풋볼 레전드 스토리 2편 - 유럽의 베켄바우어에 대한 남미의 대답, 엘리아스 피게로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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풋볼 레전드 스토리 2편 - 유럽의 베켄바우어에 대한 남미의 대답, 엘리아스 피게로아

토르난테 2021. 9. 11. 17: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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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

 

현세대 축구팬들에게 역대 최고의 수비수를 물어본다면 십중팔구는 프란츠 베켄바우어를 언급할 것이다. 그 외에도 축구 역사에 관심이 있으면 무어나 바레시, 그리고 마티아스 잠머를 언급하며 청소년들은 세르히오 라모스도 언급한다.

이들의 공통점은 유럽 리그와 월드컵 또는 유로에서 엄청난 활약을 보여준 선수다. 베켄바우어는 따로 말할 것도 없고 바비 무어는 1966 잉글랜드 월드컵을 우승한 캡틴이며 프랑코 바레시는 밀란 제너레이션을 이끌고 유러피언 컵을 호령했다. 잠머 역시 유로 1996에서 베켄바우어에 못지않은 기량을 보였으며 라모스도 스페인과 레알 마드리드의 전성기를 꾸준하게 이끌었다.

하지만 수비수는 포지션상 인지도가 있는 큰 대회에서 우승하지 못하면 저평가된다.

오늘 소개할 선수도 이와 같은 케이스다. 당대에 남미 리그는 유럽 리그와 동급의 수준 높은 리그였으나 현세대에는 내리막길을 걸으며 인지도가 낮아졌다. 그리고 이 선수의 국적은 칠레로 국제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내기 어려운 나라였다. 이 선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미 올해의 선수상을 세 번이나 탔다.

오늘 소개할 이 선수는 바로 엘리아스 피게로아다.

 


프로필

 

사진 출처: 법정스님의 소유

 

선수이름: 엘리아스 피게로아

출생일: 1946년 10월 25일

국적: 칠레

신체조건: 키 187cm

포지션: 리베로, 센터백

 


커리어

 

피게로아는 발파라이소 지역 출신이지만 어린 나이부터 칠레의 수도를 연고로 삼았던 산티아고 원더러스의 유소년 팀에서 활약하다가 1964년에 성인팀에 데뷔했다. 우니온 라칼레라에서 1년 임대를 가며 경험을 쌓았으며 1966년까지 칠레에 머물며 리그 정상급 수비수로 활약했다.

이때의 활약으로 1966 잉글랜드 월드컵에 칠레 대표팀 소속으로 참가했지만 소련, 이탈리아, 북한이 속한 조에서 1무 2패로 최하위로 탈락했다.

이후 남미 최강의 팀 중 하나인 우루과이의 페냐롤로 이적해 활약했으며 두 번의 우루과이 프리메라 디비시온 우승을 이뤄냈다. 페냐롤에서의 5년 동안 남미 최고의 수비수로 활약하며 팬들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무려 세 차례나 리그 MVP를 수상했다. 훗날 2000년에 우루과이 축구협회 선정 20세기 최고의 외국인 선수로 선정되는 영광을 누렸다.

 

페냐롤 시절의 피게로아


1972년, 페냐롤에서의 계약이 만료되자 스페인의 레알 마드리드는 그에게 오퍼를 보냈다. 하지만 그는 유럽으로 떠나면 국가대표팀 소집이 어려워서 레알 마드리드의 오퍼를 거절하고 브라질 리그의 인테르나시오나우로 향한다.

인테르나시오나우에서 뛴 5년간 주 리그는 5년 연속 우승했고 그중 1974년에는 18전 18승. 전승 우승이라는 대업적을 이룩하기도 했으며 전국 리그에서는 1975년과 1976년 두 번 우승했다.

피게로아가 인테르나시오나우에서 보여준 활약은 당대 유럽 최고의 수비수이자 최고의 선수 프란츠 베켄바우어에 비견되었다. 그는 1976년까지 인테르나시오나우에서 활약하며 남아메리카 올해의 수비수를 다섯 번 연속으로 제패했으며 특히 1974년부터 1076년까지 남아메리카 올해의 축구 선수상 3회 연속 수상하는 기염을 토했다.

