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축구 역사상 최고의 스트라이커 Top 11~20

국가의 영웅들/이탈리아

이탈리아 축구 역사상 최고의 스트라이커 Top 11~20

토르난테 2025. 5. 23. 15:28
728x90
728x90

*작성자의 주관적인 순위입니다.
*대상자는 이탈리아 국가 대표팀으로 A매치 1경기 이상 출전한 선수를 대상자로 했습니다.

*오리운디의 경우에도 이탈리아 국가 대표팀으로 A매치 1경기 이상 출전한 선수는 모두 포함했습니다.
*선수 사진은 대부분 플레이어스 유저인 법정스님의 소유님의 건조폼 입니다. 다만 법정님이 만들지 않은 선수들은 제가 만들었습니다.
*기록일은 2025년 5월 11일 기준입니다.

 


20위 펠리체 보렐

 


생년월일: 1914년 4월 5일
A매치 기록: 3경기 1골
신체조건: 키 179cm / 몸무게 76kg
주 소속팀: 유벤투스 FC

1930년대 유벤투스의 전성시대를 이끌었던 스트라이커로 나비처럼 날아서 벌처럼 쏘는 스타일로 빠른 스피드로 상대의 골문으로 침투해 강력한 슈팅보다는 골키퍼가 손을 아예 쓸 수 없는 곳으로 정확히 슈팅하는 것을 즐겨 유벤투스 팬들로부터 나비넥타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1932-33 시즌에 혜성처럼 데뷔해서 리그 28경기 29골 및 시즌 30골을 기록한 보렐은 다음 시즌에는 시즌 36골을 기록하며 2회 연속 세리에 A 득점왕에 오르는 맹활약을 펼쳤음은 물론 세리에 A 3연패를 이뤄내는 괴력을 선보였지만 보렐은 데뷔 초창기에 전성기가 끝나며 그 뒤에는 데뷔 시즌만큼의 임팩트를 보여주지는 못했다.

1932-33 시즌의 활약으로 이탈리아 대표팀에서도 소집된 보렐은 1933년 10월에 부상으로 잠시 빠진 안젤로 스키아비오를 대신하여 헝가리를 상대로 데뷔하였고, 결승골을 득점해 1-0 승리를 이끌었지만 1934 이탈리아 월드컵에서는 스페인과의 재경기를 제외하고는 나서지 못해 백업으로 우승을 경험했다.

 

 

19위 베니토 로렌치

 


생년월일: 1925년 12월 20일
A매치 기록: 14경기 4골
신체조건: 키 169cm / 몸무게 68kg
주 소속팀: 인테르 밀란

1950년대 이탈리아 정상급 스트라이커로 체구는 작았지만 문전에서의 침착함과 득점 감각 역시 높게 평가받았다. 그리고 우수한 스피드와 한혈마를 연상시키게 하는 튼튼한 지구력을 겸비했고 우수한 기본기를 바탕으로 한 기술적인 드리블로 상대 수비를 제칠 수 있었기에 아웃사이드 라이트로도 종종 기용되었으며 센터포워드였지만 공을 다시 패스하는 연계 플레이도 즐겼다.

인테르 구단 통산 득점 6위에 오른 로렌치는 제2차 세계대전 직후에 엠폴리에서 커리어를 시작해 단숨에 대표팀 주전 공격수 자리를 꿰찼으며 인테르에서도 니어스, 스코그룬트 등과 함께 세리에 A 2연패를 이뤄내는데 큰 공을 세웠다. 그리고 이탈리아 대표팀 소속으로도 1950 브라질 월드컵과 1954 스위스 월드컵에 참가했는데 후자의 대회에서는 주전으로 참가했다.

경기장 안팎에서 꽤 입체적인 캐릭터였던 로렌치는 벨레노, 즉 독이라 불렸던 그의 성품탓에 많은 동료들과 상대, 그리고 심판들과 갈등을 일으켰고 실제로 파트너 니어스 이스테반이 쉬운 찬스를 놓치자 그를 구타하기도 했고 심판과 물리적으로 충돌하거나 상대 수비수에게 로우 블로를 행하며 자주 퇴장당했는데 경기장 밖에서는 이와 반대로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으며 음식 기부, 자선 활동등 다양한 선행을 했다.

