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구 역사상 최고의 선수 80~71위

포지션별 역대 TOP 100/Total

축구 역사상 최고의 선수 80~71위

토르난테 2024. 10. 25. 17: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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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사항


* 작성자 개인의 주관이 강하게 들어갔습니다. 아무리 설득하셔도 바꿀 생각 없습니다.

* 과거 버전과는 대폭 수정되었습니다. 관점이 바뀐 부분도 있고 가진 자료가 그때보다 많아졌다는 이유도 있습니다.

* 과거의 선수일수록 수상 기회가 적어 수상 횟수에서 불리하다는 점은 꼭 알아두셨으면 좋겠습니다.

* 사진 출처는 에펨코리아와 플레이어스에서 활동하시는 법정스님의 소유님의 사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단 소유님이 만드시지 않았던 선수들에 한정해서는 제가 직접 건조폼을 제작합니다.

 


80위 지아친토 파케티

 


생년월일: 1942년 7월 18일
국적: 이탈리아
신체조건: 키 191cm / 몸무게 82kg
주 소속팀: 인테르 밀란

인테르와 아주리의 위대한 캡틴이자 유럽 최초로 오버래핑을 시도하며 카테나치오의 매서운 역습을 상징하는 선수였는데 빠른 스피드와 탄탄한 기본기를 활용해 공격에 적극 가담하며 상대 수비진을 교란했으며 강력한 피지컬을 앞세운 대인 수비에도 능했다.

선수생활을 오직 인테르에서만 보낸 원 클럽맨 파케티는 세리에 A 4회 우승과 코파 이탈리아 1회 우승, 그리고 유러피언 컵과 인터콘티넨탈컵 2연패를 이뤄내며 그란데 인테르의 시대를 이뤄냈으며 파케티 개인도 월드 사커지 선정 세계 베스트 일레븐에 6회 선정되었으며 발롱도르 투표에서도 5위 안에 두 번 들었으며 1965년에는 개인 통산 최고 순위인 2위에 오르며 포디움에 들었던 위대한 레프트백이다.


아주리에서는 첫 메이저 대회인 1966 잉글랜드 월드컵에서는 소련과 북한에게 패해 조기 탈락하는 굴욕을 겪었지만 유로 1968에서는 주장이자 공격의 시발점 역할을 맡아 우승을 이뤄냈으며 1970 멕시코 월드컵에서도 개최국 멕시코와 난적 서독을 이기고 결승에 진출했다. 언급한 두 대회에서 모두 대회 베스트 일레븐에 들었다.

 

 

79위 파울 브라이트너

 


생년월일: 1951년 9월 5일
국적: 독일
신체조건: 키 176cm / 몸무게 73kg
주 소속팀: FC 바이에른 뮌헨

독일 축구의 천재 수비수이자 미드필더이며 풍운아로 레프트백 시절부터 이름을 날렸던 활약했던 뛰어난 수비 능력은 물론, 전략가라는 별명으로 불릴 정도로 훌륭한 전술안과 탄탄한 기본기를 겸비했으며 상대방의 허를 찌르며 동료 공격수에게 골 찬스를 제공하는 킬패스와 골문을 직접 노리는 중거리 슈팅은 물론 왕성한 활동량까지 겸비해 그라운드의 넓은 범위에 영향력을 끼쳤던 공수겸장의 완벽한 선수였다.

바이에른 뮌헨과 레알 마드리드에서 전성기를 누린 브라이트너는 바이에른 뮌헨 1기 시절에는 분데스리가 3회 우승과 포칼 우승, 그리고 구단 역사상 첫 유러피언 컵 우승을 이끌어냈고 레알 마드리드 시절에는 라리가 2회 우승과 1974-75 시즌에는 코파 델 레이에서도 우승하며 도메스틱 더블을 이뤄냈다. 이후 중앙 미드필더로 포지션을 변경한 뒤 아인트라흐트 브라운슈바이크를 거쳐 바이에른 뮌헨으로 돌아가 루메니게와 함께 브라이트니게 조합을 이루며 분데스리가 2연패와 DFB포칼 우승, 그리고 유러피언 컵 준우승을 추가했다. 특히 1981년에는 압도적인 퍼포먼스를 보이며 동료 루메니게의 뒤를 이어 발롱도르 투표에서 2위에 올랐다.

