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유럽 축구 역사상 최고의 중앙 공격수 Top 11~20

국가의 영웅들/북유럽

북유럽 축구 역사상 최고의 중앙 공격수 Top 11~20

토르난테 2025. 3. 3. 12:14
728x90
728x90

*작성자의 주관적인 순위입니다.
*선수 사진은 대부분 플레이어스 유저인 법정스님의 소유님의 건조폼 입니다. 다만 법정님이 만들지 않은 선수들은 제가 만들었습니다.
*기록일은 2025년 3월 2일 기준입니다.

*북유럽에 해당하는 국가는 스웨덴, 덴마크, 노르웨이, 핀란드, 아이슬란드, 페로 제도 6개 국가입니다.

 


20위 하세 옙손

 


생년월일: 1925년 5월 10일
국적: 스웨덴
A매치 기록: 12경기 9골
신체조건: 키 180cm / 몸무게 70kg
주 소속팀: SSC 나폴리

한때 군나르 노르달의 후계자로 거론되었고 이탈리아 현지에서는 오늘날의 크리스티안 비에리와 유사하다는 평가를 받는 공격수로 테니스 선수를 겸직했을 정도로 운동신경이 우수했고 신체적으로도 강력했는데 특히 공중전에 뛰어났고 아크로바틱한 득점을 많이 했지만 쉬운 찬스를 놓치기로도 유명했다.

외리뤼테에서 데뷔해 유르고르덴에서 전성기를 누리며 팀의 1부 리그 승격을 이끌었고 1950-51 시즌에는 알스베스칸 득점왕에 오른 옙손은 이탈리아로 떠나 대표팀 자격을 상실한 군나르 노르달의 후계자로 1950 브라질 월드컵에 참가해 조국을 3위에 올렸는데 이때 뛰어난 활약으로 팬들로부터 황금발 하세라 불렸다.

그러나 그 역시 선배들처럼 프로 선수가 되기 위해 이탈리아 무대로 떠났는데 아탈란타를 거쳐 당대 세계 이적료인 7만 파운드의 이적료를 기록하며 나폴리로 이적했는데 이런 엄청난 이적료 때문에 나폴리 팬들은 그를 두고 나폴리의 은행이라 불렀는데 그 별명이 아깝지 않게 우수한 퍼포먼스를 선보이며 "코리에르 델로 스포츠가 선정한 세리에 A 올해의 팀에 3회 선정되었고 사후에는 스웨덴 축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19위 케네트 안데르손

 


생년월일: 1967년 10월 6일
국적: 스웨덴
A매치 기록: 83경기 31골
신체조건: 키 193cm / 몸무게 92kg
주 소속팀: 볼로냐 FC

1990년대 초중반 스웨덴 축구의 약진을 이끌었던 장신 스트라이커로 스피드가 느리고 기술적으로도 평범했지만 큰 키와 강력한 피지컬을 앞세운 제공권 경합에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했는데 카를로 안첼로티는 그를 두고 "안데르손을 공중에서 막겠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라고 평가했는데 직접 헤더로 득점하는 부분은 물론 포스트플레이로 파트너 공격수를 지원하는 부분 역시 우수했다.
 
IFK 에스킬스투나에서 데뷔해 무려 12개의 클럽을 돌아다는 저니맨인 안데르손은 IFK 예테보리에서 1990-91 시즌 도메스틱 더블 및 알스베스칸 2연패를 이뤄냈고 개인은 득점왕에 오르며 첫 주목을 받았고 볼로냐에서 전성기를 누리며 로베르토 바조와 함께 1998년 UEFA 인터토토컵 우승을 이뤄내기도 했으며 2000-01 시즌에는 페네르 바체의 튀르키에 수페르리가 우승을 이뤄내는데 공헌했다.

