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구 역사상 최고의 선수 11~20위

포지션별 역대 TOP 100/Total

축구 역사상 최고의 선수 11~20위

토르난테 2024. 11. 5. 1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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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사항


* 작성자 개인의 주관이 강하게 들어갔습니다. 아무리 설득하셔도 바꿀 생각 없습니다.

* 과거 버전과는 대폭 수정되었습니다. 관점이 바뀐 부분도 있고 가진 자료가 그때보다 많아졌다는 이유도 있습니다.

* 과거의 선수일수록 수상 기회가 적어 수상 횟수에서 불리하다는 점은 꼭 알아두셨으면 좋겠습니다.

* 사진 출처는 에펨코리아와 플레이어스에서 활동하시는 법정스님의 소유님의 사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단 소유님이 만드시지 않았던 선수들에 한정해서는 제가 직접 건조폼을 제작합니다.

 


20위 마누엘 노이어

 


생년월일: 1986년 3월 27일
국적: 독일
신체조건: 키 193cm / 몸무게 93kg
주 소속팀: FC 바이에른 뮌헨


바이에른 뮌헨과 분데스리가 역대 최고의 골키퍼이며 골키퍼로서의 기본적인 능력은 물론, 필드 플레이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넓은 커버 범위와 훌륭한 빌드업으로 스위퍼 키퍼의 시대를 열었던 장본인이다.

샬케와 바이에른 뮌헨에서 전성기를 누렸으며 샬케에서는 로얄 블루스의 2009-10 시즌 분데스리가 준우승과 2010-11 시즌 DFB포칼 우승과 UEFA 챔피언스리그 4강 진출에 공을 세워 독일 올해의 선수상을 받았으며 바이에른 뮌헨에서는 분데스리가 10연패를 이뤄냈으며 2012-2013 시즌과 2019-20 시즌에는 트레블을 이뤄냈는데 특히 2019-20 시즌 결승전에서는 전반 초반 파리의 네이마르, 음바페, 디 마리아의 공세를 철벽처럼 막아내며 우승에 크게 공헌했다.

디 만샤프트에서도 뛰어난 활약을 펼친 노이어는 특히 2014 브라질 월드컵에서는 스위퍼 키퍼가 무엇인지 세계에 널리 알리며 팀의 월드컵 우승에 공헌하며 대회 최우수 골키퍼로 선정되었음은 물론 골키퍼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선도한 활약을 인정받아 발롱도르 투표에서 3위에 올랐으며 독일 올해의 선수상을 차지했다.

골키퍼의 평가를 올려준 야신의 업적도 매우 대단했지만 팀에 한 명이 더 필드에 있는 효과를 낸 노이어의 전술적 가치와 두 번의 트레블을 달성했으며 메시, 호날두와 함께 2014년에는 발롱도르도 노렸던 확실한 고점, 그리고 10년 넘게 정상급 기량을 선보인 롱런을 모두 갖춘 노이어가 1위로 올라가도 무리가 아니라 생각한다.

 

 

19위 가린샤

 


생년월일: 1933년 10월 28일
국적: 브라질
신체조건: 키 169cm / 몸무게 72kg
주 소속팀: 보타포구

역대 최고의 라이트윙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 선수로 소아마비로 인해 양다리의 길이가 달랐으나 오히려 그런 점을 이용해 자신만이 할 수 있는 드리블을 보여주며 상대 수비를 벗겨냈다. 크로스와 패스로 찬스를 만드는 데에도 능했다.

펠레의 산투스의 위용에 밀렸지만 지지, 니우통 산투스, 마리우 자갈루, 콰렌치냐 등과 함께 보타포구의 황금기를 누렸으며 캄페오나투 카리오카 3회 우승을 이뤄냈으며 보타포구 통산 출전 2위와 통산 득점 2위에 올라있으며 캄페오나투 카리오카 최우수 선수상을 3회 수상했다.

셀레상에서는 펠레와 함께 1958 스웨덴 월드컵부터 1966 잉글랜드 월드컵 때까지 활약했으며 펠레가 중도에 부상으로 이탈한 1962 칠레 월드컵에서는 에이스로서 팀을 이끌며 우승을 이뤄내며 득점왕과 골든볼을 수상했다.

특히 1962년에는 클럽과 대표팀에서 모두 대단한 활약을 보였는데 클럽에서 보타포구의 6관왕을 이끌었음은 물론 월드컵에서는 펠레 대신 에이스로 활약했다. 한 해 5개의 대회에서 MVP에 오른 것은 덤이다.

