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플레이어 열전 75편: 왼쪽 그 자체 브란코 제베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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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플레이어 열전 75편: 왼쪽 그 자체 브란코 제베츠

토르난테 2020. 3. 10. 17: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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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년의 제베츠

1. 프로필

이름: 브란코 제베츠 (Branko Zebec)
생몰년: 1929년 5월 17일-1988년 9월 26일 (향년 59세) 
국적: 유고슬라비아→크로아티아
신체조건: 키 176cm
포지션: 레프트 백, 아웃사이드 레프트, 인사이드 레프트, 레프트 하프, 센터 백

 

2. 클럽 이력

파르티잔의 믿을 맨

유고슬라비아 컵의 제왕

보락 자그레브: (1948-1951) 경기 미상
FK 파르티잔: (1951-1959) 135경기 39골
츠르베나 즈베즈다: (1959-1961) 33경기 4골
알레마니아 아헨: (1961-1965) 102경기 4골

토탈: 270경기 45골 (유고슬라비아 컵과 보락 자그레브 기록 누락)

 

제베츠는 어릴 때부터 발이 빠르고 축구 이해도가 높은 왼발잡이였으나 그의 장점을 이해하지 못하는 감독들에 의해 자그레브 지역에 여러 유소년 팀을 떠돌았다.

보락 자그레브에서 처음 프로 데뷔를 한 그는 1951년 FK 파르티잔으로 이적했다.

하지만 파르티잔은 유고슬라비아 군부의 후원을 받는 강팀임에도 리그 우승과 인연이 없었던 팀이었다.

1953-54 시즌 제베츠의 활약으로 우승 경쟁을 했지만 결국 승점 1점 차이로 준우승을 하긴 했고 1957-58 시즌에도 준우승에 머물렀다.

다만 유고슬라비아컵에선 매우 강했는데 첫 컵 결승에서 츠르베나 즈베즈다를 6-0으로 이겼는데 여기서 제베츠가 멀티 골을 기록하기도 했다.

이후에도 츠르베나 즈베즈다를 4-1로 대파하기도 했으며 Radnicki Belgrade를 5-3으로 이기고 우승하기도 했다.

파르티잔 시절에서는 제베츠는 주로 아웃사이드 레프트로 나왔으며 스체판 보벡, 밀로스 밀루티노비치, 마르코 발록, 스토예 요키치와 오각 편대를 이루며 활약했지만 수비진의 부진으로 리그 우승을 이루진 못했다.

그러나 그는 라이벌 츠르베나 즈베즈다로 이적하여 파르티잔의 서포터들을 화나게 했으며 츠르베나 즈베즈다에서는 드디어 리그 우승에 성공한다.

하지만 전성기가 지난 뒤라 1961년 독일의 알레마니아 아헨으로 이적해서 용병으로 4년간 활약한 뒤 은퇴한다.

3. 국가대표팀 이력

올림픽 득점왕으로 개인의 영광은 이루었지만 이루었지만 팀 단위 성적은 아쉬운 무관 

유고슬라비아 A 대표팀: (1951-1961) 65경기 17골

 

1954 유고슬라비아 멤버. 오른쪽에서 다섯 번째 선수가 제베츠. 

국가대표팀에서는 본 포지션인 아웃사이드 레프트에 훌륭한 선수가 많아 레프트 백이나 레프트 하프로도 많이 뛰었다.

하이두크 스플리트의 전설적인 아웃사이드 레프트 부카스에 밀려 레프트 백으로 출전했으나 첫 경기 인도를 상대로 4골을 몰아넣는 괴력을 보여줬다.

소련을 상대로도 당시에는 유럽 축구엔 없는 개념인 기습적인 오버래핑을 임기응변으로 해서 두 골을 넣었으며 덴마크를 상대로도 득점해 총 7골을 넣었다.

5경기에서 7골을 넣으며 단독 득점왕에 올랐지만 결승전에서는 매직 마자르라 불리는 헝가리의 윙어 부다이를 뛰어난 수비력으로 철저하게 봉쇄했지만 부다이를 봉쇄한다고 막을 수 있는 팀이 아니어서 2-0으로 패배한다.

결국 1952 헬싱키 올림픽에서는 수비수 득점왕이라는 이색적인 이력에도 은메달에 그쳤다.

1954 스위스 월드컵에도 참가해서 프랑스를 이기는데 일조하고 남미의 강호이자 전 대회 준우승 팀 브라질을 상대로도 선제골을 넣으며 활약했지만 디디에게 동점골을 먹히고 비겼다.

8강에 진출해서 2조 2위 서독을 만났는데 당시 유고슬라비아는 서독보다 전력적으로 우위에 있었던 팀이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서독만 만나면 작아졌으며 전반 9분 수비의 핵 호르바트의 자책골로 무너졌으며 헬무트 란에게도 추가 골을 먹히며 2-0으로 8강에서 허무하게 탈락한다.