 

18위 아마데오 아마데이

 


생년월일: 1921년 7월 26일
A매치 기록: 13경기 7골 
신체조건: 키 173cm / 몸무게 72kg
주 소속팀: AS 로마

1940년대 로마의 아이콘으로 활약했던 센터포워드로 빠른 스피드를 활용해 교묘하게 상대 수비수를 따돌리고 골키퍼와 일대 일 찬스를 만드는데 능했던 골잡이였는데 그의 팀동료 귀도 마제티는 그를 두고 "아마데이가 중원에서 볼을 컨트롤하는 것은 골을 넣은 것이나 다름없다."라고 평가했다.

AS 로마에서 데뷔해 전성기를 누리며 로마의 여덟번째 왕으로 불린 아마데이는 피오렌티나와의 경기에서 만 15세로 세리에 A 최연소 데뷔 기록을 세웠고 일주일 후에는 루케세를 상대 첫 골을 터트리며 세리에 A 최연소 득점 기록을 세웠으나 주세페 보노미의 이적에 대한 대가로 아탈란타 BC에서 한 시즌을 보냈다가 다시 AS 로머로 돌아와서는 전성기를 누리는데 1940-41 시즌에는 코파 이탈리아 득점왕에 올랐고 1941-42 시즌, 구단 역사상 첫 세리에 A 우승을 이뤄냈다. 그리고 1943년에는 귀도 마제티에 이어 로마의 주장으로 활약했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의 여파로 로마가 재정난에 허덕이자 구단은 어쩔수 없이 그를 인테르로 이적시켰는데 인테르에서도 1949년 11월 6일에 열린 AC 밀란과의 데르비 델라 마돈니나에서 1-4로 끌려가는 상황이었는데 아마데이가 해트트릭을 바탕으로 6-5로 대역전승을 펼쳤고 이 시기에 이탈리아 대표팀에도 선발되어 1950 브라질 월드컵에 참가했다. 여담으로 아마데이는 인테르와 나폴리에 머무는 동안에도 다음과 같은 말을 남기고 AS 로마와의 경기에 출전하지 않았다.

"로마를 만나는 날에는 스쿠데토를 놓고 결정적인 경기가 되더라도 경기에 나서지 않겠다고 새 팀에 항상 말했습니다. 저는 엄마를 찌를 거라고는 기대할 수 없었어요."

 

17위 로베르토 프루초

 


생년월일: 1955년 4월 1일
A매치 기록: 6경기 0골
신체조건: 키 178cm / 몸무게 73kg
주 소속팀: AS 로마

1980년대 이탈리아 무대에서 이름을 날린 전천후 공격수로 양발 슈팅에 능해 양쪽에서 위협적인 슈팅으로 득점할 수 있었으며 작은 키에도 용수철 같은 점프력으로 헤더에 능했으며 왕성한 활동량과 동료를 이용하는 높은 축구 지능을 바탕으로 연계 플레이에도 능숙한 모습을 보여줬다.

프란체스코 토티에 이어 AS 로마 통산 득점 2위에 랭크된 프루초는 1982-83 시즌에는 40년 만에 스쿠테토를 들어올렸고 1983-84 시즌에는 구단 역사상 유일하게 유러피언 컵 결승에 진출했으며 코파 이탈리아 4회 우승을 이뤄냈다. 그리고 프루초 개인도 1979-80 시즌 코파 이탈리아 득점왕에 올랐고 세리에 A 득점왕도 세 번이나 수상했고 말년은 피오렌티나에서 보냈다.

양발과 헤더를 가리지 않고 득점포를 가동하며 잘로로시의 최전성기를 이끌었기에 당대 세리에 A 최고의 선수였던 미셸 플라티니로부터 "최고의 스트라이커이며, 강력하고, 공중에서 훌륭하고 멋진 골을 넣을 수 있다. 그에 대한 책을 쓸 수도 있어."라는 평가를 받았지만 이탈리아 대표팀의 장벽은 매우 높았는데 파올로 로시와 알레산드로 알토벨리의 벽에 밀려 거의 나오지 못했다.