 

 

18위 에우제비우

 


생년월일: 1942년 1월 25일
국적: 포르투갈
신체조건: 키 175cm / 몸무게 76kg
주 소속팀: SL 벤피카

1960년대 남미의 펠레에 대한 유럽의 대답으로 평가받았던 선수로 공격수에게 필요한 능력은 모두 가지고 있었으며 특히 슈팅 능력만큼은 당대 최고의 선수 펠레를 능가했으며 찬스 메이킹 능력과 드리블 돌파 능력도 당대 유럽 최고의 수준이었다.

벤피카 통산 최다 득점자 에우제비우는 프리메이라 리가 11회 우승과 타사 데 포르투갈 5회 우승 및 유러피언 컵 2회 우승을 이뤄냈는데 특히 1972-73 시즌에는 코엘류, 토니, 시몽에스 등과 함께 무패 우승의 위업을 달성했다. 에우제비우 개인도 리그 득점왕 7회 수상, 유러피언 컵 득점왕 3회 수상 등 화려한 커리어를 자랑했음은 물론 1965년에는 발롱도르를 수상하며 커리어의 화룡점정을 찍었다.

포르투갈 대표팀에서도 불세출의 활약을 펼친 에우제비우는 1966 잉글랜드 월드컵에서 디펜딩 챔피언 브라질과 전통의 강호 헝가리를 밀어내고 조 1위로 8강에 진출해 북한을 상대로 4골을 넣으며 0-3 패배를 5-3으로 뒤집으며 준결승에 진출하는데 큰 공을 세우며 득점왕까지 차지했음은 물론 실질적인 대회 MVP로 평가받기도 했다.

 

 

17위 호나우지뉴

 


생년월일: 1980년 3월 21일
국적: 브라질
신체조건: 키 181cm / 몸무게 76kg
주 소속팀: FC 바르셀로나

2005년, 단 1년은 펠레, 마라도나, 메시, 호나우두가 보여준 모습을 보여준 창의적인 윙어다. 외계인으로 불렸으며 다른 선수들은 실전에서 사용할 수 없는 다양한 프리스타일 개인기를 경기 내내 실전에 맞게 구사하는 천재였으며 저 화려한 기술을 뛰어난 전술안과 결합해 절륜한 플레이메이킹을 구사했으며 프리킥 실력마저 역대급 레벨로 평가받았다.

그레미우에서 캄파오네투 가우초 우승을 이끌며 두각을 나타냈고 파리에서 정상급 선수로 올라서며 바르셀로나에 입단한 호나우지뉴는 FC 바르셀로나에서는 바르셀로나를 수렁에서 구하며 라리가 2연패를 이뤄냈으며 2005-06 시즌 챔피언스리그 우승이라는 대단한 성적을 거뒀는데 이때 호나우지뉴의 퍼포먼스가 대단해 2005년 발롱도르를 수상했으며 2005-06 시즌에는 라리가와 UEFA 챔피언스리그에서 도움왕을 수상하며 2005-06 시즌 UEFA 클럽 올해의 선수상을 수상했다, 

그러나 무절제한 생활과 부실한 몸관리로 인해 고점을 오래 유지하지 못하며 2007-08 시즌에 최악의 부진을 거두자 AC 밀란으로 떠난 호나유지뉴는 전성기 때만큼의 퍼포먼스를 보여주지는 못했지만 세리에 A 도움왕을 수상하며 클래스를 증명했고 이후 브라질 무대로 돌아가서는 아틀레치쿠 미네이루에서는 2012년에 브라질 세리 A MVP와 팬선정 올해의 선수에 선정되었고 2013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우승을 이뤄내는데 크게 공헌하며 2013 남미 올해의 축구선수에 선정되며 커리어를 완성한다.

셀레상에서도 외계인이란 명성을 이어가며 뛰어난 퍼포먼스를 보여준 호나우지뉴는 1999년 코파 아메리카에 처음으로 명단에 올렸으나 히바우두와 제 호베르투에 밀려 벤치 신세를 졌었다. 그러나 2002 월드컵에서 호나우두, 히바우두와 함께 3R이란 공격 삼각편대를 이뤄내 우승에 크게 공헌해 대회 올스타 팀에 들었다. 이후 호나우두를 밀어내고 대표팀의 에이스로 군림해 2005 컨페드컵을 우승했으나 2006 독일 월드컵에서는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활약을 보이며 8강에서 탈락했다.