디 만샤프트에서도 UEFA 유로 1972와 1974 서독 월드컵에서 모두 압도적인 활약을 펼치며 우승은 물론 대회 베스트 일레븐에도 들었다. 그러나 독일 축구협회와의 갈등으로 디 만샤프트에 뽑히지 못하다가 1980년 이후에 다시 뽑히며 1982 스페인 월드컵에서 결승 진출에 공헌하며 팀은 결승전에서 패했지만 브라이트너는 결승전에서 만회골을 넣었다.

브라이트너는 개인적으로도 엄청난 영예를 누렸는데 키커지 선정 분데스리가 베스트 일레븐에 6회 선정 월드 사커지 선정 월드 일레븐 4회 선정, 그리고 1981년 독일 올해의 선수상은 물론 발롱도르 노미네이트에 6회 선정해 1981년에는 개인 통산 최고 순위인 2위에 올랐으며 은퇴한 이후인 1994년에는 FIFA 월드컵 올타임 베스트 일레븐에 선정되었을 정도로 수상 이력이 화려하다.

 


78위 루카 모드리치

 


생년월일: 1985년 9월 9일
국적: 크로아티아
신체조건: 키 172cm / 몸무게 66kg
주 소속팀: 레알 마드리드

2010년대 하반기 세계 최고의 중앙 미드필더로 광활한 시야와 우수한 전술안과 경이로운 창의성을 바탕으로 한 플레이메이킹 능력이 돋보였으며 왕성한 활동량으로 공수 양면으로 큰 영향력을 끼치며 우수한 탈압박 능력으로 상대의 압박에 플레이메이킹을 방해받지 않았으며 정교한 패싱력까지 겸비했다.

토트넘에서 이름을 날린 뒤 레알 마드리드로 이적해 활약한 모드리치는 첫 시즌에는 부진한 활약으로 질타받았지만 안첼로티 부임 이후 외질에서 모드리치로 중심축이 옮겨진 이후로는 라리가 4회 우승과 코파 델 레이 2회 우승, 그리고 챔피언스리그 3연패를 포함한 5회 우승을 이뤄냈으며 그 과정에서 크로스, 카세미루와 우수한 중원진을 형성해 최전방의 호날두와 최후방의 라모스를 연결하며 공을 세웠고 그들이 떠난 이후에도 노익장을 과시해 2021-22 챔피언스리그 우승에 공헌하며 지단, 피리를 능가하는 레알 마드리드 구단 역사상 최고의 미드필더로 역사에 남았다.

크로아티아 대표팀에서도 UEFA 유로 2008 올스타 팀에 들며 이름을 날린 모드리치는 특히 2018 러시아 월드컵에서 우승후보로 주목받지 못했던 팀을 이끌고 결승에 진출했으며 특히 연달아 연장전을 치르는 상황에서도 최고참 모드리치가 지치지 않은 모습으로 팀을 결승 무대까지 이끌자 이 퍼포먼스를 높게 평가받아 2018 러시아 월드컵 골든볼을 수상하며 챔피언스리그 우승과 함께 더해져 그해에 메시와 호날두를 밀어내고 발롱도르를 수상했으며 2022 카타르 월드컵에서도 조국의 준결승 진출을 이끌며 브론즈볼을 수상했다.

크로아티아 올해의 선수에 10회 선정된 모드리치는 클럽과 대표팀을 가리지 않고 화려한 개인커리어를 자랑하는데 UEFA 챔피언스리그 올해의 스쿼드 6회 선정, UEFA 올해의 팀 3회 선정 및 올해의 미드필더 2회 선정은 물론 2018 러시아 월드컵 베스트 일레븐과 골든볼, 2022 카타르 월드컵 브론즈볼 등 엄청난 개인 커리어를 자랑했다.

