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축구 역사상 최고의 처진 공격수 Top 10

국가의 영웅들/이탈리아

이탈리아 축구 역사상 최고의 처진 공격수 Top 10

토르난테 2025. 5. 20. 1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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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작성자의 주관적인 순위입니다.
*대상자는 이탈리아 국가 대표팀으로 A매치 1경기 이상 출전한 선수를 대상자로 했습니다.

*오리운디의 경우에도 이탈리아 국가 대표팀으로 A매치 1경기 이상 출전한 선수는 모두 포함했습니다.
*선수 사진은 대부분 플레이어스 유저인 법정스님의 소유님의 건조폼 입니다. 다만 법정님이 만들지 않은 선수들은 제가 만들었습니다.
*기록일은 2025년 5월 11일 기준입니다.

 


10위 지노 카펠로

 


생년월일: 1920년 6월 2일
A매치 기록: 11경기 3골
신체조건: 키 184cm / 몸무게 80kg
주 소속팀: 볼로냐 FC

1940년대 하반기와 1950년대 초반에 활약했던 판타지스타로 강력한 신체 능력과 높은 차원의 기술을 겸비했으며 드리블은 물론 특히 킬패스에 능해 팀의 플레이메이커 역할을 맡았으며 양발과 헤더를 가리지 않고 득점했으며 닐스 리드홀름으로부터 '역사상 최고의 이탈리아 선수 중 하나다."라는 평가를 받았다.

파도바에서 데뷔해 제2차 세계대전 기간 동안 AC 밀란에서 성장한 카펠로는 전쟁 종식 직후 볼로냐로 이적해 전성기를 누리며 1945-46 시즌 볼로냐의 코파 이탈리아 우승을 이뤄냈는데 비록 구단의 황금기는 끝난 뒤라 리그 우승 트로피를 차지하지는 못했지만 엘 그란데 토리노의 멤버들과 그레놀리 삼총사와 함께 당대 세리에 A를 대표하는 선수 중 한 명으로 이름을 날렸다.

이탈리아 대표팀에서는 발렌티노 마촐라와 에지오 로이크에게 밀려 백업으로 대기하던 카펠로는 수페르가의 비극으로 잃은 그란데 토리노의 멤버들의 공백을 메우려고 노력했지만 그것이 결과로 이어지지는 못했다.

 

9위 레나토 체사리니

 


생년월일: 1906년 4월 11일
A매치 기록: 11경기 3골
신체조건: 키 172cm / 몸무게 70kg
주 소속팀: 유벤투스 FC

1930년대 상반기 이탈리아 무대에서 활약했던 아르헨티나 태생의 인사이드 포워드로 유려한 볼 컨트롤에서 나오는 드리블과 대지를 가르는 롱 패스로 공격 활로를 여는데 능했다.

초년에는 아르헨티나의 차카리타 주니어스에서 활약하다가 이탈리아의 유벤투스로 건너가서 전성기를 누린 체사리니는 비안코네리 군단의 세리에 A 5연패를 이뤄내며 유벤투스를 이탈리아의 국민 구단을 만들었고 체사리니 개인도 미트로파 컵에서도 득점왕에 올랐다. 그러나 유럽에 전운이 돌자 친정팀 차카리타 주니어스로 돌아갔다가 리버 플레이트에서 프리메라 디비시온 2회 우승을 이뤄냈다.

아르헨티나 대표팀에서는 기회를 거의 받지 못했고 이탈리아 대표팀에서도 메아차와 페라리에 밀렸던 체사리니는 두 차례의 중유럽컵에 참가해서 1933-35 중유럽컵 우승을 이뤄내는데 공헌했다.

 

8위 주세페 시뇨리

 


생년월일: 1968년 2월 17일
A매치 기록: 28경기 7골
신체조건: 키 171cm / 몸무게 68kg
주 소속팀: SS 라치오

1990년대 세리에 A 최고의 골잡이 중 하나로 매서운 왼발 킥력과 빠른 스피드를 활용해 상대 수비진을 공략하고 상대 골망을 뒤흔들었다. 특히 프리킥과 페널티킥에 능했는데 보통은 도움닫기 동작 이후 킥을 차지만 시뇨리는 디딤발만 딛고 페널티 킥을 찼다. 그리고 1994년에는 아탈란타와의 경기에서 왼발 프리킥만으로 해트트릭을 기록하기도 했다.