 

 

16위 엑토르 스카로네

 


생년월일: 1898년 11월 26일
국적: 우루과이
신체조건: 키 171cm / 몸무게 73kg
주 소속팀: 클루브 나시오날

브라질엔 펠레와 호나우두, 아르헨티나엔 마라도나와 메시가 있다면 우루과이엔 스카로네가 있었다. 인사이드 포워드에게 필요한 모든 덕목에서 우수했으며 특히 골 결정력과 동료들을 활용하는 플레이가 일품이었기에 1920년대 최고의 인사이드 포워드로 이름을 날렸으며 마법사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클루브 나시오날 통산 득점 2위에 랭크된 스카로네는 로마노와 함께 트리콜로리스의 공격을 이끌며 우루과이 프리메라 디비시온 8회 우승과 아르헨티나 챔피언과의 슈퍼컵인 코파 알다오 3회 우승을 포함해 국내외의 크고 작은 대회에서 도합 22개의 우승 트로피를 따내며 구단의 황금기를 누리는데 큰 역할을 했으며 1926-27 시즌에는 스페인의 FC 바르셀로나로 임대를 다녀오기도 했다.

우루과이 대표팀의 황금기를 이끈 가장 중요한 인물로 1917 코파 아메리카에서 팀의 우승을 견인하며 득점왕과 MVP를 모조리 석권했으며 총 네 번의 코파 아메리카에서 우승했고 두 번의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그리고 초대 월드컵에서 우승을 거뒀으며 대회 베스트 일레븐에 선정되었다. 1927 코파 아메리카에서는 득점왕에 오르기도 했다.

 

 

15위 샤로시 죄르지

 


생년월일: 1912년 8월 5일
국적: 헝가리
신체조건: 키 186cm / 몸무게 83kg
주 소속팀: 페렌츠바로시

1930년대 최고의 축구선수 중 하나로 공격적인 부분은 물론 미드필더와 수비수로서의 역량은 물론 신체 능력과 전술 이해도까지 우수한 일명 육각형 선수의 시조와도 같은 선수로 심지어는 법학 박사 학위를 딸 정도로 축구 외적으로도 다재다능했다.

1930년대 마자르 군단이 중유럽 최고의 수준으로 올라서는데 큰 공을 세운 샤로시는 헝가리 대표팀 A매치 통산 득점 5위에 랭크되었고 1933-35 중유럽컵에서 득점왕에 올랐으며 나치 독일이 오스트리아를 병탄 하면서 중단된 1936-38 중유럽컵에서도 10골을 넣으며 득점 선두를 달렸었다. 1934 이탈리아 월드컵에서는 큰 활약을 하지는 못했지만 1938 프랑스 월드컵에서도 에이스로 5골을 득점하며 헝가리를 결승전 무대에 올려놓았고 그 공로를 인정받아 대회 베스트 일레븐에 선정되었고 브론즈볼을 수상했다. 그리고 중유럽컵에서는 17골로 대회 통산 최다 득점자에 올랐다.

클럽 커리어를 페렌츠바로시에서만 보낸 원 클럽맨이었던 샤로시는 1931-32 시즌 전승 우승을 포함해 넴제티 버이녹샤그 5회 우승과 헝가리 컵 4회 우승, 그리고 1937년 미트로파컵 우승을 이뤄내며 구단 역사상 최고의 선수로 평가받는데 리그 득점왕과 미트로파컵 득점왕을 각각 3회 차지했음은 물론 미트로파컵 통산 최다 득점자에 이름을 올리기도 했던 진정한 중유럽의 황제였다.

 


14위 주세페 메아차

 


생년월일: 1910년 8월 23일 
국적: 이탈리아
신체조건: 키 169cm / 몸무게 73kg
주 소속팀: 인테르 밀란

이탈리아 역대 최고의 축구선수로 추앙받는 선수로 뛰어난 드리블 능력과 창의적이며 정확한 패스에서 나오는 찬스 메이킹, 그리고 직접 슈팅하거나 헤딩을 활용한 득점력도 우수했다.

인테르 밀란에서 전성기의 대부분을 보낸 주세페 메아차는 어린 나이에 데뷔해 처음에는 선배들의 무시를 당했지만 압도적인 실력으로 선배들을 승복시켰는데 세리에 A 3회 우승과 코파 이탈리아 우승을 이뤄냈으며 메아차 개인도 리그와 미트로파컵, 코파 이탈리아를 포함해 무려 일곱 번이나 득점왕에 올랐다. 이러한 활약을 인정한 인테르 밀란은 자신의 홈 구장의 이름을 주세페 메아차 스타디움으로 명명했다.

