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축구 역사상 최고의 공격형 미드필더 Top 10

국가의 영웅들/독일

독일 축구 역사상 최고의 공격형 미드필더 Top 10

토르난테 2025. 1. 31.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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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의 주관적인 순위입니다.
*대상자는 독일 국가 대표팀으로 A매치 1경기 이상 출전한 선수를 대상자로 했습니다.
*선수 사진은 대부분 플레이어스 유저인 법정스님의 소유님의 건조폼 입니다. 다만 법정님이 만들지 않은 선수들은 제가 만들었습니다.
*기준일은 2025년 1월 31일입니다.

 


10위 지기 헬트

 


생년월일: 1942년 8월 7일
A매치 기록: 41경기 3골
신체조건: 키 180cm / 몸무게 75kg
주 소속팀: 보루시아 도르트문트

1960년대 서독을 대표하는 다재다능한 공격 자원으로 빠른 스피드를 활용해 중앙과 측면을 아우르며 폭넓게 움직이며 신속정확하게 배달되는 오른발 택배 크로스와 뛰어난 방향 전환 능력을 겸비해 수많은 득점 찬스를 만들어냈다.

도르트문트에서 전성기를 누리며 레프트윙 로타어 에머리히와 함께 '끔찍한 쌍둥이'라는 공격 듀오로 활약하며 유명세를 떨친 헬트는 1965-66 시즌 분데스리가 준우승과 UEFA 컵 위너스컵 우승을 이뤄냈고 키커스 오펜바흐와 바이어 위어딩겐에서도 훌륭한 모습을 보이며 분데스리가 시즌 베스트 일레븐에 2회 선정되었다.

키커 랑리스테 평가에서도 인터내셔널 클래스 등급에 12회 선정된 헬트는 서독 대표팀 주전으로 발탁되어 1966 잉글랜드 월드컵에서 조국의 결승행에 공헌했고 1970 이탈리아 월드컵에서도 로테이션 멤버로 활약했다.

 

9위 메수트 외질

 


생년월일: 1988년 10월 15일
A매치 기록: 92경기 23골
신체조건: 키 183cm / 몸무게 76kg
주 소속팀: 아스날 FC

2010년대 상반기에 세계 정상급 공격형 미드필더로 활약했던 선수로 활동량이 적고 조직적인 압박에는 약하다는 평가가 있었지만 광활한 시야와 창의적인 패싱력을 바탕으로 골 찬스를 만드는 부분에서만큼은 타의 추종을 불허해 어시스트 왕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베르더 브레멘에서 2008-09 시즌 DFB포칼 우승과 UEFA컵 준우승, 그리고 분데스리가 시즌 베스트 일레븐에 들었고 2009-10 시즌에는 분데스리가와 UEFA 유로파 리그에서 동시에 도움왕에 오르며 세계에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외질은 레알 마드리드에서는 본격적인 전성기를 누리며 벤제마, 호날두와 손발을 맞추며 2010-11 시즌 코파 델 레이 우승과 2011-12 시즌 라리가 우승을 이뤄냈는데 이때 외질 개인도 2010-11 시즌 UEFA 챔피언스리그 도움왕 및 2011-12 시즌 라리가 도움왕을 이뤄냈다.

그러나 레알 마드리드에서 중원의 새로운 축으로 루카 모드리치를 선택함으로써 밀려났는데 당시 아스날 역대 최고 이적료인 5000만 유로에 아스날로 이적해 활약했는데 프리미어 리그 우승을 이뤄내지는 못했지만 FA컵 4회 우승에 공헌하며 FA컵의 강자로 올랐고 외질 개인도 산체스, 카솔라와 함께 팀의 공격을 이끌며 2015-16 시즌 프리미어리그 도움왕에 올라 3대 리그와 챔피언스리그, 그리고 유로파 리그에서 모두 도움왕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고 이 시즌 전반기에 키커 랑리스테 평가에서 월드클래스 등급을 받기도 했다.