스웨덴 대표팀에서의 퍼포먼스가 클럽에서의 퍼포먼스보다 더 좋았던 소위 '애국자' 유형의 선수였던 안데르손은 대표팀에서 마르틴 달린, 헨리크 라르손의 파트너로 대단한 활약을 누렸는데 UEFA 유로 1992 준결승을 시작으로 1994 미국 월드컵에서는 단연 돋보이는 활약을 펼쳤는데 무려 5골을 득점하며 조국을 준결승에 올렸고 안데르손 개인은 대회 브론즈부트를 수상했다.

 

18위 요르겐 쇠렌센

 


생년월일: 1922년 9월 24일
국적: 덴마크
A매치 기록: 14경기 8골
신체조건: 키 175cm / 몸무게 80kg
주 소속팀: 아탈란타 BC

제2차 세계대전 직후 덴마크 축구계의 게으른 천재로 프로의식이 부족하고 규율을 잘 지키지 않았으며 술과 도박을 즐겼음에도 타고난 우수한 재능을 바탕으로 뛰어난 퍼포먼스를 선보였는데 강력한 왼발 슈팅과 유려한 볼 컨트롤 및 정확한 패스로 유명했으며 공격 지역 전 포지션을 뛸 수 있었고 자기관리 능력이 부족한 편임에도 활동량에서 밀리지 않았을 정도로 타고난 신체능력이 우수했다.

오덴세에서 데뷔해 주로 활약했으나 정작 우승은 잠시 B.93에서 했던 쇠렌센은 덴마크 대표팀에서도 칼 아게 프라에스트, 칼 아게 한센, 욘 한센과 함께 공격진을 구성해 활약하며 1948 런던 올림픽에서 동메달을 목에 걸었다. 그 활약을 바탕으로 세리에 A의 아탈란타로 이적해서는 덴마크 대표팀 선수인 폴 라스무센, 스벤 한센과 함께 또 다른 데니시 트리오로 활약했다. 그리고 AC 밀란에서도 군나르 그렌의 대체자 중 한 명으로 합류하며 1954-55 시즌 세리에 A 우승을 이뤄냈다. 은퇴한 뒤에는 덴마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17위 하랄트 니엘센

 


생년월일: 1941년 10월 26일
국적: 덴마크
A매치 기록: 14경기 15골
신체조건: 키 174cm / 몸무게 72kg
주 소속팀: 볼로냐 FC

1960년대 세리에 A에서 이름을 날렸던 덴마크인 스트라이커로 키는 작았지만 북유럽인 특유의 다부진 피지컬을 바탕으로 큰 수비수를 상대로도 밀리지 않았으며 우수한 위치 선정과 재빠른 스피드를 바탕으로 수비라인 배후로 침투해 원샷원킬로 마무리하는 플레이에 능했다.

프레데릭스하운에서 데뷔해 단번에 두각을 나타내며 덴마크 대표팀에 소집된 니엘센은 1959년 9월 13일 오슬로에서 노르웨이를 상대로 17세에 덴마크 국가대표팀에 데뷔했는데 이는 덴마크 대표팀 역사상 최연소 국가대표 선수였다. 그리고 1960 로마 올림픽에서는 6골을 득점하며 조국의 은메달에 공헌하며 이탈리아 축구계를 사로잡기도 했다.

결국 1961-62 시즌을 앞두고 덴마크 대표팀을 포기한 뒤에 이탈리아의 볼로냐에 입단해 전성기를 누린 니엘센은 1961 미트로파컵 우승을 이뤄냈고 그 과정에서 득점왕에 오른 것을 시작으로 1962-63 시즌에는 미트로파컵과 세리에 A에서 모두 득점왕에 올랐고 1963-64 시즌에는 볼로냐의 최전방 공격수로 활약하며 로쏘블루의 세리에 A 우승에 크게 기여했음은 물론 니엘센 개인도 저번 시즌에 이어 재차 득점왕에 올랐다.

