소유자였으며 드넓은 시야와 우수한 킥력을 토대로 골 찬스를 만드는 회심의 롱패스로 득점 찬스를 만들거나 강력한 슈팅으로 직접 골문을 노리는 부분에도 능했다.
텔레 산타나 체제에서 상 파울루가 구단의 황금기를 구가하던 시절에 팀의 플레이메이커로 활약한 하이는 캄페오나투 파울리스타 6회 우승과 1991 시즌 브라질 세리 A 우승, 그리고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2연패를 이뤄냈으며 특히 1992년에는 아름다운 축구로 유럽 무대를 제패했던 크루이프의 바르셀로나를 상대로 더 아름다운 축구를 보여준 하이는 본업인 플레이메이킹 이외에도 멀티골을 득점하며 상파울루의 2-1 승리를 이끌며 인터콘티넨탈컵 MVP와 1992년 남미 올해의 선수를 수상했다.
유럽 무대의 파리 생제르맹으로 이적한 뒤에도 구단의 핵심으로 활약하며 1993-94 시즌 리그앙 우승과 UEFA 챔피언스리그 4강 진출일 이뤄냈으며 쿠프 드 프랑스와 리그컵을 각각 2회 우승을 이끌어냈으며 1995-96 시즌에는 UEFA 컵 위너스컵 우승을 이뤄냈으며 그 시즌에 ESM 올해의 팀에도 선정되는 영예를 누렸다.
형 소크라치스와 마찬가지로 대표팀에서도 중추로 활약했던 하이는 1987 코파 아메리카에서 데뷔해 1991 코파 아메리카에서 준우승을 이뤄냈고 1994 미국 월드컵에서는 조별 리그에서는 주전으로 활약했으나 카를루스 아우베르투 파헤이라 감독이 토너먼트에서는 수비에 더 중점을 두기 위해 마지뉴를 중용하면서 백업 멤버로 밀려나 주장 완장을 둥가에게 양보했다.
6위 자이르 다 호사

생년월일: 1921년 3월 21일
A매치 기록: 39경기 22골
신체조건: 키 168cm / 몸무게 62kg
주 소속팀: 파우메리아스
무려 20년 가까이 브라질에서 맹위를 떨쳤던 인사이드 포워드이자 공격형 미드필더로 전광석화와 같은 스피드와 유려한 볼 컨트롤 능력을 겸비했으며 프로 통산 450골을 넘게 득점했을 정도로 득점력도 대단한 완성형 인사이드 포워드였다.
마두레이라 시절부터 브라질 정상급 인사이드 포워드로 명성을 날린 자이르 다 호사는 바스쿠 다 가마, 플라멩구, 파우메리아스, 산투스에서 모두 정상급 선수로 이름을 날렸는데 3개의 주립 리그에서 7회 우승을 기록하는 기염을 토했고 1951년에는 파우메리아스 소속으로 유럽과 남미의 강팀이 참여한 토너먼트인 코파 리우에서 데니쉬 트리오를 앞세운 유벤투스를 꺾고 우승을 이뤄내는데 큰 역할을 했다. 그리고 노장으로 접어들었을 때에는 산투스에서 자신보다 19살 어린 초신성 펠레와 같이 인사이드 포워드로 호흡을 맞추기도 했다.
브라질 대표팀에서도 지지뉴, 아데미르와 함께 중용받은 자이르 다 호사는 1949 코파 아메리카에서도 결승전 멀티골을 포함해 8경기에서 9골을 기록하며 득점왕에 오르는 퍼포먼스를 보여주며 우승을 이뤄냈고 1950 브라질 월드컵에서도 지지뉴와 바스쿠 다 가마의 삼각 편대와 조합을 맞추며 압도적인 공격력을 선보였나 결승 리그 마지막 경기에서 우루과이에게 일격을 당하며 빛이 바랬다.
5위 소크라치스

