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나 지금이나 브라질은 축구천재가 즐비한 나라로 평가받는다. 축구황제라 불렸던 펠레와 지쿠, 그리고 호마리우와 호나우두와 같은 축구황제들은 물론이고 다른 나라였으면 거뜬히 주전을 차지했을 선수도 브라질 대표팀에서는 벤치는커녕 소집조차 되지 못해 다른 나라로 귀화하는 경우도 많았다.

특히 펠레가 셀레상의 유니폼을 입고 활동하던 1958년부터 1970년까지는 그런 브라질 축구의 최전성기였다. 1군 대표팀들의 네임벨류와 실적도 압도적이었지만 그들에 가려져 월드컵에 나서지 못한 선수들 중에서도 다른 나라였으면 주전으로 활약할 만한 재능들이 많았다. 그러기에 셀레상에 선발되는 것을 포기하고 전성기를 구가하던 시기에 유럽으로 넘어가 많은 돈을 버는 선수들도 있었다.
그러나 브라질을 대표해 월드컵에 나서지 못했음에도 계속 브라질에 남아 활약하며 해당 구단 팬들의 마음속에서만큼은 최고의 선수로 올라간 선수들이 있다. 오늘은 대단한 재능으로 팬들의 지지를 받았지만 월드컵에는 나서지 못했던 펠레 시대의 브라질 재능들로 베스트 일레븐을 선정해 봤다. 적어도 이 글을 읽는 순간만큼은 그 당시 경악스러운 브라질의 선수층에 감탄하며 이들의 업적을 즐겨보기를 바란다.
골키퍼

이름: 발지르 지 모라에스
출생년도: 1931년 11월 23일
신체조건: 키 175cm
포지션: 골키퍼
주 소속팀: 파우메이라스
1960년대 파우메이라스의 약진을 이끈 골키퍼로 단신이었지만 뛰어난 반사신경과 적절한 위치선정 및 상황판단을 바탕으로 브라질 최고의 골키퍼 중 하나로 평가받았다.
파우메이라스에서 전성기를 누린 모라에스는 1967년 전국리그 더블 우승을 포함해 전국리그 3회 우승과 캄페오나투 파울리스타 3회 우승, 그리고 1965년 토르네오 리우상파울루 우승을 이뤄냈으며 펠레의 공격을 가장 잘 상대하는 골키퍼로 이름을 날리기도 했다.
하지만 지우마르와 망가, 카스틸류의 3두 체제는 너무나 견고했고 모라에스는 단신이라는 부분에 발목이 잡히며 결국 월드컵에는 참가하지 못했다.
센터백

이름: 자우마 디아스
출생년도: 1939년 8월 21일
신체조건: 키 177cm
포지션: 센터백, 수비형 미드필더
주 소속팀: 파우메이라스
1960년대 브라질 무대 최고의 수비수 중 하나로 타고난 수비 리더였으며 어린 시절부터 절륜한 라인 컨트롤과 적절한 커버 플레이를 바탕으로 팀의 철벽 수비의 중핵으로 활약했으며 거물급 공격수들과의 맞대결에서도 특유의 지능적인 플레이와 강력한 집념을 바탕으로 상대를 고전시켰고 그 시대 선수로서는 드물게 롱패스로 빌드업의 활로를 열어주는 부분에도 재능을 보였다.
아메리카 RJ에서 1960 캄페오나투 카리오카 우승과 1962 인터내셔널 사커리그 우승을 이끈 자우마 디아스는 파우메이라스에서는 산투스와의 치열한 경쟁에서 캄페오나투 파울리스타 2회 우승을 이뤄냈음은 물론 1965년에는 토르네오 리우상파울루 우승을 이뤄내기도 했고 1967년에는 두 번의 브라질 전국 리그 (타사 브라질과 호베르탕) 우승을 이끌며 더블을 달성하기도 했고 이후 산투스에서도 활약하며 1969 캄페오나투 파울리스타 우승과 1970 상파울루 컵 우승을 이끌었다.
이렇게 강팀과 약팀을 가리지 않고 뛰어난 모습을 보여준 디아스는 브라질 대표팀에서는 친선 경기를 뛰긴 했으나 감독의 선호도에 밀려나며 일데랄두 베우리니, 마우루 하무스, 오를란두 페시나, 브리투 및 윌송 피아차를 더 선호했기에 그의 모습을 월드컵에서는 볼 수 없었다.
센터백