 

16위 조르지오 키날리아

 


생년월일: 1947년 1월 24일
A매치 기록: 14경기 4골
신체조건: 키 186cm / 몸무게 80kg
주 소속팀: SS 라치오

1970년대 이탈리아 무대를 풍미한 스트라이커로 다혈질적인 성격으로 자주 트러블을 일으켰고 많이 뛰지 않았지만 페널티 박스 안에서는 엄청난 몸싸움 능력과 강력한 슈팅으로 득점했는데 적어도 페널티 박스 안에서만큼은 크리스티안 비에리와 유사한 모습을 보여줬다.

라치오에서 전성기를 누리며 구단 통산 득점 4위에 오른 키날리아는 1973-74 시즌에 구단 역사상 첫 세리에 A 우승을 이뤄냈고 본인도 득점왕에 오르는 영광을 누렸지만 라이벌 AS 로마 팬들의 살해 협박과 세금 문제로 라치오를 떠나 미국의 뉴욕 코스모스로 떠나 펠레, 베켄바우어, 아우베르투와 함께 활약하며 NASL 통산 234경기 231골을 기록하며 리그 우승 4회, 득점왕 4회, 1981년 NASL 최우수 선수에 오르는 영예를 누렸다.

이탈리아 대표팀에서는 1974 서독 월드컵에서 주전 공격수 루이지 리바를 레프트윙으로 밀어내고 윙에서 뛰던 보닌세냐는 벤치로 밀어내며 중앙 공격수 자리를 차지했으나 단 한 골도 득점하지 못하며 부진했고 이 여파로 발카레지 감독이 경질되자 이탈리아 축구 협회에 대해 분노를 표출하며 대표팀을 떠났다.

 

15위 피에트로 아나스타시

 


생년월일: 1948년 4월 7일
A매치 기록: 25경기 8골
신체조건: 키 172cm / 몸무게 66kg
주 소속팀: 유벤투스 FC

1960년대 후반과 70년대 초반에 천재적인 플레이로 두각을 나타낸 공격수로 빠른 반응속도와 민첩한 몸놀림은 물론 효율적인 원터치 플레이와 적시에 빠른 스피드로 상대의 빈 공간으로 침투해 득점하는 플레이를 보여주며 사람들에게 하얀 펠레라 불렸다.

유벤투스에서 전성기를 누린 아나스타시는 비안코네리 군단에서 세리에 A 3회 우승을 이뤄냈으며 1972-73 시즌에는 유러피언 컵 준우승을 이뤄냈고 개인으로도 1970-71 시즌 인터시티 페어스 컵 득점왕과 1974-75 시즌 코파 이탈리아 득점왕에 올랐다. 그리고 보닌세냐와 트레이드로 인테르에 입단해서는 1977-78 시즌 코파 이탈리아 우승을 이뤄냈다.

이탈리아 대표팀에서도 뛰어난 활약을 이어간 아나스타시는 UEFA 유로 1968에서 주전으로 활약하며 조국의 우승을 이뤄내는데 기여했는데 특히 유고슬라비아와의 결승 재경기에서는 그림같은 발리골을 성공시키며 우승에 큰 역할을 했고 1974 서독 월드컵에서는 아이티를 상대로 득점하기도 했다.

 

14위 로베르토 보닌세냐

 


생년월일: 1943년 11월 13일
A매치 기록: 22경기 9골
신체조건: 키 174cm / 몸무게 74kg
주 소속팀: 인테르 밀란

1970년대 세리에를 풍미한 스트라이커 중 한 명으로 키는 작았지만 강력한 힘과 타점 높은 헤더를 활용한 득점력으로 명성이 높았는데 득점력 이외에도 찬스를 만드는 능력과 뛰어난 테크닉을 겸비해 측면 공격수로도 활약했다.