생년월일: 1954년 2월 19일
A매치 기록: 60경기 22골
신체조건: 키 192cm / 몸무게 80kg
주 소속팀: 코린치안스
1980년대 브라질을 호령하던 축구선수이자 민주화 운동가이며 동시에 훌륭한 의사였던 축구계를 넘어 브라질 사회의 거물로 지쿠, 마라도나, 보치니와 함께 당대 남미를 수놓은 공격형 미드필더였는데 농구선수를 했어도 잘했을 거라는 평가를 받을 정도로 드리블이 훌륭했으며 뒤에도 눈이 달려있다는 평가를 받았을 정도로 드넓은 시야와 창의적인 패싱력을 겸비한 플레이메이킹 능력을 보여줬으며 양발을 모두 잘 써 뛰어난 슈팅력을 보여줬음은 물론 의사 면허를 땄을 정도로 지적이며 냉정한 성격이라 어려운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았다.
코린치안스에서 전성기를 누린 소크라치스는 캄파오네투 파울리스타에서 3회 우승을 이뤄냈고 1980년에는 브라질 세리 A 베스트 일레븐에 선정되었고 1983년에는 공식 경기 52경기에 출전해 무려 36골을 득점하며 남미 올해의 선수상을 타내는 우수한 활약을 보여줬다. 유럽 무대의 피오렌티나에서도 뛰어난 모습을 보여줬지만 향수병으로 인해 브라질 무대로 복귀하며 플라멩구로 이적해 캄페오나투 카리오카 1회 우승을 이뤄내기도 했으며 브라질 무대에 머무는 동안 1983년 남미 올해의 선수상을 수상했고 월드 사커지 선정 월드 일레븐 3회 선정되었다.
셀레상에서는 1982 스페인 월드컵을 앞두고 브라질 전국 리그에서는 라이벌리를 형성한 지쿠, 파우캉, 세레주와 함께 황금의 사중주를 구성한 소크라치스는 주장으로 이들을 이끌며 1970 브라질에 버금간다는 평가를 받았으나 정작 대회 2차 리그에서 탈락했다. 그리고 1983 코파 아메리카에서는 준우승에 그쳤으며 이후 1986 멕시코 월드컵에서도 승부차기 끝에 8강에서 탈락하는 등 결과적으로는 좋지 못했지만 팬들에게 우수한 퍼포먼스 자체는 인정을 받았다.
4위 카카

생년월일: 1982년 4월 22일
A매치 기록: 90경기 29골
신체조건: 키 186cm / 몸무게 73kg
주 소속팀: AC 밀란
2000년대 하반기 브라질을 대표했던 트레콰르티스타이자 축구 선수로 화려한 볼 컨트롤 능력과 창의적인 킬패스는 물론 일명 치고 달리기를 활용해 역습 상황에서 상대 수비 라인을 순식간에 붕괴시키고 1선으로 침투해 득점하는 데 굉장히 능했으며 그의 스피드가 어찌나 빨랐던지 인테르의 전설적인 수비수 왈테르 사무엘은 카카의 연속적인 방향 전환을 따라가려다가 무릎이 돌아가버려 시즌 아웃을 당하는 굴욕을 당하기도 했다.
AC 밀란에서 전성기를 보낸 카카는 상 파울루에서 영입된 이후 후이 코스타와 히바우두 같은 거물들과의 주전 경쟁을 이기고 로쏘네리의 트레콰르티스타이자 에이스로 활약하며 2003-04 시즌에는 10골을 득점하며 세리에 A 우승을 이끌었고 2006-07 시즌에는 챔피언스리그에서만 10골 3도움을 기록하며 챔피언스리그 우승을 이끌었고 카카 개인도 득점왕과 UEFA 클럽 올해의 선수상을 석권했다. 그리고 2007-08 시즌과 2008-09 시즌에는 연속으로 리그 15골을 돌파했으며 거액의 이적료를 안겨주고 레알 마드리드로 이적했으나 레알 마드리드에서는 부상 등으로 아쉬운 활약을 보여줬다.
특히 밀란에 머무는 동안 카카의 개인상 이력은 굉장히 화려한데 2004-05 시즌 UEFA 클럽 올해의 미드필더, 2006-07 시즌 UEFA 클럽 올해의 공격수와 UEFA 클럽 올해의 선수상을 수상했으며 UEFA 올해의 팀 3회 선정, 세리에 A 올해의 외국인 3회 선정과 올해의 선수 2회 선정은 물론 발롱도르 상위 11등 안에 네 번 들어 2007년에는 1위를 차지해 발롱도르를 수상했으며 그 해에 피파 올해의 선수상과 월드 사커지 선정 올해의 선수상은 물론 옹즈도르까지 수상하며 부정할 수 없는 2007년 최고의 선수로 평가받는다.
브라질 대표팀에서도 어린 시절부터 주목받았던 카카는 한일 월드컵에서 백업으로 우승을 경험한 것을 시작으로 2005 컨페드컵 우승과 2009 컨페드컵 우승을 경험했다. 그러나 핵심으로 활약한 2006 독일 월드컵과 2010 남아공 월드컵에서 연달아 8강에서 탈락하며 아쉬운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3위 호베르투 히벨리누

생년월일: 1946년 1월 1일
A매치 기록: 92경기 26골
신체조건: 키 169cm / 몸무게 73kg
주 소속팀: 코린치안스
펠레 이후, 지쿠 이전 브라질 대표팀의 아이콘이었던 선수로 플립플랩 드리블의 시조로 화려한 드리블을 보여줬으며 원자폭탄 킥이라 불렸던 매서운 왼발 프리킥을 보여줬다. 즉 킥과 드리블, 패스에서 모두 완벽한 모습을 보이는 플레이메이커였다.
어린 시절부터 펠레 다음 세대의 브라질을 책임질 재능이라고 평가받은 호베르투 히벨리누는 첫 전성기를 누린 코린치안스에서는 산투스와 파우메이라스의 기세에 밀려 우승컵을 차지하지는 못했지만 펠레, 아데미르 다 기아, 페드로 로차와 함께 상 파울루 주의 4대 플레이메이커로 평가받았고 1971년에는 브라질 세리 A 올스타 팀에 선정되었다. 그리고 플루미넨시에서는 플라멩구의 지쿠와 치열한 접전을 벌이며 캄페오나투 카리오카 2연패를 이뤄냈다.
1970 멕시코 월드컵에서 지역예선과 본선에서 전승 우승을 거두며 화려하게 자신을 세상에 알린 히벨리누는 1970년에는 대회 올스타에 선정되었고 1974 서독 월드컵에서도 팀의 핵심 선수로 팀 공격을 이끌며 팀이 4위에 올라서는데 공헌했다. 히벨리누 개인도 남미 올해의 선수 10위 안에 5회 선정되었으며 1977년에는 개인 통산 최고 순위인 2위에 올랐고 은퇴 이후에는 브라질 축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2위 지지뉴

