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축구 역사상 최고의 사이드백 Top 11~20

국가의 영웅들/독일

독일 축구 역사상 최고의 사이드백 Top 11~20

토르난테 2025. 1. 16. 1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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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의 주관적인 순위입니다.
*대상자는 독일 국가 대표팀으로 A매치 1경기 이상 출전한 선수를 대상자로 했습니다.
*선수 사진은 대부분 플레이어스 유저인 법정스님의 소유님의 건조폼 입니다. 다만 법정님이 만들지 않은 선수들은 제가 만들었습니다.
*기준일은 2025년 1월 15일입니다.

 


20위 헤어베르트 치머만

 


생년월일: 1954년 7월 1일
A매치 기록: 14경기 2골
신체조건: 키 178cm / 몸무게 72kg
주 소속팀: FC 쾰른

1970년대 분데스리가 정상급 레프트백으로 빠른 스피드와 민첩한 몸놀림, 그리고 날카로운 돌파력을 앞세워 측면에서 골 찬스를 만드는데 장점을 보였고 기본기와 축구지능이 우수하고 활동량도 우수해 미드필더나 센터백도 소화할 수 있었다.

바이에른 뮌헨에서 스트라이커로 데뷔해 게르트 뮐러의 백업으로 머물다가 쾰른으로 이적해 레프트백으로 포지션을 변경해 주전자리를 차지한 치머만은 1977-78 시즌 분데스리가와 포칼을 우승하며 도메스틱 더블을 이뤄냈고 그 과정에서 키커지 선정 분데스리가 올스타 팀에 선정되었고 이를 포함해 분데스리가 1회 우승 및 포칼 3회 우승을 이뤄냈다.

독일 대표팀에서도 베르나르트 디츠 및 한스페터 브리겔의 백업 및 준주전으로 자주 소집된 치머만은 1978 아르헨티나 월드컵과 UEFA 유로 1980에서 백업으로 참가해 후자의 대회에서는 우승 메달을 목에 걸었다.

 

19위 한스 노박

 


생년월일: 1937년 8월 9일
A매치 기록: 15경기 0골
신체조건: 키 176cm / 몸무게 73kg
주 소속팀: FC 샬케 04

전국리그 시기 말기와 분데스리가 초창기에 활약했던 선수로 커리어 초기에는 공격수로 뛰었고 이러한 경력을 살려 라이트백으로 포지션을 옮기고 나서도 강력한 오버래핑을 시도해 전문가들은 노박을 분데스리가 공격형 풀백의 시조로 보고 있다.

FC 샬케에서 데뷔해 전성기를 누린 노박은 비록 샬케에서 우승컵을 들어올리진 못했지만 당대 독일 무대 정상급 풀백으로 활약하며 키커 랑리스테 평가에서 인터내셔널 클래스 등급에 6회 선정 및 풀백 포지션 1위에 4회 올랐으며 바이에른 뮌헨에서는 DFB 포칼 2회 우승과 1966-67 시즌 UEFA 컵 위너스컵 우승에 공헌해 바이에른이 훗날 독일의 지배자가 되는 기틀을 마련하는데 기여했다.

전성기 시절에는 디 먄샤프트에서도 중용받았던 노박은 1962 칠레 월드컵에서 주전으로 활약하며 팀의 8강 진출에 공을 세웠으나 이후 베르티 포그츠, 호어스트디터 회트게스와 같은 걸출한 후배들에게 자리를 내줬다.

 

18위 베른트 푀르스터

 



생년월일: 1956년 5월 3일
A매치 기록: 33경기 0골
신체조건: 키 183cm
주 소속팀: VfB 슈투트가르트

1980년대 분데스리가에서 이름을 날렸던 만능 수비 자원으로 측면에서 활약할 때에는 공격을 자제하고 수비에 힘을 보탰으며 끈질긴 맨마킹과 터프한 몸싸움을 겸비했으며 특히 제공권 경합에서 우수한 모습을 보여줬으며 수비라인의 전 포지션은 물론 수비형 미드필더까지 소화할 수 있었다.

바이에른 뮌헨에서 데뷔해 백업 멤버로 활약하며 두 번의 유러피언 컵 우승을 경험한 푀르스터는 슈투트가르트에서는 동생 칼하인츠 푀르스터와 함께 전성기를 누리며 새로운 전설을 썼는데 칼하인츠 푀르스터, 부흐발트, 샤퍼와 함께 막강한 수비라인을 구축해 1983-84 시즌, 분데스리가 출범 이후 구단 역사상 첫 리그우승을 이뤄내는데 큰 공을 세웠고 1985-86 시즌에는 DFB포칼 결승에 진출했으나 결승전에서 친정팀 바이에른 뮌헨에게 패해 준우승에 머물기도 했다.

