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축구 역사상 최고의 골키퍼 Top 11~20

국가의 영웅들/이탈리아

이탈리아 축구 역사상 최고의 골키퍼 Top 11~20

토르난테 2025. 4. 21. 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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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의 주관적인 순위입니다.
*대상자는 이탈리아 국가 대표팀으로 A매치 1경기 이상 출전한 선수를 대상자로 했습니다.

*오리운디의 경우에도 이탈리아 국가 대표팀으로 A매치 1경기 이상 출전한 선수는 모두 포함했습니다.
*선수 사진은 대부분 플레이어스 유저인 법정스님의 소유님의 건조폼 입니다. 다만 법정님이 만들지 않은 선수들은 제가 만들었습니다.
*기록일은 2025년 4월 20일 기준입니다.

 


20위 루카 마르체지아니

 


생년월일: 1966년 2월 22일
A매치 기록: 9경기 7실점 / 4클린시트
신체조건: 키 188cm / 몸무게 77kg
주 소속팀: SS 라치오

세리에 A 황금기에 명성을 날린 골키퍼로 민첩한 몸놀림과 탁월한 상황 판단 능력을 이용한 안정적인 선방에 능했고 안정적인 공중볼 캐칭에도 강점을 보였으며 특히 페널티킥 선방에 강점을 보였다.

1990년대 초반 토리노의 약진을 이끈 마르체지아니는 1990-91 시즌 세리에 B 우승을 이끌며 승격에 공헌했고 1992-93 시즌에는 코파 이탈리아 우승을 이뤄냈고 이때의 활약으로 이탈리아 대표팀에서 팔류카의 서브 역할을 맡았고 팔류카의 퇴장으로 조별리그 세 경기에서 모두 출전했으며 토너먼트 이후에는 백업으로 다시 내려가 월드컵 준우승을 경험했다.

토리노를 떠나 이적한 라치오에서는 구단이 황금기를 누리는데 일조한 마르체지아니는 1997-98 시즌 코파 이탈리아 우승을 시작으로 1998-99 시즌에는 컵 위너스 컵 우승을 이뤄내며 구단 역사상 최초로 유럽 대항전에서 우승했고 여름에는 UEFA 슈퍼컵에서 퍼거슨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를 상대로 승리했음은 물론 1999-2000 시즌에는 세리에 A와 코파 이탈리아를 모두 제패하는 기염을 토했다. 페루치 이적 이후에도 그의 백업 역할을 맡았다.

 

19위 이바노 보르돈

 


생년월일: 1951년 4월 13일
A매치 기록: 22경기 20실점 / 8클린시트
신체조건: 키 183cm / 몸무게 78kg
주 소속팀: 인테르 밀란

1970~80년대에 이탈리아 무대에서 유명세를 떨쳤던 슛 스토퍼로 높은 차원의 운동신경과 총알이라 불렸을 정도로 대단한 민첩성을 살려 매 경기마다 슈퍼 세이브를 보여줬으며 우수한 수비 조율 능력으로 다른 수비수들의 위치를 잡아주는 커맨더로서의 역할도 훌륭하게 수행했음은 물론 튜터링에도 능해 후배 발테르 젱가가 세계적인 골키퍼로 성장하는데 도움을 주기도 했다.

인테르에서 데뷔해 13년간 머물며 구단의 터줏대감으로 명성을 떨친 보르돈은 세리에 A 2회 우승과 코파 이탈리아 2회 우승을 이뤄내는 과정에서 큰 공을 세웠음은 물론 팀이 암흑기에 빠졌을 때에도 팀에게 충성을 다했다. 그러나 성장한 발테르 젱가에게 밀려나며 삼프도리아에서 말년을 보냈고 삼프도리아에서도 팀의 세리에 A 중상위권 진입과 1984-85 시즌 코파 이탈리아 우승을 이뤄내는데 큰 역할을 했다.