1930년대 이탈리아의 성공시대를 이끌었던 주세페 메아차는 인사이드 포워드 파트너 지오반니 페라리와 함께 1934 이탈리아 월드컵과 1938 프랑스 월드컵에서 모두 선발로 뛰며 우승한 유이한 선수였으며 1934 이탈리아 월드컵에서는 골든볼을 수상했으며 후자의 대회에서는 주장으로 팀을 지휘하며 월드컵에서 우승했다.

 

 

13위 게르트 뮐러

 


생년월일: 1945년 11월 3일
국적: 독일
신체조건: 키 176cm / 몸무게 77kg
주 소속팀: FC 바이에른 뮌헨

축구 역사상 최고의 스트라이커 중 하나로 빠른 스피드와 화려한 테크닉, 좋은 신체 조건까지 어느 것도 갖추지 못했으나 완벽한 축구 지능과 훌륭한 골감각과 위치 선정, 그리고 동료를 이용하는 영리한 플레이를 펼치며 득점은 물론 도움도 많이 기록했던 완성형 공격수였다.

바이에른 뮌헨에서 데뷔해 선수 생활 대부분을 보낸 게르트 뮐러는 압도적인 득점력을 바탕으로 분데스리가와 DFB포칼 각 4회 우승을 이뤄냈으며 컵 위너스컵 우승과 유러피언컵 3연패를 이뤄냈고 바이에른 뮌헨 통산 최다 득점자를 비롯해 분데스리가에서 골에 관련된 기록 대부분은 게르트 뮐러의 타이틀이다. 비록 현재는 레반도프스키가 갱신했지만 오랜 시간 동안 한 시즌 최다 득점 기록을 보유했음은 물론 분데스리가 득점왕을 7회 수상했으며 유러피언 컵 득점왕도 4회 수상했다.

디 만샤프트에서도 자신의 첫 메이저 대회인 1970 멕시코 월드컵에서는 펠레나 자이르지뉴 같은 쟁쟁한 공격수들을 제치고 10골이나 넣으며 득점왕을 수상한 게르트 뮐러는 이때의 활약으로 발롱도르를 수상했다. UEFA 유로 1972에서도 4골로 득점왕에 올랐으며 1974 월드컵 결승전에서는 결승전에서 미헬스와 크루이프의 네덜란드를 상대로 결승골을 기록하며 우승에 방점을 찍었다. 유로와 월드컵을 모두 석권하며 화려하게 국가대표팀을 은퇴했다.

특히 결승전에 강력한 모습을 보이며 13회의 결승전에서 전승을 기록했음은 물론 11골을 득점했으며 그중 결승골 5개를 기록한 대기록을 세운 게르트 뮐러는 키커지 선정 분데스리가 시즌 베스트 일레븐에 4회 선정되었으며 월드 사커지 선정 월드 일레븐에 8회 선정되었고 국가대표팀과 클럽을 포함해 13회나 득점왕을 수상했으며 1970년에는 발롱도르를 수상했다.

 

 

12위 로타어 마테우스

 


생년월일: 1961년 3월 21일
국적: 독일
신체조건: 키 177cm / 몸무게 75kg
주 소속팀: FC 바이에른 뮌헨

마라도나가 인정한 유일한 라이벌이자 축구 역사상 최고의 3선 미드필더로 철인이라 불리는 신체 능력과 왕성한 활동량을 물론 대인 수비에서도 당대 수비형 미드필더들보다 한 차원 위에 있었으며 우수한 테크닉과 결정적인 순간에 한건하는 클러치 능력과 반 바스텐, 비알리, 클린스만, 카레카 같은 세리에 A 정상급 스트라이커들과 득점왕 경쟁을 했을 정도로 뛰어난 득점력까지 겸비하며 넓은 지역에서 영향력을 유지하면서 게임도 끝낼 수 있는 완벽한 선수였으며 다양한 포지션에서 훌륭한 활약을 펼쳤다. 과장 좀 해서 마테우스 이전에 언급한 미드필더들의 장점을 모두 가지고 있는 완벽한 미드필더였다.

