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축구 역사상 최고의 스트라이커 Top 10

국가의 영웅들/이탈리아

이탈리아 축구 역사상 최고의 스트라이커 Top 10

토르난테 2025. 5. 24. 14: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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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의 주관적인 순위입니다.
*대상자는 이탈리아 국가 대표팀으로 A매치 1경기 이상 출전한 선수를 대상자로 했습니다.

*오리운디의 경우에도 이탈리아 국가 대표팀으로 A매치 1경기 이상 출전한 선수는 모두 포함했습니다.
*선수 사진은 대부분 플레이어스 유저인 법정스님의 소유님의 건조폼 입니다. 다만 법정님이 만들지 않은 선수들은 제가 만들었습니다.
*기록일은 2025년 5월 11일 기준입니다.

 


10위 프란체스코 그라지아니

 


생년월일: 1952년 12월 16일
A매치 기록: 64경기 23골
신체조건: 키 180cm / 몸무게 76kg
주 소속팀: 토리노 FC

1980년대 초반 이탈리아 무대 톱클래스 포워드로 특유의 다재다능함을 바탕으로 주 포지션인 스트라이커 이외에도 측면 공격수와 처진 공격수를 모두 막힘없이 소화할 수 있었고 강력한 집중력과 이타적인 움직임으로 동료들에게 공간을 만들어주는 능력은 물론 벼락같은 헤더로 직접 득점하는 부분에서도 강점을 보였다.

아레초에서 데뷔해 토리노에서 전성기를 누리며 레프트윙 파올로 풀리치와 함께 골 쌍둥이라 불리며 뛰어난 콤비 플레이를 보여줬던 그라지아니는 1975-76 시즌에는 세리에 A 우승을 이뤄냈으며 그 과정에서 세리에 A 득점왕을 3회 수상했고 코파 이탈리아에서도 1979-80 시즌 준우승과 1980-81 시즌에는 준우승과 더불어 득점왕에 오르며 맹활약했음은 물론 토리노를 떠난 뒤에도 피오렌티나를 거쳐 AS 로마에서도 코파 이탈리아 2회 우승과 1983-84 시즌 유러피언 컵 준우승이라는 성적을 이뤄냈다.

이탈리아 대표팀에서도 중앙과 측면을 오가며 주축으로 활약했던 그라지아니는 1978 아르헨티나 월드컵에서는 백업으로 4위에 오르는 경험을 했고 UEFA 유로 1980에서는 파올로 로시의 징계로 인해 주전 스트라이커로 나서며 팀의 4위를 이끌었고 1982 스페인 월드컵에서도 베테가가 부상으로 이탈하자 처진 공격수 역할을 맡아 중앙과 측면을 오가며 파올로 로시를 보좌하며 월드컵 우승에 기여했다.

 

9위 알레산드로 알토벨리

 


생년월일: 1955년 11월 28일
A매치 기록: 61경기 25골
신체조건: 키 181cm / 몸무게 73kg
주 소속팀: 인테르 밀란

1980년대 상반기, 마른 체형으로 인해 바늘이라 불렸던 선수로 신출귀몰한 공간 이해도와 빠른 스피드를 활용해 빈 공간으로 침투해 정교한 슈팅 정확도를 바탕으로 무수한 득점을 기록했는데 사실 바늘이란 뜻은 상대 골문을 정확히 찌른다는 중의적인 표현이기도 했다.

인테르에서 베칼로시, 루메니게 등 우수한 찬스 메이커들과 호흡을 맞추며 구단 통산 득점 2위에 랭크된 알토벨리는 1979-80 시즌에 세리에 A 우승을 차지했고 코파 이탈리아에서도 2회 우승했음은 물론 알토벨리 개인도 1981-82 시즌에는 코파 이탈리아 득점왕에 올랐으며 1978-79 시즌에는 컵 위너스컵 득점왕에 올랐는데 특히 코파 이탈리아에서 강력한 모습을 보여 56골을 득점해 대회 역대 개인 통산 최다골의 주인공으로 올라서기도 했다.