1990년대 7공주라 불리던 치열한 세리에 A 무대에서도 최고 레벨의 공격수로 평가받았던 시뇨리는 라치오에서 전성기를 누리며 세리에 A 득점왕을 3회 수상했고 코파 이탈리아 득점왕을 2번이나 기록했으며 특히 1993년에는 세리에 A 최우수 평점왕인 구에린 도르를 수상했다. 그러나 밀란과 유벤투스의 황금기에 맞물려 우승컵을 들지 못한 상황에서는 맹활약했지만 구단의 황금기의 시작을 이끈 스벤예란 에릭손이 삼프도리아에서 데려온 만치니를 중용하면서 주전 경쟁에서 밀리자 라치오를 떠나 볼로냐에서 제2의 전성기를 불태우기도 했다.

이탈리아 대표팀에서도 바조의 그늘에 가려져 주로 4-4-2 체제의 레프트윙으로 출전한 시뇨리는 투톱의 처진 공격수 및 스리톱의 윙포워드와 다르게 잘 적응하지 못하며 부진했는데 결국 1994 미국 월드컵에서는 우측의 도나도니가 좌측으로 이동하면서 백업으로 밀려나기도 했다.

 

7위 지안프랑코 졸라

 


생년월일: 1966년 7월 5일
A매치 기록: 35경기 10골
신체조건: 키 168cm / 몸무게 67kg
주 소속팀: 첼시 FC

1990년대 하반기 이탈리아 최고의 판타지스타 중 한 명으로 어떤 플레이를 펼칠지 예측하기 어려워 팬들로부터 매직박스라 불렸으며 번뜩이는 센스와 우수한 심리전 능력에서 나오는 드리블 돌파는 물론 우수한 데드볼 능력도 겸비했다.

나폴리에서 데뷔해 1989-90 시즌 세리에 A 우승을 경험한 졸라는 파르마로 이적해 본격적인 전성기를 누렸는데 1994-95 시즌 UEFA컵 우승을 이뤄냈다. 그리고 30세가 넘어 첼시로 왔으나 오히려 이전보다 더 훌륭한 퍼포먼스를 보여주며 FA컵 2회 우승, 1997-98 시즌 리그컵과 컵 위너스컵 더블 우승을 이끌며 팬들의 사랑을 독차지했음은 물론 1997년에는 FWA 올해의 선수상을 수상했고 1998-99 시즌과 2002-03 시즌에는 첼시 올해의 선수상을 수상했다.

아주리에서는 오랜 세월 동안 로베르토 바조와 로베르토 만치니의 그늘에 가려졌던 졸라는 백업 멤버로 1994 미국 월드컵 준우승을 경험했다. 그러나 경쟁자 바조가 결승전 승부차기에서 실축하고 사키와의 관계도 나빠져서 주전으로 도약했는데 UEFA 유로 1996에서는 카시라기와 함께 주전으로 참여했으나 그 대회 우승팀 독일과 준우승팀 체코에 밀려 탈락하는 등 대표팀과는 인연이 없었다.

 

6위 로베르토 만치니

 


생년월일: 1964년 11월 27일
A매치 기록: 36경기 4골
신체조건: 키 179cm / 몸무게 78kg
주 소속팀: UC 삼프도리아

1980년대 하반기와 1990년대에 걸쳐 이탈리아 무대에서 명성을 떨친 선수로 전형적인 판타지스타로 매혹적인 드리블과 우수한 패스를 활용해 팀의 공격을 이끄는데 능했으며 슈팅도 제법 날카로워서 몇몇 사람들은 그가 디에고 마라도나보다도 낫다는 격찬을 하기도 했다.

삼프도리아에서 커리어의 대부분을 보낸 만치니는 코파 이탈리아에서 강한 모습을 보이며 4회 우승을 이뤄냈고 1989-90 시즌 UEFA 컵 위너스컵 우승은 물론 1990-91 시즌에는 세리에 A 우승을 이뤄냈다. 그리고 1991-92 시즌에는 유러피언 컵 결승에 진출했으나 연장 혈투 끝에 크루이프의 바르샤에게 아쉽개 패하며 준우승에 머물렀다.

1980년대 하반기와 1990년대 초반 세리에 A를 대표하는 간판스타로 군림했던 만치니는 구에린 도르 2회 수상 및 1996-97 시즌 세리에 A 올해의 선수와 세리에 A 올해의 이탈리아 선수를 동시에 수상했고 말년에 에릭손 감독을 따라 라치오로 이적한 뒤에도 1999-2000 시즌 도메스틱 더블을 포함해 코파 이탈리아 2회 우승, 1998-99 시즌 UEFA 컵 위너스컵 우승 1999년 UEFA 슈퍼컵 우승을 이뤄냈다.

