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축구 국가대표팀 역대 올스타

국대 올스타 짜보기/서유럽

독일 축구 국가대표팀 역대 올스타

토르난테 2025. 2. 23. 1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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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사항

 

2025년 2월 23일 기준입니다.

 

기존에는 대표팀 활약에 가산점을 더 부여했지만 이 부분을 제외하고 다시 선정했습니다. 즉 독일 대표팀 경력만 있으면 그 안에서는 선수 자체의 위상을 반영해 선정했습니다.

 

그러나 감독은 독일 대표팀 감독으로서의 활약을 기준으로 뒀습니다. 고로 디 만샤프트의 지휘봉을 잡은 적 없는 오트마어 히츠펠트, 위르겐 클롭, 유프 하인케스, 오토 레하겔, 우도 라테크 등은 선정 대상에서 걸러졌습니다.

 

최소한의 밸런스는 챙길 예정이며 더블 리베로를 내는 현상이나 중앙 공격수로만 세 명이 나서는 현상은 최대한 피할 예정입니다.

 

선수 사진은 에펨네이션에서 활동하고 계시는 법정스님의 소유님의 건조폼을 주로 활용했습니다.

 


1. 독일 축구 국가대표팀

 

별칭: 디 만샤프트

월드컵: 출전 19회 / 우승 4회

UEFA 유로: 출전 12회 / 우승 3회

컨페더레이션스컵: 출전 3회 / 우승 1회

하계 올림픽: 출전 9회 / 은메달 1회

최다 출전 선수: 로타어 마테우스, 150 경기

최다 득점 선수: 미로슬라프 클로제, 71골

 


2. 베스트 일레븐

 

골키퍼

 

 

이름: 마누엘 노이어
생년월일: 1986년 3월 27일

포지션: 골키퍼
A매치 기록: 124경기 118실점 / 51클린시트
신체조건: 키 193cm / 몸무게 93kg
주 소속팀: FC 바이에른 뮌헨

바이에른 뮌헨과 분데스리가 역대 최고의 골키퍼이며 골키퍼로서의 기본적인 능력은 물론, 필드 플레이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넓은 커버 범위와 훌륭한 빌드업으로 스위퍼 키퍼의 시대를 열었던 장본인인데 팀에 한 명이 더 필드에 있는 효과를 낸 노이어의 전술적 가치는 현 세대는 물론 역대로도 다른 골키퍼들과는 궤를 달리했다.

샬케에서 데뷔해 첫 전성기를 누린 노이어는 로얄 블루스의 2006-07 시즌과 2009-10 시즌에 로얄 블루스를 분데스리가 준우승을 이뤄냈고 2010-11 시즌 DFB포칼 우승과 UEFA 챔피언스리그 4강 진출에 공을 세워 독일 올해의 선수상을 수상했고. 전성기를 누린 바이에른 뮌헨에서는 분데스리가 11연패를 이뤄냈고 2012-2013 시즌과 2019-20 시즌에는 트레블을 이뤄냈는데 특히 2019-20 시즌 결승전에서는 전반 초반 파리의 네이마르, 음바페, 디 마리아의 공세를 철벽처럼 막아내며 우승에 크게 공헌했다.

디 만샤프에서도 뛰어난 활약을 펼친 노이어는 2010 남아공 월드컵과 UEFA 유로 2012 및 UEFA 유로 2016에서는 조국을 4강에 올렸고 특히 2014 브라질 월드컵에서는 스위퍼 키퍼가 무엇인지 세계에 널리 알리며 팀의 월드컵 우승에 공헌하며 대회 최우수 골키퍼로 선정되었음은 물론 골키퍼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선도한 활약을 인정받아 발롱도르 투표에서 3위에 올랐고 동시에 독일 올해의 선수상을 차지했다. 그러나 말년에는 세대교체의 실패로 고생했다.

 

키커 랑리스테 월드클래스 등급 12회 선정 및 인터내셔널 클래스 등급 14회에 선정된 노이어는 분데스리가에서는 독일 올해의 선수 2회 선정 및 VDV 일레븐과 키커 올해의 골키퍼에 각각 9회 선정되었고 유럽 및 세계 단위로는 베스트 유러피언 골키퍼와 IFFHS 세계 최고위 골키퍼에 5회 선정되었고 UEFA 챔피언스 리그 시즌의 스쿼드 3회 선정되었으며 특히 UEFA 올해의 선수에서는 2013-14 시즌 2위 및 2019-20 시즌 3위에 올랐다. 당연하게도 2020년에 선정한 IFFHS 지난 10년의 세계 최고의 골키퍼와 월드팀 및 UEFA팀에 모두 선정되었다.

 

 

리베로

 

 

이름: 프란츠 베켄바우어
생년월일: 1945년 9월 11일

포지션: 리베로, 센터백, 수비형 미드필더
A매치 기록: 103경기 14골
신체조건: 키 181cm / 몸무게 75kg
주 소속팀: FC 바이에른 뮌헨

부정할 수 없는 축구 역사상 최고의 수비수로 수비 라인에서의 자유인을 넘어 전 경기장을 자유롭게 누비는 독일식 리베로의 시조로 서독 대표팀의 전성시대를 열었으며 그리고 당대 최고의 공격형 미드필더 바비 찰튼을 지워냈을 정도로 대인 마킹에도 능했다.

독일 내에서도 평범한 클럽이었던 바이에른 뮌헨이 독일 최고의 클럽으로 올라서는데 큰 공을 세운 프란츠 베켄바우어는 팀의 첫 승격부터 분데스리가와 DFB포칼에서 각각 4회 우승을 달성했고 유럽 대항전에서도 컵 위너스컵 우승을 시작으로 유러피언 컵 3연패를 이뤄냈으며 키커지 선정 분데스리가 시즌 베스트 일레븐에 12회 선정되었고 키커 랑리스테 평가에서도 무려 27회의 월드클래스 등급을 받았다.

베켄바우어의 맹활약은 디 만샤프트에서도 이어졌는데 수비형 미드필더로 활약하던 1966 잉글랜드 월드컵에서는 야신을 상대로 중거리 슈팅으로 득점하거나 바비 찰튼을 완벽하게 봉쇄하는 등 인상적인 모습을 보여주며 월드컵 신인상에 올랐으며 1970 멕시코 월드컵에서는 준결승전에서 만난 이탈리아를 상대로 쇄골이 다치는 부상을 입으면서도 풀타임으로 경기를 마치며 철인의 풍모를 보여줬다.

1970년대에 들어서 리베로로 출전한 UEFA 유로 1972에서는 람바참바라 불리던 독일 역사상 최고의 대표팀을 이끌고 독일식 리베로의 새 패러다임을 제시해 유로 우승을 이뤄내며 트레블을 이룬 크루이프를 밀어내고 발롱도르를 수상했고 1974 서독 월드컵에서는 팀의 우승에 크게 공헌했으나 크루이프에 밀려 월드컵 실버볼을 받았고 UEFA 유로 1976에서는 팀의 결승행을 이끌었는데 회네스가 승부차기에서 실축하며 준우승에 머물렀지만 대단한 퍼포먼스로 복수의 언론으로부터 대회 최우수 선수로 선정되었음은 물론 발롱도르를 재차 수상했다.

 

 

센터백

 


이름: 위르겐 콜러
생년월일: 1965년 9월 5일

포지션: 센터백, 수비형 미드필더
A매치 기록: 105경기 2골
신체조건: 키 186cm / 몸무게 84kg
주 소속팀: 보루시아 도르트문트

독일 축구 역사상 최고의 스토퍼로 당대를 넘어 역대 최고급의 대인 마킹 능력을 가지고 있었으며 특히 압도적인 피지컬과 교묘한 심리전을 겸비하며 공격수들을 괴롭혔으며 본인이 인터뷰에서 직접 "나를 곤혹케 한 공격수는 내 경력을 통틀어 없었다."라고 밝혔고 실제로도 대표팀과 세리에 A에서 반 바스텐과 라이벌리를 구축했으며 실제로도 반 바스텐이 가장 상대하기 어렵다고 밝힌 수비수 중 하나였다.

발트호프 만하임에서 두각을 나타내며 바이에른 뮌헨으로 이적한 콜러는 아우겐탈러와 함께 팀의 수비의 중핵으로 활약하며 분데스리가 3연패를 이뤄냈고 유벤투스에서도 1992-93 시즌 UEFA컵 우승 및 1994-95 시즌 세리에 A와 코파 이탈리아 더블을 이뤄냈다. 그러나 팀의 감독 리피는 새로 영입한 치로 페라라를 선호했기에 도르트문트로 되돌아간 콜러는 분데스리가 2회 우승을 이뤄냈으며 1996-97 시즌에는 UEFA 챔피언스리그 우승 및 인터콘티넨탈컵 우승에 크게 공헌하며 발롱도르 투표에서 11위에 올랐다.

 

키커 랑리스테 평가에서 월드클래스 등급 6회 선정 및 인터내셔널 클래스 등급 15회에 선정된 위르겐 콜러 개인도 키커 올해의 수비수에 5회 선정되었고 1980년대와 90년대, 그리고 2000년대 세 세대에 걸쳐 분데스리가 베스트 일레븐에 총 6회 선정되었다. 그리고 1997년에는 상술한 UCL 우승에 큰 공을 세우며 발롱도르 11위와 옹즈 몽디알 선정 유럽 베스트 일레븐에 선정되었다.

쾰른 시절부터 디 만샤프트에 뽑혔던 콜러는 칼하인츠 푀르스터의 후계자로 대표팀에 선발되었고 UEFA 유로 1988을 시작으로 월드컵과 유로에 각각 3회 선발되었는데 1990 이탈리아 월드컵에서는 상대 공격수를 지워내며 조국의 통일 선물로 월드컵 우승을 선물했고 UEFA 유로 1992에서는 부흐발트와 함께 수비라인을 이끌며 대회 올스타 팀에 선정되었다. 그러나 UEFA 유로 1996에서는 주전으로 활약에 예정되었으나 대회 도중 부상당해 낙마했으며 1998 프랑스 월드컵에서는 팀의 침몰을 막지 못하고 아쉬운 은퇴를 했다.

 

 

라이트백

 

 

이름: 베르티 포그츠

생년월일: 1946년 12월 30일

포지션: 라이트백, 센터백, 리베로

A매치 기록: 96경기 1골
신체조건: 키 168cm / 몸무게 67kg
주 소속팀: 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

유럽 축구 역사상 최고의 라이트백으로 통하는 선수로 특히 크루이프마저 완전히 지워버린 발군의 대인 마킹 실력은 당대는 물론 역대에서도 최고로 손꼽히며 팬들로부터 마치 사냥개와 같다고 'Der Terrier'라고 불렸다.

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에서 클럽 커리어의 전부를 보낸 원 클럽맨인 베르티 포그츠는 분데스리가 5회 우승과 UEFA컵 2회 우승, 그리고 1976-77 시즌 유러피언 컵 준우승을 이뤘던 중심에는 모두 그가 있었으며 1972-73 시즌에는 포칼을 우승하며 황금기를 누리는데 가장 큰 공을 세웠다.

