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헨티나 축구 역사상 최고의 3선 미드필더 Top 10

국가의 영웅들/아르헨티나

아르헨티나 축구 역사상 최고의 3선 미드필더 Top 10

토르난테 2025. 6. 21. 15: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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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의 주관적인 순위입니다.
*대상자는 아르헨티나 국가 대표팀으로 A매치 1경기 이상 출전한 선수를 대상자로 했으며 이탈리아나 스페인으로 귀화한 오리운디도 아르헨티나 대표팀 경력이 있으면 포함했습니다.
*선수 사진은 대부분 플레이어스 유저인 법정스님의 소유님의 건조폼 입니다. 다만 법정님이 만들지 않은 선수들은 제가 만들었습니다.
*기록 출처는 RSSSF와 트렌스퍼마크트이며 둘의 기록이 상충할 경우에는 전자를 우선적으로 따릅니다.
*기록일은 2025년 6월 17일 기준입니다.

 


10위 아메리코 가예고

 


생년월일: 1955년 4월 25일
A매치 기록: 73경기 3골
신체조건: 키 170cm / 몸무게 70kg
주 소속팀: 리버 플레이트

황소라는 별명으로 불렸던 저돌적인 수비형 미드필더로 별명에 걸맞게 집요한 대인 마킹과 왕성한 활동량을 활용해 상대의 중원을 청소했으며 정확한 패싱력으로 공격과 수비의 연결고리 역할도 훌륭하게 수행했다.

뉴웰스 올드 보이스에서 데뷔해 8년간 뛰어난 활약을 펼치며 아르헨티나 무대 톱클래스 수비형 미드필더의 반열에 오른 가예고는 리버 플레이트로 이적해 본격적인 전성기를 누리며 아르헨티나 프리미어 디비시온 2회 우승을 이뤄냈고 1986년에는 정규리그와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우승과 인터콘티넨탈컵에서도 우승, 그리고 코파 인터아메리카 우승을 이뤄내며 쿼드러플을 이뤄냈다.

아르헨티나 대표팀에서도 청소년 대표팀 시절부터 꾸준히 활약하며 엘리트 코스를 밟은 가예고는 1978 아르헨티나 월드컵에서 아르딜레스, 발렌시와 함께 중원을 구성해 우승에 기여했다.

 

9위 안토니오 라틴

 


생년월일: 1937년 5월 16일
A매치 기록: 34경기 1골
신체조건: 키 190cm / 몸무게 88kg
주 소속팀: 보카 주니어스

1960년대 아르헨티나를 대표하는 미드필더로 엘 라테, 즉 들소라는 별명에 맞게 터프한 태클 실력과 왕성한 활동량을 가지고 있었으며 안정적인 패싱력도 겸비했으며 뛰어난 리더십으로 팀원들을 이끌었다.

선수 생활을 오직 보카 주니어스 한 구단에서만 보낸 라틴은 보카 주니어스의 주장으로 활약하며 프리메라 디비시온 4회 우승과 코파 아르헨티나 1회 우승을 이뤄내며 1969년 엘 그라피코 선정 1960년대 남미 최고의 수비형 미드필더 1위에 올랐다.

아르헨티나 대표팀에서도 장기간 주전으로 활약한 라틴은 코파 아메리카 2회 준우승을 이뤄냈고 1962년과 1966년 두 번의 월드컵에 참가했는데 1966년에는 8강전에서 잉글랜드를 상대로 심각한 오심으로 퇴장당하며 잉글랜드와 아르헨티나의 축구 라이벌리의 시작을 알리기도 했다.

 

8위 디에고 시메오네

 


생년월일: 1970년 4월 28일
A매치 기록: 108경기 11골
신체조건: 키 177cm / 몸무게 77kg
주 소속팀: SS 라치오

현세대 젊은 팬들에게는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의 보스로 유명한 시메오네지만 현역 시절에는 거친 몸싸움과 지능적인 반칙, 뛰어난 리더십과 헤딩을 활용한 득점력까지 모두 겸비한 수비형 미드필더였으며 팬들로부터 엘 촐로, 즉 목동이라고 불렸다.