 

16위 폴 니엘센

 



생년월일: 1891년 12월 25일
국적: 덴마크
A매치 기록: 38경기 52골
신체조건: 미상
주 소속팀: 쾨벤하우스 볼드클럽

덴마크 축구 초창기에 활약했던 스타플레이어로 화려하면서도 세밀한 볼 컨트롤과 전광석화와 같은 스피드, 그리고 대포알같은 슈팅력까지 겸비했고 기복도 적은 편이라 무수하게 많은 골을 득점했다.

선수 생활의 전부를 쾨벤하우스 볼드클럽에서 보낸 원 클럽맨 니엘센은 구단에 20년간 머물며 정규리그에서만 201경기에 출전해 276골을 기록했고 정규리그 6회 우승을 이뤄냈다.

덴마크 대표팀에서도 1912 스톡홀름 올림픽에서 조국의 은메달에 큰 공을 세운 니엘센은 100년 동안 덴마크 대표팀 A매치 통산 최다 득점자에 올라있음은 물론 쉬로서 임레에 이어 두 번째로 A매치 50골 고지를 넘었다. 사후에는 덴마크 축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15위 마르틴 달린

 


생년월일: 1968년 4월 16일
국적: 스웨덴
A매치 기록: 60경기 29골
신체조건: 키 184cm / 몸무게 84kg
주 소속팀: 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

스웨덴 국적의 흑인 출신 타켓 스트라이커로 흑인 특유의 빠른 스피드 및 탄력과 정확한 위치 선정, 그리고 강력한 몸싸움을 토대로 하는 제공권 경합에서 승리해 헤더로 득점하거나 적절한 라인브레이킹으로 상대방의 허를 찔러 골키퍼와 일대일 상황을 만드는 부분은 물론 먼 거리에서 대포알 같은 슈팅으로 직접 득점하기도 했다.

말뫼에서 데뷔해 알스베스칸 2회 우승 및 1988-89 시즌 스벤스카 쿠펜을 이뤄냈고 1988년에는 리그 득점왕에도 오른 달린은 독일의 명문 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로 이적해 슈테판 에펜베르크, 파트릭 안데르손과 함께 1990년대 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의 아이콘으로 군림했는데 1992-93 시즌의 빼어난 활약으로 굴드불렌을 수상했고 1994-95 시즌 DFB포칼 결승에서 선제골을 득점하며 우승에 큰 공을 세웠고 1995-96 시즌에는 키커지 선정 분데스리가 시즌 베스트 일레븐에 들었으나 이탈리아의 세리에 A와 잉글랜드의 블랙번 로버스에서는 적응에 실패했다.

스웨덴 대표팀에서도 주전으로서 활약한 달린은 1988 서울 올림픽에서 데뷔했는데 1990 이탈리아 월드컵에서는 나서지 못했지만 UEFA 유로 1992에서는 주전으로 도약해 조국의 준결승행을 이끌었고 1994 미국 월드컵에서도 케네트 안데르손과 함께 상대방의 골문을 맹폭하며 3위에 올랐고 여기에 클럽에서의 활약까지 더해져 키커 랑리스테 평가에서 1993-94 시즌 카커 랑리스테 평가에서 월드클래스 등급을 받았다. 상술한 활약을 인정받은 달린은 은퇴한 뒤에는 스웨덴 축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14위 랄프 에드스트룀

 


생년월일: 1952년 10월 7일
국적: 스웨덴
A매치 기록: 40경기 15골
신체조건: 키 191cm / 몸무게 85kg
주 소속팀: PSV 에인트호번

크루이프가 아약스를 떠난 뒤, 네덜란드 무대를 대표했던 공격수로 큰 키에도 유연한 몸을 가지고 있으며 우수한 왼발 슈팅 능력을 겸비해 발리 슈팅, 바이시클 킥 등 고난이도의 동작을 자유자재로 구사했으며 부드러운 볼 컨트롤 능력과 우수한 패싱력, 그리고 드넓은 시야를 바탕으로 플레이메이킹에도 능했던 오늘날의 즐라탄 이브라히모비치와 유사한 플레이스타일을 보였던 공격수였다.