이름: 호베르투 디아스
출생년도: 1943년 1월 7일
포지션: 센터백
신체조건: 키 168cm / 몸무게 67kg
주 소속팀: 상 파울루
1960년대 브라질 무대에서 명성을 떨친 중앙 수비수로 168cm의 단신이었지만 굳이 몸싸움을 하지 않고도 명민한 예측력과 빠른 발을 바탕으로 상대 공격수를 막아냈으며 키는 작았지만 다부진 신체 밸런스와 강력한 투쟁심을 통해 사냥개로 변신해 상대를 괴롭히기도 했다.
축구황제 펠레에 의해 브라질 최고의 센터백으로 평가받았던 호베르투 디아스는 상 파울루에서 13년간 활약했는데 같은 주의 산투스와 파우메이라스의 강세로 인해 어려운 시기를 보냈음에도 캄페오나투 파울리스타 2회 우승을 이끌며 브라질 무대 최고의 수비수 중 하나로 이름을 날렸다.
하지만 셀레상의 감독들은 그 대신 일데랄두 베우리니, 마우루 하무스, 오를란두 페시나, 브리투 및 윌송 피아차를 더 선호했기에 그의 모습을 월드컵에서는 볼 수 없었으며 친선 경기에서만 모습을 드러냈다.
라이트백

이름: 파울리스타냐
출생년도: 1939년 8월 20일
포지션: 라이트백, 레프트백, 수비형 미드필더, 스트라이커
신체조건: 키 172cm
주 소속팀: 보타포구
1960년대 브라질 무대에서 이름을 날린 풀백으로 뛰어난 대인 수비 능력은 물론 특유의 다재다능함을 바탕으로 좌우 측면 수비수는 물론 센터백과 수비형 미드필더, 그리고 스트라이커까지 소화할 수 있었을 정도로 축구에 대한 이해도가 높았다.
선수생활 전부를 보타포구에서 보낸 원 클럽맨으로 영광의 팀이라 불리던 팀의 황금기를 이끌며 1962년 6관왕을 포함해 캄페오나투 카리오카 4회 우승과 토르네오 히우상파울루 3회 우승, 그리고 1968 타사 브라질 우승을 이뤄내며 팀의 전성기에 일조했다.
그러나 대표팀에는 자우마 산투스와 카를루스 아우베르투에 밀렸음은 물론 다른 백업 선수였던 자이르 마우리뉴나 피델리스에도 밀려났다. 그만큼 그 시대 브라질의 선수층은 두터웠다.
레프트백

이름: 조르당 다 코스타
출생년도: 1932년 11월 24일
포지션: 레프트백, 센터백, 수비형 미드필더
신체조건: 키 171cm / 몸무게 72kg
주 소속팀: 플라멩구
1950년대 플라멩구의 약진을 이끌었던 수비수로 2-3-5 시스템에서는 레프트 하프로 활약하다가 WM 시스템에선 레프트 풀백으로 활약했으며 4백 시스템에서는 레프트백으로 활약했으며 우수한 신체능력을 바탕으로 볼을 빼앗긴 뒤 곧바로 리커버리하며 볼을 탈환했음은 물론 오버래핑을 나갔다가도 볼을 상대편에게 빼앗기면 바로 수비진영으로 내려와 상대를 막아냈는데 이런 열정적인 수비에도 불구하고 파울을 거의 하지 않았던 페어플레이어로 이름이 높았으며 상대를 건드리지 않고 공만 빼내는 세련된 슬라이딩 태클로도 이름을 날렸다.
플라멩구 통산 출전 4위에 랭크된 조르당은 캄페오나투 카리오카 3회 우승, 토르네오 이니시우 두 캄페오나투 카리오카 2회 우승을 이뤄냈음은 물론 1961년에는 토르네오 리우상파울루를 포함해 3개의 컵 대회에서 우승을 이뤄내는데 큰 공을 세웠으며 이 과정에서 그는 줄리뉴, 가린샤와 같은 거물들과의 경합에서도 좋은 모습을 보였는데 이에 가린샤는 가장 상대하기 힘든 수비수로 조르당 다 코스타를 뽑기도 했다.
하지만 브라질 대표팀에서 그의 경쟁자는 당대 최강의 레프트백 니우통 산투스와 캄페오나투 카리오카에서 니우통 산투스 다음가는 레프트백으로 평가받았던 알타이르였다.
수비형 미드필더