디 만샤프트에서도 핵심적인 역할을 맡아 1970 멕시코 월드컵을 시작으로 황금기에 기여한 포그츠는 3회의 월드컵과 2회의 유럽 선수권 대회에 참가했는데 특히 1974 서독 월드컵에서는 결승전에서 크루이프를 완벽하게 봉쇄하며 숨은 공로자 역할을 했으며 UEFA 유로 1976와 1978 아르헨티나 월드컵에서도 좋은 모습을 보여줬다.

키커 랑리스테 평가에서 월드클래스 등급에 11회 선정된 포그츠는 묀헨글라트바흐와 서독 대표팀에서 활약하는 동안 많은 개인상을 수상했는데 키커 선정 분데스리가 시즌 베스트 일레븐에 8회 선정되었고 1971년과 1979년에는 독일 올해의 선수상을 받았으며 발롱도르 투표에서도 노미네이트에 5회 선정되어 10위 안에 네 번 들었는데 특히 1975년에는 발롱도르 4위에 오르며 라이트백 포지션에서는 발롱도르 역대 최고의 순위에 올랐다.

 

 

레프트백

 

 

이름: 안드레아스 브레메
생년월일: 1960년 11월 9일

포지션: 레프트백, 수비형 미드필더, 중앙 미드필더, 레프트윙
A매치 기록: 86경기 8골
신체조건: 키 176cm / 몸무게 77kg
주 소속팀: 인테르 밀란

1980년대 하반기 세계 최고의 레프트백이자 독일 축구 역사상 최고의 세트피스 키커이자 양발잡이로 뛰어난 패싱력을 활용해 대표팀의 빌드업 시작점 역할을 했던 미래형 윙백이었으며 프리킥과 코너킥에 능해 팀의 공격을 지원했다.

카이저슬라우테른과 바이에른 뮌헨, 인테르 밀란에서 전성기를 누린 브레메는 바이에른과 인테르, 카이저슬라우테른에서 모두 리그 우승을 이뤄내는 기염을 토했다. 그리고 바이에른 뮌헨에서는 1986-87 시즌 유러피언 컵 준우승을 이뤄냈고 인테르에서는 1990-91 시즌 UEFA컵 우승을 이뤄냈으며 카이저슬라우테른에서는 포칼 우승을 이뤄냈다.

디 만샤프트 소속으로는 각각 세 번의 월드컵과 유로에 참가한 브레메는 1990 이탈리아 월드컵에서는 결승전에서 페널티 킥 결승골을 넣고 월드컵 우승을 이루고 대회 베스트 일레븐에 들었음은 물론 소파스코어 기준 대회 평점 2위를 기록하는 등 축구를 통달한 모습을 보였다. 그리고 UEFA 유로 1984와 UEFA 유로 1992에서도 우승을 하지는 못했지만 브레메 개인의 활약은 대단해 대회 올스타 팀에 선정되었다.

브레메는 개인적으로도 많은 영광을 누렸는데 분데스리가에 머문 기간에는 키커지 선정 분데스리가 시즌 베스트 일레븐에 3회 선정, 1988-89 시즌에는 인테르 올해의 선수와 세리에 A 평점왕인 구에린 도르를 수상했으며 1990 이탈리아 월드컵에서의 활약으로 발롱도르 포디움에 드는 영예를 누렸다.

 

 

수비형 미드필더

 

 

이름: 로타어 마테우스
생년월일: 1961년 3월 21일

포지션: 중앙 미드필더, 리베로, 수비형 미드필더, 공격형 미드필더
A매치 기록: 150경기 23골
신체조건: 키 174cm / 몸무게 71kg
주 소속팀: FC 바이에른 뮌헨

마라도나가 인정한 유일한 라이벌이자 축구 역사상 최고의 3선 미드필더로 철인이라 불리는 신체 능력과 왕성한 활동량을 물론 대인 수비에서도 당대 수비형 미드필더들보다 한 차원 위에 있었으며 우수한 테크닉과 결정적인 순간에 한건하는 클러치 능력과 반 바스텐, 비알리, 클린스만, 카레카 같은 세리에 A 정상급 스트라이커들과 득점왕 경쟁을 했을 정도로 뛰어난 득점력까지 겸비하며 넓은 지역에서 영향력을 유지하면서 게임도 끝낼 수 있는 완벽한 선수였으며 다양한 포지션에서 훌륭한 활약을 펼쳤다. 과장 좀 해서 마테우스 이전에 언급한 미드필더들의 장점을 모두 가지고 있는 완벽한 미드필더였다.

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에서 프로 커리어를 시작한 마테우스는 주전으로 도약한 첫 시즌인 1979-80 UEFA컵 결승에 진출했으며 바이에른 뮌헨으로 이적한 뒤에는 분데스리가 3연패와 유러피언 컴 결승 진출을 이뤄냈으며 바이에른 뮌헨으로 이적해서는 분데스리가 3연패와 유러피언 컴 결승 진출을, 인테르에서는 1988-89 시즌 세리에 A 우승과 1990-91 UEFA컵 우승을 이뤄냈으며 다시 바이에른 뮌헨으로 돌아와서는 리베로로 활동하며 분데스리가 4회 우승과 UEFA컵 우승을 추가했고 1998-99 시즌에는 챔피언스리그 결승까지 진출했으나 퍼거슨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게 역전패하며 아쉽게 준우승에 머물렀다.

디 만샤프트에서도 A매치 통산 최다 출전자의 자리를 지킨 마테우스는 백업 멤버로 UEFA 유로 1980 우승 및 1982 스페인 월드컵 준우승을 경험했고 UEFA 유로 1984 때부터 1994 미국 월드컵 때까지 핵심 선수로 활약하며 1986 멕시코 월드컵 준우승, UEFA 유로 1988 3위를 이뤄냈고 1990 이탈리아 월드컵에서는 수비형 미드필더로 활약하며 팀의 코어이자 주 득점원으로 팀을 우승시키며 발롱도르를 수상했다. 그러나 클린스만과의 불화와 리베로에서 마티아스 잠머가 대두하면서 대표팀에서 소외되었으나 잠머의 부상으로 다시 소집되어 1998 프랑스 월드컵과 UEFA 유로 2000까지 출전했으나 이미 독일은 노쇠화되었으며 세대교체 실패의 영향으로 부진한 활약을 보여줬다.

마테우스는 개인적으로도 엄청난 수상 이력을 자랑하는데 키커지 선정 분데스리가 시즌 베스트 일레븐에 5회 선정되었으며 옹즈 몽디알에서 뽑은 유럽 베스트 일레븐에 4회 연속 선정되었고 독일 올해의 선수상을 2회 수상했음은 물론 1990년에는 발롱도르를 수상했고 1991년에는 초대 피파 올해의 선수상을 수상했다.

 

 

수비형 미드필더

 


이름: 파울 브라이트너
생년월일: 1951년 9월 5일

포지션: 중앙 미드필더, 레프트백, 수비형 미드필더, 레프트윙
A매치 기록: 48경기 10골
신체조건: 키 176cm / 몸무게 73kg
주 소속팀: FC 바이에른 뮌헨

독일 축구의 천재 수비수이자 미드필더이며 풍운아로 레프트백 시절부터 이름을 날렸던 활약했던 뛰어난 수비 능력은 물론, 전략가라는 별명으로 불릴 정도로 훌륭한 전술안과 탄탄한 기본기를 겸비했으며 상대방의 허를 찌르며 동료 공격수에게 골 찬스를 제공하는 킬패스와 골문을 직접 노리는 중거리 슈팅은 물론 왕성한 활동량까지 겸비해 그라운드의 넓은 범위에 영향력을 끼쳤던 공수겸장의 완벽한 선수였다.

바이에른 뮌헨과 레알 마드리드에서 전성기를 누린 브라이트너는 바이에른 뮌헨 1기 시절에는 분데스리가 3회 우승과 포칼 우승, 그리고 구단 역사상 첫 유러피언 컵 우승을 이끌어냈고 레알 마드리드 시절에는 라리가 2회 우승과 1974-75 시즌에는 코파 델 레이에서도 우승하며 도메스틱 더블을 이뤄냈다. 이후 중앙 미드필더로 포지션을 변경한 뒤 아인트라흐트 브라운슈바이크를 거쳐 바이에른 뮌헨으로 돌아가 루메니게와 함께 브라이트니게 조합을 이루며 분데스리가 2연패와 DFB포칼 우승, 그리고 유러피언 컵 준우승을 추가했다. 특히 1981년에는 압도적인 퍼포먼스를 보이며 동료 루메니게의 뒤를 이어 발롱도르 투표에서 2위에 올랐다.

디 만샤프트에서도 UEFA 유로 1972와 1974 서독 월드컵에서 모두 압도적인 활약을 펼치며 우승은 물론 대회 베스트 일레븐에도 들었다. 그러나 독일 축구협회와의 갈등으로 디 만샤프트에 뽑히지 못하다가 1980년 이후에 다시 뽑히며 1982 스페인 월드컵에서 결승 진출에 공헌하며 팀은 결승전에서 패했지만 브라이트너는 결승전에서 만회골을 넣었다.

키커 랑리스테 평가에서 월드클래스 등급에 무려 7회 선정된 브라이트너는 개인적으로도 엄청난 영예를 누렸는데 키커지 선정 분데스리가 베스트 일레븐에 6회 선정 월드 사커지 선정 월드 일레븐 4회 선정, 그리고 1981년 독일 올해의 선수상은 물론 발롱도르 노미네이트에 6회 선정해 1981년에는 개인 통산 최고 순위인 2위에 올랐으며 은퇴한 이후인 1994년에는 FIFA 월드컵 올타임 베스트 일레븐에 선정되었을 정도로 수상 이력이 화려하다.

 

 

공격형 미드필더

 

 

이름: 칼하인츠 루메니게
생년월일: 1955년 9월 25일

포지션: 포워드, 공격형 미드필더, 라이트윙, 레프트윙
A매치 기록: 95경기 45골
신체조건: 키 182cm / 몸무게 79kg
주 소속팀: FC 바이에른 뮌헨

1980년대 초반 세계 최고의 축구 선수 중 한 명으로 피지컬 활용 능력과 드리블, 슈팅, 헤더 모두 우수했으며 공격수로서 결점이 없는 완벽한 공격수임과 동시에 우수한 플레이메이킹 능력을 겸비한 완성형 선수였으며 독일의 펠레라 불리며 80년대 유럽 축구의 아이콘으로 자리 잡았다.

1974년에 데뷔해 1970년대 황금기 막바지부터 활약했던 루메니게는 암흑기를 거치며 다시 돌아온 브라이트너와 함께 브라이트니게 시대를 이끌며 분데스리가와 DFB포칼을 각각 두 번 우승했고 유러피언 컵에서도 2회 우승과 1회 준우승을 이뤄냈다. 그리고 1980-81 시즌에는 유러피언 컵 득점왕에도 올랐고 이후 인테르 밀란으로 이적한 뒤에도 세리에 A 정상급 선수로 활약했다.

독일과 이탈리아 무대를 호령했던 루메니게 개인도 키커 분데스리가 시즌 베스트 일레븐에 7회 선정되었으며 옹즈 몽디알이 선정한 유럽 베스트 일레븐에 5회 선정, 구에린 스포르티보 선정 월드 베스트 일레븐 5회 선정 및 키커 랑리스테 평가에서 월드클래스 등급 8회 선정 및 옹즈도르 2회 수상의 영예를 누렸다.