 

피게로아의 전성기인 인테르나시오나우 시절 유망주였던 파우캉과 함께 (사진 출처: nasljerseys.com)


피게로아는 브라질 리그에서 활약과 더불어 국가대표팀에서도 핵심 선수로서 좋은 모습을 보여주며 약체 칠레를 이끌고 페루와 베네수엘라를 꺾고 남미 예선을 통과한다. 특히 쿠비야스를 에이스로 보유한 페루를 따돌린 데는 피게로아의 공이 컸다. 이후 소련이 칠레의 정치상황을 비판하며 플레이오프에 참가하지 않고 기권하자 칠레는 월드컵 본선에 진출한다.

칠레는 개최국 서독을 비롯해 호주, 동독과 한 조가 되었다. 유럽 챔피언 서독과의 경기에서 피게로아는 서독의 공격수들의 파상공세를 모조리 막아내는 뛰어난 활약을 보여준다. 게르트 뮐러는 피게로아에게 봉쇄되어 아무것도 하지 못했으며 다른 독일 공격수들도 그를 뚫어내지 못했고 브라이트너의 원더 골로 간신히 승리할 수 있었다. 심지어 피게로아는 단 한 차례의 파울도 기록하지 않았다.

이때 칠레는 피게로아의 선전에도 공격진의 부진으로 동독과 호주와도 비기며 조별 리그에서 탈락했지만 피게로아의 활약은 대단했으며 베켄바우어는 인터뷰에서 "나는 유럽의 피게로아다."라는 말을 남겼으며 피게로아는 1차 조별 리그 탈락팀 소속으로는 유일하게 대회 베스트 일레븐에 들었다.

게르트 뮐러를 견제했던 피게로아 (사진 출처: 트위터 @SelecaoTalk 계정)



이후 피게로아는 1977 시즌에 CD 팔레스티노로 이적해 활약하며 1978년 칠레 리그 우승을 이끌었으며 1979년에는 칠레 대표팀의 코파 아메리카 준우승을 이끌었다. 피게로아는 은퇴하려 했지만 축구 협회의 만류로 철회한다.

1981년에는 미국의 게르트 뮐러, 고든 뱅크스 등이 활약했던 미국의 포트 로더데일 스트라이커스로 이적했으며 1982년에는 콜로 콜로로 이적해 활약했으며 1982 스페인 월드컵에도 참가하나 서독, 알제리, 오스트리아와 한 조가 되었으나 전성기가 지난 피게로아는 힘을 쓰지 못했고 팀의 전패 탈락을 막지는 못하며 현역에서 물러났다.

비록 마무리는 허망했지만 피게로아는 우루과이와 브라질 모두에서 20세기 리그 최고의 용병으로 추앙받았으며 팔레스타인 이민자들이 세운 약체 CD 팔레스티노에게 리그 우승을 선물하며 구단 역대 최고의 선수로 추앙되며 축구사에 위대한 이름을 남겼다.

아르헨티나의 황제로 불렸으며 역시 축구사 최고의 수비수 중 하나인 다니엘 파사레야가 피게로아에 대해 남긴 말이다.

"피게로아와 같은 대선수와 비교되는 것 자체가 내겐 영광이다."


클럽

1963-1966 산티아고 원더러스: 54경기
1964 우니온 라칼레라 임대: 30경기
1967-1971 CA 페냐롤: 241경기 7골
1972-1976 인테르나시오나우: 336경기 26골
1977-1980 CD 팔레스티노: 118경기 6골
1981 포트 로더데일 스트라이커스: 22경기
1982 콜로 콜로: 17경기

클럽 통산: 801경기 39골

국가대표팀

1966-1982 칠레 축구 국가대표팀: 47경기 2골

 


플레이 스타일

 

"백작처럼 우아하고 벵갈호랑이처럼 위험했다. 피게로아는 완벽한 수비수였다."

- 네우송 로드리게스 (브라질의 축구 평론가)

 

칠레 역사상 최고의 선수이자 남미 축구 역사상 최고의 수비수로 꼽혔던 선수인만큼 수비력도 역대 최고 레벨의 수준을 보여줬다.

큰 체격을 활용한 제공권 장악 능력은 실로 감탄을 할 만했으며 큰 키에도 몸이 굉장히 유연했고 아주 민첩했다,

 

피게로아의 몸을 날리는 수비 (출처: 나무위키)


특히 1974년 서독 공격진을 상대로 보여준 파울 없는 깔끔하면서도 교묘한 수비는 관중들을 감탄시켰으며 게르트 뮐러는 그 경기에서 유효슈팅을 단 한 차례도 기록하지 못했다.

