풋볼 레전드 스토리 5편 - 흑인차별의 중심지에서 축구 영웅에 등극한 폴 봉가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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풋볼 레전드 스토리 5편 - 흑인차별의 중심지에서 축구 영웅에 등극한 폴 봉가봉가

토르난테 2021. 10. 16. 14: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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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

 

오늘날의 콩고민주공화국은 과거 벨기에의 식민지배를 받았었다. 벨기에의 국왕 레오폴트 2세는 콩고민주공화국을 자신의 사유지로 삼았고 원주민들을 노예로 부렸다. 자신이 원하는 성과를 이루지 못하면 잔혹한 학살을 저질렀으며 그 때문에 콩고에서 수백만이 죽었다.

벨기에의 사람들도 잔혹함에서만 덜할 뿐 흑인들에 대한 시선은 레오폴트 2세와 다르지 않았다. 벨기에는 유럽에서 가장 인종차별이 심했고 흑인을 전시하는 인간 동물원이 존재했다.

당연히 벨기에에선 축구도 백인들의 전유물이었다. 이 콩고민주공화국 출신의 선수가 등장하기 전까진 말이다. 이 선수의 등장이 훗날 벨기에 대표팀에 빈센트 콤파니나 로멜로 루카쿠 같은 흑인 선수들이 등장하는 데 큰 영향을 줬다.

오늘 소개할 이 선수는 1950년대 후반과 1960년대 초반까지 벨기에 리그 최고의 하프백으로 활약하며 벨기에 축구계의 흑인 입성을 이끈 폴 봉가봉가다.

 


프로필

 

사진 출처: 법정스님의 소유

 

선수이름: 폴 봉가봉가

출생일: 1933년 4월 25일

국적: 벨기에령 콩고 → 콩고민주공화국

신체조건: 키 180cm

포지션: 중앙 미드필더, 수비형 미드필더

 


커리어

 

봉가봉가는 벨기에령 콩고 북서부의 에본다에서 태어났다. 당시 콩고민주공화국 지역은 벨기에의 왕 레오폴트 2세의 수탈로 인한 후유증을 겪었으며 아프리카 식민지 중에서도 굉장히 가난한 지역에 속했다.

봉가봉가 역시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맨발로 축구를 했다. 그러나 확실히 재능이 있어서 지역팀인 우니온과 모테마 펨베에서 활약하며 명성을 쌓았으며 벨기에의 명문 구단 스카우터들의 눈에 들었다.

당시 벨기에는 서문에 상술했듯이 인종차별이 심해 흑인이 벨기에에서 축구선수로 활약하는 일은 있을 수 없는 일로 여겨졌다. 하지만 그의 실력은 그런 편견을 뛰어넘는 실력이었고 결국 1957년에 스탕다르 리에주에 입단한다.

그는 상대팀 서포터로부터 엄청난 인종차별과 야유에 시달렸지만 그것을 무시하고 연신 좋은 활약을 펼쳐 스탕다르 리에주의 창단 첫 리그 우승에 크게 공헌한다.

 

노년의 봉가봉가, 봉가봉가는 스탕다르 리에주의 레전드로 대접받는다. (사진 출처: 트위터 Robert Abolonne)



이듬해에는 유러피언컵에 출전해서 8강에 진출하지만 당시 강호였던 스타드 드 랭스와의 경기에서 홈에서 2-0으로 이겼지만 원정에서 3-0으로 역전패하며 아쉽게 탈락한다. 봉가봉가는 유러피언 컵에서도 좋은 모습을 보여줬지만 그의 상대인 레이몽 코파는 매우 뛰어났다.

이후 봉가봉가는 경기장 내에서는 상대 선수와 경기하고 경기장 밖에서는 인종차별과 싸웠다. 봉가봉가는 훗날 ESPN과의 인터뷰에서 "내가 나이트 클럽에 가서 춤을 추고 놀았을 때 한 남자가 나를 댄스 플로어에서 끌어내리며 "네 자리는 여기가 아니야!" 라고 말했다." 라고 그때의 아픔을 이야기하기도 했다.

하지만 봉가봉가는 이런 시련에 굴하지 않았다. 그는 1960년에는 벨기에 리그의 올해의 선수 격인 벨기에 골든슈 투표에서 폴 반 힘스트에 이어 2위를 기록하는 맹활약을 했으며 이는 첫 수상인 1954년 이후 20년 동안 외국인 선수로서는 유일하게 3위 안에 들었다. 그리고 이 해에 조국은 킨샤샤 콩고라는 이름으로 독립했다. 봉가봉가는 킨샤샤 콩고를 자신의 조국으로 선택했다.

 

벨기에 리그 시절의 봉가봉가



이후 1960-61 시즌에 봉가봉가는 리에주에게 리그우승을 선물했다. 이때의 활약을 인정받아 영국 언론 월드 사커지에서 선정하는 월드 일레븐에 선정되었다, 같이 선정된 선수들의 이름이 펠레, 니우통 산투스, 디 스테파노, 쿠발라, 푸스카스, 헨토와 같은 선수들임을 보면 대단한 업적이었다.

 

1961년 월드 사커지 선정 월드 일레븐 (선수사진 출처: 법정스님의 소유)



1961-62 시즌 유러피언 컵에서는 핀란드의 하카와 스코틀랜드의 레인저스를 꺾고 준결승에 진출하기도 했다. 비록 4강에서는 디 스테파노와 푸스카스가 이끄는 레알 마드리드를 상대로 원정에서는 4-0, 홈에서는 2-0으로 패하며 결승 진출엔 실패했지만 이 시즌 봉가봉가는 인상적인 모습을 다시  한번 보여줬다.

이후 1962-63 시즌에는 스탕다르에게 세 번째 리그 우승컵을 선물하고 스포르팅 샤를루아로 이적해 4년간 활약하며 선수생활을 마무리한다.

그는 벨기에로의 귀화를 권유받았지만 자신의 조국 콩고민주공화국을 버리지 않았다. 비록 벨기에 대표팀에서 뛰지는 않았지만 그의 활약으로 인해 벨기에는 점점 흑인들이 축구계로 진입하는 길을 열었으며 먼 훗날 콤파니와 루카쿠 같은 선수들이 벨기에를 대표해서 활약하는데 공헌한다.

 


플레이 스타일

 

'피지컬과 테크닉을 겸비한 괴물 미드필더'

 

봉가봉가는 당시에는 장신인 180cm에서 나오는 압도적인 힘과 뛰어난 볼 컨트롤 능력, 그리고 넓은 시야에서 나오는 훌륭한 패싱력을 겸비한 완벽한 미드필더였다.

스탕다르 리에주의 팬들은 처음에는 그의 영입에 부정적이었지만 그가 경기장에서 보여준 화려한 볼 컨트롤에 매료되어 그를 받아들이고 응원하게 된다.

 


여담

 

봉가봉가는 조국이 대표팀을 만들기 이전에 활약했던 선수라 콩고민주공화국 대표팀에서 활약한 적이 없지만 1989년에 콩고민주공화국의 감독을 맡는다. 그러나 인상적인 성과는 거두지는 못한다.

 


수상 이력

 

스탕다르 리에주

1957-58 벨기에 리그 우승
1960-61 벨기에 리그 우승
1961-62 유러피언 컵 4강
1962-63 벨기에 리그 우승

 


개인 수상

1960 벨기에 골든슈 투표 2위
1962 월드 사커지 선정 월드 일레븐
스탕다르 리에주 명예의 전당

 

스탕다르 리에주 명예의 전당 (출처: 스탕다르 리에주 공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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