이탈리아 대표팀에서도 1980년대 후반에 주전으로 활약한 만치니는 UEFA 유로 1988에서 조별리그 독일전에서 선제골을 기록하는 등의 활약을 펼치며 팀을 4강에 진출시켰고 1990 월드컵에도 처음엔 주전으로 출전했지만 부진으로 인해 신성 로베르토 바조와 이 대회의 신데렐라 살바토레 스킬라치한테 밀리며 벤치에서 대회 3위를 경험했다.

 

5위 로베르토 베테가

 


생년월일: 1950년 12월 27일
A매치 기록: 42경기 19골
신체조건: 키 184cm / 몸무게 78kg
주 소속팀: 유벤투스 FC

1970년대 후반을 풍미한 백발 미남의 공격수로 우수한 피지컬을 활용한 헤더와 부드러운 유연성을 활용한 발리 슈팅은 물론 동료들과의 연계 플레이와 킬 패스로 골 찬스를 만들어냈으며 축구 지능도 높아 윙 포워드나 스트라이커, 공격형 미드필더 역할도 맡을 수 있었다.

선수 생활 대부분을 유벤투스에서 보낸 베테가는 7회의 세리에 A 우승과 1976-77 UEFA 컵 우승, 그리고 1978-79 코파 이탈리아 우승을 이뤄내며 구단의 황금기를 이끌었고 베테가 개인도 1977년과 1978년에는 발롱도르 투표에서 4위에 올랐으며 1979-80 시즌에는 세리에 A 득점왕에 올랐다.

이탈리아 대표팀에서도 루이지 리바 세대 이후 공격진의 에이스로 군림한 베테가는 1978 아르헨티나 월드컵과 UEFA 유로 1980에서 4위라는 호성적을 이뤘다. 다만 부상으로 1982 스페인 월드컵에 불참해서 우승 기회를 놓친 건 아쉬운 부분이다.

 

4위 알레산드로 델 피에로

 


생년월일: 1974년 11월 9일
A매치 기록: 91경기 27골
신체조건: 키 174cm / 몸무게 73kg
주 소속팀: 유벤투스 FC

1990년대 하반기와 2000년대를 대표하는 유벤투스의 판타지스타로 훌륭한 드리블 실력과 우수한 찬스 메이킹 능력, 그리고 정교한 슈팅으로 유명했으며 특히 프리킥에 능해 델 피에로 존이라 불리는 신조어가 나오기도 했다.

유벤투스에서 선수 생활의 대부분을 보낸 구단 역사상 최고의 선수 중 한 명인 델 피에로는 1994-95 시즌 도메스틱 더블을 포함해 세리에 A 6회 우승을 이뤄냈고 UEFA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에 3회 진출해 1995-96 시즌에는 우승을 이뤄냈다. 그리고 유벤투스가 칼치오폴리로 세리에 B로 강등당했을 때도 "신사는 숙녀가 원할 때 떠나지 않는 법입니다."라는 말을 남기고 잔류하며 결국 구단 역사상 최다 출전자가 되었다.

유벤투스에서 팀 커리어도 화려하지만 델피에로는 개인이 세운 커리어도 대단했는데 ESM 올해의 팀에 3회 선정되었고 1997-98 시즌 UEFA 챔피언스리그 득점왕, 1999-2000 시즌 세리에 A 도움왕, 2005-06 시즌 코파 이탈리아 득점왕, 2007-08 시즌 세리에 A 득점왕을 수상했고 1998년과 2008년에는 세리에 A 올해의 이탈리아 선수상을 수상했으며 1995년과 1996년에는 발롱도르 투표에서 4위에 올랐다.

이탈리아 대표팀에서는 명성에 비해 좋은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지만 2006 독일 월드컵 4강전 독일전에서 연장전에서 승부의 쐐기를 박는 득점을 기록하며 우승에 기여하며 대표팀에서의 한을 풀어냈다.

 

3위 오마르 시보리

 


생년월일: 1935년 10월 2일
A매치 기록: 9경기 8골
신체조건: 키 163cm / 몸무게 59kg
주 소속팀: 유벤투스

1950년대 후반과 1960년대 초반기 세계 최고의 판타지스타 중 한 명으로 뛰어난 볼 컨트롤과 드리블로 수비진을 교란했으며 매서운 왼발 슈팅으로 직접 득점하기도 했으나 규율과 규칙을 싫어하고 브라질 선수들과 사이가 나빠 여러 문제를 일으켰다.

리버 플레이트에서는 아르헨티나 프리메라 디비시온 3연패를 이뤄내며 모레노, 디 스테퍼노와 같은 선배들에게 뒤지지 않은 실적으로 주목받은 시보리는 이때 아르헨티나 대표팀에서는 1957년 코파 아메리카에서 우승하는데 크게 공헌했는데 이때 시보리와 아르헨티나 대표팀 선수들은 팬들로부터 더러운 얼굴의 천사들이라 불렸고 시보리는 그 핵심이었다.