독일 대표팀에서도 주축으로 활약하며 팬투표로 선정하는 독일 국대 올해의 선수에 5회 선정된 외질은  2010 남아공 월드컵에서 도움왕에 오르며 팀이 3위에 오르는데 큰 공을 세웠고  UEFA 유로 2012에서도 준결승에 진출하는데 기여하며 대회 올스타 팀에 선정되었다. 그리고 2014 브라질 월드컵에서는 조력자로서 토마스 뮐러를 도와 월드컵 우승에 공헌하는 등 승승장구했으나 2018 러시아 월드컵에서는 여러 논란과 함께 부진한 활약으로 탈락의 주범으로 지목되며 큰 비판을 받았다.

 

8위 울리 회네스

 


생년월일: 1952년 1월 5일
A매치 기록: 35경기 5골
신체조건: 키 181cm / 몸무게 76kg
주 소속팀: FC 바이에른 뮌헨

현재는 바이에른 뮌헨이 유럽 최고의 클럽 중 하나로 손꼽히게 만들었던 바이에른의 전직 회장으로 더 유명하지만 선수 시절에도 독일을 넘어 전 유럽에 이름을 날리던 유망주로 자신의 장기인 빠른 스피드를 이용해 데뷔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주전 자리를 획득하며 구단의 황금기를 이끌었다.

바이에른에서 데뷔해 뉘른베르크 임대시절을 제외하면 선수 생활을 바이에른에서만 보낸 원 클럽맨 회네스는 10년도 안 되는 짧은 선수 시절 동안 분데스리가 3연패와 유러피언컵 3연패를 이끌어냈으며 이 대회에서 모두 주전으로 우승을 이뤄냈다. 그 과정에서 1973-74 시즌 하반기에는 키커 랑리스테 평가에서 월드클래스 등급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무릎 부상으로 27세라는 젊은 나이에 은퇴하고 구단 운영으로 보직을 변경했다.
 
선수 생활이 짧음에도 불구하고 서독 대표팀에서 세운 업적이 대단한 울리 회네스는 데뷔 초반부터 독일 대표팀 주전으로 빠르게 도약했는데 UEFA 유로 1972와 1974 서독 월드컵의 우승을 주전으로 이끌며 두 대회에서 모두 베스트 일레븐에 들었고 UEFA 유로 1976에서도 팀의 결승행에 공헌하는 등 황금기를 보냈다. 은퇴한 이후에는 바이에른 뮌헨의 역사를 새로 쓰며 선수는 물론 경영인으로서도 유럽 축구사에 큰 족적을 남겼다.

 

7위 펠릭스 마가트

 


생년월일: 1953년 7월 26일
A매치 기록: 43경기 3골
신체조건: 키 172cm / 몸무게 74kg
주 소속팀: 함부르크 SV

현세대의 팬들에게는 괴장으로 유명한 마가트는 23세에 처음 프로 무대에 진출한 대기만성형 선수로 1970년대 후반과 1980년대 중반까지 함부르크의 전성기를 이끈 다재다능한 미드필더로 창의적인 롱패스 능력과 강력한 중거리 슈팅을 겸비했으며 뛰어난 스테미너를 기반으로 왕성한 수비 가담 능력도 겸비했다.

자르브뤼켄에서 프로무대에 데뷔한 마가트는 함부르크에서 전성기를 누리며 분데스리가 3회 우승 및 1976-77 시즌 UEFA 컵 위너스 컵 우승과 1981-82 시즌 UEFA컵 준우승은 물론 최고 레벨 대회인 유러피언 컵에서도 1979-80 시즌 준우승 및 1982-83 시즌 우승을 이뤄냈다. 특히 1982-83 시즌 유러피언 컵 결승전에서는 유벤투스의 명 골키퍼 디노 조프를 상대로 벼락같은 중거리 슈팅으로 결승골을 터트리며 디 로토센의 첫 빅이어에 일등 공신이 되며 1983년 발롱도르 투표에서 5위에 올랐다.