키커 랑리스테 평가에서 인터내셔널 클래스 등급에 3회 선정된 베른트 푀르스터는 디 만샤프트에서도 동생 칼하인츠 푀르스터와 함께 소집되어 활약하며 UEFA 유로 1980에서는 백업 멤버로 우승을 경험했고 1982 스페인 월드컵에서는 동생과 함께 나란히 주전 스토퍼로 활약하며 디 만샤프트의 결승행을 이끌었다.

 

17위 베른트 파츠케

 


생년월일: 1943년 3월 14일
A매치 기록: 24경기 0골
신체조건: 키 176cm / 몸무게 73kg
주 소속팀: 1860 뮌헨

1960년대에 이름을 날린 분데스리가의 공격적인 레프트백으로 강력한 스테미너를 활용한 오버래핑과 사이드에서의 위협적인 롱패스로 득점 찬스를 만드는 부분에서 이름을 떨쳤으며 수비적으로도 우수해 센터백과 수비형 미드필더 역할도 곧잘 소화했다.

특이하게도 벨기에의 스탕다르 리에주에서 선수생활을 시작한 파츠케는 1962-63 시즌 주필러리가 우승을 이뤄냈고 이후 분데스리가의 1860 뮌헨으로 이적해 전성기를 구가하며 1965-66 시즌 분데스리가 우승을 이뤄냈고 1968-69 시즌에는 키커지 선정 분데스리가 시즌 베스트 일레븐에 선정되었다. 그리고 헤르타 BSC에서도 준수한 활약을 펼쳤다.

키커 랑리스테 평가에서 인터내셔널 클래스에 11회 선정된 파츠케는 디 만샤프트에도 소집되어 활약했는데 슈넬링어의 백업 역할을 맡으며 1966 잉글랜드 월드컵 준우승과 1970 멕시코 월드컵 3위를 경험했다.



16위 마르쿠스 바벨

 


생년월일: 1972년 9월 8일
A매치 기록: 51경기 1골
신체조건: 키 191cm / 몸무게 81kg
주 소속팀: FC 바이에른 뮌헨

1990년대 중후반 독일 대표팀과 바이에른 뮌헨에서 명성을 날린 라이트백이자 센터백으로 뛰어난 제공권 능력과 터프한 슬라이딩 태클로 팀의 후방을 수호했으며 강력한 킥력으로 빌드업을 하거나 심지어는 중거리 슈팅을 날리기도 했는데 이런 다양한 능력들로 알렉스 퍼거슨이 간절히 영입을 원했던 선수였고 현세대 뱅자맹 파바르의 상위호환 격의 선수였다.

바이에른 뮌헨에서 데뷔했으나 조르지뉴에게 밀려나 함부르크로 떠난 뒤 리그 정상급 라이트백으로 성장해 다시 돌아온 바벨은 바이에른 뮌헨에서는 분데스리가 3회 우승과 1995-96 시즌 UEFA컵 우승, 그리고 1998-99 시즌에 UEFA 챔피언스리그 준우승을 이뤄냈으나 라이트백 윌리 사뇰과 센터백 파트리크 안데르손을 영입하며 구단 내 입지가 떨어지자 리버풀로 이적했고 리버풀에서는 2000-01 시즌 UEFA컵과 리그컵, FA컵 토너먼트 트레블 및 UEFA 슈퍼컵 우승을 이뤄냈는데 여기서 친정팀 바이에른 뮌헨의 왼쪽 자원인 리자라쥐와 살리하미지치를 상대로 절륜한 수비력을 선보이며 승리에 큰 공을 세웠다.


디 만샤프트에서도 센터백과 라이트백으로 중용된 바벨은 UEFA 유로 1996에서 데뷔해 조국의 우승을 차지하는데 큰 공을 세웠으나 1998 프랑스 월드컵에서는 슈테판 로이터, 외르크 하인리히, 크리스티안 뵈른스와의 주전경쟁에서 밀려나며 16강 멕시코전에서만 선발 출전했다. 그리고 UEFA 유로 2000에서는 다시 주전 자리를 회복했으나 조별리그 탈락이라는 굴욕적인 성적으로 대표팀 커리어를 마무리했다. 더 안타까운 부분은 이를 만회할 기회조차 없이 말초신경계의 손상으로 급격하게 근무력이 사라지는 병인 길링 바레 증후군으로 인해 다소 이른 나이에 몰락했다.

 

15위 클라우스 우르반칙

 



생년월일: 1940년 6월 4일
A매치 기록: 34경기 0골
신체조건: 키 174cm / 몸무게 74kg
주 소속팀: 케미 할레

1960년대 유럽무대 정상급 라이트백으로 빠른 스피드와 날카로운 슬라이딩 태클을 앞세운 수비력으로 상대 윙포워드들을 제압하면서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

동독의 중견팀 케미에 할레의 원 클럽맨인 우르반칙은 1961-62 시즌 FDGB포칼 우승을 이뤄냈으며 1963년 동독 언론지에서 세계 베스트 일레븐으로 선정된 이력이 있었고 동독 대표팀 소속으로도 동독 대표팀 소속으로 1964 도쿄 올림픽에서 동메달을 목에 건 일등 공신으로 평가받아 1964년 독일 올해의 선수상을 수상했다.