생년월일: 1921년 9월 14일
A매치 기록: 53경기 30골
신체조건: 키 169cm / 몸무게 63kg
주 소속팀: 플라멩구
펠레 이전 브라질 축구의 아이콘이었던 선수로 인사이드 포워드에게 필요한 모든 덕목을 가지고 있던 창의적인 플레이메이커로 이름을 날렸으며 이외에도 하프백이나 전방 공격수로도 훌륭한 모습을 보여줄 수 있었던 선수라 풋볼 마스터, 혹은 대가라는 뜻의 마에스트레라 불렸다.
플라멩구와 방구 AC에서 전성기를 누린 지지뉴는 플라멩구에서는 캄파오네투 카라오카 3회 우승을 이뤄내며 승리의 급행열차라 불리며 남미 최고의 클럽으로 군림한 바스쿠 다 가마 왕조를 잘 견제했고 전성기 이후에 상파울루에서는 캄페오나투 파울리스타 우승을 이뤄냈다. 지지뉴 개인도 방구에서 뛰던 1951년에는 캄페오나투 카리오카 득점왕에도 오르며 아데미르와 함께 브라질 최고의 스타로 군림했다.
지지뉴의 위대한 활약은 셀레상에서도 이어졌는데 코파 아메리카에 여섯 번 출전해 1949년 대회 우승과 네 번의 준우승을 기록했으며 1950 브라질 월드컵에서도 팀은 마라카냥에서 우루과이에게 패하며 준우승에 머물렀지만 지지뉴는 골든볼을 수상했다.
1위 지쿠

생년월일: 1953년 3월 3일
A매치 기록: 71경기 46골
신체조건: 키 172cm / 몸무게 68kg
주 소속팀: 플라멩구
1980년대 상반기를 수놓은 당대 최고의 선수이자 공격형 미드필더로 탄탄한 기본기와 교묘한 드리블, 창의적인 패싱 스킬과 양발 슈팅 스킬을 겸비했으며 스트라이커들을 초월하는 득점력을 보여주기도 했다. 특히 프리킥에 능해 프리킥 통산 최다골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전성기의 대부분을 플라멩구에서 보낸 구단 통산 최다 득점자 지쿠는 캄페오나투 카리오카 7회 우승과 브라질 전국리그인 세리 A 3회 우승을 이뤄냈으며 개인적으로도 캄페오나투 카리오카 득점왕 5회, 브라질 전국 리그 베스트 일레븐에 5회 선정되었고 1981년에는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결승 1차전에서 멀티골을 넣어 2-1 승리했는데 1승 1패 상황 최종전에서도 멀티골을 넣으며 2-0으로 승리하는데 크게 기여해 우승은 물론 대회 MVP를 수상했고 인터콘티넨탈컵에서는 붉은 제국이라 불리는 리버풀을 3-0으로 완파하며 대회 MVP를 수상했다. 유럽 무대 도전을 위해 이탈리아 세리에 A의 우디네세로 이적해 활약하며 1983-84 시즌 올해의 선수에 올랐으나 향수병으로 다시 플라멩구로 돌아갔으며 말년에는 J리그에서 새로운 도전을 했다.
셀레상에서는 황금의 사중주라 불렸던 미드필더 조합의 핵심으로 참가한 지쿠는 개인은 훌륭했지만 팀 성적은 아쉬웠는데 1978 아르헨티나 월드컵에서는 아르헨티나와 페루의 승부조작 의혹으로 2차 조별리그 2위로 밀려나 3위의 성적에 만족해야 했다. 그리고 1982 스페인 월드컵에서는 사상 최고의 전력이라 호평받고 본인은 대회 베스트 일레븐에 드는 활약을 보이고도 이탈리아에게 역전패하며 아쉽게 탈락했으며 1986 멕시코 월드컵에서도 만회에 실패했다.
당대 남미 축구계의 아이콘이었던 지쿠는 남미 올해의 선수상 투표에서 1977년, 1981년, 1982년, 총 3회 수상했고 1983년에는 월드 사커지 선정 올해의 선수상을 수상했고 은퇴 이후에는 브라질 축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