이탈리아 대표팀에서는 오랫동안 디노 조프의 아성에 눌려서 백업 골키퍼 역할을 맡았던 보르돈은 백업으로 1978 아르헨티나 월드컵 4위, UEFA 유로 1980 4위, 그리고 1982 스페인 월드컵 우승을 이뤄냈고 은퇴한 뒤인 2022년에는 인테르에서의 활약을 바탕으로 구단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18위 프랑코 탄크레디

 


생년월일: 1955년 1월 10일
A매치 기록: 12경기 6실점 / 6클린시트
신체조건: 키 176cm / 몸무게 72kg
주 소속팀: AS 로마

이탈리아의 리나트 다사예프라고 불렸던 골키퍼로 키가 작았지만 대단한 유연성과 경이로운 반사신경으로 이를 극복했으며 어깨 힘이 강해 공을 멀리 던지며 팀의 빌드업의 시작을 이끄는 역할도 맡았다.

선수생활의 대부분을 AS 로마에서 보낸 탄크레디는 잘로로시 군단의 전성기를 이끌며 코파 이탈리아 4회 우승을 이뤄냈고 1982-83 시즌에는 40년 만에 스쿠테토를 따냈다. 그리고 1983-84 시즌에는 유러피언 컵 결승에 오르며 구단의 황금기를 이끌었고 이런 공로를 인정받아 AS 로마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이탈리아 대표팀에서는 1984 LA 올림픽 멤버로 참가해 4위를 이뤄낸 탄크레디는 성인 대표팀에서는 주로 백업 역할을 맡았는데 1986 멕시코 월드컵에서도 백업으로 참가했다.

 

17위 발레리오 바치갈루포

 


생년월일: 1924년 2월 12일
A매치 기록: 5경기 8실점 / 0클린시트
신체조건: 키 176cm / 몸무게 75kg
주 소속팀: 토리노 FC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이탈리아 무대 최고의 골키퍼이자 유망주로 명성을 떨쳤으며 엄청난 반사신경과 용수철과 같은 점프력을 바탕으로 지상과 공중으로 오는 슈팅들을 가리지 않고 잘 막아냈으며 특히 페널티 킥 선방에 강점을 보였다.

1940년대를 풍미하며 유럽 최강의 팀이라 불렸던 엘 그란데 토리노의 골문을 지킨 바치갈루포는 세리에 A 4연패의 전설적인 신화를 이뤄냈고 이탈리아 대표팀에서도 주전으로 활약하며 향후를 기대하게 만들었지만 1949년, 벤피카와의 친선 경기 이후 리스본에서 돌아오는 길에 발생한 수페르가 비행기 참사로 인해 숨을 거뒀고 그들의 죽음으로 인해 토리노의 전설적인 신화는 비극적으로 막을 내렸다.

수페르가의 비극으로 엘 그란데 토리노의 신화는 비극적으로 막을 내렸지만 구단과 팬들은 이 시절의 영웅들의 활약을 대대로 기억했고 사고 이후 65년 뒤인 2014년에 바치갈루포는 최초로 토리노 FC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 네 명의 선수 중 하나였다.

 

16위 루치아노 카스텔리니

 


생년월일: 1945년 12월 12일
A매치 기록: 1경기 1실점 / 0클린시트
신체조건: 키 180cm / 몸무게 80kg
주 소속팀: 토리노 FC

1970년대 하반기와 1980년대 상반기 세리에 A 정상급 골키퍼로 이름을 날렸던 선수로 재규어라 불렸을 만큼 부드러운 유연성과 경이로운 반사신경으로 상대의 슈팅을 막아냈으며 열정적이고 감정적이어서 팬들의 사랑을 받았던 골키퍼였다.

토리노에서 첫 전성기를 누린 카스텔리니는 1970-71 시즌 코파 이탈리아 우승을 이끌었고 1975-76 시즌에는 그라나타 군단이 27년 만에 스쿠테토를 드는데 공헌했는데 이듬해에도 세리에 A 준우승을 이뤄내며 팀의 마지막 황금기를 이끌었고 이 공로를 인정받아 은퇴한 뒤인 2016년에 토리노 FC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나폴리에서도 전성기를 이어간 카스텔리니는 비록 우승컵은 들지 못했지만 1979-80 시즌 골키퍼로는 최초로 구에린 도르를 수상했고 762분 연속 무실점을 기록하며 나폴리 역대 최장시간 연속 무실점을 기록했다. 다만 리그에서의 우수한 활약에도 불구하고 대표팀과는 지독하게도 인연이 없었던 카스텔리니는 디노 조프라는 큰 벽에 막히기도 했지만 백업 역시 감독 엔초 베아르초트의 비선호로 인해 1977년에 한 경기에 나선 것을 제외하면 거의 소집되지 못했다.