축구 실력 이외에도 화재 속 영웅으로 유명한 우르반칙은 1971년 9월 28일 '질베런 세페르트 호테루 화재 사건' 당시에는 화상을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사람들을 구해냈으나 이때 몇 미터 아래로 떨어져 심각한 부상을 당해 커리어를 중단해야 했기에 동독 대표팀의 본격적인 전성기를 함께하지는 못한 비운의 선수였다.

 

14위 라인홀트 뮌첸베르크

 


생년월일: 1909년 1월 25일
A매치 기록: 41경기 0골
신체조건: 키 175cm / 몸무게 77kg
주 소속팀: 알레마니아 아헨

1930년대 유럽 대륙 최초의 측면 수비수로 이름을 날렸던 선수로 데어 엘세르네, 즉 철이라는 별명으로 불렸으며 투지 넘치는 허슬플레이와 파워풀한 슬라이딩 태클로 상대 공격수들을 쓰러트렸던 특히 강한 신체적 능력과 함께 공중볼 경합에 강점을 가졌으며 훗날 독일 최고의 명장에 올라선 헬무트 쇤도 뮌첸베르크를 평가할 때 "파울 야네스의 파트너로 그는 기술적인 선수는 아니었지만 더 날카롭고 단단했으며, 수비수로서 경합을 피하는 스타일은 아니었다."라고 평가했다.

알레마니아 아헨에서 선수생활의 대부분을 보낸 뮌첸베르크는 정작 우승은 아헨이 아닌 잠시 머문 베르더 브레멘과 LSV함부르크에서 했는데 브레멘에서는 가울리가 니더작센 우승을, LSV 함부르크에서는 가울리가 함부르크 우승과 독일 챔피언십 준우승을 이뤄냈다.

1930년대 디 만샤프트의 왼쪽 측면을 견고하게 방어하며 중용받은 뮌첸베르크는 1934 이탈리아 월드컵에서 팀의 3위에 기여했는데 특히 4강전에서는 당대 최고의 골게터 요제프 비칸을 막아냈으며 1937년에 엄청난 퍼포먼스를 보여줬던 브레슬라우 엘프의 일원으로 이름을 날렸고 1935년 웸블리에서 열렸던 잉글랜드와의 평가전에 참가해 터프함으로는 둘째 가면 서러운 잉글랜드 선수들을 터프함으로 제압하는 활약을 보여주며 잉글랜드 사람들에게 " 잉글랜드 선수들보다 더 잉글랜드 선수 같은 선수."라는 찬사를 듣는다.

 

13위 크리스티안 치게

 


생년월일: 1972년 2월 1일
A매치 기록: 72경기 9골
신체조건: 키 186cm / 몸무게 82kg
주 소속팀: FC 바이에른 뮌헨

1990년대 하반기에 이름을 날린 공격형 레프트백으로 측면 공격수를 겸할 수 있었을 정도로 폭발적인 사이드라인 돌파와 정교한 왼발 크로스를 자랑했으며 득점력까지 능해 두 자릿수 득점을 기록한 시즌도 두 번이나 되었던 공격형 레프트백의 표본이었다.

바이에른 뮌헨에서 데뷔해 전성기를 누린 치게는 구단에서 분데스리가 2회 우승과 1995-96 시즌 UEFA컵 우승을 이뤄냈는데 그 과정에서 큰 공을 세웠다. AC 밀란 이적이 악수가 되어 그 뒤로부터 바이언 시절의 기량을 선보이지는 못했다가 미들즈브러로 이적해 부활의 날갯짓을 펼치지만 리버풀에서 부상으로 흔들렸고 토트넘 훗스퍼에서도 2001-02 시즌 EFL컵 결승전에서 득점하는 등 좋은 모습으로 부활하지만 2002년 월드컵을 끝내고 원인을 알 수 없는 매우 심각한 무릎 부상에 걸려 몰락한다.

사이드백에게 등급을 매우 짜게 주던 시대의 키커 랑리스테 평가에서 인터내셔널 클래스 등급에 5회 선정된 치게는 디 만샤프트에서도 주전 멤버로 UEFA 유로 1996 우승을 이뤄내며 1996 발롱도르 투표에서 22위에 올랐고 1998 프랑스 월드컵에서도 주전으로 참가했다. 이후에는 부상으로 몰락하는가 싶더니 토트넘에서 부활해 2002 한일 월드컵에서도 로테이션 멤버로 결승 진출에 공헌했고 몰락한 시점인 2004년까지 대표팀에 뽑히며 전성기의 끝자락과 녹슨 전차 군단이라 불리던 암흑기의 중간에서 고생했다.