독일 대표팀에서도 오랜 기간 중용된 마가트는 백업 멤버로 UEFA 유로 1980 우승을 경험했으며 1982 스페인 월드컵과 1986 멕시코 월드컵에서도 팀의 결승 진출에 공헌했는데 특히 1986 멕시코 월드컵 결승전은 마가트의 은퇴경기였을 정도로 은퇴하기 직전까지 당시 선수층이 가장 두터운 서독 대표팀의 부름을 받았을 정도로 기량유지를 잘 했다.

 

6위 헬무트 할러

 


생년월일: 1939년 7월 21일
A매치 기록: 33경기 13골
신체조건: 키 178cm / 몸무게 79kg
주 소속팀: 볼로냐 FC

1960년대 독일 대표팀의 공격을 이끌었던 공격형 미드필더이자 처진 공격수로 부드러운 드리블과 유려한 볼 컨트롤을 활용한 플레이메이킹 능력은 물론 날카로운 오른발 슈팅으로 직접 득점에도 능했다.

BC 아우크스부르크에서 데뷔해 두각을 나타낸 할러는 독일 무대에서의 성공을 바탕으로 이탈리아 세리에 A의 볼로냐로 이적한 뒤에는 불가렐리와 함께 팀의 플레이메이킹을 이끌며 그란데 인테르라 불리던 강호 인테르를 제치고 1963-64 시즌 세리에 A 우승을 이뤄내며 세리에 A 올해의 선수상을 수상했고 유벤투스로 이적한 뒤에도 세리에 A 2연패와 1972-73 시즌 유러피언 컵 결승에 진출하는 영광을 누렸다.

1960년대 독일 대표팀에서도 주전으로 활약한 헬무트 할러는 1962 칠레 월드컵과 1966 잉글랜드 월드컵에서는 우베 젤러와 투 톱으로 나섰는데 특히 후자의 대회에서는 토너먼트 전 경기에 득점하는 활약을 펼치며 총 6골을 득점해 조국의 준우승에 일조했다.

 

5위 안드레아스 묄러

 


생년월일: 1967년 9월 2일
A매치 기록: 85경기 29골
신체조건: 키 180cm / 몸무게 78kg
주 소속팀: 보루시아 도르트문트

헤슬러와 함께 1990년대 독일 축구를 대표하는 테너로 넓은 시야에서 나오는 창의적인 패스 능력과 정교한 테크닉에서 나오는 드리블로 팀의 공격을 이끌었으며 득점력도 우수해 가끔은 해결사 역할까지 도맡기도 했다.

프랑크푸르트에서 데뷔해 토마스 베어톨트와 함께 프랑크푸르트의 미래로 평가받았던 묄러는 팀이 내리막을 걷자 도르트문트로 이적해 1988-89 시즌 DFB포칼 우승 및 DFL슈퍼컵 우승을 이뤄냈고 유벤투스로 이적해서는 바조와 함께 팀의 공격을 이끌며 1992-93 시즌 UEFA컵 우승을 이뤄냈다. 그러나 델 피에로가 두각을 나타내며 다시 도르트문트로 이적해 분데스리가 2연패 및 1996-97 시즌 UEFA 챔피언스리그 우승 및 인터콘티넨탈컵 우승을 이뤄냈다. 특히 인터콘티넨탈컵에서는 MVP를 수상했다. 2000년에는 라이벌팀 샬케로 이적했다가 말년은 고형팀 프랑크푸르트에서 보냈다. 개인 통산 키커 올해의 팀 6회 선정 및 분데스리가 도움왕에 2회 선정되었다.

독일 대표팀에서도 토마스 헤슬러와 치열한 주전 경쟁을 펼쳤는데 백업으로 1990 이탈리아 월드컵 우승을 경험했고 1992년에는 헤슬러와 동시에 출전해 준우승을 이뤄냈다. 그리고 UEFA 유로 1996에서도 우승을 이뤄냈으나 경고 누적과 부상 등으로 결승전과는 인연이 없었다. 그리고 월드컵에서는 다소 부진했다.