디 만샤프트에서는 1978 멕시코 월드컵에 처음 주전으로 출전했던 루메니게는 UEFA 유로 1980에서 차원이 다른 기량을 보여주며 핵심 선수로 우승해 발롱도르를 획득했고 1982 스페인 월드컵에서는 부상을 달고 뛰었음에도 5골이나 기록하며 월드컵 준우승과 브론즈 볼을 수상했음은 물론 대회 베스트 일레븐에도 선정되는 기염을 토했으며 1986 멕시코 월드컵에서는 주장으로 팀을 결승에 올려놓았다.

 

 

공격형 미드필더

 

 

이름: 프리츠 발터
생년월일: 1920년 10월 31일

포지션: 공격형 미드필더, 포워드
A매치 기록: 61경기 33골
신체조건: 키 174cm / 몸무게 73kg
주 소속팀: FC 카이저슬라우테른

프란츠 베켄바우어, 로타어 마테우스 등과 함께 독일 축구사의 상징적인 존재이자 비 오는 날에 특히 강했던 서독 대표팀 역대 최고의 주장, 나치 독일 시절에 데뷔해 서독 축구의 부흥을 이끈 다재다능한 인사이드 포워드로 훌륭한 리더십과 플레이메이킹 능력을 보여줬으며 특히 비 오는 날에 훌륭한 경기력을 보여줘 비 오는 날을 '프리츠 발터의 날'이라고 불렀다.

나치당의 강압적인 명령으로 잠시 임대를 간 것을 제외하면 클럽 커리어의 전부를 카이저슬라우테른에서만 보낸 발터는 오베리가 주트베스트 10회 우승과 독일 챔피언십 결승에 다섯 번 진출해 두 번 우승했으며 최초의 키커 랑리스테 평가에서 35세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인사이드 포워드 부문 월드클래스 등급을 받았다. 카이저슬라우테른 구단 측도 상술한 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홈구장의 이름을 프리츠 발터 슈타디온으로 바꾸기도 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감독 헤어베어거와 함께 서독 대표팀의 재건을 이끈 발터는 1954 스위스 월드컵에서 높게 평가받지 못했던 서독을 이끌고 결승에 진출했으며 조별 리그에서 자신을 8-3으로 이겼던 헝가리를 상대로 3-2 승리를 거두는, 일명 베른의 기적의 주인공으로 활약하는 과정에서 3골 6도움을 기록하며 ESPN 선정 대회 베스트 일레븐에 선정되었고 1958 스웨덴 월드컵에서도 만 37세의 나이에도 주전으로 활약했다.

 

 

스트라이커

 


생년월일: 1945년 11월 3일
A매치 기록: 62경기 68골
신체조건: 키 176cm / 몸무게 77kg
주 소속팀: FC 바이에른 뮌헨

축구 역사상 최고의 스트라이커 중 하나로 빠른 스피드와 화려한 테크닉, 좋은 신체 조건까지 어느 것도 갖추지 못했으나 완벽한 축구 지능과 훌륭한 골감각과 위치 선정, 그리고 동료를 이용하는 영리한 플레이를 펼치며 득점은 물론 도움도 많이 기록했던 완성형 공격수였다.

바이에른 뮌헨에서 데뷔해 선수 생활 대부분을 보낸 게르트 뮐러는 압도적인 득점력을 바탕으로 분데스리가와 DFB포칼 각 4회 우승을 이뤄냈으며 컵 위너스컵 우승과 유러피언컵 3연패를 이뤄냈고 바이에른 뮌헨 통산 최다 득점자를 비롯해 분데스리가에서 골에 관련된 기록 대부분은 게르트 뮐러의 타이틀이다. 비록 현재는 레반도프스키가 갱신했지만 오랜 시간 동안 한 시즌 최다 득점 기록을 보유했음은 물론 분데스리가 득점왕을 7회 수상했으며 유러피언 컵 득점왕도 4회 수상했다.

디 만샤프트에서도 자신의 첫 메이저 대회인 1970 멕시코 월드컵에서는 펠레나 자이르지뉴 같은 쟁쟁한 공격수들을 제치고 10골이나 넣으며 득점왕을 수상한 게르트 뮐러는 이때의 활약으로 발롱도르를 수상했다. UEFA 유로 1972에서도 4골로 득점왕에 올랐으며 1974 월드컵 결승전에서는 결승전에서 미헬스와 크루이프의 네덜란드를 상대로 결승골을 기록하며 우승에 방점을 찍었다. 유로와 월드컵을 모두 석권하며 화려하게 국가대표팀을 은퇴했다.

특히 결승전에 강력한 모습을 보이며 13회의 결승전에서 전승을 기록했음은 물론 11골을 득점했으며 그중 결승골 5개를 기록한 대기록을 세운 게르트 뮐러는 키커지 선정 분데스리가 시즌 베스트 일레븐에 4회 선정되었으며 월드 사커지 선정 월드 일레븐에 8회 선정되었고 국가대표팀과 클럽을 포함해 13회나 득점왕을 수상했으며 1970년에는 발롱도르를 수상했다.

 

 

스트라이커

 

 

이름: 우베 젤러
생년월일: 1936년 11월 5일

포지션: 스트라이커, 포워드, 공격형 미드필더
A매치 기록: 72경기 43골
신체조건: 키 170cm / 몸무게 76kg
주 소속팀: 함부르크 SV

1960년대 독일 축구의 아이콘으로 범국민적인 사랑을 받아 우리들의 우베라는 별칭으로 불렸던 인물로 공격수로서 결점이 없는 완벽한 공격수였는데 170cm의 단신임에도 헤딩에 매우 능했으며 양발을 모두 잘 썼고 백 헤더와 백힐 패스, 바이시클 킥 등 고급적인 기술들을 실전에서 자유자재로 선보이기도 했음은 물론 천둥과도 같은 강력한 슈팅으로 엄청난 득점력을 보여줬다. 여기에 스피드도 빨랐고 강력한 리더십마저 보유했다.

선수 생활의 대부분을 함부르크에서 보낸 젤러는 오버리가 노르트 9회 우승과 1959-60 시즌 독일 챔피언쉽 우승을 이끌어냈으며 이듬해에 1960-61 시즌에는 유러피언 컵 4강에 진출했으나 바르셀로나에게 아쉽게 탈락했고 1962-63 시즌 포칼 우승도 이끌어냈다. 비록 분데스리가 출범 이후에는 우승과는 인연이 없었지만 1963-64 시즌 분데스리가 득점왕을 기록했으며 발롱도르 10등 안에 네 번이나 들었던 우베 젤러의 활약은 당대 최고라 불려도 손색이 없었기에 레알 마드리드와 인터 밀란에서 영입을 타진했으나 젤러가 함부르크에 대한 충성심으로 거부했다.

디 만샤프트에서도 주장 계보를 이어나가며 팀의 에이스로 활약했던 젤러는 1958 스웨덴 월드컵부터 1970 멕시코 월드컵까지 네 번에 월드컵에 참가해 모두 주전으로 활약하며 모든 대회에서 득점을 기록했으며 특히 1966 잉글랜드 월드컵에선 주장으로 디 만샤프트를 이끌고 결승에 진출하는 활약을 보여줬다.

우리들의 우베라 불렸던 서독 축구계의 인기 스타 우베 젤러는 키커 랑리스테 월드클래스 등급에 14회 선정되는 위업을 달성했고 독일 올해의 선수상을 3회 수상했으며 발롱도르 노미네이트에 5회 선정되어 1960년에는 개인 통산 최고 순위인 3위에 오르며 포디움에 들었다.

 

 

감독

 

 

이름: 헬무트 쇤
생년월일: 1915년 9월 15일
국적: 독일

'람바참바와 카테나치오의 두 얼굴'

1960년대 하반기와 1970년대 서독 축구계가 세계 축구계를 쥐락펴락하게 만든 일등 공신 중 한 명으로 일명 독일식 리베로 시스템이라 불렸던 리베로에게 플레이메이킹의 일부를 담당시키며 공격적으로 기용해 베켄바우어의 역량을 극으로 끌어올린 감독으로 유명했고 이는 2000년대 초반까지 독일 축구의 아이덴티티로 자리 잡았다.

디 만샤프트에 14년간 머물며 가장 찬란한 시기를 맞이했던 헬무트 쇤은 1966 잉글랜드 월드컵 준우승과 1970 멕시코 월드컵 3위라는 성적을 시작으로 UEFA 유로 1972에서는 마치 1970 멕시코 월드컵에서 우승한 브라질 대표팀에 비견되는 공격적인 패스 플레이를 앞세운 일명 람바참바 풋볼로 예선에서 잉글랜드를, 본선에서는 벨기에와 소련을 압도적으로 무너트리고 우승하며 세계 축구계를 경악시키며 역대 최고의 디 만샤프트라 불렸다.

그러나 자국에서 열리는 1974 서독 월드컵에서는 자신들보다 기술적으로 훌륭한 팀들이 많이 참전하자 이탈리아식 카테나치오를 연상시키는 플레이로 상대 공격진을 옥죄며 승리를 차지하는 방식을 바탕으로 유고슬라비아와 폴란드, 그리고 스웨덴을 격파하고 결승전에 올랐고 결승전에서는 네덜란드의 에이스 크루이프에게 포그츠를 밀착마킹시켜 무력화시키는 지우개 전략이 성공적으로 먹히며 우승을 차지했다. 서로 다른 두 축구로 정점에 올라 메이저대회를 연속으로 제패한 서독은 1976년에도 UEFA 유로 결승에 진출했으나 승부차기에서 아쉽게 패했지만 서독 축구가 유럽 축구의 대표로 자리 잡는데 큰 공을 세웠다.

여담으로 헬무트 쇤은 그 시대 상황과는 다르게 선수들을 권위주의적인 방식이 아닌 많은 자유와 발언권을 주었다는 사실을 줬으며 자신의 업무를 재밌게 수행했다고 한다. 루트거 슐체는 이를 두고 "헬무트 쇤은 아마도 돈이 아니라 축구를 전면에 내세운 감독의 마지막 대표자일 것입니다. 그의 주된 원동력은 수입이 아니라 일의 재미였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항상 그런 것에 대한 느낌을 가지고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베스트 일레븐

 

토르난테 선정 독일 역대 베스트 일레븐

 

 


3. 서브 14인 포함 1군 스쿼드

 

 

이름: 올리버 칸
생년월일: 1969년 6월 15일

포지션: 골키퍼
A매치 기록: 86경기 95실점 / 29클린시트
신체조건: 키 188cm / 몸무게 91kg
주 소속팀: FC 바이에른 뮌헨

2000년대 초반을 대표하는 골키퍼로 경이로운 선방 능력과 뛰어난 수비 라인 통솔, 그리고 압도적인 카리스마로 상대 공격수와의 기싸움에 능해 타이탄이라 불렸던 골키퍼였다.