벨레스 사르스필드에서 데뷔해 두각을 나타낸 시메오네는 피사와 세비야를 거치면서 유럽 무대 적응을 완료했고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에서는 첫 전성기를 누리며 1995-96 시즌에는 라리가와 코파 델 레이를 동시에 석권하며 도메스틱 더블을 이뤄내면서 라리가 올해의 라틴 아메리카의 선수로 평가받았다.

1990년대 후반, 당대 최고의 리그였던 세리에 A의 도전을 시도한 시메오네는 인테르 밀란에서는 호나우두, 사모라노, 사네티 등과 함께 UEFA컵 우승을 이뤄냈고 자신이 UEFA컵에서 꺾었던 라치오로 이적해서도 시즌 초 UEFA 슈퍼컵 우승을 시작으로 1999-2000 시즌 세리에 A와 코파 이탈리아 더블을 이뤄냈다.

아르헨티나 대표팀에서도 최초로 센추리 클럽에 가입한 영예를 누린 시메오네는 1991년과 1993년 코파 아메리카 우승을 이뤄냈고 1992년 킹파드컵 우승과 1994년 미국 월드컵 16강, 그리고 1996년 애틀란타 올림픽 은메달이란 성과를 냈다. 월드컵에서는 다소 부진했지만 1998 프랑스 월드컵에서는 슈퍼스타 베컴을 도발해 퇴장시키며 8강 진출에 공헌하기도 했다.

 

7위 에스테반 캄비아소

 


생년월일: 1980년 8월 18일
A매치 기록: 52경기 5골
신체조건: 키 177cm / 몸무게 78kg
주 소속팀: 인테르 밀란

2000년대 중후반 최고의 수비형 미드필더 중 하나로 뛰어난 수비 지능과 왕성한 활동량을 겸비했으며 강력한 중거리 슈팅과 훌륭한 수비 스킬을 겸비한 공수겸장의 미드필더였다.

레알 마드리드에서의 실패를 딛고 인테르 밀란에서 전성기를 누린 캄비아소는 10년간 활약하며 세리에 A 5연패와 코파 이탈리아 4회 우승을 이뤄냈으며 특히 2009-10 시즌에는 챔피언스리그마저 제패하며 트레블을 달성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당대 세리에 A 정상급 수비형 미드필더였던 캄비아소 개인도 2004-05 시즌 DBS 칼초, 세리에 A 평점 1위에 올라 2005년 인테르 밀란 올해의 선수상을 받았으며 2005-06 시즌에는 ESM 올해의 팀에 선정되었다.

아르헨티나 대표팀에서도 마스체라노, 리켈메와 함께 두각을 나타낸 캄비아소는 2005 컨페드레이션스컵 준우승을 이뤄냈으며 2006 독일 월드컵에서는 8강 진출을 이뤄냈고 2007 코파 아메리카에서도 준우승을 차지했다. 그러나  2010 남아공 월드컵 당시에는 최고의 폼을 자랑했음에도 아르헨티나의 감독 디에고 마라도나에 의해 뽑히지 않았고 결국 아르헨티나는 독일에게 4-0으로 패하며 팀의 수비적인 부분에서의 부족함을 극복하지 못하고 탈락한다.

 

6위 하비에르 마스체라노

 


생년월일: 1984년 6월 8일
A매치 기록: 147경기 3골
신체조건: 키 174cm / 몸무게 74kg
주 소속팀: FC 바르셀로나

2000년대 하반기와 2010년대 상반기를 대표하는 수비형 미드필더로 거칠고 터프한 태클을 앞세운 강력한 대인 수비력과 상대의 패스 흐름을 우수하게 차단하는 모습을 보여주며 중원에서 영향력을 발휘했던 진공청소기였으며 FC 바르셀로나로 이적한 이후로는 본 포지션인 수비형 미드필더뿐만이 아니라 센터백으로도 훌륭한 활약을 보여줬다.