결승에 올라 매직 마자르에 복수하겠다는 계획은 8강에서 어이없게 무너졌으며 저 서독이 매직 마자르까지 베른에서 제압하며 우승하는 걸 지켜보게 된다.

이후 1958 스웨덴 월드컵에서는 라이코 미티치의 뒤를 이어 주장으로 참가했다.

유고슬라비아는 제베츠의 훌륭한 수비력을 바탕으로 레이몽 코파와 쥐스트 퐁텐을 보유한 프랑스를 3-2로 이겼고 제베츠는 언론으로부터 평점 10점을 받았습니다.

한 수 아래로 여겨지던 스코틀랜드와 파라과이와 연이어 비기며 조 2위로 8강에 진출한다.

그리고 8강에서 만난 서독에게 복수를 다짐했지만 또 전반 12분에 제베츠가 헬무트 란을 마킹하는데 실패하며 실점의 빌미가 되었으며 8강에서 다시 탈락한다.

이후 제베츠는 국가대표팀 주전에서 밀렸으며 유로 60에서도 대표팀에 선발되지만 벤치에서 후배들의 활약을 지켜봤다.

보라 코스티치는 본선에서는 부진했지만 예선에서는 호날두를 연상시키는 득점 행진을 벌였으며 파흐루딘 유수피는 철벽 수비로 팀의 결승 진출에 공헌했다.

그러나 소련에게 2-1로 아쉽게 패하면서 또 준우승을 하고 1961년에 서독의 아헨으로 이적하며 국가대표팀을 반납한다.

 

함부르크 감독 생활 중에 이뤄낸 분데스리가 우승 셀레브레이션 도중

4. 간략히 설명하는 은퇴 이후

은퇴 이후 훌륭한 축구 지능과 적절한 임기응변을 앞세워 디나모 자그레브에서 지도자로 성공했다.

특히 바이에른 뮌헨에서는 팀의 첫 분데스리가 우승과 포칼 우승을 이뤄내며 첫 도메스틱 더블을 이뤄냈다.

그리고 함부르크에서는 1978-79 시즌 케빈 키건과 만프레드 칼츠, 호어스트 흐루베쉬, 펠릭스 마가트를 앞세워 분데스리가 우승과 유러피언 컵 결승을 이뤄냈으나 결승전에서 패배하고 사임했다.

그 외에도 슈투트가르트, 아인트라흐트 브라운슈바이크,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 보루시아 도르트문트 등에서 활약하며 분데스리가에서 이름을 날렸다.

애주가였으며 경기 전날에도 과음하여 경기 도중 벤치에서 존 적이 있을 정도로 술을 많이 마셨다.

그러나 술을 너무 좋아해서 1988년 59세의 한창 감독으로 활약할 나이에 알코올에 관련된 질병으로 사망했다.

5. 당대의 평가와 플레이 스타일

50년대 좌측의 루드 굴리트

당대 유고슬라비아의 에이스 카드

왼쪽과 중앙의 모든 포지션을 소화 가능했던 선수이며 이는 다재다능한 능력을 바탕으로 이루어졌다.

그 당시 영 좋지 않은 축구화를 신고도 100m를 11초만에 주파했을 정도로 훌륭한 기동력을 가지고 있었으며 마른 체형임에도 근육량을 열심히 키웠고 신체 밸런스가 좋아서 몸싸움을 잘 이겨냈다.

드리블을 꼭 필요할 때만 사용했으며 화려한 개인기를 선호하지는 않았지만 냉철한 판단력에서 나오는 적절한 개인기로 상대를 제치고 득점하는데 매우 능했다.

신체 능력 이상으로 훌륭한 축구 지능을 갖추고 있었는데 상술한 냉철한 판단력에서 나오는 임기응변에 매우 능했으며 훌륭한 축구이해도를 바탕으로 다양한 포지션에서 마치 어린 시절부터 해당 포지션에서만 뛴 것 같은 안정감을 주는 스타일이었다.

훌륭한 축구지능을 바탕으로 레프트 백으로 올림픽 득점왕도 했으며 팀에 사정에 따라 다양한 플레이가 가능했으며 리더십도 뛰어나 주장으로서 팀을 잘 이끌기도 했다.

그리고 이 축구지능과 임기응변, 그리고 통솔력을 바탕으로 훗날 감독으로서도 성공한다.

 

제베츠 우표

6. 수상 이력 (선수 시절의 수상 이력만 기재)

클럽

FK 파르티잔

1952 유고슬라비아 컵 우승
1953-54 유고슬라비아 컵 우승
1957-58 유고슬라비아 컵 우승

츠르베나 즈베즈다

1959-60 유고슬라비아 1부 리그

국가대표팀

1952 헬싱키 올림픽 은메달
1960 유러피언 네이션스 컵 (유로 60) 준우승

개인

1952 헬싱키 올림픽 득점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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