 

4위 토마스 헤슬러

 


생년월일: 1966년 5월 30일
A매치 기록: 101경기 11골
신체조건: 키 166cm / 몸무게 66kg
주 소속팀: FC 쾰른

안디 묄러와 함께 1990년대 독일 축구를 대표하는 테너로 166cm의 왜소한 체구를 가지고 있었지만 중앙과 측면, 최전방과 후방을 오가는 왕성한 활동량과 물 찬 제비와 같은 민첩한 움직임과 우아한 볼 컨트롤 능력은 물론 뛰어난 스루패스와 크로스를 활용해 골 찬스를 만들어내며 자신의 신체적 약점을 완벽하게 극복했다.

쾰른, 유벤투스, 로마, 카를스루헤, 보루시아 도르트문트 등 독일과 이탈리아의 여러 구단을 돌았던 헤슬러는 클럽에서의 관운은 없었는지 쾰른에서는 분데스리가 2회 준우승과 UEFA컵 1회 준우승을, 유벤투스에서는 수페르코파 이탈리아나 준우승을, 로마에서는 수페르코파 이탈리아나와 코파 이탈리아 준우승을, 카를스루헤에서는 포칼 준우승을 이루며 개인의 뛰어난 활약에도 불구하고 클럽 단위 우승컵을 한 번도 들지 못하고 준우승에만 머무른 비운의 선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키커 랑리스테 평가에서 월드클래스 등급에 4회 선정되는 등 개인의 활약은 인정받는 편이었는데 헤슬러 개인의 활약은 대단해 키커지 선정 분데스리가 시즌 베스트 일레븐에 6회 선정되었고 옹즈 몽디알에서 뽑으 유럽 베스트 일레븐에 2회 선정되었다.

그래도 독일 대표팀에서는 클럽에서의 아쉬움을 완벽하게 씻어낸 헤슬러는 1988 서울 올림픽 동메달을 시작으로 성인 대표팀에서도 핵심 선수가 되며 1990 이탈리아 월드컵 우승, UEFA 유로 1992에서는 준우승에 머물렀지만 MVP를 수상했고 이때의 활약으로 1992 발롱도르 4위와 피파 올해의 선수상 3위에 올랐으며 1994 미국 월드컵 도움왕, UEFA 유로 1996 우승이라는 화려한 활약상을 보여줬으며 2000년에는 독일 대표팀에서 다섯 번째로 센추리 클럽에 가입했다.

 

3위 볼프강 오베라트

 


생년월일: 1943년 9월 29일
A매치 기록: 81경기 17골
신체조건: 키 176cm / 몸무게 71kg
주 소속팀: FC 쾰른

귄터 네처와 함께 1960년대 하반기와 1970년대 상반기를 대표하는 독일 최고의 테너로 뛰어난 플레이메이킹 능력은 물론이고 왕성한 활동량과 우수한 기동력을 겸비했으며 유사시에는 수비에도 적극 가담했던 현대적인 미드필더였다.

클럽 커리어의 전부를 쾰른에서만 보낸 원 클럽맨인 오베라트는 1963-64 시즌에 팀을 첫 번째 분데스리가 우승팀으로 만드는데 큰 공을 세웠으며 이후에도 2회 준우승을 추가로 이뤄냈으며 DFB포칼 결승에도 5회 진출해 2회 우승하며 디 가이스버커가 독일의 명문으로 올라서는데 큰 공을 세웠음은 물론 오베라트 개인도 키커 랑리스테 평가에서 월드클래스 등급에 8회 선정되었고  키커지 선정 분데스리가 시즌 베스트 일레븐에 4회 선정되었다.

디 만샤프트에서는 월드컵에서 특히 강한 모습을 보였던 오베라트는 3번의 월드컵에서 모두 주전으로 나서며 총 59회의 찬스 메이킹을 기록했음은 물론 1966 잉글랜드 월드컵에서 데뷔해 준우승이라는 성적에 공헌했고 1970 멕시코 월드컵에서는 뛰어난 활약을 선보이며 발롱도르 투표에서 5위에 올랐다. 그러나 UEFA 유로 1972 당시에는 기량이 떨어져 명단에서 제외당하는 수모를 겪었으나 절치부심해 1974 서독 월드컵에서는 다시 주전 자리를 회복하며 특유의 왕성한 활동량으로 팀의 우승을 도왔다.