리버 플레이트에서 데뷔해 첫 두각을 나타낸 마스체라노는 프리메라 디비시온 클라우수라 우승을 이뤄냈고 코린치안스에는 브라질 전국 리그 우승을 이뤄 내며 두각을 나타냈는데 그 과정에서 남미 올해의 팀에 2년 연속으로 선정되었으며 잉글랜드로 건너가서는 웨스트햄 유나이티드와 리버풀을 거쳐 세계 정상급 수비형 미드필더의 반열에 올랐다.

그러나 파트너 알론소가 팀을 떠나는 것을 보고 구단의 야망에 대한 회의감을 느껴 바르셀로나로 이적한 마스체라노는 시스템상 부스케츠를 밀어내지 못하자 센터백으로 포지션을 변경해 푸욜의 후계자 역할을 하며 2014-15 시즌 트레블을 포함해 라리가와 코파 델 레이에서 각각 5회 우승을 이뤄냈고 챔피언스리그에서도 2010-11 시즌과 2014-15 시즌에 우승을 이뤄내는데 큰 공을 세웠고 마스체라노 개인도 2015년 발롱도르 투표에서 14위를 차지하는 기염을 토했다.

아르헨티나 대표팀 통산 A매치 출전 2위를 기록한 마스체라노는 라 알비셀레스테의 유니폼을 입고 두 번의 올림픽과 네 번의 월드컵, 그리고 다섯 번의 코파 아메리카에 출전했는데 특히 2004년 아테네와 2008년 베이징에서 열린 두 번의 올림픽에서는 모두 금메달을 목에 걸었고 2014 브라질 월드컵과 팀을 결승에 올려놓으며 맹활약했다. 코파 아메리카에서도 결승에만 4회 진출했고 그 과정에서 두 번이나 대회 베스트 일레븐에 들었을 정도로 뛰어난 활약을 펼쳤지만 모두 준우승을 하며 메이저 국가대항전 준우승만 다섯 번을 기록한 비운의 선수였다.

 

5위 오스발도 아르딜레스

 


생년월일: 1952년 8월 3일
A매치 기록: 51경기 8골
신체조건: 키 170cm / 몸무게 62kg
주 소속팀: 토트넘 핫스퍼

1970년대 중반~80년대 초반에 전성기를 누린 중앙 미드필더로 비단뱀이라 불리며 현란한 드리블과 볼 컨트롤을 보여줬으며 여기에 뛰어난 패싱력과 강한 체력, 그리고 영리한 오프 더 볼 능력도 겸비했다.

인스티투토 데 코르도바에서 데뷔해 우라칸에서 두각을 나타낸 아르딜레스는 토트넘 핫스퍼에서 전성기를 누렸는데 입단한 첫 시즌에 PFA 올해의 팀에 선정되었으며 비록 리그 우승은 없었지만 두 번의 FA컵과 1983-84 시즌의 UEFA컵 우승의 주역으로 활약했다. 이 활약이 얼마나 대단한지 토트넘 핫스퍼의 팬들은 "그냥 포클랜드를 아르헨티나에게 줘버리고 그 대가로 오시 아르딜레스를 귀화시키자"라고 헸을 정도로 아르딜레스를 사랑했다.

아르헨티나 대표팀 소속으로는 1978년 아르헨티나 월드컵에 출전해 준수한 퍼포먼스로 팀의 우승에 큰 공을 세웠으나 1982 스페인 월드컵에서는 아르헨티나가 포클랜드 전쟁에서 패했다는 사실을 안 아르헨티나 선수단은 정신적으로 흔들렸고 2차 조별 리그에서 브라질과 이탈리아에게 패해 탈락했다.