이탈리아 대표팀에서도 UEFA 유로 1980을 앞두고 아주리 군단 스쿼드에 포함된 알토벨리는 그 대회에서는 벤치에 머물며 활약하지 못했지만 1982 스페인 월드컵에서는 파울로 로시의 백업으로 나와 서독과의 결승전에서 팀의 세 번째 골을 득점해 3-1로 서독을 꺾고 우승하는데 기여했고 1986 멕시코 월드컵에서는 파울로 로시가 중국전에서 부상을 당하자 주전으로 활약하며 대한민국을 상대로 멀티골을 득점하며 총 4골을 득점하며 아주리 군단에서 군계일학으로 활약했으며 유로 1988에서는 주장 자격으로 참가했지만 노쇠화로 인해 다시 백업 멤버로 내려갔다.

 

8위 훌리오 리보나티

 


생년월일: 1901년 7월 5일,
A매치 기록: 18경기 15골
신체조건: 미상
주 소속팀: 토리노 FC

아르헨티나 출신의 오리운디로 1926년 토리노로 이적한 뒤 이탈리아 국적을 취득해 활약했는데 효과적인 전진 드리블과 우수한 볼 컨트롤에서 나오는 효율적인 원터치 플레이로 무수한 득점 찬스를 만들어냈으며 직접 득점하는 부분에도 능한 만능 공격수였으며 실제로 주 포지션인 센터포워드 이외에도 인사이드 포워드에서도 활약할 수 있었다.

뉴웰스 올드 보이스에서 7년간 활약하며 1921년 이바구렌 컵 우승을 이뤄냈던 리보나티는 1926-27 시즌, 축구 역사상 최초로 대륙간 이적에 성공하며 토리노에 합류했는데 인사이드 포워드 발론치에리, 로제티와 함께 공격 듀오를 구성해 압도적인 활약을 펼치며 우승을 이뤄냈지만 이 우승은 알레만디 이적 스캔들로 인해 박탈당했다. 그러나 이에 굴하지 않고 다음 시즌인 1927-28 시즌에는 팀 역사상 최초로 리그 우승을 차지하며 토리노가 명문으로 도약하는 길을 열었고 리보나티 개인도 1927-28 시즌 세리에 A 우승을 이뤄내는 과정에서 득점왕을 수상하는 활약을 펼쳤다.

남미에서 이미 1921년 코파 아메리카 득점왕에 올랐던 리보나티는 1920년대 토리노의 전성기를 이끌며 1927-28 시즌 토리노의 세리에 A 우승을 이뤄내는데 큰 공을 세우며 득점왕에도 올랐으며 아주리에서도 1927-30 중유럽컵에서 주전으로 활약하며 우승을 이뤄내는 공을 세웠으며 6골로 득점왕에 올랐다.

 

7위 지안루카 비알리

 


생년월일: 1964년 7월 9일
A매치 기록: 59경기 16골
신체조건: 키 180cm / 몸무게 77kg
주 소속팀: UC 삼프도리아

1980년대 후반부터 90년대 초반까지 세계 최고의 스트라이커 중 하나로 군림했던 선수로 우수한 양발 사용 능력에서 나오는 환상적인 슈팅 스킬과 황소 같은 전진 드리블은 물론 강력하면서도 정확히 꽂히는 헤더와 우수한 연계 플레이를 겸비했다.

삼프도리아에서 전성기를 누린 비알리는 만치니와 전설적인 투톱 콤비를 형성하며 코파 이탈리아 3회 우승과 1988-89 시즌 UEFA 컵 위너스컵 준우승, 그리고 1989-90 시즌에는 UEFA 컵 위너스컵 우승을 이뤄냈음은 물론 1990-91 시즌에는 구단 역사상 첫 세리에 A 우승을 이뤄냈고 1991-92 시즌에는 삼프도리아의 유러피언 컵 결승 진출을 이끌었는데 이 과정에서 비알리는 코파 이탈리아 득점왕과 UEFA 컵 위너스컵 득점왕은 물론 1990-91 시즌에는 마테우스, 반 바스텐, 클린스만, 바조와의 득점왕 경쟁을 이기고 세리에 A 득점왕에 올랐다.
 