카를스루헤에서 잠재력을 만개하기 시작해 바이에른 뮌헨에서 전성기를 보낸 올리버 칸은 19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소속팀 바이에른 뮌헨을 유럽 축구 3M의 시대를 이끌며 분데스리가 8회 우승과 DFB포칼 6회 우승, 그리고 1995-96 UEFA컵 우승을 이뤄냈다. 특히 2000-01 시즌에는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에서 맹활약해 팀의 우승에 마침표를 찍으며 맨 오브 더 매치를 수상했고 이를 바탕으로 발롱도르 포디움에 들었다.

디 먄샤프트에서도 1998 프랑스 월드컵 이후 쾨프케가 은퇴하면서 주전 자리를 차지한 올리버 칸은 2002 한일 월드컵에서는 다수의 멤버들이 부상과 부진으로 고생하는 팀을 이끌며 압도적인 활약을 펼쳐 결승에 진출했는데 그 공로로 골키퍼로는 최초로 월드컵 MVP인 골든볼을 수상했고 이런 활약을 인정받아 2002년 발롱도르 투표에서도 3위에 들었다. 그러나 UEFA 유로 2004에서는 기대에 미치지 못해 2006 독일 월드컵에서는 주전자리를 레만에게 내주기도 했다.

 

1999년부터 2002년까지 베스트 유러피언 골키퍼와 UEFA 클럽 베스트 골키퍼를 4회 연속으로 수상했고 키커 랑리스테 평가에서도 월드클래스 등급에 8회 선정되며 시대를 빛낸 올리버 칸은 IFFHS 월드 베스트 골키퍼 3회 수상을 이뤄냈고 2000년과 2001년에는 독일 올해의 선수 2회 연속 수상 및 발롱도르 포디움에 2년 연속으로 들며 골키퍼로서는 유일하게 발롱도르 포디움에 2회 이상 선정되는 대기록을 세웠다.

 

 

 

이름: 제프 마이어
생년월일: 1944년 2월 28일

포지션: 골키퍼
A매치 기록: 95경기 73실점 / 43클린시트
신체조건: 키 183cm / 몸무게 75kg
주 소속팀: FC 바이에른 뮌헨

20세기 독일 최고의 골키퍼이자 바이에른 뮌헨 통산 출전 1위에 랭크된 마이어는 안칭의 고양이라는 별명답게 날렵한 반사신경과 유연성을 자랑했다.

바이에른 뮌헨의 원 클럽 맨이자 구단 통산 최다 출전자에 랭크된 제프 마이어는 분데스리가 4회 우승과 유러피언 컵 3회 연속 우승을 포함해 13회의 우승컵을 들었으며 독일 올해의 선수상을 세 번 수상했고 특히 1975년에는 유러피언 컵 우승 과정에서 크게 기여하며 발롱도르 투표에서 5위를 차지하는 영광을 누린 것을 포함했고 키커 랑리스테 평가에서도 월드클래스 등급에 6회 선정 및 인터내셔널 클래스 등급에 21회 선정되었다.

디 만샤프트에서도 안정적인 활약을 펼치며 1970년대 초중반 서독 대표팀의 최전성기를 이끈 일등 공신 중 한 명으로 추앙받는 제프 마이어는 UEFA 유로 1972 우승과 1974 서독 월드컵 우승, 그리고 UEFA 유로 1976 준우승을 달성하며 메이저 대회 3회 연속 결승 진출에 성공했으며 마이어 본인도 1974 서독 월드컵에서 대회 최우수 골키퍼로 선정되었다.

 

 


이름: 마티아스 잠머
생년월일: 1967년 9월 5일

포지션: 리베로, 중앙 미드필더, 수비형 미드필더, 공격형 미드필더
A매치 기록: 74경기 14골 (동독시절 포함)
신체조건: 키 181cm / 몸무게 75kg
주 소속팀: 보루시아 도르트문트

전성기는 짧지만 그 고점은 가히 베켄바우어 다음가는 수비수이자 마지막 리베로라 불리는 사나이로 초년에는 중앙 미드필더 및 공격형 미드필더로 뛰다가 1990년대 중반에 리베로로 포지션을 변경해 대성했는데 한혈마를 연상시키는 지구력과 세련된 패싱력과 태클, 드넓은 시야를 겸비했음은 물론 피가 터지고 머리에 부상을 입은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팀의 수비라인을 지휘하는 정신적, 기술적, 신체적으로 모두 우수한 선수였지만 그의 진짜 특별한 부분은 스리백 시스템에서 오프사이드 트랩은 불가능하다는 세간의 편견을 깨며 스리백 시스템에서도 오프사이드 트랩을 자유자재로 사용하는 축구 지능과 수비 조율 능력이었다.

동독 시절에는 디나모 드레스덴에서 데뷔해 활약하던 잠머는 DDR 오베리가 2회 우승 및 1989-90 시즌에는 FDGB포칼까지 석권하며 더블을 이뤄냈고 통일 독일 이후에는 슈투트가르트로 이적해 1990-91 시즌 분데스리가 우승을 이끈 잠머는 인테르에서는 적응에 실패하며 부진했지만 도르트문트로 돌아온 뒤에는 히츠펠트의 조언을 수용해 리베로로 포지션을 변경한 뒤에 전성기를 누리며 분데스리가와 DFL슈퍼컵 2연패를 이뤄냈으며 1996-97 시즌에는 유벤투스를 꺾고 UEFA 챔피언스리그 우승을 이뤄냈다.

동독 대표팀에서 중앙 미드필더로 활약하다 통일 이후에는 수비형 미드필더를 거쳐 리베로로 활약했던 잠머는 리베로로 활약한 UEFA 유로 1996에서는 압도적인 퍼포먼스로 녹슨 전차군단이라 조롱받았던 독일을 우승으로 이끌며 대회 MVP를 수상하는 영예를 누렸으나 이후 1998 프랑스 월드컵을 앞두고 큰 부상을 당해 은퇴하면서 독일 축구는 한동안 암흑기를 겪었다.

키커 랑리스테 평가에사 월드클래스 등급에 4회 선정된 잠머는 분데스리가 올해의 팀에 3회 선정된 것을 시작으로 1995년 독일 올해의 선수와 발롱도르 9위에 올랐고 1996년에는 디 만샤프트의 앙리 들로네를 드는데 크게 기여해 독일 올해의 선수상을 수상했으며 초신성 호나우두를 간신히 따돌리고 발롱도르를 수상했다. 그리고 1997년에도 도르트문트의 UEFA 챔피언스리그 우승에 기여하며 발롱도르 투표에서 10위에 올랐다.

 

 

 

이름: 칼하인츠 푀르스터
생년월일: 1958년 7월 25일

포지션: 센터백
A매치 기록: 81경기 2골
신체조건: 키 178cm / 몸무게 73kg
주 소속팀: VfB 슈투트가르트

1980년대 독일을 넘어 세계 최고의 스토퍼로 명성을 떨쳤던 수비수로 천사의 얼굴을 한 철의 정강이로 불릴 정도로 반칙을 자제하면서도 깔끔한 수비로 상대 공격수를 완벽하게 무력화시키며 수비력에 대해서는 명성이 높았는데 특히 맨 마팅 부분에서는 1980년대 활약한 그 어떤 수비수보다도 뛰어났다.

슈투트가르트에서 구단 역사상 최고의 수비수로 평가받았던 칼하인츠 푀르스터는 1983-84 시즌에는 권터 샤퍼, 기도 부흐발트, 베른트 푀르스터와 함께 구성한 막강한 수비라인의 리더이자 팀의 주장으로 활약하며 바이에른 뮌헨을 제치고 1983-84 시즌 분데스리가 우승을 이뤄내는데 큰 공을 세웠으며 본인의 슈바벤에서의 마지막 시즌인 1985-86 시즌에는 DFB포칼 준우승을 이뤄내며 구단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다. 그리고 말년에는 마르세유에서도 뛰어난 퍼포먼스를 보이며 리그앙 2연패를 이뤄냈다.

키커 랑리스테 평가에서 스토퍼 부문 1위 12회 선정 및 월드클래스 등급 3회, 인터내셔널 클래스 등급 13회에 선정된 푀르스터는 1982년 독일 올해의 선수상을 수상했으며 키커지 선정 분데스리가 시즌 베스트 일레븐에 2회 선정되었고 옹즈 몽디알에서 선정한 올해의 유럽 베스트 일레븐 투표에서 스토퍼 부문에서 여섯 번 선정되었으며 구에린 스포르티보 선정 올해의 세계 베스트 일레븐에 3회 선정되는 영예를 누렸던 1980년대 세계 최고의 스토퍼였다.

독일 대표팀에서도 각각 두 번의 월드컵과 유로에서 팀의 핵심으로 맹활약한 칼하인츠 푀르스터는 UEFA 유로 1980 우승을 이뤄냈고 1982 스페인 월드컵과 1986 멕시코 월드컵 준우승을 이뤄냈으며 심지어는 조별 리그에서 탈락한 1984년 UEFA 유로에서도 개인 활약은 뛰어나 팀 오브 더 토너먼트에 선정되었다.

 

 

 

이름: 필립 람
생년월일: 1983년 11월 11일

포지션: 라이트백, 레프트백, 수비형 미드필더, 라이트윙
A매치 기록: 113경기 5골
신체조건: 키 170cm / 몸무게 66kg
주 소속팀: FC 바이에른 뮌헨

2010년대 최고의 명장 펩 과르디올라로부터 자신이 가르친 선수 중 가장 축구를 잘 이해하는 선수라 평가받은 지능적인 라이트백으로 부드러운 카리스마로 2010년대 디 만샤프트와 바이에른 뮌헨을 이끌었다. 훌륭한 축구 지능과 강철 같은 체력, 적절한 공격 가담을 겸비한 2010년대 최고의 라이트백이었다.

슈투트가르트로 임대를 다녀온 것을 제외하면 선수 생활을 전부 바이에른 뮌헨에서 구단의 황금기를 보낸 필립 람은 분데스리가 8회 우승과 DFB 포칼 6회 우승, 그리고 2012-13 시즌에는 챔피언스리그마저 제패하며 주장으로써 빅이어를 들며 트레블을 달성했다.

 

구단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며 '믿음직한'이라는 칭호를 받은 필립 람 개인도 개인 통산 키커 랑리스테 월드클래스 등급 5회 선정 및 키커 선정 분데스리가 시즌 베스트 일레븐에 5회 선정되었고 유럽 단위로도 ESM 올해의 팀에 2회 선정, UEFA 올해의 팀에 5회 선정되었고 은퇴 직전 시즌인 2016-17 시즌에는 독일 올해의 선수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디 만샤프트에서도 뛰어난 활약을 보여준 필립 람은 월드컵과 유로에 각각 3번의 대회에 출전했는데 첫 대회인 UEFA 유로 2004를 제외한 모든 대회에서 좋은 활약을 펼치며 대회 올스타 팀에 선정되었다. 특히 2014 브라질 월드컵에서는 주장으로서 월드컵 우승 트로피를 들어 올리는 영예를 누렸으며 이 활약으로 발롱도르 투표에서 6위에 랭크되었고 대표팀에서 은퇴한 2016년에는 UEFA 유로 대회 역대 베스트 일레븐에 선정되었다.