 

4위 네스토르 로시

 


생년월일: 1925년 5월 10일
A매치 기록: 26경기 0골
신체조건: 키 185cm / 몸무게 83kg
주 소속팀: 리버 플레이트

1940년대와 50년대에 걸쳐 전성기를 맞았던 선수로 당시로서는 굉장히 큰 키인 185cm라는 거대한 피지컬에서 나오는 태클과 몸싸움 능력으로 상대 공격수들을 무자비하게 찍어 눌렀다.

리버 플레이트에서 첫 전성기를 누린 로시는 축구 역사상 최고의 공격편대 중 하나인 라 마키나의 뒤를 받쳐주며 수비 지역에서 안정적으로 볼 배급을 하며 아르헨티나 프리메라 디비시온 5회 우승을 이뤄냈으나 아르헨티나가 경제적으로 어려워지고 콜롬비아 무대가 막대한 투자로 새 블루오션으로 떠오르자 미요나리요스로 이적해 콜롬비아 리그 우승 4회를 달성했다가 콜롬비아 무대의 거품이 꺼지자 아르헨티나 무대로 돌아왔다.

라 알비셀레스테의 유니폼을 입고도 우수한 성과를 냈던 로시는 1947년에는 호세 마누엘 모레노,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 노르베르트 멘데스의 뒤를 받히며 우승을 이뤄냈고  이후 콜롬비아로 떠나서는 대표팀에 소집되지 못하다가 리버 플레이트로 다시 돌아온 이후에는 1957년 코파 아메리카에서는 더러운 얼굴의 천사들이라 불렸던 오마르 시보리, 오마르 코르바타, 움베르토 마스치오와 같은 후배 공격수들의 뒤를 받혀주며 재차 우승했으며 1958 스웨덴 월드컵에서도 주전으로 활약했다.

 

3위 미겔 앙헬 브린디시

 


생년월일: 1950년 10월 8일
A매치 기록: 46경기 17골
신체조건: 키 175cm / 몸무게 70kg
주 소속팀: CA 우라칸

1970년대 아르헨티나 최고의 미드필더로 왕성한 활동량과 우수한 전술안과 양질의 패싱력을 기반으로 경기장 전역에 볼을 운반하며 자신의 영향력을 보여줬음은 물론 우수한 1선 침투 능력으로 공격형 미드필더나 처진 공격수 역할도 수행했던 인쿠르소네의 표본이었다.

우라칸에서 데뷔해 첫 전성기를 누린 브린디시는 1973년 아르헨티나 프리미어 디비시온 전기리그 우승을 이끌며 아르헨티나 올해의 선수상을 수상했고 남미 올해의 선수상 투표에서 2위에 올랐다. 유럽 무대의 라스 팔마스로 건너가서도 팬들에게 구단 역사상 최고의 전성기를 선물하며 라리가 MVP를 수상했고 다시 아르헨티나로 돌아와서도 보카 주니어스에서 1981년 아르헨티나 프리미어 디비시온 전국리그 우승에 공헌했다.

아르헨티나 대표팀에서도 중원의 핵으로 중용받은 브린디시는 1974 서독 월드컵에 참가해 라 알비셀레스테 군단의 8강 진출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러나 스페인에서 활약한다는 이유로 1978 아르헨티나 월드컵의 대표팀에서는 소집받지 못했다.

 

2위 페르난도 레돈도

 


생년월일: 1969년 6월 6일
A매치 기록: 29경기 1골
신체조건: 키 186cm / 몸무게 75kg
주 소속팀: 레알 마드리드

화려함과 견고함을 겸비한 90년대 최고의 수비형 미드필더 중 하나로, 부드러운 볼 트래핑과 비단결 같은 패싱력을 겸했으며 몸을 사리지 않는 거친 슬라이딩 태클과 집요한 몸싸움과 지능적인 인터셉트 능력을 모두 겸비했으며 기습적인 전진 드리블로 상대 수비를 교란하는 능력마저 갖춘 만능 수비형 미드필더였다.