 

 

77위 프리츠 발터

 


생년월일: 1920년 10월 31일
국적: 독일
신체조건: 키 174cm / 몸무게 73kg
주 소속팀: FC 카이저슬라우테른

프란츠 베켄바우어, 로타어 마테우스 등과 함께 독일 축구사의 상징적인 존재이자 비 오는 날에 특히 강했던 서독 대표팀 역대 최고의 주장, 나치 독일 시절에 데뷔해 서독 축구의 부흥을 이끈 다재다능한 인사이드 포워드로 훌륭한 리더십과 플레이메이킹 능력을 보여줬으며 특히 비 오는 날에 훌륭한 경기력을 보여줘 비 오는 날을 '프리츠 발터의 날'이라고 불렀다.

나치당의 강압적인 명령으로 잠시 임대를 간 것을 제외하면 클럽 커리어의 전부를 카이저슬라우테른에서만 보낸 발터는 오베리가 주트베스트 10회 우승과 독일 챔피언십 결승에 다섯 번 진출해 두 번 우승했으며 최초의 키커 랑리스테 평가에서 35세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인사이드 포워드 부문 월드클래스 등급을 받았다. 카이저슬라우테른 구단 측도 상술한 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홈구장의 이름을 프리츠 발터 슈타디온으로 바꾸기도 했다.

1954 스위스 월드컵에서 높게 평가받지 못했던 서독을 이끌고 결승에 진출했으며 조별 리그에서 자신을 8-3으로 이겼던 헝가리를 상대로 3-2 승리를 거두는, 일명 베른의 기적의 주인공으로 활약하는 과정에서 3골 6도움을 기록하며 ESPN 선정 대회 베스트 일레븐에 선정되었고 1958 스웨덴 월드컵에서도 만 37세의 나이에도 주전으로 활약했다.



76위 오르트 죄르지

 


생년월일: 1901년 4월 30일
국적: 헝가리
신체조건: 키 185cm
주 소속팀: MTK 헝가리아

1910년대 하반기와 1920년대 상반기 MTK 헝가리아 왕조의 핵심 선수 중 한 명으로 인사이드 포워드와 센터 하프에서 주로 활약했지만 골키퍼를 제외한 전 포지션을 소화했던 멀티플레이어였으며 우아한 볼 터치와 넓은 시야를 바탕으로 한 창의적인 패싱력을 바탕으로 플레이메이킹에 능했으며 득점력도 우수했다.

MTK 헝가리아에서 정규리그 8회 연속 우승을 이뤄냈으며 그 과정에서 리그 득점왕 3회 수상 및 1918년 헝가리 올해의 선수상을 수상한 오르트는 헝가리 대표팀에서도 10년간 주전으로 활약했다. 말년에는 프랑스의 마르세유에서 활약하며 프랑스 리그 우승을 경험했다.

여러 축구 역사 전문가로부터 1920년대 상반기 최고의 선수로 평가받으며 실제로도 헝가리 축구계의 큰 발전을 이끌었으며 시대를 앞서나간 명선수였다.

 


75위 페드로 로차

 


생년월일: 1942년 12월 3일
국적: 우루과이
신체조건: 키 183cm / 몸무게 78kg
주 소속팀: CA 페냐롤

브라질의 펠레에 대한 우루과이의 대답으로 1960년대 말 세계 최고의 플레이메이커로 공격형 미드필더에게 필요한 덕목을 모두 갖춘 것은 물론 우수한 신체 능력과 우수한 득점력마저 겸비해 상대팀의 목숨을 한 순간에 끊어버린다는 뜻의 사형집행인이란 별명으로 불렸으며 펠레는 그를 두고 "내가 붙어본 선수 중 다섯 손가락 안에 든다."라는 평가를 했다.

페냐롤의 황금기에 데뷔한 로차는 아우리네그로스의 공격을 진두지휘하며 1961년 리그,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인터콘티넨탈컵 트레블을 포함해 우루과이 프리메라 디비시온 8회 우승 및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3회 우승, 그리고 인터콘티넨탈컵 2회 우승을 이끌었고 로차 개인도 우루과이 프리메라 디비시온 득점왕을 3회, 인터콘티넨탈 슈퍼컵 득점왕을 2회 수상했다.

브라질 무대의 상 파울루에서도 캄페오나투 파울리스타 2회 우승을 이뤄냈고 개인적으로도 1972년 브라질 세리 A 득점왕을 수상했고 1973년 브라질 전국 리그 베스트 일레븐에 선정되었으며 1974년에는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득점왕에 올랐고 1977년에는 전국 리그 우승의 영광을 누렸던 로차는 두 구단에서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대회 통산 득점 3위에 랭크되었다.