 

 

 

이름: 칼하인츠 슈넬링어
생년월일: 1939년 3월 31일

포지션: 레프트백, 센터백, 리베로
A매치 기록: 47경기 1골
신체조건: 키 180cm / 몸무게 77kg
주 소속팀: AC 밀란

1960년대 유럽 정상급 수비수로 이름을 날렸으며 우수한 체력과 빠른 기동력을 활용한 왕성한 활동량을 보여주며 상대의 공격을 틀어막아 폭스바겐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쾰른과 AC 밀란에서 전성기를 보냈는데 쾰른에서는 1962 독일 챔피언쉽 우승에 크게 기여해 발롱도르 투표에서 3위에 랭크되어 포디움에 올랐으며 AC 밀란에서는 리그 우승 1회, 코파 이탈리아 우승 3회는 물론 유러피언 컵과 유러피언 컵 위너스컵 우승도 달성했다.

디 만샤프트에서도 핵심 수비수로 활약한 슈넬링어는 1958 스웨덴 월드컵부터 1970 멕시코 월드컵까지 활약했으며 첫 번째 대회를 제외하고는 모두 주전으로 활약했는데 1962년 칠레 월드컵에선 뛰어난 활약으로 대회 베스트 일레븐에 들었으며 1966 잉글랜드 월드컵에서는 준우승, 1970 멕시코 월드컵에서는 3위라는 성적을 이뤄내는데 큰 공을 새운다.

키커 랑리스테 평가에서 월드클래스 등급에 8회 선정되는 등 대체로 우수한 활약을 보여줬던 슈넬링어지만 1966 잉글랜드 월드컵에서는 자주 심판을 속이며 비매너 플레이를 자주 벌여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했고 1970 멕시코 월드컵 준결승전에서는 이탈리아를 상대로 동점골을 득점해 승부를 연장으로 끌고 가자 이탈리아 선수들에게 이탈리아로 돌아올 생각은 하지 말라는 협박을 듣기도 했다.

 

 

 

이름: 베른트 슈스터

생년월일: 1959년 12월 22일

포지션: 중앙 미드필더, 공격형 미드필더, 수비형 미드필더, 센터백
A매치 기록: 21경기 4골
신체조건: 키 181cm / 몸무게 74kg
주 소속팀: FC 바르셀로나

1980년대 유럽 최고의 미드필더 중 한 명으로 필드를 넓게 사용하며 창의적이면서 부드럽고 정교한 패스로 많은 찬스를 만들어냈으며 뛰어난 볼 소유 능력과 탄탄한 기본기, 그리고 세련된 볼 컨트롤 능력과 상대의 수비 라인을 무너트리는 기습적인 쓰루패스와 1선 능력을 고루 겸비했으며 중거리 슛 능력도 대단한 완벽한 플레이메이커였다.

쾰른에서 커리어를 시작해 바르셀로나에서 전성기를 누리며 구단의 암흑기의 에이스로 군림한 슈스터는 코파 델 레이 3회 우승, 컵 위너스컵 우승, 그리고 1984-85 시즌에는 라리가 우승과 유러피언 컵 결승 진출을 이뤄냈으나 구단과의 갈등으로 레알 마드리드로 이적해 라리가 2연패를 이끌었고 거기서도 구단과의 불화로 팀을 떠나 아틀레티코 마드리드로 이적한 뒤에 코파 델 레이 2연패를 이뤄냈다. 이후 독일 무대로 복귀해 레버쿠젠에서도 슈스터 개인은 분데스리가 시즌 베스트 일레븐에 들었을 정도로 출중한 기량을 자랑하며 팬들을 들었다 놨다 하며 악마의 재능으로 불렸다.

다만 이런 성격 문제로 디 만샤프트 커리어는 다소 빈약한 편이었던 슈스터는 UEFA 유로 1980에서 루메니게와 함께 팀의 우승을 이끌면서 발롱도르 2위와 대회 베스트 일레븐에 들었지만 이후 감독 유프 데어발과 대표팀에 복귀한 포지션 경쟁자 파울 브라이트너와의 불화로 대표팀을 떠났으며 데어발이 사임하고 베켄바우어가 감독으로 부임한 뒤 슈스터를 다시 부르려 했으나 에이전트인 아내를 통해 소집 대가로 거액의 돈을 요구하며 결국 복귀가 불발되었고 디 만샤프트에서의 영광은 후배 로타어 마테우스가 차지했다.

비록 성품 문제로 인해 대표팀 커리어가 상대적으로 빈약하지만 슈스터는 개인 수상 부분에서도 대단했는데 돈 발롱 선정 라리가 베스트 일레븐에 3회 선정, 구에린 스포르티보 선정 세계 베스트 일레븐에 2회 선정되었으며 발롱도르 포디움에도 세 번이나 올라섰다.

 

 

 

이름: 프리츠 슈체판
생년월일: 1907년 9월 2일

포지션: 중앙 미드필더, 공격형 미드필더, 포워드, 수비형 미드필더
A매치 기록: 34경기 6골
신체조건: 키 177cm / 몸무게 76kg
주 소속팀: FC 샬케 04

2차 세계 대전 이전 독일 역대 최고의 축구선수로 포지션은 인사이드 포워드로 오늘날의 공격형 미드필더 위치에 있었지만 오늘날의 박스 투 박스 미드필더의 활동 범위와 플레이메이커의 경기 지배력을 겸비한 시대를 앞질러간 훌륭한 미드필더였다.

1930년대 샬케가 독일에서 가장 강력했던 클럽인 시절 핵심 선수였던 슈체판은 독일 챔피언쉽 6회 우승을 이뤄냈는데 특히 1936-37 시즌에는 독일 챔피언쉽과 DFB포칼을 동시에 우승하며 샬케를 독일 최초의 도메스틱 더블 팀으로 만들었다. 이 공로를 후세에 인정받아 1999년에 샬케 세기의 일레븐에 선정되었다.

디 만샤프트에서도 좋은 모습을 보여준 슈체판은 1934년 월드컵에서는 3위에 올랐고 헤어베르거 체제에서는 1937년에 11번의 A매치에서 10승 1무를 기록하며 상승세를 타며 폴란드 브레슬라우에서 덴마크를 상대로 8-0 대승을 기록하는데 기여하며 브레슬라우 엘프의 전설을 썼을 때 팀의 주장이자 팀 전술의 핵심적인 존재로 활약했다.

 

 

 

이름: 미하엘 발락

생년월일: 1976년 9월 26일

포지션: 중앙 미드필더, 공격형 미드필더, 수비형 미드필더
A매치 기록: 98경기 42골
신체조건: 키 189cm / 몸무게 88kg
주 소속팀: 바이어 04 레버쿠젠

2000년대 상반기 최고의 중앙 미드필더 중 한 명으로 만능 미드필더로 강력한 피지컬과 탄탄한 기본기, 뛰어난 축구 지능과 승부를 결정짓는 클러치 능력을 모두 겸비한 다재다능한 미드필더였다.

카이저슬라우테른을 거쳐 레버쿠젠에서 처음 두각을 나타낸 발락은 2001-02 시즌 트리플 준우승이라는 다소 대단하면서도 아쉬운 성적을 냈지만 개인적으로는 대단한 활약을 인정받아 2001-02 시즌 ESM 올해의 팀과 2002 UEFA 클럽 올해의 미드필더상을 받았으며 바이에른 뮌헨으로 이적해서는 분데스리가와 포칼 3회 우승을 이루고 첼시에서는 프리미어리그 우승 1회, FA컵 우승 3회, 그리고 챔피언스리그 결승 진출을 이뤄냈다.

2000년대 독일 대표팀의 중핵이자 아이콘이었던 발락은 2002 한일 월드컵에서는 돌풍의 팀 대한민국을 상대로 팀을 결승에 진출시키는 결승골을 넣었지만 경고 누적으로 결승전에 출전하지 못해 팀의 패배를 지켜본 아픈 경험이 있었고 UEFA 유로 2004에서는 조별 리그에서 탈락하는 수모를 겪었지만 발락 본인은 대회 올스타 팀에 들었을 정도로 훌륭한 활약을 보여줬으며 2006 독일 월드컵과 UEFA 유로 2008에서는 주장 완장을 차고 맹활약했으나 각각 4강전과 결승전에서 아쉽게 패했다. 유로 2000을 제외한 참가한 월드컵과 유로에서 모두 대회 올스타 팀에 들었다.

비록 독일 축구의 암흑기에 전성기를 맞아 우승 트로피가 상대적으로 적은 발락이지만 개인의 활약은 모두에게 인정받았기에 키커지 선정 분데스리가 시즌 베스트 일레븐에 4회 선정되었으고 독일 올해의 선수상을 3회 수상했으며 발롱도르 노미네이트에 4회 선정되어 2002년에는 개인 통산 최고 순위인 5위에 올랐다.

 

 

 

이름: 귄터 네처
생년월일: 1944년 9월 14일

포지션: 공격형 미드필더, 중앙 미드필더
A매치 기록: 37경기 6골
신체조건: 키 178cm / 몸무게 75kg
주 소속팀: 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

볼프강 오베라트와 함께 1960년대 하반기와 1970년대 상반기를 대표하는 독일 최고의 테너로 역사상 최고의 패스 마스터 중 하나로 손꼽혔을 정도로 패스를 잘해서 패스의 단위를 센티미터 단위로 조절한다는 이야기가 있었을 정도로 패싱력이 우수해 "센티미터 패서", "컴퓨터 패서"라 불렸다.

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에서 전성기를 보낸 네처는 키커 랑리스테 월드클래스 등급 4회와 인터내셔널 클래스 등급 10회를 기록했으며 리그 2연패를 이끌었으나 감독 헤네스 바이스바일러와의 불화로 팀을 떠나게 되는데 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에서 마지막 경기인 1972-73 포칼에서는 부상을 핑계로 경기에 출장하지 않으려 했으나 쾰른과 묀헨글라트바흐가 연장에 돌입하자 이제 출전하겠다며 교체 출전하며 결승골을 넣고 팀에게 마지막까지 트로피를 주고 떠났다. 묀헨글라트바흐에 머무는 동안  키커지 선정 분데스리가 시즌 베스트 일레븐에 7회 선정되었으며 월드 사커지 선정 세계 베스트 일레븐 3회 선정되었고 레알 마드리드에서도 활약했다.

디 만샤프트에서도 오베라트와 치열한 주전 경쟁을 펼치며 활약했던 네처는 UEFA 유로 1972에서 그의 뛰어나면서도 창의적인 패스는 람바참바 풋볼에서 중요한 요소였기에 결국 대회를 압도적으로 우승한 뒤 베켄바우어 다음으로 게르트 뮐러와 함께 발롱도르 공동 2위를 수상했다. 다만 월드컵에서는 라이벌 볼프강 오베라트에게 밀려 벤치 신세를 지며 아쉬운 활약상을 보여줬다.

 

 

 

이름: 볼프강 오베라트
생년월일: 1943년 9월 29일

포지션: 공격형 미드필더, 레프트윙, 중앙 미드필더, 포워드
A매치 기록: 81경기 17골
신체조건: 키 176cm / 몸무게 71kg
주 소속팀: FC 쾰른

귄터 네처와 함께 1960년대 하반기와 1970년대 상반기를 대표하는 독일 최고의 테너로 뛰어난 플레이메이킹 능력은 물론이고 왕성한 활동량과 우수한 기동력을 겸비했으며 유사시에는 수비에도 적극 가담했던 현대적인 미드필더였다.