아르헨티노스 주니어스에서 데뷔해 스페인의 테네리페에서 구단 올해의 선수에 2회 연속 선정되며 이름을 알린 레돈도는 레알 마드리드로 이적한 뒤 전성기를 누리며 라리가 2회 우승과 UEFA 챔피언스리그 2회 우승을 이뤄냈고 레돈도 개인도 레알 마드리드 올해의 선수에 2회 선정되었음은 물론 1997-98 시즌 ESM 올해의 팀 선정과 1999-2000 시즌 UEFA 올해의 선수상을 수상했다.

아르헨티나 대표팀에서도 시메오네와 중원 조합으로 명성을 떨치며 우수한 모습을 보여줬던 레돈도는 라 알비셀레스테의 유니폼을 입고 1992년에 컨페드컵의 전신인 킹스 컵 우승을 이끌며 골든볼을 수상한 것을 시작으로 1993년 코파 아메리카 우승에도 기여했다. 그러나 다니엘 파사레야 감독의 단발령에 거부하여 대표팀에서 일시적으로 물러나는 바람에 아르헨티나 대표팀 경력은 길지 않았다.

 

1위 루이스 몬티

 


생년월일: 1901년 5월 15일
A매치 기록: 16경기 5골
신체조건: 키 169cm / 몸무게 73kg
주 소속팀: 유벤투스 FC

이탈리아계 아르헨티나인을 뜻하는 '오리운디'로 왕성한 활동량을 보여주며 팀원들로부터 두 개의 날개란 뜻의 도블레 안초라 불렸으며 잔혹한 태클로 상대 공격수를 무너트리는 거친 플레이를 앞세워 상대팀에게는 도살자라 불렸는데 당대 언론으로부터 "게임의 엔진. 몬티는 무섭도록 단단한 수비와 롱패스로 공격의 물꼬를 틀 수 있는 선수이다. 메아차와 페라리의 공격 라인업이 되는 것보다는 그를 보좌한다."라고 불렸으며 대표팀 감독 포초로부터 "아웃사이드 플레이어를 어떻게 보좌하는지, 다이렉트 패스는 어떻게 하는지 등 열린 시야를 가지고 있다."라고 불렸다.

우라칸에서 데뷔해 1921년 아르헨티나 프리메라 디비시온 우승을 이뤄낸 몬티는 보카 주니어스로 이적해서는 자리를 잡지 못하다가 산 로렌소로 이적해 아르헨티나 프리메라 디비시온 3연패를 이뤄냈다. 이탈리아로 귀화한 뒤에는 유벤투스에서 활약한 몬티는 유벤투스의 황금기 도중에 합류했는데 선배 비가토의 공백을 완벽하게 메워내며 세리에 A 4연패를 이끌어내며 남미와 유럽 무대를 모두 평정했다.

아르헨티나와 이탈리아 대표팀에서 모두 큰 성과를 낸 몬티는 아르헨티나 대표팀 주축으로 활약하며 1927 코파 아메리카 우승과 1928 암스테르담 올림픽 은메달, 그리고 1930 우루과이 월드컵 준우승을 이뤄냈다. 그리고 이탈리아로 귀화한 뒤에도 아주리 군단의 1934 이탈리아 월드컵과 1933-1935 중유럽컵 우승을 이뤄내며 각기 다른 국적으로 월드컵 결승 무대를 밟는 진기록은 물론 각기 다른 국적으로 대회 올스타 팀에 드는 진기록도 세웠다.

당대에는 우루과이의 안드라데와 함께 최강의 하프백이었음은 물론 역대 최고의 수비형 미드필더 중 하나로 평가받는데 이러한 배경에는 그의 엄청난 자기 관리 능력이 있다. 아르헨티나에서 이탈리아로 선박으로 오는 기간에 살이 찌자 혹독한 수준으로 다이어트를 하며 폼을 빠르게 찾았을 정도로 프로의식이 대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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