 

15위 지오반니 갈리

 


생년월일: 1958년 4월 29일
A매치 기록: 19경기 12실점 / 10클린시트
신체조건: 키 187cm / 몸무게 81kg
주 소속팀: AC 밀란

사키가 이끌던 밀란 제너레이션 시절의 주전 골키퍼로 민첩한 몸놀림으로 기복 없는 선방을 기록함은 물론 우수한 판단력과 빠른 반응속도에서 나오는 수비 지역을 넓게 커버했으며 효과적인 일대일 전진수비를 통해 상대를 막아내며 밀란의 지역방어 시스템 구축에 큰 도움이 되기도 했다.

피오렌티나에서 데뷔해 10년간 피렌체의 골문을 지키며 세리에 A 정상급 골키퍼로 활약한 갈리는 1981-82 시즌 비올라의 세리에 A 준우승을 이뤄내는데 공헌했고 사키 체제의 AC 밀란으로 이적한 뒤에는 1987-88 시즌 세리에 A 우승을 이뤄낸 것을 시작으로 1988-89 시즌과 1989-90 시즌에는 유러피언컵 2연패의 대업을 이뤄내는 과정에서 큰 공을 세웠다.

AC 밀란과 피오렌티나 두 구단에서 모두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 갈리는 이탈리아 대표팀에서는 1982 스페인 월드컵에서는 백업으로 우승을 경험했고 디노 조프가 은퇴한 뒤에는 주전으로 도약해 1986 멕시코 월드컵에서 주전으로 나섰다.

 

14위 귀도 마제티

 


생년월일: 1907년 11월 22일
A매치 기록: 3경기 6실점 / 0클린시트
신체조건: 키 180cm / 몸무게 80kg
주 소속팀: AS 로마

1930년대 세리에 A 정상급 골키퍼 중 한 명으로 평가받았던 인물로 뛰어난 반사신경과 안정적인 핸들링, 그리고 냉정한 판단력이 더해진 결점이 없는 골키퍼다.

AS 로마 역사상 최고의 골키퍼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 마제티는 두 번의 준우승이라는 트라우마를 극복하고 1942-43 시즌, 구단의 첫 세리에 A 우승을 이뤄냈다. 그러나 코파 이탈리아 결승에 두 번 진출했으나 모두 준우승을 기록했으며 이를 극복하지는 못했다.

AS 로마에서의 훌륭한 퍼포먼스에도 불구하고 아주리에서는 중용받지 못했던 마제티는 콤비와 올리비에리의 백업으로 나서며 한 경기도 뛰지 않고 월드컵을 두 번이나 우승한 독특한 기록을 세우게 된다.

 

13위 알도 올리비에리

 


생년월일: 1910년 10월 2일
A매치 기록: 25경기 30실점 / 7클린시트
신체조건: 키 178cm / 몸무게 75kg
주 소속팀: 루케세 1905

1930년대 하반기 이탈리아 무대 최고의 골키퍼 중 한 명으로 178cm의 작은 신장에도 불구하고 높은 점프력과 빠른 반사 신경과 완벽한 예측력을 바탕으로 신체적 한계를 극복하며 팬들로부터 '작은 헤라클레스' 또는 '마법의 고양이'라고 불렸으며 공을 멀리 펀칭하는 데에도 능했다.