데게르포르스 IF에서 데뷔해 오트비다베리 FF에서 산베리, 코르스텐손과 함께 삼각편대를 구성해 1970-71 시즌 스벤스카 쿠펜 우승과 알스베스칸 2연패를 이뤄냈고 에드스트룀 개인은 1972년 알스베스칸 득점왕에 오르며 주목받았고 PSV 에인트호번에서는 전성기를 누리며 1975-76 시즌 더블을 포함해 에레데비시와 KNVB컵에서 각각 2회 우승을 이뤄냈음은 물론 1975년에는 월드 사커가 선정한 월드 일레븐에 선정되었다. 이후 벨기에의 스탕다르 리에주에서는 벨기에 컵을, 프랑스의 AS 모나코에서는 리그앙 우승을 이뤄내며 우승 청부사로 명성을 떨쳤다.

스웨덴 대표팀에서도 주전으로 활약한 에드스트룀은 1974 서독 월드컵에서 4골을 터트리며 조국 스웨덴이 2차 조별리그 및 5위를 이뤄내는 과정에서 수훈갑을 세웠다. 1973년부터 1975년까지 3년 연속으로 발롱도르 후보에 이름을 올려 각각 9위, 10위, 14위를 기록했고 은퇴한 뒤에는 스웨덴 축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13위 아그네 시몬손

 


생년월일: 1935년 10월 19일
국적: 스웨덴
A매치 기록: 51경기 27골
신체조건: 키 180cm / 몸무게 82kg
주 소속팀: 외리뤼테 IS

군나르 노르달과 하세 옙손이 은퇴한 이후에 스웨덴 축구계를 책임졌던 센터포워드로 경기 흐름을 완벽하게 파악하는 전술안과 완성도 높은 테크닉, 그리고 긴박한 상황에서의 냉철한 판단력 및 정확하면서도 깔끔한 마무리로 유명했음은 물론이고 이를 활용해 후방으로 내려와 동료들과 연계하는 부분에서도 능숙했던 현대적인 공격수였다.

외리뤼테 IS에서 데뷔한 시몬손은 3부 리그에서부터 시작해 2부 리그와 알스베스칸 승격을 이뤄내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고 이에 스웨덴 대표팀에서도 주전으로 활약하며 닐스 리드홀름, 군나르 그렌, 쿠르트 함린 및 레나르트 스코그룬트와 함께 환상의 오각 편대를 이루며 4골을 득점해 조국에서 열린 월드컵에서 준우승을 기록했고 1959년에는 웸블리에서 잉글랜드를 3-2로 꺾어냈고 여기에 클럽에서의 활약이 더해지며 굴드불렌 수상 및 발롱도르 투표에서 5위에 오르기도 했다.

단숨에 유럽 전역에서도 손에 꼽히는 선수로 성장한 시몬센은 레알 마드리드로 이적했는데 하필이면 주전 경쟁 상대가 나이를 잊은 활약을 펼친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와 페렌츠 푸스카스여서 벤치로 몰렸고 레알 소시에다드에서도 해결책을 찾지 못하자 외리뤼테 IS로 돌아와서 활약했고 은퇴한 뒤에는 스웨덴 축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12위 헨리 카를손

 


생년월일: 1917년 10월 29일
국적: 스웨덴
A매치 기록: 26경기 17골
신체조건: 키 163cm / 몸무게 65kg
주 소속팀: AIK 포트볼

1940년대 유럽무대 정상급 인사이드 포워드 중 한 명으로 민첩한 몸놀림과 엄청난 가속력을 앞세운 빠른 스피드, 그리고 부드러우면서도 섬세한 볼 터치를 주 무기로 삼았으며 키는 작았지만 무게중심이 낮고 레슬링을 훈련했기에 경합 능력에 매우 뛰어나 헤더에서도 강점을 보였음은 물론 드넓은 시야와 정확한 패싱력 및 우수한 판단력으로 정확하게 찔러주는 패스로 득점 찬스를 만드는 부분에서도 뛰어났다.