클럽 커리어의 전부를 쾰른에서만 보낸 원 클럽맨인 오베라트는 1963-64 시즌에 팀을 첫 번째 분데스리가 우승팀으로 만드는데 큰 공을 세웠으며 이후에도 2회 준우승을 추가로 이뤄냈으며 DFB포칼 결승에도 5회 진출해 2회 우승하며 디 가이스버커가 독일의 명문으로 올라서는데 큰 공을 세웠음은 물론 오베라트 개인도 키커 랑리스테 평가에서 월드클래스 등급에 8회 선정되었고  키커지 선정 분데스리가 시즌 베스트 일레븐에 4회 선정되었다.

디 만샤프트에서는 월드컵에서 특히 강한 모습을 보였던 오베라트는 3번의 월드컵에서 모두 주전으로 나서며 총 59회의 찬스 메이킹을 기록했음은 물론 1966 잉글랜드 월드컵에서 데뷔해 준우승이라는 성적에 공헌했고 1970 멕시코 월드컵에서는 뛰어난 활약을 선보이며 발롱도르 투표에서 5위에 올랐다. 그러나 UEFA 유로 1972 당시에는 기량이 떨어져 명단에서 제외당하는 수모를 겪었으나 절치부심해 1974 서독 월드컵에서는 다시 주전 자리를 회복하며 특유의 왕성한 활동량으로 팀의 우승을 도왔다.

 

 


이름: 헬무트 란
생년월일: 1929년 8월 16일

포지션: 라이트윙, 포워드, 레프트윙
A매치 기록: 40경기 21골
신체조건: 키 178cm / 몸무게 76kg
주 소속팀: 로트바이트 에센

1950년대 서독을 상징하는 축구선수 중 한 명으로 뛰어난 돌파력과 벼락같은 슈팅을 겸비해 상대의 골문을 위협하던 아웃사이드 라이트였으며 뛰어난 슈팅력으로 에센의 대포라 불렸다.

로트바이트 에센에서 전성기를 누리며 구단 역사상 최고의 선수로 추앙받는 헬무트 란은 에센에 머무는 동안 1952-53 시즌 포칼 우승과 오베리가 웨스트 2회 우승은 물론 1955 시즌에는 독일 챔피언쉽 우승을 이뤄냈으며 특히 당대 독일 최강의 팀 카이저슬라우테른과의 결승전에서는 공격수 프란츠 일잔커의 해트트릭을 도우며 구단의 황금기를 이끌었다.

디 만샤프트에서도 대단한 활약을 보여줬던 헬무트 란은 1954 스위스 월드컵 결승전에서 멀티 골을 득점해 우승에 가장 크게 기여하며 대회 베스트 일레븐에 선정되었고 1958 월드컵에서도 여섯 골을 기록하며 팀을 준결승에 올려놓는 활약을 보여주며 발롱도르 투표에서 2위를 기록하게 된다.

 

 

 

이름: 토마스 뮐러
생년월일: 1989년 9월 13일

포지션: 포워드, 공격형 미드필더, 라이트윙, 레프트윙
A매치 기록: 131경기 45골
신체조건: 키 186cm / 몸무게 75kg
주 소속팀: FC 바이에른 뮌헨

2010년대 독일 축구의 아이콘으로 라움도이터라는 축구계의 신조어를 창안하게 했던 공간 활용의 달인이었으며 자신이 빈 공간으로 들어가 직접 득점을 하거나 동료들에게 좋은 공간을 제공해주며 골 찬스를 만드는 데에도 능했는데 티에리 앙리는 그를 두고 "화려한 개인기? 그런 게 축구가 아니다. 뮐러가 하는 게 바로 축구다. 내 아들에게 축구를 가르친다면 나는 메시나 호날두가 아닌 뮐러를 보고 배우라고 할 것이다."라고 호평했다.

클럽 커리어를 오직 바이에른 뮌헨에서만 보낸 원 클럽맨으로 바이에른에서 분데스리가 10연패를 포함해 11회 우승을 이뤄냈으며 포칼 우승 6회와 챔피언스리그 우승 2회를 기록하며 도메스틱 더블 4회와 트레블 2회를 모두 주전으로 이뤄내 30개의 트로피를 들어올렸다.

토마스 뮐러 개인도 분데스리가 시즌 베스트 일레븐 4회 선정, 분데스리가 도움왕 4회 수상은 물론 바이에른 한 클럽에서만 200골 200도움이라는 기록을 달성했는데 한 클럽에서 200골 200도움을 기록한 선수는 공식적으로는 리오넬 메시와 토마스 뮐러가 유이하다.

독일 대표팀에서는 UEFA 유로에서는 약세를 보였지만 월드컵에서는 강한 모습을 보여줬던 뮐러는 2010 남아공 월드컵 득점왕과 신인상, 대회 베스트 일레븐을 모조리 휩쓸었으며 2014 브라질 월드컵에서는 디 만샤프트의 월드컵 우승의 일등 공신으로 호평받으며 실버볼을 수상했다. 일각에서는 리오넬 메시 대신 토마스 뮐러가 골든볼을 받아야 했다는 주장도 있었을 정도로 훌륭한 퍼포먼스였으며 이때의 퍼포먼스를 바탕으로 2014년 발롱도르 5위에 랭크되었다.

 

 

 

이름: 위르겐 클린스만
생년월일: 1964년 7월 30일

포지션: 스트라이커
A매치 기록: 108경기 47골
신체조건: 키 181cm / 몸무게 75kg
주 소속팀: 인테르 밀란

1990년대를 풍미한 정상급 스트라이커로 페널티 박스에서 우수한 슈팅 스킬과 냉정침착한 판단력을 바탕으로 엄청난 존재감을 뽐냈는데 특히 환상적인 발리 슈팅이나 바이시클킥으로 승부를 결정짓는 능력이 뛰어나 사람들의 뇌리에 강력하게 새겨지기 좋은 스트라이커였다.

특이한 성격으로 인해 팀에 잘 융화되지 못했기에 클럽을 자주 옮겨 다녔던 선수였던 클린스만은 슈투트가르트에서 두각을 나타내며 1985-86 시즌 DFB포칼 준우승과 1988-89 시즌 UEFA컵 준우승을 이뤄냈으며 1987-88 시즌에는 분데스리가 득점왕과 독일 올해의 선수상을 동시에 수상했고 1988-89 시즌 전반기에는 키커 랑리스테 평가에서 월드클래스 등급에 선정되는 영예를 누렸고 인테르 밀란에서는 생애 첫 전성기를 누리며 마테우스, 브레메와 함께 게르만 삼총사로 이름을 날리며 1990-91 시즌 UEFA컵 우승에 기여했다.

그러나 인테르에서 팀원들과의 불화로 아르센 뱅거 체제의 AS 모나코로 팀을 옮긴 클린스만은 그곳에서도 두 시즌 머물며 모두 두 자릿수 골을 득점했고 1994-95 시즌 토트넘 핫스퍼에서는 제2의 전성기를 누렸는데 단 한 시즌 머물렀지만 1994-95 시즌 50경기 29골을 기록했고 FWA 올해의 선수 및 PFA 올해의 팀에 선정되는 괴력을 선보이며 발롱도르 투표에서 2위에 올랐다. 바이에른 뮌헨으로 이적해서도 UEFA컵 우승과 분데스리가 우승을 이뤄내며 마지막 전성기를 누렸다. 실제로도 클린스만 개인은 상술했던 1995년 발롱도르 2위를 포함해 발롱도르 노미네이트에 7회 선정되어 그중 6번을 10위 안에 들었고 독일 올해의 선수상을 2회 수상했으며 키커 랑리스테 평가에서도 월드클래스 등급에 7회 선정되었다.

1990년대 디 만샤프트에서는 공격진의 에이스로 군림하며 클럽에서보다도 더 대단한 활약을 펼쳤는데 UEFA 유로 1988에서 준결승에 올랐으나 네덜란드에게 아쉽게 석패했고 서울 올림픽에서는 은메달을 목에 걸었으며 1990 이탈리아 월드컵에서는 조별리그 2골 및 16강 네덜란드전 선제골을 득점해 우승에 공헌했고 UEFA 유로 1992에서도 준우승을 이뤄냈고 1994 미국 월드컵에서는 5골을 터트렸다. UEFA 유로 1996에서도 우승에 기여했고 1998 프랑스 월드컵에서도 3골을 추가하며 월드컵 통산 11골을 득점했다.

 


독일 역대 올스타 1군 25인 팀

 

 

 

 


4. 리저브

 


이름: 하랄트 슈마허
생년월일: 1954년 3월 6일

포지션: 골키퍼
A매치 기록: 76경기 73실점 / 25클린시트
신체조건: 키 186cm / 몸무게 78kg
주 소속팀: FC 쾰른

1980년대 세계 최고의 골키퍼 중 하나로 거친 플레이로 상대 공격수의 기를 죽이는 플레이를 즐겼으며 폭발적인 반사신경과 막강한 팔 힘에서 나오는 멀리 던지기를 활용한 빌드업 능력을 활용해 유럽 축구계를 주무르는 골키퍼 중 하나로 이름을 날렸다.

FC 쾰른에서 전성기를 보내며 구단 통산 최다 출전자에 랭크된 슈마허는 데뷔 시즌에 분데스리가와 DFB포칼 더블 준우승을 경험했고 1976-77 시즌 DFB포칼 우승에 이어 1977-78 시즌에는, 디 가이스버커의 분데스리가 우승과 DFB포칼 우승, 즉 더블 크라운을 이뤄내며 전 독일의 주목을 받았고 1980년대에도 1979-80 시즌 DFB포칼 준우승과 1981-82 시즌 분데스리가 준우승, 그리고 1982-83 시즌 DFB포칼 우승을 이뤄냈고 유럽 무대에서도 1985-86 시즌엔 UEFA컵 결승에 진출했으나 레알 마드리드에게 패하며 아쉽게 준우승에 머물렀다. 그리고 튀르키예의 페네르바체에서도 정규리그 우승을 이뤄내는데 공헌했으며 말년에는 바이에른 뮌헨과 보루시아 도르트문트에서 백업 골키퍼로 머물며 후자의 팀에서는 1995-96 시즌 분데스리가 우승을 경험하기도 했다.

키커 랑리스테 평가에서 월드클래스 등급 9회 선정 및 인터내셔널 클래스 등급 6회 선정을 기록한 슈마허는 디 먄샤프트에서는 UEFA 유로 1980 우승과 두 번의 월드컵 결승 진출에 공헌했는데 특히 유로 1984에서는 팀이 조별 리그에서 탈락했음에도 대회 베스트 일레븐에 들며 대회 최우수 골키퍼로 인정받아 독일 올해의 선수상을 받았고 1986 멕시코 월드컵에서는 서독의 결승행을 이끌며 실버볼과 대회 베스트 일레븐에 선정되었으며 그 해에도 독일 올해의 선수상을 받았다.

 

 

 

이름: 빌리 슐츠
생년월일: 1938년 10월 4일

포지션: 리베로, 센터백, 수비형 미드필더
A매치 기록: 66경기 0골
신체조건: 키 181cm / 몸무게 74kg
주 소속팀: 함부르크 SV

서독 최초의 리베로로 후대의 베켄바우어나 잠머와는 달리 공격적인 부분보다는 수비적인 부분에서 더 돋보였던 선수로 냉철하면서도 재빠른 판단력을 바탕으로 완벽한 커버플레이와 센스 있는 수비력을 보여줬다.