이름: 두두
출생년도: 1939년 11월 7일
포지션: 수비형 미드필더, 중앙 미드필더
신체조건: 키 172cm / 몸무게 63kg
주 소속팀: 파우메이라스
파우메이라스의 홈구장인 알리안츠 파르키 외곽에 흉상이 조각되어 있는 전설적인 선수로 주로 수비형 미드필더로 활약했는데 일반적인 브라질 축구선수와 다르게 기술이 뛰어난 편은 아니었으나 적극적인 수비와 왕성한 활동량으로 팀의 궂은일을 맡으며 중원의 넓은 지역에서 볼을 소유하는데 도움을 줬기에 공의 노동자라는 별명을 얻었다.
1960년대와 70년대 초반 파우메이라스의 약진을 이끈 두두는 파우메이라스에서 펠레의 산투스의 대항마로서 캄페오나투 파울리스타 3회 우승 및 브라질 전국리그 5회 우승이라는 대업적을 남겼고 1974년에는 플라카르 선정 브라질 전국리스 시즌 베스트 일레븐에도 들었다.
다만 대표팀에는 지투, 리마, 클루두아우두, 제퀴냐, 데니우손 등 뛰어난 수비형 미드필더가 많았기에 발밑이 다소 투박한 그는 대표팀 전술에 맞지 않았기에 거의 소집되지 못했다. 물론 월드컵에도 단 한 번도 나간 적 없다.
중앙 미드필더

이름: 카를리뇨스
출생년도: 1937년 11월 19일
포지션: 중앙 미드필더, 수비형 미드필더
신체조건: 키 178cm
주 소속팀: 플라멩구
1950년대와 60년대에 걸쳐 브라질 최고의 미드필더 중 한 명으로 평가받았던 선수로 우아하면서 세련된 플레이로 이름을 날렸으며 세련된 볼 터치와 정교하면서도 창의적인 패스로 팀의 플레이메이커로 이름을 날렸는데 그 우아한 플레이에 세간의 사람들은 그에게 바이올린이라는 별명을 선물했다.
플라멩구에 머무는 동안 보타포구, 플루미넨시, 그리고 바스쿠 다 가마와 치열한 경쟁을 펼치며 1961 리우상파울루 토너먼트 우승과 캄페오나투 카리오카 2회 우승을 이뤄내며 구단의 레전드로 이름을 남겼다.
카를리뇨스는 대단한 재능을 가졌지만 브라질 대표팀에는 지지, 제르송, 멩가우비우, 리마, 디노 사니 등 뛰어난 플레이메이커들이 즐비했고 카를리뇨스는 대표팀에 거의 선발되지 못했다.
라이트윙

이름: 도르발
출생년도: 1935년 2월 26일
포지션: 라이트윙
신체조건: 키 177cm / 몸무게 70kg
주 소속팀: FC 산투스
당대 브라질 정상급의 라이트윙으로 빠른 스피드와 상대방을 속이는 교묘한 발재간, 그리고 뛰어난 슈팅력을 겸비한 완성형 윙어로 가린샤와 줄리뉴에 버금가는 존재라 평가받았다.
산투스 통산 최다 출전 5위와 최다 득점 7위에 오른 도르발은 산투스에서 캄페오나투 파울리스타 6회 우승과 국리그 5연패를 달성하며 브라질 무대를 제패한 도르발은 코파 리베르타도레스와 인터콘티넨탈컵에서도 2연패를 기록하며 황금기를 누렸는데 특히 1962년에는 참가한 모든 대회에서 우승컵을 드는 기염을 토했다.
그러나 브라질 대표팀에는 가린샤, 줄리뉴, 자이르지뉴, 호엘 등 대단한 라이트윙이 많았으며 그 유명한 자이르 다 코스타도 대표팀에 뽑힐 가능성이 없어지자 유럽으로 떠난 마당에 그가 월드컵에 소집되는 일은 없었다.
레프트윙