 

12위 슈테판 로이터

 


생년월일: 1966년 10월 16일
A매치 기록: 69경기 2골
신체조건: 키 181cm / 몸무게 75kg
주 소속팀: 보루시아 도르트문트

100m를 11초대에 주파하는 빠른 발과 훌륭한 지구력과 강력한 몸싸움을 겸한 압도적인 신체 능력으로 팀의 오른쪽을 책임지며 터보라 불렸던 선수로 본업인 라이트백 이외에도 수비형 미드필더와 리베로, 윙어도 볼 수 있었고 현역 마지막 시즌인 2003-04 시즌에도 시즌 공식 경기를 37경기나 소화한 철인이다.

뉘른베르크와 바이에른 뮌헨, 그리고 보루시아 도르트문트에서 모두 뛰어난 퍼포먼스를 보였던 로이터는 뉘른베르크에서 성장해 바이에른 뮌헨에서는 분데스리가 2연패를 이뤄냈음은 물론 로이터 개인도 1990-91 시즌, 팀의 준우승을 이끌며 키커지 선정 시즌 베스트 일레븐에 선정되었다. 그러나 바이에른의 재정난으로 유벤투스로 잠시 떠났다가 도르트문트로 돌아온 뒤에는 분데스리가 3회 우승 및 1996-97 시즌 UEFA 챔피언스리그와 인터콘티넨탈컵 우승을 이뤄냈고 그중 1994-95 시즌에는 키커 선정 분데스리가 시즌 베스트 일레븐에 선정되었다.

사이드백에게 등급을 매우 짜게 주던 시대의 키커 랑리스테 평가에서 인터내셔널 클래스 등급에 6회 선정된 로이터는 디 만샤프트에서도 이탈리아 무대에서 이름을 날렸던 토마스 베어톨트와 치열한 주전 경쟁을 벌였는데 1990 이탈리아 월드컵에서는 백업 멤버로 우승의 즐거움을 만끽했고 UEFA 유로 1992에서는 준우승, UEFA 유로 1996에서는 주전으로 우승을 이뤄내며 영광을 누렸는데 경쟁자 베어톨트에 비해 월드컵에서는 성과가 좋지 못했지만 UEFA 유로에서의 성과는 한수 위였다.

 

11위 토마스 베어톨트

 


생년월일: 1964년 11월 12일
A매치 기록: 62경기 1골
신체조건: 키 185cm / 몸무게 81kg
주 소속팀: VfB 슈투트가르트

수비지향적인 라이트백으로 수비라인의 넓은 범위를 커버했고 빠른 스피드와 견고한 몸싸움, 그리고 강력한 지구력을 활용한 뛰어난 대인 수비 능력과 날카로운 슬라이딩 태클 자신의 가치를 증명했으며 라이트백은 물론 센터백에서도 우수한 기량을 발휘했다.

이탈리아와 독일의 여러 클럽을 거친 저니맨 베어톨트는 프랑크푸르트에서 데뷔해 약관의 나이의 어린 선수였음에도 팀이 모종의 사건으로 이사회가 해산되고 핵심 선수들이 이탈했음에도 팀이 강등을 필사적으로 막아내며 주목받아 독일 대표팀에 입성했음은 물론 1987년, 팀이 분데스리가에서 15위에 그쳤음에도 옹즈 몽디알 선정 유럽 베스트 일레븐에 선정되는 경이로운 퍼포먼스를 보였다.

세리에 A에서는 베로나를 거쳐 AS 로마에서 전성기를 누리며 1989-90 시즌 코파 이탈리아 우승 및 UEFA컵 준우승을 이뤄냈다. 바이에른에서는 부상으로 좋은 모습을 보이지 못했지만 슈투트가르트에서는 다시 부활했는데 7년간 머물며 분데스리가 4위권에 두 번 들었으며 1993-94 시즌 키커지 선정 분데스리가 베스트 일레븐에 선정되었고 1996-97 시즌 DFB포칼 우승과 1997-98 시즌 UEFA 컵 위너스컵 준우승을 이뤄냈다.

디 만샤프트에서는 슈테판 로이터와 치열한 주전 경쟁을 벌였던 베어톨트는 UEFA 유로보다는 월드컵에서 더 준수한 활약을 펼쳤는데 1986 멕시코 월드컵 준우승과 1988 UEFA 유로 3위를 기록한데 이어 1990 이탈리아 월드컵에서는 우승을 이뤄내는데 큰 공을 세웠고 1994 미국 월드컵에서도 로이터를 밀어내고 주전자리를 차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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