샬케에서 데뷔해 정상급 센터 하프로 활약했는데 이미 이 시절부터 분데스리가 최고의 센터하프로 군림했고 분데스리가 출범 이후에는 함부르크로 이적해 활약했는데 비록 우승 트로피를 들진 못했지만 1966-67 DFB 포칼 준우승과 1967-68 UEFA 컵 위너스 컵 준우승을 이뤄냈으며 특히 컵 위너스 컵에서의 퍼포머스를 인정받아 1968년에는 발롱도르 12위에 올랐고 키커 랑리스테 평가에서도 월드클래스 6회와 인터내셔널 클래스 11회에 선정되었다.

1960년대 독일 대표팀 수비라인의 리더였던 슐츠는 세 번의 월드컵에 출전했는데 1966 잉글랜드 월드컵에서 아쉽게 준우승에 머물렀지만 빌리 슐츠 개인은 뛰어난 활약을 펼치며 사람들로부터 월드컵 빌리라는 별명으로 불렸고 1970 멕시코 월드컵에서도 3위에 오르는데 공을 세웠다.

 

 

 

이름: 만프레트 칼츠
생년월일: 1953년 1월 6일

포지션: 라이트백, 리베로, 센터백, 중앙 미드필더
A매치 기록: 69경기 8골
신체조건: 키 186cm / 몸무게 77kg
주 소속팀: 함부르크 SV

1970년대 후반 세계 최고의 측면 수비수로 역대 최고의 오른발 크로서로 손꼽힐 정도로 뛰어난 크로스 실력을 보여 이를 두고 바나나 크로스라 불렸으며 실제로 함부르크와 디 만샤프트에서 칼츠의 크로스와 흐루베쉬의 헤딩은 중요한 공격 루트로 자리 잡았음은 물론 함부르크 통산 100 득점을 넘게 득점했을 정도로 득점력에서도 강점을 보였다.

함부르크 통산 최다 출전자로 이름을 남긴 칼츠는 팀의 전성기의 에이스로 활약하며 분데스리가 3회 우승, DFB포칼 2회 우승을 이뤄냈고 유럽에서도 컵 위너스 컵 우승과 1981-82 시즌 UEFA컵 결승 진출은 물론 1979-80 시즌 유러피언 컵 준우승과 1982-83 시즌 유러피언 컵 우승을 모두 이뤄냈다. 특히 1979-80 시즌 유러피언 컵 4강 2차전에서는 레알 마드리드를 상대로 5-1 대승을 거두는 2골 1도움을 기록하며 원정에서의 2-0 패배를 완벽하게 뒤집기도 했다.

디 만샤프트에서도 대단한 활약을 보여준 만프레트 칼츠는 UEFA 유로 1976에서는 포그츠의 백업으로 준우승을 경험했고 1978 아르헨티나 월드컵에서 잠시 리베로로 활약했으나 오스트리아와의 경기에서 패하며 2차 조별 리그에서 탈락했다. 그리고 1980년대에는 라이트백으로 회귀해 UEFA 유로 1980 우승과 1982 스페인 월드컵에서 조국의 결승 진출에 큰 공을 세웠다.

키커 랑리스테 평가에서 월드클래스 등급에 3회 선정된 칼츠는 분데스리가 통산 출전 2위, 키커 선정 분데스리가 시즌 베스트 일레븐 6회 선정된 칼츠는 발롱도르 투표에서도 1979년 4위와 1980년 10위를 기록했으며 1976년부터 선정한 옹즈 드 옹즈 선정 세계 베스트 일레븐에도 2회 선정되었다.

 

 

 

이름: 한스페터 브리겔

생년월일: 1955년 10월 11일

포지션: 레프트백, 센터백, 수비형 미드필더, 중앙 미드필더
A매치 기록: 72경기 4골
신체조건: 키 188cm / 몸무게 87kg
주 소속팀: FC 카이저슬라우테른

우수한 신체능력과 높은 축구지능을 겸비한 선수로 188cm의 89kg라는 거대한 체격은 물론 축구를 시작하기 전 육상에서도 큰 두각을 나타냈던 선수라 운동 능력에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했으며 이러한 우수한 피지컬을 앞세운 맨마킹 능력이 뛰어났는데 공격적인 부분에서도 양발을 모두 잘 썼고 특히 중거리 슈팅이 대단했으며 축구 지능도 뛰어나 필드 내에서 모든 포지션을 소화할 수 있었다.

카이저슬라우테른에서 데뷔해 1978-79 시즌에 확고한 주전으로 도약한 브리겔은 1978-79 시즌부터 1981-82 시즌까지 붉은 악마 군단을 네 시즌 연속으로 분데스리가 4위 안에 들며 상위권으로 올렸고 DFB포칼 결승에도 2회 진출하는 데 큰 공을 세워 브리겔 개인도 분데스리가 시즌 베스트 일레븐에 4회 연속으로 선정되었으며 1980-81 시즌에는 키커 랑리스테 평가에서 월드클래스 등급을 받았다.

이탈리아 무대에 진출해서 활약한 엘라스 베로나에서는 중앙 미드필더와 수비형 미드필더도 활약하며 전성기를 누렸는데 왕성한 활동량을 활용한 전진성을 앞세워 약체로 평가받던 팀을 우승시키는데 큰 공을 세워 1985 발롱도르 8위에 올랐고 독일 올해의 선수상을 수상했으며 말년에는 삼프도리아에서 1987-88 시즌 코파 이탈리아 우승을 이뤄냈다. 그리고 브리겔도 세 팀에 머물면서 개인 통산 옹즈 몽디알 선정 유럽 베스트 일레븐에 3회 선정되었다.

디 만샤프트에서도 자신의 다재다능을 유감없이 발휘했던 브리겔은 레프트백 시절에는 UEFA 유로 1980 우승에 기여하며 대회 올스타 팀에 선정되었고 1982 스페인 월드컵에서도 준우승을 이뤄냈고 1986 멕시코 월드컵에서는 안드레아스 브레메에게 레프트백 자리를 내주고 스토퍼와 수비형 미드필더로 활약하며 조국을 재차 결승행에 올렸으나 마라도나를 막지 못해 우승컵을 들지는 못했다.

 

 

 

이름: 호어스트 시마니악
생년월일: 1934년 8월 29일

포지션: 수비형 미드필더, 중앙 미드필더, 센터백, 공격형 미드필더
A매치 기록: 43경기 2골
신체조건: 키 178cm / 몸무게 76kg
주 소속팀: 부퍼탈 SV

1950년대 하반기~1960년대 상반기 독일 최고의 하프백으로 수비적으로는 한 박자 빠른 슬라이딩 태클과 악착같은 대인 수비는 물론 정교한 왼발 롱패스와 우아한 볼 컨트롤 능력도 겸비한 공수겸장으로 이름을 날렸으며 센터백과 인사이드 포워드 자리에서도 활약할 수 있었을 정도로 포지션에 대한 이해도가 높았다.

클럽에서는 부퍼탈, 카를스루헤, 카타니아, 바레세 같은 중소규모의 구단에서 활약한 시마니악은 팀 전력의 한계 탓에 클럽팀 우승 커리어는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발롱도르 노미네이트에 5회 선정 및 10위 안에만 3회 선정되었고 키커 랑리스테 평가에서도 월드클래스 등급에 7회 선정되었다.

디 만샤프트의 감독 제프 헤어베르거의 총애를 받아 1958 스웨덴 월드컵과 1962 칠레 월드컵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맡았던 시마니악은 전자의 대회에서는 팀을 준결승에 진출시키는데 크게 공헌해 다수의 매체에서 대회 베스트 일레븐에 선정되었고 그 공을 인정받아 1958년 발롱도르 투표에서 8위에 올랐다.

 

 

 

이름: 토니 크로스
생년월일: 1990년 1월 4일

포지션: 중앙 미드필더, 공격형 미드필더, 수비형 미드필더
A매치 기록: 114경기 17골
신체조건: 키 182cm / 몸무게 78kg
주 소속팀: 레알 마드리드

2010년대 유럽 축구계를 빛낸 중원의 마에스트로라 평가받으며 드넓은 시야와 날카로운 킬패스, 그리고 볼을 받기 유리한 위치를 선점하면서 안정적인 패스로 팀의 점유율을 장악하는 데에도 능했으며 중거리 슈팅도 우수했고 의외로 지구력도 우수해 수비 상황에서도 꽤 도움을 주기도 했음은 물론 높은 축구지능으로 국내 팬들은 그를 두고 '교수님'이라고 불렸다.

바이에른 뮌헨과 레알 마드리드에서 전성기를 보냈으며 전자의 구단에서는 공격형 미드필더로 활약하며 2011-12 시즌 트리플 준우승 2012-13 시즌 트레블을 경험했으며 레알 마드리드에서는 카세미루, 모드리치와 함께 크카모 라인을 형성해 라 리가 3회 우승과 UEFA 챔피언스리그 5회 우승을 이뤄내며 2010년대 최고의 클럽인 레바뮌 중 두 구단에서 커다란 족적을 남겼다.

키커 랑리스테 평가에서 월드클래스 등급 4회 선정 및 인터내셔널 클래스 등급 17회 선정에 빛나는 크로스의 활약은 디 만샤프트에서도 이어졌는데 2014 브라질 월드컵 우승에 공헌해 대회 올스타 팀에 선정되었으며 유로 2016에서도 준결승 진출에 공헌하며 대회 베스트 일레븐으로 선정되었다. 다만 람과 슈바인슈타이거가 은퇴하고 본인이 중핵이 되어 도전했던 2018 러시아 월드컵에서는 조별리그 탈락이라는 최악의 부진을 경험하기도 했지만 UEFA 유로 2024에서는 팀의 중핵으로 8강 진출을 이뤄냈다.

청소년 시절부터 개인적으로 대단한 영광을 누린 크로스는 2007 FIFA U-17 월드컵에서 골든볼을 수상했으며 그 해에 프리츠 발터 U-18 부문 금메달을 수상했으며 성인 무대에서도 UEFA 챔피언스리그 올해의 스쿼드 5회 연속 선정, 키커지 선정 분데스리가 시즌 베스트 일레븐 3회 선정, 그리고 발롱도르 노미네이트에 5회 선정되어 2014년과 2024년에는 개인 통산 최고 순위인 9위에 올랐다.

 

 

 

이름: 바스티안 슈바인슈타이거

생년월일: 1984년 8월 1일

포지션: 중앙 미드필더, 수비형 미드필더, 윙어, 공격형 미드필더
A매치 기록: 121경기 24골
신체조건: 키 183cm / 몸무게 79kg
주 소속팀: FC 바이에른 뮌헨

2000년대 후반과 2010년대 초반에 전성기를 누린 다재다능한 미드필더로 윙어 시절에는 경기력은 좋지 않았지만 결정적인 득점으로 팀을 여러 번 구했으며 중앙 미드필더로 보직을 변경한 이후엔 드넓은 시야와 우수한 킥력을 활용해 우수한 중원 지휘 능력과 롱패스로 공격 활로를 여는데 능했으며 벼락같은 중거리 슈팅으로 득점에 기여하기도 했으며 우수한 탈압박 능력으로 상대방의 압박을 무력화시키는데도 능해 팬들로부터 '푸스발 고트'라 불렸다.