18년의 현역 생활 동안 단 한 차례만 퇴장당했을 정도로 깔끔한 수비를 보였으며 강한 멘탈로 항상 흔들림 없이 침착하게 플레이했다.

수비라인 통솔 능력도 단연 역대 최고급으로 축구 역사상 최초로 오프사이드 트랩을 사용한 선수 중 하나이며 마티아스 잠머와 함께 축구 역사에서 오프사이드 트랩을 가장 잘 활용한 수비라인의 지휘자였다,

공격 능력도 대단했다. 세트피스 상황에서 헤딩 득점은 물론이고 기습적인 드리블을 활용한 공격 가담에도 능했으며 짧은 패스를 활용한 안정적인 볼 배급에도 능했던 완벽한 수비수였다.

즉 우월한 신체 능력과 볼을 다루는 기술, 그리고 강한 정신력의 삼박자를 모두 갖춘 공수겸장이었다.

 


여담

 

팔레스티노와 인테르나시오나우에서 감독 생활을 잠시 했지만 감독으로선 성공하지 못했다.

피게로아가 유소년 시절부터 머물렀던 클럽인 CD 산티아고 원더러스는 홈구장을 리모델링하면서 경기장의 공식 명칭을 'Estadio Elias Figueroa Brander de Valparaiso'로 바꾸었다.

 


수상 이력

 

페냐롤

1967 우루과이 프리메라 디비시온 우승
1968 우루과이 프리메라 디비시온 우승
1969 인터콘티넨탈 챔피언스 슈퍼컵 우승

 


인테르나시오나우

1972 캄페오나투 가우슈 우승
1973 캄페오나투 가우슈 우승
1974 캄페오나투 가우슈 우승
1975 캄페오나투 가우슈 우승
1975 브라질 세리에 A 우승
1976 캄페오나투 가우슈 우승 (5회 연속 우승)
1976 브라질 세리에 A 우승

 


CD 팔레스티노

1977 코파 칠레 우승
1978 칠레 프리메라 디비시온 우승

 


국가대표팀

1966 잉글랜드 월드컵 16강 조별 리그
1974 서독 월드컵 16강 조별 리그
1979 코파 아메리카 준우승
1982 스페인 월드컵 24강 조별 리그

 


개인 수상

1966 칠레 프리메라 디비시온 올해의 선수
1967 우루과이 프리메라 디비시온 MVP
1968 우루과이 프리메라 디비시온 MVP
1971 우루과이 프리메라 디비시온 MVP
1972 남미 올해의 수비수
1972 Bola de Ouro 선정 브라질 리그 MVP
1972 Bola de Prata 선정 브라질 리그 올해의 수비수
1973 남미 올해의 수비수
1974 남미 올해의 선수상
1974 남미 올해의 수비수
1974 서독 월드컵 대회 올스타 팀
1974 Bola de Prata 선정 브라질 리그 올해의 수비수
1975 남미 올해의 선수상
1975 남미 올해의 수비수
1975 Bola de Prata 선정 브라질 리그 올해의 수비수
1976 남미 올해의 선수상
1976 남미 올해의 수비수
1976 Bola de Ouro 선정 브라질 리그 MVP
1976 Bola de Prata 선정 브라질 리그 올해의 수비수
1977 남미 올해의 수비수
1981 칠레 프리메라 디비시온 올해의 선수
1981 칠레 올해의 스포츠맨
1998 FIFA 선정 20세기 남미 올스타
1999 칠레 축구 역사상 최고의 선수
2000 우루과이 프리메라 디비시온 세기 최고의 외국인 선수
2001 브라질 축구리그 세기 최고의 외국인 선수
2002 페냐롤 역대 드림 팀
2009 CONMEBOL 남아메리카 축구 공로상

 

3회의 남미 올해의 선수상을 수상하다..

 


옛날 축구 용어 해설

 

캄페오나투 가우슈- 히우그란지두술주 지역의 최상위 축구 리그로 인테르나시오나우와 그레미우가 이 지역의 강호로 손꼽힌다.

브라질 세리에 A- 브라질의 전국 단위 1부 리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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