칼리아리에서 첫 두각을 나타내며 1968-69 세리에 A 2위를 기록하며 일약 스타덤에 오른 보닌세냐는 인테르로 이적해 전성기를 누리면서 1970-71 시즌 세리에 A 우승을 이뤄냈고 1971-72 시즌에는 팀을 유러피언컵 결승에 올렸으며 보닌세냐 개인도 두 번의 세리에 A 득점왕과 1971-72 시즌에는 코파 이탈리아에서도 득점왕에 오르며 득점왕 더블을 이뤄내다가 아나스타시와 트레이드되어 유벤투스로 이적해서는 1976-77 시즌과 1977-78 시즌에 모두 두 자릿수 득점을 기록하며 세리에 A 2회 우승 및 1976-77 시즌 UEFA컵 우승, 그리고 1978-78 시즌 코파 이탈리아 우승을 이뤄내는데 공헌했다.

이탈리아 대표팀에서는 주로 측면 공격수로 활약한 보닌세냐는 1970 멕시코 월드컵에서는 주전 레프트윙으로 활약하며 스트라이커로 나선 루이지 리바와 찰떡같은 시너지를 냈는데 조별리그에서는 부진했지만 준결승 서독전에서는 선제골을 득점하며 결승 진출에 큰 공을 세웠고 결승전 브라질전에서도 역사상 최고의 팀을 상대로 동점골을 득점했으나 중원과 수비진이 무너졌기에 4-1 대패를 막을 수는 없었다. 은퇴한 뒤에는 이탈리아 축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13위 구글리엘모 가베토

 


생년월일: 1916년 2월 24일
A매치 기록: 6경기 5골
신체조건: 키 174cm / 몸무게 70kg
주 소속팀: 토리노 FC

1940년대 이탈리아 무대를 평정한 최고의 센터 포워드로 우수한 공간 지각력과 빠른 스피드를 활용해 상대 수비수의 예측을 불허하는 공간 침투 이후 우수한 슈팅 스킬로 마무리를 이뤄냈는데 뛰어난 유연성으로 예술적인 바이시클 킥과 발리 슈팅을 보여주며 팬들에게 즐거움을 선사했다.

토리노의 두 구단 유벤투스와 토리노 FC에서 모두 대단한 활약을 펼친 가베토는 선수생활 초년에는 유벤투스에서 활약했는데 1934-35 시즌에서 백업 멤버로 세리에 A 우승을 이뤄냈고 1937-38 시즌 코파 이탈리아에서는 토리노를 상대로 멀티골을 득점하며 팀을 우승으로 인도했다.

유벤투스에서 토리노로 이적한 뒤에는 그란데 토리노라 불리던 토리노의 전성시대를 이끈 가베토는 1941-42 시즌에는 토리노로 이적해 압도적인 활약을 펼치며 세리에 A 5연패를 이뤄내는 대업적을 세우며 엘 그란데 토리노의 시대를 열었다. 그러나 1949년, 벤피카와의 친선 경기 이후 리스본에서 돌아오는 길에 발생한 수페르가 비행기 참사로 인해 숨을 거뒀고 그들의 죽음으로 인해 토리노의 전설적인 신화는 비극적으로 막을 내렸다.

 

12위 루카 토니

 


생년월일: 1977년 5월 26일
A매치 기록: 47경기 16골
신체조건: 키 193cm / 몸무게 88kg
주 소속팀: 피오렌티나

2000년대 중후반에 이름을 날린 장신 공격수로 테크닉이 좋지 못했으며 활동 반경도 좁았지만 강력한 피지컬과 우수한 위치 선정을 겸비했으며 이런 능력에서 나오는 강력한 헤더와 우수한 양발 사용 능력에서 나오는 강력하면서도 정확한 슈팅으로 엄청난 득점력을 보이며 자신의 단점을 비판하는 이들의 입을 다물게 만들었다.