 

2위 귄터 네처

 


생년월일: 1944년 9월 14일
A매치 기록: 37경기 6골
신체조건: 키 178cm / 몸무게 75kg
주 소속팀: 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

볼프강 오베라트와 함께 1960년대 하반기와 1970년대 상반기를 대표하는 독일 최고의 테너로 역사상 최고의 패스 마스터 중 하나로 손꼽혔을 정도로 패스를 잘해서 패스의 단위를 센티미터 단위로 조절한다는 이야기가 있었을 정도로 패싱력이 우수해 "센티미터 패서", "컴퓨터 패서"라 불렸다.

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에서 전성기를 보낸 네처는 키커 랑리스테 월드클래스 등급 4회와 인터내셔널 클래스 등급 10회를 기록했으며 리그 2연패를 이끌었으나 감독 헤네스 바이스바일러와의 불화로 팀을 떠나게 되는데 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에서 마지막 경기인 1972-73 포칼에서는 부상을 핑계로 경기에 출장하지 않으려 했으나 쾰른과 묀헨글라트바흐가 연장에 돌입하자 이제 출전하겠다며 교체 출전하며 결승골을 넣고 팀에게 마지막까지 트로피를 주고 떠났다. 묀헨글라트바흐에 머무는 동안  키커지 선정 분데스리가 시즌 베스트 일레븐에 7회 선정되었으며 월드 사커지 선정 세계 베스트 일레븐 3회 선정되었고 레알 마드리드에서도 활약했다.

디 만샤프트에서도 오베라트와 치열한 주전 경쟁을 펼치며 활약했던 네처는 UEFA 유로 1972에서 그의 뛰어나면서도 창의적인 패스는 람바참바 풋볼에서 중요한 요소였기에 결국 대회를 압도적으로 우승한 뒤 베켄바우어 다음으로 게르트 뮐러와 함께 발롱도르 공동 2위를 수상했다. 다만 월드컵에서는 라이벌 볼프강 오베라트에게 밀려 벤치 신세를 지며 아쉬운 활약상을 보여줬다.

 

1위 프리츠 발터

 


생년월일: 1920년 10월 31일
A매치 기록: 61경기 33골
신체조건: 키 174cm / 몸무게 73kg
주 소속팀: FC 카이저슬라우테른

프란츠 베켄바우어, 로타어 마테우스 등과 함께 독일 축구사의 상징적인 존재이자 비 오는 날에 특히 강했던 서독 대표팀 역대 최고의 주장, 나치 독일 시절에 데뷔해 서독 축구의 부흥을 이끈 다재다능한 인사이드 포워드로 훌륭한 리더십과 플레이메이킹 능력을 보여줬으며 특히 비 오는 날에 훌륭한 경기력을 보여줘 비 오는 날을 '프리츠 발터의 날'이라고 불렀다.

나치당의 강압적인 명령으로 잠시 임대를 간 것을 제외하면 클럽 커리어의 전부를 카이저슬라우테른에서만 보낸 발터는 오베리가 주트베스트 10회 우승과 독일 챔피언십 결승에 다섯 번 진출해 두 번 우승했으며 최초의 키커 랑리스테 평가에서 35세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인사이드 포워드 부문 월드클래스 등급을 받았다. 카이저슬라우테른 구단 측도 상술한 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홈구장의 이름을 프리츠 발터 슈타디온으로 바꾸기도 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감독 헤어베어거와 함께 서독 대표팀의 재건을 이끈 발터는 1954 스위스 월드컵에서 높게 평가받지 못했던 서독을 이끌고 결승에 진출했으며 조별 리그에서 자신을 8-3으로 이겼던 헝가리를 상대로 3-2 승리를 거두는, 일명 베른의 기적의 주인공으로 활약하는 과정에서 3골 6도움을 기록하며 ESPN 선정 대회 베스트 일레븐에 선정되었고 1958 스웨덴 월드컵에서도 만 37세의 나이에도 주전으로 활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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