우루과이 대표팀에서도 에이스 역할을 도맡았던 로차는 1962 칠레 월드컵부터 1974 서독 월드컵까지 네 번의 월드컵에 참가해 부상으로 조기에 하차한 1970 멕시코 월드컵을 제외하고는 모두 주전으로 활약했으며 1967년 코파 아메리카에서는 5경기 3골을 득점하며 우승에 크게 기여해 대회 MVP에 선정되었다.

 


74위 엔조 프란체스콜리

 


생년월일: 1961년 11월 12일
국적: 우루과이
신체조건: 키 181cm / 몸무게 73kg
주 소속팀: CA 리버 플레이트

1980년대와 90년대 남미 무대에서 이름을 날린 트레콰르티스타로 공격형 미드필더가 필요한 모든 덕목에서 우수한 모습을 보였으며 특히 깔끔한 볼 터치와 상대의 예측을 비웃는 킬 패스가 일품이었고 득점력 또한 아르헨티나 무대에서 득점왕을 수상했을 정도로 뛰어났다. 그의 활약을 본 지네딘 지단은 그를 우상으로 생각했으며 프란체스콜리의 이름을 따 아들의 이름을 엔조로 지었다.

아르헨티나의 리버 플레이트에서 전성기를 맞았던 프란체스콜리는 1985-86 시즌 리그 우승과 득점왕을 석권했으며 이후 유럽으로 진출해서 라싱 파리와 마르세유, 칼리아리에서 활약했으며 1989-90 시즌에는 마르세유에서 리그 앙 우승을 이뤄냈고 다시 아르헨티나로 돌아와서는 전기리그 3회 우승과 후기리그 1회 우승은 물론 1996년에는 팀의 주장으로서 주전의 다수를 차지하는 신인 선수들을 잘 통솔하며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우승을 이뤄냈다.

우루과이 대표팀에서도 핵심으로 활약한 프란체스콜리는 1983 코파 아메리카에서는 공격수로 출전해 소크라치스가 이끄는 브라질을 제압하고 우승에 크게 공헌해 대회 MVP에 선정되었으며 1987 코파 아메리카에서는 공격형 미드필더로 출전해 우승했다. 그리고 1995년 코파 아메리카에서도 뛰어난 퍼포먼스를 보였으며 브라질을 제압하고 우승을 거두며 대회 MVP에 선정되었다. 이토록 코파 아메리카에서는 마라도나나 지쿠를 능가하는 화려한 모습을 보였지만 월드컵에서의 활약은 다소 아쉬웠다.

프란체스콜리는 아르헨티나 프리메라 디비시온 득점왕을 3회 수상했으며 리그 MVP에 2회 선정되었고 1984년과 1995년에는 남미 올해의 선수 1위에 올랐고 1985년 구에린 스포르티보지 선정  세계 최우수 선수에 선정되었고 선수 은퇴 이후 2004년에는 펠레가 선정한 FIFA 100에 선정되었다.

 


73위 후안 스키아피노

 


생년월일: 1925년 7월 28일
국적: 우루과이
신체조건: 키 175cm / 몸무게 69kg
주 소속팀: CA 페냐롤

우루과이 축구 역대 최고의 선수 중 한 명이자 1950년대 최고의 인사이드 포워드 중 한 명으로 이름을 날렸으며 우수한 테크닉과 넓은 시야, 창의적이면서 정확한 패싱력을 보유했으며 임기응변에 능해 불리한 경기를 여러 번 뒤집었다.

1943년에 페냐롤에서 데뷔해 축구 선수 인생을 시작한 후안 스키아피노는 아우리네그로스의 공격을 이끌며 1949 시즌, 우루과이 프리메라 디비시온에서 16승 2무의 성적으로 무패 우승을 이뤄낸 업적을 포함해 우루과이 프리메라 디비시온 4회 우승과 토르네오 데 아너 7회 우승을 이뤄내는데 핵심적인 역할을 하며 남미 무대를 평정했다.