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에서 프로 커리어를 시작해 1979-80 UEFA컵 결승에 진출했으며 바이에른 뮌헨으로 이적한 뒤에는 분데스리가 3연패와 유러피언 컴 결승 진출을 이뤄냈으며 바이에른 뮌헨으로 이적해서는 분데스리가 3연패와 유러피언 컴 결승 진출을, 인테르에서는 1988-89 시즌 세리에 A 우승과 1990-91 UEFA컵 우승을 이뤄냈으며 다시 바이에른 뮌헨으로 돌아와서는 리베로로 활동하며 분데스리가 4회 우승과 UEFA컵 우승을 추가했고 1998-99 시즌에는 챔피언스리그 결승까지 진출했으나 퍼거슨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게 역전패하며 아쉽게 준우승에 머물렀다.

디 만샤프트에서는 UEFA 유로 1980에 처음 뽑혔으나 유로 1984 때부터 1994 미국 월드컵 때까지 핵심 선수로 활약하며 1986 멕시코 월드컵 준우승, 1988 유로 3위를 이뤘고 1990 이탈리아 월드컵에서는 수비형 미드필더로 활약하며 팀의 코어이자 주 득점원으로 팀을 우승시키며 발롱도르를 수상했다. 그러나 클린스만과의 불화와 리베로에서 마티아스 잠머가 대두하면서 대표팀에서 소외되었으나 잠머의 부상으로 다시 소집되어 1998 프랑스 월드컵과 UEFA 유로 2000까지 출전했으나 이미 독일은 노쇠화되었으며 세대교체 실패의 영향으로 부진한 활약을 보여줬다.

마테우스는 개인적으로도 엄청난 수상 이력을 자랑하는데 키커지 선정 분데스리가 시즌 베스트 일레븐에 5회 선정되었으며 옹즈 몽디알에서 뽑은 유럽 베스트 일레븐에 4회 연속 선정되었고 독일 올해의 선수상을 2회 수상했음은 물론 1990년에는 발롱도르를 수상했고 1991년에는 초대 피파 올해의 선수상을 수상했다.

 

 

11위 미셸 플라티니

 


생년월일: 1955년 6월 21일
국적: 프랑스
신체조건: 키 179cm / 몸무게 74kg
주 소속팀: 유벤투스 FC

1980년대 상반기 세계 최고의 축구선수로 1983년부터 1985년까지 발롱도르 3회 연속 수상을 기록해 남미의 지쿠, 디에고 마라도나에 대한 유럽의 대답이라 불렸는데 드넓은 시야와 창의적인 패싱력을 바탕으로 하는 플레이메이킹은 일품이었으며 경기가 안 풀릴 때에는 3선 지역까지 내려가서 볼을 순환시켰다. 그리고 전방에서 동료들과 연계하며 많은 득점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훌륭한 킥력을 바탕으로 하는 롱패스는 당대를 넘어 역대에서도 최고라 할 만했다.

셍테티엔과 유벤투스에서 전성기를 누렸으며 전자의 클럽에서는 프랑스 리그 우승을 이뤄냈으며 후자의 클럽에서는 두 번의 세리에 A 우승과 한 번의 코파 이탈리아 우승, 그리고 1983-84 시즌에는 유러피언 컵 위너스컵 우승을 이뤄냈음은 물론 1984-85 시즌에는 유러피언 컵을 우승해 유벤투스 역사상 최초의 빅 이어 달성에 큰 공을 세우며 대회 득점왕에 올랐으며 단 5년만 활약하고도 유벤투스 역사상 최고의 선수로 반드시 거론될 정도로 압도적인 퍼포먼스를 보여줬다.

레 블뢰에서도 역시 대단한 활약을 펼친 플라티니는 티가나, 지레스, 루이 페르난데스와 함께 마법의 사각형이라 불리는 중원 조합을 구성해 1982 스페인 월드컵과 1986 멕시코 월드컵에서는 4강에 진출했으며 UEFA 유로 1984에서는 우승을 차지했다. 특히 UEFA 유로 1984에서의 활약이 일품이었는데 경기에 끼치는 영향력이 대단했음은 물론 단일대회 5경기 9골을 기록하며 2021년에 크리스티아누 호날두가 경신할 때까지 유로 역대 최다 득점자에 이름을 올렸었다. 호날두가 다섯 대회에서 득점을 기록한 것을 생각하면 다섯 경기에서 9골이나 득점한 플라티니의 활약이 얼마나 대단한 지 알 수 있다. 이때의 활약으로 당연하게도 1984년 발롱도르를 수상한다.

플라티니는 개인적으로도 1983년과 1985년에 발롱도르와 옹즈도르를 3년 연속으로 수상했으며 1984년과 1985년에는 월드 사커지 선정 올해의 선수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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