AIK 포트볼에서 데뷔해 전성기를 보낸 카를손은 비록 리그 우승을 하지는 못했지만 군나르 노르달, 닐스 리드홀름, 군나르 그렌 다음가는 공격수로 명성을 떨쳤고 이 덕분에 스웨덴 대표팀에서도 이들과 호흡을 맞춰 1948 런던 올림픽에서 강호 오스트리아를 3-0으로 제압한 것을 시작으로 대한민국을 12-0으로 격파한 경기에서는 해트트릭을 기록했으며 라이벌 덴마크를 상대로도 그레놀리 삼총사의 침묵에도 멀티골을 기록했다. 그리고 결승전에서도 유고슬라비아를 3-1로 꺾고 우승을 차지하는데 기여했다.

그러나 칼손도 스타드 프랑세로 떠나면서 프로 선수가 되며 대표팀에 더이상 소집되지 못했는데 말년에는 엘레니오 에레라 체제의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에서 보내면서 라르비 벤바레크와 함께 팀의 공격을 지휘하며 라리가 2연패 및 1950-51 시즌에는 라리가에 이어 코파 델 레이까지 우승하며 더블을 이뤄냈다. 제2차 세계대전만 아니었어도 더 나은 커리어를 기록할 수 있는 인물이었고 실제로 세계대전이 끝난 말년에도 대단한 커리어를 이뤄냈기에 사후에는 스웨덴 축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11위 헨리크 라르손

 


생년월일: 1971년 9월 20일
국적: 스웨덴
A매치 기록: 106경기 37골
신체조건: 키 178cm / 몸무게 76kg
주 소속팀: 셀틱 FC

1990년대 하반기와 2000년대 상반기에 스웨덴 축구를 이끌었던 공격수로 키가 큰 편은 아니었지만 예술적인 볼 컨트롤과 탄탄한 바디 밸런스, 그리고 영리하게 빈 공간으로 파고들어 냉정하게 득점했으며 정신력도 우수해 상대적으로 기복도 적었다.

페예노르트와 셀틱에서 전성기를 누린 라르손은 특히 셀틱에서는 스코틀랜드 프리미어 리그 4회 우승과 4번의 컵 대회 우승 및 2002-03 시즌 UEFA컵 준우승을 이뤄냈음은 물론 라르손 개인도 리그 득점왕을 5회 차지했고 그중 2000-01 시즌에는 유러피언 골든슈에 올랐으며 1999년과 2001년에는 SFWA 올해의 선수와 SPFA 올해의 선수를 모두 석권하며 리그 최고의 선수로 군림했기에 FIFA로부터 작은 연못에 사는 큰 물고기라 불렀을 정도로 압도적인 활약을 펼쳤다.

노장의 반열에 든 뒤에 간 빅클럽에서의 활약상도 나쁘진 않았는데 FC 바르셀로나에서는 에투의 백업 스트라이커 역할을 맡으며 라리가 2연패 및 유러피언 컵 우승을 이뤄내는데 일조했으며 고국으로 복귀했다가 잠시 이적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서도 2006-07 시즌에 세 달 동안 활약하며 중요한 순간 골을 넣어주고 경기의 흐름을 바꿔주는 움직임으로 맨유의 프리미어 리그 우승에 적잖이 기여하며 임대의 신화를 썼다.

1998년과 2004년에 두 번의 굴드불렌을 수상한 라르손은  스웨덴 대표팀에서도 오랜 기간 주포로 활약했는데 1994 미국 월드컵 3,4위 결정전에서 데뷔해 불가리아를 상대로 득점하며 스웨덴의 3위를 이끌었고 이후에도 두 번의 월드컵과 세 번의 유럽 선수권 대회에 출전해 주전으로 활약해 2002 한일 월드컵에서는 나이지리아 전에서 멀티골을 득점하며 죽음의 F조에서 1위로 올라서는데 공을 세웠고 UEFA 유로 2004에서는 바이킹 군단을 8강에 올려놓았다. 은퇴한 이후에는 스코틀랜드 축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728x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