바이에른 뮌헨 유스팀에서 데뷔해 선수생활 전성기를 보내며 분데스리가 8회 우승과 포칼 7회 우승을 이뤄냈으며 특히 2012-13 시즌에는 절정의 폼을 보여주며 2012-13 시즌 분데스리가, 포칼은 물론 챔피언스리그도 석권하며 트레블을 달성하는 위용을 보여줬고 개인으로도 많은 영예를 누리며 2010년 독일 축구 국가대표팀 올해의 선수상을 시작으로 2013년에 ESM 올해의 팀에 선정되었고 UEFA 올해의 선수 투표에서 7위를 기록했으며 2013 독일 올해의 선수상을 수상했다. 발롱도르 노미네이트 및 키커 랑리스테 월드클래스 등급에도 각각 4회 선정되었음은 물론 팬들의 민심이 대단히 좋아 은퇴 이후에는 '푸스발 고트'라는 이름으로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기도 했다.

독일 대표팀에서는 클럽에서는 경기력에 기복이 있다고 지적받던 시절에도 굉장히 잘해 미로슬라프 클로제, 루카스 포돌스키와 함께 소위 '애국자'라고 불렸던 슈바인슈타이거는 2006 독일 월드컵 3,4위전에서는 포르투갈을 상대로 멀티골을 기록했고 UEFA 유로 2008 8강전에서도 포르투갈을 상대로 선제골을 기록하며 포르투갈 킬러로 명성을 날렸다. 중앙 미드필더로 보직을 변경한 이후에도 2010 남아공 월드컵에서 팀의 4강 진출에 핵심적인 역할을 하며 드림팀에 선정되었고  2014 브라질 월드컵에서는 뛰어난 중원 지휘 능력을 앞세워 우승의 방점을 찍었다. 심지어는 클럽에서는 부진하던 시절인 UEFA 유로 2016에서도 베테랑으로 팀을 이끌며 조국의 준결승 진출을 이뤄내는데 공헌했는데 그가 은퇴하자 독일 대표팀은 메이저 대회에서 번번이 조기탈락하며 그와 람의 공백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다.

 

 

 

이름: 토마스 헤슬러
생년월일: 1966년 5월 30일

포지션: 공격형 미드필더, 라이트윙, 중앙 미드필더
A매치 기록: 101경기 11골
신체조건: 키 166cm / 몸무게 66kg
주 소속팀: FC 쾰른

안디 묄러와 함께 1990년대 독일 축구를 대표하는 테너로 166cm의 왜소한 체구를 가지고 있었지만 중앙과 측면, 최전방과 후방을 오가는 왕성한 활동량과 물 찬 제비와 같은 민첩한 움직임과 우아한 볼 컨트롤 능력은 물론 뛰어난 스루패스와 크로스를 활용해 골 찬스를 만들어내며 자신의 신체적 약점을 완벽하게 극복했다.

쾰른, 유벤투스, 로마, 카를스루헤, 보루시아 도르트문트 등 독일과 이탈리아의 여러 구단을 돌았던 헤슬러는 클럽에서의 관운은 없었는지 쾰른에서는 분데스리가 2회 준우승과 UEFA컵 1회 준우승을, 유벤투스에서는 수페르코파 이탈리아나 준우승을, 로마에서는 수페르코파 이탈리아나와 코파 이탈리아 준우승을, 카를스루헤에서는 포칼 준우승을 이루며 개인의 뛰어난 활약에도 불구하고 클럽 단위 우승컵을 한 번도 들지 못하고 준우승에만 머무른 비운의 선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키커 랑리스테 평가에서 월드클래스 등급에 4회 선정되는 등 개인의 활약은 인정받는 편이었는데 헤슬러 개인의 활약은 대단해 키커지 선정 분데스리가 시즌 베스트 일레븐에 6회 선정되었고 옹즈 몽디알에서 뽑으 유럽 베스트 일레븐에 2회 선정되었다.

그래도 독일 대표팀에서는 클럽에서의 아쉬움을 완벽하게 씻어낸 헤슬러는 1988 서울 올림픽 동메달을 시작으로 성인 대표팀에서도 핵심 선수가 되며 1990 이탈리아 월드컵 우승, UEFA 유로 1992에서는 준우승에 머물렀지만 MVP를 수상했고 이때의 활약으로 1992 발롱도르 4위와 피파 올해의 선수상 3위에 올랐으며 1994 미국 월드컵 도움왕, UEFA 유로 1996 우승이라는 화려한 활약상을 보여줬으며 2000년에는 독일 대표팀에서 다섯 번째로 센추리 클럽에 가입했다.

 

 

 

이름: 에른스트 쿠조라
생년월일: 1905년 10월 16일

포지션: 포워드, 공격형 미드필더, 스트라이커
A매치 기록: 12경기 7골
신체조건: 키 173cm / 몸무게 75kg
주 소속팀: FC 샬케 04

로얄 블루스에게 중원에 스체판이 있다면 공격에는 쿠조라가 있었다. 정교한 드리블과 정확하면서도 강력한 슈팅력을 모두 갖췄으며 공격진의 모든 포지션을 소화할 수 있는 다재다능한 선수였으며 레비어 더비가 독일 내에서 치열해진 이유로는 나치가 쿠조라가 도르트문트로 이적할 수 있다는 루머를 퍼트려서였다는 설도 있었을 정도였다.

1930년대 샬케의 황금기를 대표하는 공격진의 핵심이자 주장으로 명성이 높았던 쿠조라는 가울리가 베스트팔렌 11회 우승과 6번의 독일 챔피언쉽 우승을 이뤄냈는데 특히 1936-37 시즌에는 독일 챔피언쉽과 DFB포칼을 동시에 우승하며 샬케를 독일 최초의 도메스틱 더블 팀으로 올려놓았다. 쿠조라 개인도 샬케 구단 역대 최다 득점과 통산 출전 2위에 랭크되었으며 1999년에 선정된 샬케의 세기의 일레븐과 명예의 주장에 동시에 선정되었다.

다만 쿠조라는 디 만샤프트에서 큰 족적을 남기진 못했는데 감독 오토 네어츠가 자신의 성향과 샬케 선수들이 맞지 않아서 그들을 기용하지 않기도 했지만 쿠조라의 제외는 다른 이유가 있었는데 네어츠가 쿠조라에게 "너는 독일 대표팀을 위해 뛰지 않는다."라고 지적하자 쿠조라가 "내 엉덩이나 핥아라"라고 응수하자 이에 분노해 뽑지 않아 쿠조라의 대표팀 커리어는 초라했다.

 

 

 

이름: 루디 푈러
생년월일: 1960년 4월 13일

포지션: 스트라이커, 레프트윙, 포워드
A매치 기록: 90경기 47골
신체조건: 키 180cm / 몸무게 71kg
주 소속팀: 베르더 브레멘

1980년대 중후반 유럽 정상급 스트라이커로 영리한 움직임과 매끄러운 볼 터치로 상대 수비를 제치고 페널티 박스에 침투했고 머리와 양 발을 가리지 않고 어떻게든 득점하는데도 능했음은 물론 침착하기까지 했기에 이탈리아 언론은 그를 두고 날아다니는 독일인이라고 지칭했다.

베르더 브레멘에서 데뷔해 월드클래스 공격수로 성장한 푈러는 브레멘에서 활약할 당시 무려 세 시즌이나 리그 20골을 넘겼으며 1982-83 시즌 분데스리가 득점왕을 차지했음은 물론 1983년에는 독일 올해의 선수상을 받았고 1985년에는 발롱도르 투표에서 11위를 기록하는 등 독일 최고의 공격수로 군림했다.

이후 당대 최고 레벨의 리그인 이탈리아 세리에 A의 AS 로마로 이적해서는 지안니니와 함께 에이스로 활약하며 1990-91 시즌 코파 이탈리아 우승과 UEFA컵 준우승을 이뤄냈고 푈러 개인도 그 해에 UEFA컵에서 득점왕을 차지했으며 마르세유에서는 1992-93 시즌 UEFA 챔피언스리그 우승을 이뤄냈고 이후 마르세유가 승부조작 혐의로 강등당하자 레버쿠젠으로 이적해서 그곳에서 커리어를 마감했다.

디 만샤프트에서도 핵심적인 역할을 맡았던 루디 푈러는 대표팀에서 각각 세 번의 월드컵과 유로에 참가했는데 UEFA 유로 1984에서 팀은 조기 탈락했지만 푈러 개인은 대회 베스트 일레븐에 들었고 1986 멕시코 월드컵에서는 결승전에 교체 출전해 팀의 흐름을 바꾸며 분전했으며 1990 이탈리아 월드컵에서는 레이카르트와의 다툼으로 퇴장당하기도 헸지만 준수한 활약으로 팀의 우승에 기여했다. 마지막으로 1994 미국 월드컵에서도 두 골을 추가해 개인 통산 월드컵 8골을 기록했다.

 

 

 

이름: 미로슬라프 클로제
생년월일: 1978년 6월 9일

포메이션: 스트라이커
A매치 기록: 137경기 71골
신체조건: 키 184cm / 몸무게 84kg
주 소속팀: 베르더 브레멘

2000년대와 2010년대 디 만샤프트를 대표했던 스트라이커로 우수한 점핑력을 활용한 뛰어난 헤더로 많은 골을 득점했으며 깔끔한 원터치 패스를 활용해 동료 공격수와의 유려한 연계 능력으로 분데스리가에서 도움왕만 두 번을 올려놨을 정도로 기회 창출에도 능했던 완성형 공격수였다.

카이저슬라우테른에서 데뷔해 베르더 브레멘에서 전성기를 보낸 클로제는 이 시기에는 분데스리가와 DFB포칼에서 우승하지 못했지만 2005-06 시즌에는 득점왕, 도움왕, 분데스리가 MVP를 석권했고 키커 선정 분데스리가 올해의 팀 2회 선정 및 분데스리가 도움왕 2회 수상이라는 기록을 세웠다.

바이에른 뮌헨에서는 루카 토니, 프랑크 리베리와 함께 공격을 이끌며 두 번의 도메스틱 더블을 이뤄냈으나 이후 노쇠화와 부진으로 고메스와의 경쟁에서 밀려난 클로제는 라치오로 이적해 권토중래를 노리며 부활했는데 2012-13 시즌 코파 이탈리아 우승은 물론 볼로냐를 상대로 한 경기 다섯 골을 넣는 기염을 토했다.

독일 대표팀에서는 A매치 통산 최다 득점자의 자리를 지키고 있는 클로제는 2002 한일 월드컵 때 무려 5골을 넣으며 화려하게 데뷔했고 2006 독일 월드컵과 2010 남아공 월드컵에서는 각각 5골과 4골을 넣으며 팀이 3위에 오르는데 공헌했고 2014 브라질 월드컵 4강전에서는 자신과 타이를 이루던 호나우두가 보는 앞에서 월드컵 개인 통산 16호 골을 득점하며 대회 우승에 기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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