우루과이 대표팀에서도 빼어난 활약을 펼치며 두 번의 월드텁에 참가했으며 1950 브라질 월드컵에서는 동점골을 기록하며 우승에 기여해 대회 베스트 일레븐에 선정되었으며 1954 스위스 월드컵에서도 공격의 주축으로 활약하며 팀의 4강 진출에 공헌했다.

1954 스위스 월드컵 이후에는 유럽 무대에 도전하며 이탈리아의 AC 밀란에서 노르달, 리드홀름과 함께 팀의 공격을 이끌며 리드홀름과 함께 세리에 A 3회 우승과 1956년 라틴 컵 우승을 이뤄냈으며 1957-58 시즌 챔피언스리그 결승 진출을 이뤄냈다.



72위 라이문도 오르시

 

 

생년월일: 1901년 12월 2일
국적: 아르헨티나 → 이탈리아
신체조건: 키 168cm / 몸무게 68kg
주 소속팀: 유벤투스 FC

1920년대와 30년대 당시 최고의 아웃사이드 레프트로 빠른 스피드와 교묘한 드리블을 겸비해 상대 수비수를 속이며 크로스를 올려 공격수를 지원하는 능력과 왼발 슈팅으로 직접 마무리하는 능력 모두 훌륭했으며 중요한 경기에서 강한 면모를 보였다.

아르헨티나의 인데펜디엔테에서 데뷔해 정규리그 우승 3회를 이뤄낸 라이문도 오르시는 이탈리아로 건너가서는 유벤투스의 공격진 핵심으로 세리에 A 5연패에 큰 공을 세워 구단을 전국구급 인기 구단으로 만들었고 다시 남미로 돌아가서는 페냐롤에서 우루과이 프리미어 디비시온 우승을 했으며 플라멩구에서 캄파오네투 카리오카 우승을 이뤄냈다.

아르헨티나 대표팀 시절에는 1927 코파 아메리카 우승컵을 들어냈고 1928 암스테르담 올림픽 은메달을 목에 걸었던 오르시는 이탈리아로 귀화한 뒤에는 1927-30 중유럽컵과 1933-35 중유럽컵 우승에 기여했으며 1934 이탈리아 월드컵에서는 결승전에서 1-0으로 뒤지던 와중 구아이타의 크로스를 받아 골대를 등진 채로 오른발로 공을 받았고 골대 쪽으로 몸을 돌리면서 바로 왼발로 터닝 슈팅을 날려 동점골을 기록하며 승부를 연장전까지 끌고 갔으며 결국 아주리의 우승에 기여했다.

 

 

71위 톰 피니

 


생년월일: 1922년 4월 5일
국적: 잉글랜드
신체조건: 키 172cm / 몸무게 67kg
주 소속팀: 프레스턴 노스 엔드

1940년대 하반기와 1950년대 상반기, 메튜스와 함께 영국 축구 최고의 윙어로 평가받았던 선수로 빠른 스피드와 정교한 양발 크로스, 그리고 강력한 슈팅을 왼발과 오른발을 가리지 않고 날렸으며 작은 채구와는 다르게 헤딩에도 능했다.

선수 생활 대부분을 약체인 프레스턴 노스 엔드에서 보낸 핀니는 여러 팀들이 그를 영입하기를 원했지만 그는 프레스턴이 좋다는 이유로 모두 거절했는데 심지어는 팀이 2부 리그로 강등당했을 때도 충성심을 보여주며 결국 승격시켰고 결국 약팀인 프레스턴 노스 앤드의 에이스로 팀을 1부 리그 준우승 2회와 1953-54 시즌 FA컵 준우승을 이뤄냈다. 팬들은 군계일학의 핀니와 다른 선수를 두고 과거 핀니의 직업이었던 배관공을 언급하며 열 명의 떨거지들을 이끄는 한 명의 배관공이라 불렸는데 실제로 피니는 PFA 올해의 선수에 2회 선정되며 명성을 떨쳤다.

삼사자 군단에서도 핵심으로 활약한 피니는 브리티시 홈 챔피언쉽에서 10회 우승을 이뤄냈으나 정작 1950 미국 월드컵과 1954 스위스 월드컵과 1958 스웨덴 월드컵에서는 기대 이하에 성적을 보여줬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1940년대에 보여준 우수한 퍼포먼스를 인정받아 은퇴한 이후에 잉글랜드 축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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