삼프도리아를 떠나 유벤투스에서 새로운 도전을 한 뒤에는 유벤투스에서도 전성기를 이어간 비알리는 1992-93 시즌 UEFA컵 우승을 시작으로 1994-95 시즌 세리에 A 우승과 1995-96 시즌 유러피언 컵 우승을 이뤄내며 삼프도리아 시절 컵 위너스컵 우승을 포함해 3대 유럽 대항전을 모두 석권하는 진기록을 세웠다.

이탈리아 대표팀에서도 주축으로 활약한 비알리는 1986 멕시코 월드컵에 백업으로 데뷔해 UEFA 유로 1988에서는 만치니와 함께 투 톱 공격수로 선발 출전해 스페인전 결승골을 득점하며 대회 올스타 팀에 선정되는 등 승승장구했으나 1990 이탈리아 월드컵에서는 부진한 활약으로 신데렐라랄 불리는 스킬라치에게 밀려났으며 이후 대표팀과는 멀어졌다.
 

 

6위 크리스티안 비에리

 


생년월일: 1973년 7월 12일
A매치 기록: 49경기 23골
신체조건: 키 185cm / 몸무게 82kg
주 소속팀: 인테르 밀란

1990년대 말~2000년대 초반 세계 최고의 타겟 스트라이커 중 한 명으로 황소라 불렸을 정도로 강력한 몸싸움과 헤더, 그리고 빠른 스피드와 우수한 테크닉을 겸비해 괴물 스트라이커라고 평가받았다.

여러 구단을 돌아다닌 저니맨으로 유명했던 비에리는 리피 체제의 유벤투스에서 1996-97 시즌 세리에 A 우승과 UEFA 챔피언스리그 준우승을 이뤄내며 발롱도르 투표에서 9위에 올랐고 아틀레티코 마드리드로 이적해서는 1997-98 시즌 라리가 득점왕에 올랐으며 ESM 올해의 팀에 선정되었다. 그리고 라치오에서는 1998-99 시즌 UEFA 컵 위너스컵 우승을 이뤄냈고 리그에서도 우수한 퍼포먼스로 세리에 A 올해의 선수상과 올해의 이탈리아 선수상을 동시에 수상했음은 물론 발롱도르 투표에서도 개인 통산 최고 순위인 7위에 올랐다.

가장 오랜 시간을 머물렀던 인테르로 이적해서도 짧은 기간 동안 호나우두와 투톱을 이뤄서 활약한 비에리는 2001-02 시즌 구에린 도르를 수상하는 기염을 토한 비에리는 세리에 A 올해의 이탈리아 선수상과 2002-03 시즌에는 세리에 A 득점왕을 수상했음은 물론 ESM 올해의 팀에 선정되었고 2004-05 시즌에는 ESM 올해의 팀에 선정되었다. 이 시절의 비에리와 호나우두는 서로 잦은 부상으로 이탈하며 자주 가동되지는 못했지만 호나우두와의 투톱으로 나섰을 때에는 부폰이나 튀랑같은 정상급 골키퍼와 수비수들도 두려워했을 정도로 위용을 자랑했다.

이탈리아 대표팀에서는 클럽에서의 활약을 상회하는 활약을 펼친 비에리는 1998 프랑스 월드컵에서 5골을 득점하며 아주리 군단의 에이스로 활약했고 UEFA 유로 2000은 부상으로 결장했으나 2002 한일 월드컵에서도 다시 핵심 선수로 참가해 4골을 득점하며 맹활약을 펼쳤으나 네스타와 칸나바로의 결장이라는 악재를 이겨내지 못하고 대한민국을 상대로 16강에서 탈락했다.
 