코파 아메리카에서 우승한 이후 이탈리아로 건너가 유벤투스에 합류한 시보리는 유벤투스에서는 존 찰스, 보니페르티와 함께 마법의 삼총사를 구성해 세리에 A와 코파 이탈리아를 각 3회씩 우승했고 1959-60 시즌에는 세리에 A 득점왕에 올랐다. 특히 1960-61 시즌에  데르비 디탈리아에서는 인테르를 상대로 혼자서 여섯 골을 퍼부으며 9-1이라는 기록적인 대승을 거두는데 큰 역할을 했고 이때의 활약을 발판으로 1961년 발롱도르를 수상했다. 말년에는 나폴리에서도 활약했다.

 

2위 로베르토 바조

 


생년월일: 1967년 2월 18일
A매치 기록: 56경기 27골
신체조건: 키 174cm / 몸무게 73kg
주 소속팀: 유벤투스 FC

1990년대를 대표하는 슈퍼스타 중 한 명이자 아주리의 판타지스타 계보를 이끈 장본인으로 현란한 발재간과 창의적인 패싱력과 뛰어난 슈팅 스킬을 보여주며 뛰어난 온 더 볼 능력을 보여준 1990년대를 대표하는 판타지스타였다.

피오렌티나에서 데뷔해 유벤투스에서 전성기를 누린 바조는 1992-93 시즌 UEFA컵 우승과 1994-95 시즌 세리에 A와 코파 이탈리아 더블 우승을 이뤄냈고 1990-91 시즌에는 UEFA 컵 위너스컵 득점왕을 수상했으며 1993년에는 UEFA컵과 세리에 A에서 보여준 압도적인 퍼포먼스로 인해 발롱도르와 옹즈도르, 피파 올해의 선수상을 휩쓸었다. 심지어는 기량이 쇠퇴했다고 비판받았던 1995-96 시즌에도 세리에 A 도움왕에 올랐는데 델 피에로에게 밀려난 뒤에도 AC 밀란, 인테르  밀란, 그리고 브레시아 칼초에서도 리그 정상급 선수로 활약하며 2000-01 시즌 구에린 도르와 가에타노 시레아 경력모범상을 동시에 수상했다.

1990 이탈리아 월드컵에서 경쟁자 만치니의 부진으로 주전으로 도약하며 스킬라치와 함께 조국을 3위에 올린 바조는 1994 미국 월드컵에서는 거의 혼자의 힘으로 공격진을 이끌며 5골을 득점하며 팀을 결승에 올려놓았지만 승부차기 마지막 키커로 나가 실축함으로써 팀은 패했고 월드컵 실버볼과 실버슈를 수상 받은 것과는 다르게 대중들에게 그간의 공을 인정받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외 팬들 사이에서는  1994년에 그가 결승전 직전까지 보여줬던 활약상은 축구계로부터 인정받아 1994년 발롱도르와 옹즈도르에서 모두 2위를 차지했으며 피파 올해의 선수상에서도 3위에 올랐다.

 

1위 주세페 메아차

 


생년월일: 1910년 8월 23일 
A매치 기록: 53경기 33골
신체조건: 키 169cm / 몸무게 73kg
주 소속팀: 인테르 밀란

이탈리아 역대 최고의 축구선수로 추앙받는 선수로 뛰어난 드리블 능력과 창의적이며 정확한 패스에서 나오는 찬스 메이킹, 그리고 직접 슈팅하거나 헤딩을 활용한 득점력도 우수했다.

인테르 밀란에서 전성기의 대부분을 보낸 주세페 메아차는 어린 나이에 데뷔해 처음에는 선배들의 무시를 당했지만 압도적인 실력으로 선배들을 승복시켰는데 세리에 A 3회 우승과 코파 이탈리아 우승을 이뤄냈으며 메아차 개인도 리그와 미트로파컵, 코파 이탈리아를 포함해 무려 일곱 번이나 득점왕에 올랐다. 이러한 활약을 인정한 인테르 밀란은 자신의 홈 구장의 이름을 주세페 메아차 스타디움으로 명명했다.

1930년대 이탈리아의 성공시대를 이끌었던 주세페 메아차는 인사이드 포워드 파트너 지오반니 페라리와 함께 1934 이탈리아 월드컵과 1938 프랑스 월드컵에서 모두 선발로 뛰며 우승한 유이한 선수였으며 1934 이탈리아 월드컵에서는 골든볼을 수상했으며 후자의 대회에서는 주장으로 팀을 지휘하며 월드컵에서 우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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