대기만성형의 선수의 표본으로 초년에는 하부리그에서 주로 활약했지만 팔레르모에서 잠재력을 만개하며 피오렌티나로 이적한 루카 토니는 2005-06 시즌 당시 리그에서만 31골을 득점하며 세리에 A 역대 단일 시즌 최다골 기록을 경신했음은 물론 세리에 A 평점왕인 구에린 도르와 유럽 리그 최다 득점자에게 수여하는 유러피언 골든슈를 수상했고 ESM 올해의 팀에도 선정되는 대단한 영광을 누렸다. 그러나 팀 수뇌부가 칼치오폴리에 가담했기에 UEFA 챔피언스리그 진출이 취소되는 아픔을 겪었다.

2007-08 시즌에는 해외 무대에 도전해 바이에른 뮌헨으로 이적한 루카 토니는 리베리, 클로제와 함께 팀의 공격을 이끌며 분데스리가 우승을 이뤄냈고 토니 개인도 분데스리가 득점왕과 키커 올해의 팀, 그리고 키커 올해의 공격수를 수상했다. 루이 반 할과의 갈등으로 바이에른을 떠난 뒤에는 AS 로마, 제노아, 유벤투스에서 부진하다가 엘라스 베로나에서 노익장을 과시하며 2014-15 시즌 세리에 A 득점왕을 수상하는 기염을 토하기도 했다.

이탈리아 대표팀에서도 주포로 활약한 시절이 있었던 루카 토니는 2006 독일 월드컵에서 주전 공격수로 활약하며 팀의 우승에 공헌했으나 그 뒤로는 이탈리아 대표팀에서는 재미를 보지 못했다.

 

11위 필리포 인자기

 


생년월일: 1973년 8월 9일
A매치 기록: AC 밀란
신체조건: 키 181cm / 몸무게 74kg
주 소속팀: 57경기 25골

쓰나미 한가운데 속에서도 살아남았을 정도로 경이로운 위치 선정으로 유명한 스트라이커로 가만히 있는 의자 하나도 제치지 못한다는 이야기가 있었을 정도로 기술적인 부분에서는 낙제점이었으나 적절한 위치 선정과 놀라운 센스로 오프사이드 트랩을 뚫어내는 부분에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선수였다.

피아첸자에서 데뷔해 여러 클럽을 떠돌다가 아탈란타에서 잠재력을 만개한 인자기는 1996-97 시즌에 세리에 A 득점왕에 올랐고 이를 바탕으로 유벤투스에 입단해서 지단, 델 피에로와 함께 공격 삼각 편대를 구성해 1997-98 시즌 세리에 A 우승과 UEFA 챔피언스리그 준우승을 이뤄냈다. 그러나 안첼로티 체제에서는 2년 내내 무관으로 시즌을 마쳤고 인자기 개인도 트레제게와의 주전경쟁에서 패해 AC 밀란으로 떠났다.

AC 밀란에서도 셰우첸코의 파트너로 활약한 인자기는 밀란 제너레이션 2기 시대를 이끌며 세리에 A 2회 우승과 UEFA 챔피언스리그 2회 우승, 그리고 2002-03 시즌에는 챔피언스리그 우승에 이어 코파 이탈리아까지 제패했다. 특히 챔피언스리그 토너먼트 중요한 경기에 강했는데 우승후보 중 하나였던 바이에른 뮌헨을 상대로 우수한 득점력을 보여주며 밀란이 바이에른의 천적임을 공고하게 했음은 물론 2006-07 시즌 UEFA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에서 리버풀을 상대로 멀티골을 가동하며 이스탄불에서의 경기를 완벽하게 설욕하는 임무를 완수해 결승전 맨 오브 더 매치에 선정되었다.

이탈리아 대표팀에서는 주로 비에리의 백업 역할을 맡았던 인자기는 총 네 번의 메이저 대화에 나섰는데 UEFA 유로 2000에는 비에리의 부상으로 주전으로 활약하며 팀의 결승 진출을 이끌었으나 결승전에서는 침묵하며 준우승에 머물렀다. 그 뒤 대표팀 실적은 썩 좋은 방향으로 나가지 못하다가 마지막 국제 대회인 2006 독일 월드컵에서는 서브 멤버로 나서며 팀의 우승에 기여했다.

 

 

728x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