 

5위 파올로 로시

 


생년월일: 1956년 9월 23일
A매치 기록: 48경기 20골
신체조건: 키 174cm / 몸무게 67kg
주 소속팀: 유벤투스 FC

이탈리아 축구 역사상 최고의 공격수 중 한 명으로 피지컬과 스피드, 테크닉이 모두 평범했지만 완벽한 위치 선정과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귀신같은 득점 감각을 통해 팀을 승리로 이끌었다.

비첸자와 페루자에서 활약하던 시절 이미 세리에 A에서 세 시즌 연속으로 10골 이상 득점하며 1977-78 시즌에는 세리에 A 득점왕에 올랐던 로시는 AC 밀란에 머물던 기간 동안 토토네로 스캔들에 연루되며 선수 생활의 위기를 맞이했지만 그의 능력을 눈여겨본 유벤투스 측의 제의로 유벤투스로 복귀해 세리에 A 2회 우승과 1983-84 시즌 UEFA 컵 위너스컵 우승과 1984-85 시즌 유러피언 컵 우승을 이뤄냈으며 커리어 내내 발롱도르 투표에서 10위 안에 세 번 들었다.

이탈리아 대표팀에서도 맹활약한 로시는 1978 아르헨티나 월드컵에서 혜성처럼 등장해 베테가, 카우시오와 함께 이탈리아 대표팀의 공격을 이끌며 4위에 올리는 큰 공을 세운 로시는 1982 스페인 월드컵에서도 징계로 오랜 기간 쉬었다는 우려와 다르게 준결승 진출이 걸린 브라질 전에서 해트트릭을 기록했으며 준결승 폴란드 전에서는 멀티골을, 그리고 결승전인 서독전에서도 득점포를 가동하며 아주리 군단의 우승은 물론 대회 골든볼과 골든슈를 모두 석권하는 드라마를 써내며 기존의 유럽 최고라 불렸던 루메니게와 플라티니를 제치고 1982년 발롱도르를 수상했다.

 

4위 주제 아우타피니

 


생년월일: 1938년 7월 24일
A매치 기록: 6경기 5골
신체조건: 키 176cm / 몸무게 77kg
주 소속팀: AC 밀란

1960년대 초반 세리에 A 최고의 공격수 중 하나로 다부진 상체에서 나오는 우수한 신체 밸런스와 빠른 스피드는 물론 양발과 머리를 고루 이용한 슈팅 능력은 물론이고 우수한 테크닉을 활용한 드리블은 물론 오프 더 볼 상황에서의 영리한 움직임으로 동료들과 연계에도 능해 밀란의 팬들은 그에게 마치 레전드 발렌티노 마촐라와 같다고 해서 마촐라라고 불렀다.

브라질 무대의 파우메이라스에서 활약하며 대표팀에도 뽑혔으나 펠레와의 대표팀 주전 경쟁에서 밀려나자 세리에 A의 밀란으로 떠났으며 밀란에서는 리베라와 함께 로코의 카테나치오 체제에서 공격의 전권을 위임받아 활약하며 1960-61 시즌 코파 이탈리아 득점왕에 올랐으며 세리에 A 2회 우승을 이뤄내며 그중 1961-62 시즌에는 세리에 A 득점왕을 수상했으며 1962-63 시즌 유러피언 컵 득점왕에 오르며 팀이 유럽 챔피언에 오르는데 크게 기여했으며 이후 나폴리와 유벤투스에서도 좋은 모습을 보여줬으며 유벤투스는 세리에 A 2회 우승을 이뤄냈다.

1958 스웨덴 월드컵에서 주전 경쟁에서 밀렸으나 월드컵 우승을 경험했으며 비록 대표팀 활약은 미비하지만 그 대가로 이탈리아에 진출해 세리에 A, 코파 이탈리아, 그리고 유러피언컵에서 모두 득점왕에 오르며 부와 명예를 모두 챙기며 세리에 A의 전설적인 공격수로 추앙받았다.