세리에 B 소속이던 엘라스 베로나 FC에서 데뷔한 올리비에리는 1933-34 시즌에 칼초 파도바로 이적, 세리에 A에 데뷔했지만 그는 공격수와 충돌하는 바람에 두개골이 골절되는 심각한 부상을 입었고 이로 인해 커리어 내내 편두통으로 고생했음에도 세리에 A 정상급 골키퍼로 군림했고 루케세 1905를 세리에 A에 올리는 수훈을 인정받아 이탈리아 대표팀에서 소집되어 활약했다.

이탈리아 대표팀에서도 중용받은 올리비에리는 1933년에 입은 두개골 골절상으로 인해 1934 이탈리아 월드컵에 출전하지 못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일어나 귀도 마제티와 카를로 체레졸리를 모두 밀어내고 1938 프랑스 월드컵 우승을 이뤄내는데 공헌했다.

 

12위 줄리아노 사르티

 


생년월일: 1933년 10월 2일
A매치 기록: 8경기 5실점 / 3클린시트
신체조건: 키 178cm / 몸무게 70kg
주 소속팀: 피오렌티나

1950년대와 60년데에 걸쳐 세리에 A에서 이름을 날렸던 골키퍼로 기복 없이 꾸준한 활약을 펼쳤으며 우수한 운동 능력과 골의 낙하지점을 완벽하게 예측하는 예측력은 물론 침착한 성격과 강한 정신력을 겸비해 팀의 수비라인을 조율하는 능력에도 뛰어났는데 발밑도 우수해 이탈리아 무대에서는 처음으로 스위퍼 키퍼로서 두각을 나타내기도 했다.

피오렌티나 구단 역사상 최고의 황금기에 활약한 사르티는 1955-56 시즌 세리에 A 우승과 4회 준우승을 이뤄냈으며 1956-57 시즌에는 유러피언 컵에서 결승에 진출하는 활약을 펼쳤으나 1960-61 시즌에 알베르토시와의 주전 경쟁에서 밀려나며 컵 위너스컵 결승에서도 벤치를 지켰다. 여기에 전성기 시절에도 대표팀에서 중용받지 못했던 문제점까지 있어 피오렌티나를 떠나게 된다.

피오렌티나를 떠나 인테르 밀란에 입단하며 부활한 사르티는 그란데 인테르의 시대를 이뤄내며  세리에 A 2회 우승과 유러피언 컵과 인터콘티넨탈컵에서 2연패를 이뤄냈다. 그러나 1964-65 시즌에는 이미 리그와 유러피언 컵을 제패한 상황에서 코파 이탈리아 결승에서 치명적인 실수로 유벤투스 측에 결승골을 헌납하며 유럽 축구사 첫 트레블을 무산시키는 등 아쉬운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11위 지오반니 드 프라

 


생년월일: 1900년 6월 28일
A매치 기록: 19경기 29실점 / 5클린시트
신체조건: 키 170cm
주 소속팀: 제노아

사모라, 슈툴파우트, 하디와 함께 1920년대 유럽 무대를 대표하던 정상급 골키퍼로 특히 운동능력에 강점을 보였는데 유연하고 민첩했으며 반사신경 뛰어나 몸의 모든 부분을 활용해 선방해냈고 적절한 타이밍에 골라인을 벗어나 볼을 처리하는 부분에도 뛰어났다.

선수생활을 제노아에서만 보낸 원 클럽맨인 드 프라는 수비수 렌초 데 베키와 함께 구단 역사상 최고의 황금기를 이뤄내는데 큰 공을 세우며 이탈리아 전국리그 2회 우승을 이뤄냈는데 이에 유벤투스가 그의 영입을 타진했지만 그는 자신은 제노바 사람이라 제노아 이외에 다른 팀에서는 뛸 수 없다고 이적제의를 거절했고 결국 제노아에서 선수생활을 마감했다.

이탈리아 대표팀 소속으로도 주전으로 활약한 드 프라는 1924 파리 올림픽에서 주전으로 활약했고 1927-30 중유럽컵에서도 우승을 이뤄냈다. 그러나 1928 암스테르담 올림픽에서는 콤비와의 주전 경쟁에서 밀렸다. 은퇴한 이후에는 제노바가 속한 리구리아 주 지방을 빛낸 인물에게 수상하는 프론다 도로를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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