이름: 카누테이루
생년월일: 1932년 9월 24일
포지션: 레프트윙
신체조건: 키 168cm / 몸무게 73kg
주 소속팀: 상 파울루
좌측면의 가린샤라 불렸던 1950년대 브라질의 또 다른 천재로 질풍 같은 스피드와 가린샤에 버금가는 드리블 돌파는 물론 면도날 같은 왼발 크로스는 물론이고 우수한 슈팅 스킬을 통해 직접 득점에도 능했다.
상 파울루 구단에서는 신적인 존재로 1957 캄파오네투 파울리스타 우승을 이끌기도 했으며 펠레와의 라이벌리도 유명해 1958년 파카엠부 경기장에서의 산투스와의 우천 경기에서 펠레와 카누테이루가 서로 두 골씩 득점해 2-2로 비긴 경기는 희대의 명승부로 회자된다.
다만 이러한 우수한 퍼포먼스에도 불구하고 알콜 중독으로 인해 자신의 능력을 온전히 발휘하지 못했으며 술에 취해 대표팀에서 행패를 부리는 바람에 대표팀에서 제명당했다. 이미 대표팀에는 마리우 자갈루와 페페가 있었음은 물론 그들이 부상으로 빠져도 파우메이라스의 약진을 이끈 호메리우와 같은 준척급 자원들이 여럿 대기하는게 그 시대의 브라질이었기에 카누테이루는 실수를 만회할 기회를 얻지 못했다.
포워드

이름: 콰렌치냐
출생년도: 1933년 9월 15일
포지션: 포워드, 스트라이커
신체조건: 키 177cm
주 소속팀: 보타포구
1950년대부터 1960년대까지 브라질 무대에서 활약했던 공격수로 민첩한 몸놀림과 엄청난 반응속도를 지녔으며 벼락같은 왼발 슈팅과 우수한 볼 컨트롤까지 겸비해 상대 수비수들을 쥐락펴락했던 공격수였다.
보타포구에서 전성기를 보내며 442경기에 출전해 313골을 득점한 콰렌치냐는 캄페오나투 카리오카 3회 우승과 리우상파울루컵 2회 우승을 이뤄냈으며 콰렌치냐 본인도 캄페오나투 카리오카 득점왕을 3회 연속으로 수상했으며 비토리아에서도 캄페오나투 바이아누 4회 우승을 이뤄내며 이름을 날렸다.
다만 이러한 우수한 퍼포먼스에도 불구하고 그는 셀레상에 중용될 수 없었다. 그의 주전 경쟁자는 다름아닌 펠레였기 떄문이기에 기회가 올 때마다 좋은 모습을 보여도 결국 펠레를 밀어낼 수는 없었다.
스트라이커

이름: 플라비오 미누아누
출생년도: 1944년 7월 9일
포지션: 스트라이커, 포워드
신체조건: 키 179cm / 몸무게 73kg
주 소속팀: 코린치안스
1960년대와 70년대 브라질 무대 정상급으로 평가받았던 공격수로 기본적으로는 빠른 스피드를 바탕으로 상대의 수비라인 배후로 침투해 기회를 포착한 뒤 정교한 슈팅으로 마무리하는 플레이를 즐겼던 포처였지만 탄탄한 볼 컨트롤과 효율적인 원터치 패스를 활용한 연계 플레이에도 능했으며 때로는 테크니컬한 드리블로 상대를 교란하기도 했다.
히우그란지두술 주의 인테르나시오나우에서 1961 시즌 캄페오나투 가우초 우승을 이뤄내며 주목받았던 미누아누는 상 파울루의 코린치안스로 이적했는데 그곳에서는 비록 파우메이라스와 산투스 양강에 밀려 주립리그 우승은 이뤄내지 못했지만 1966 토르네오 리우상파울루 우승을 이뤄냈고 1967 시즌에는 펠레를 제치고 주립리그 득점왕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으며 리우 데 자네이루의 플루미넨세로 이적한 뒤에는 캄페오나투 카리오카 2회 우승과 과나바라 컵 2회 우승을 이뤄냈으며 그 과정에서 리그 득점왕에 2회, 컵 득점왕에 1회 올랐으며 1970년에는 브라질 전국 리그 우승을 이뤄냈다. 이후 포르투로 이적했다가 다시 인테르나시오나우로 돌아와 주립리그 2회 우승을 이뤄냈으며 전국리그인 브라질 세리 A에서는 득점왕에 올랐다.
친선 대회를 포함해 크고 작은 대회에서 26회의 우승컵을 들었으며 7회의 득점왕에 오른 미누아누는 브라질 대표팀에서는 17경기에 출전해 10골을 득점하며 기회가 올 때마다 좋은 모습을 보였음에도 펠레와 토스탕을 비롯해 여러 기라성 같은 공격수들에 밀려 월드컵 무대에 나서지 못했다.

이상 펠레 시대에 월드컵에 백업으로도 나서지 못한 브라질 선수들 11명을 선발해봤다. 이들 이외에도 출중한 재능이 많았으나 역시 월드컵에 나서는 행운을 누린 선수는 소수였다. 다음에 기회가 된다면 더 설명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