 

3위 안젤로 스키아비오

 


생년월일: 1905년 10월 15일
A매치 기록: 21경기 15골
신체조건: 키 178cm / 몸무게 69kg
주 소속팀: 볼로냐 FC

1920년대 하반기와 1930년대 상반기에 이름을 날렸던 이탈리아 출신의 스트라이커로 단단한 피지컬에서 나오는 헤딩과 절묘한 위치 선정을 겸비한 전형적인 유럽식 스트라이커였다.

선수 커리어의 전부를 볼로냐에서 보낸 원 클럽맨인 스키아비오는 볼로냐의 전성기를 이끌고 북부리그 그룹 B 우승과 세리에 A 3회 우승을 이끌어냈으며 1931-32 시즌에는 스키아비오 개인도 득점욍에 올랐으며 당시 중유럽 지역의 챔피언스리그였던 미트로파 컵에서도 2회 우승했다.

볼로냐에서의 활약을 바탕으로 아주리 군단에서도 핵심 공격수로 활약했던 스키아비오는 중유럽컵 2회 우승과 1928 암스테르담 올림픽 은메달에 이어 1934 이탈리아 월드컵에서는 앙숙이었던 몬티와 화해하는 등 팀의 화합을 위해 노력했고 좋은 퍼포먼스도 보이며 조국의 첫 우승을 이뤄내는데 경기장 내외에서 큰 공을 세웠다.

 

2위 실비오 피올라

 


생년월일: 1913년 9월 29일
A매치 기록: 34경기 30골
신체조건: 키 178cm / 몸무게 75kg
주 소속팀: SS 라치오

1930년대 후반과 1940년대 유럽 최고의 스트라이커 중 한 명으로 강력한 힘과 빠른 스피드, 냉정한 침착성과 뛰어난 골 결정력을 모두 겸비했으며 특히 유연성에 능해 바이시클 킥 같은 당시의 장비로는 실전에서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는 플레이를 종종 보여줬다.

세리에 A 역대 최다 득점자 타이틀을 가지고 있음에도 세리에 A 우승과는 인연은 없었던 피올라는 그래도 1937년에는 세리에와 당대 최고 권위의 대륙 대회인 미트로파 컵에서는 동시에 우승을 도전했지만 리그에서는 볼로냐에 밀렸고 미트로파 컵 결승전에서는 사로시 죄르지가 이끄는 페렌츠바로시에 밀려 준우승에 머물렀다. 그래도 라치오 개인 통산 득점 2위에 올랐으며 세리에 A 득점왕을 2회 수상했다.

리그 우승이 없는 대신 아주리에서는 우승컵과 인연이 있었던 피올라는 1933-35 중유럽컵 우승은 물론 1938 프랑스 월드컵에서도 우승했는데 이때 5골을 넣으며 팀의 에이스로 우승을 이루는데 공헌했다.

 

1위 루이지 리바

 


생년월일: 1944년 11월 7일
A매치 기록: 42경기 35골
신체조건: 키 180cm / 몸무게 78kg
주 소속팀: 칼리아리

1960년대 후반~1970년대 초반을 빛낸 스트라이커로 강력한 왼발 슈팅으로 인해 천둥번개란 별명으로 불렸는데 키가 큰 편이 아니었음에도 헤딩에도 능했고 스피드마저 빨라 레프트윙도 소화할 수 있었다.

선수 생활 대부분을 칼리아리에서 보낸 리바는 1969-70 시즌에는 모두의 예상을 뒤엎고 칼리아리의 세리에 A 우승을 이뤄내는데 큰 공을 세웠음은 물론 리바 자신도 득점왕에 올랐는데 이 시즌을 포함해 세리에 A 득점왕을 3회 수상된 리바는 발롱도르 노미네이트에 2회 선정되어 1969년 2위와 1970년 3위에 오르며 포디움에 2회 선정되었다.

아주리 군단 통산 A매치 최다 득점자의 자리를 아직도 지키고 있는 리바는 UEFA 유로 1968 우승을 이뤄내는데 큰 공을 세워 베스트 일레븐에 들었으며 1970 멕시코 월드컵에서는 준우승이란 우수한 성적을 거두는데 큰 공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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