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트리아 축구 국가대표팀 역대 올스타 팀

국대 올스타 짜보기/서유럽

오스트리아 축구 국가대표팀 역대 올스타 팀

토르난테 2025. 12. 9. 1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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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사항

 

2025년 12월 3일 기준입니다.

 

기존에는 대표팀 활약에 가산점을 더 부여했지만 이 부분을 제외하고 다시 선정했습니다.

 

오스트리아의 감독으로 분더팀 시대를 이끈 우고 마이슬을 선정했습니다.

 

최소한의 밸런스는 챙길 예정이며 더블 리베로를 내는 현상이나 중앙 공격수로만 세 명이 나서는 현상은 최대한 피할 예정입니다.

 

선수 사진은 에펨네이션에서 활동하고 계시는 법정스님의 소유님의 건조폼을 주로 활용했습니다.

 

우선 베스트 일레븐만 공개하고 서브는 다음주에 보강하겠습니다.

 

 


1. 오스트리아 축구 국가대표팀

 

별칭: 분더 팀 (Wunder Team), 다스 팀 (Das Team)

월드컵: 출전 7회, 3위 1회

UEFA 유로: 출전 3회

올림픽: 출전 4회, 은메달 1회

중유럽컵: 출전 6회, 1회 우승

최다 출전 선수: 마르코 아르나우토비치, 121경기

최다 득점 선수: 마르코 아르나우토비치, 45골

 


2. 베스트 일레븐

 

 

골키퍼

 


이름: 루디 하이덴
생년월일: 1909년 3월 19일
포지션: 골키퍼
A매치 기록: 20경기 25실점 / 6클린시트
신체조건: 키 184cm / 몸무게 78kg
주 소속팀: 라싱 파리

오스트리아 축구 역사상 최고의 골키퍼이자 1930년대 초반을 풍미한 골키퍼로 기복 없는 선방 능력을 보여줬으며 빠르고 용맹해 상대 공격수에게 다소 호전적인 성향도 가지고 있어서 그들에게 두려움의 대상이 되기도 했지만 잘생긴 외모와 훌륭한 팬 서비스로 다른 축구 선수들과 다르게 여성팬층이 매우 두터웠다고 전해진다.

오스트리아의 빈 AC에서 활약하던 시절에는 OFB컵 1회 우승 및 2회 준우승을 이뤄냈고 미트로파컵에서도 결승에 올랐음은 물론 분더 팀이라 불리던 오스트리아 대표팀의 주전 골키퍼로 1931-32 시즌 중유럽 컵 우승을 이뤄냈으나 1933년에 라싱 파리로 이적하며 대표팀에서 뛰지 못하기도 했다. 물론 라싱 파리에서도 1935-36 시즌에  라싱 파리의 1부 리그와 쿠프 드 프랑스의 더블 우승을 이끌었다.

프랑스로 이적한 이유 때문에 월드컵에 나서지 못했음에도 1999년 IFFHS 선정 오스트리아 역대 최고의 골키퍼로 선정된 하이덴은 실제로 채프먼이 이끌던 아스날이 1930년에 그를 노렸으나 잉글랜드의 다른 구단들이 거세게 항의하여 이적이 취소된 일은 유명하다.

 

리베로

 


이름: 브루노 페차이
생년월일: 1955년 2월 3일
포지션: 리베로, 센터백, 수비형 미드필더
A매치 기록: 84경기 9골
신체조건: 키 188cm / 몸무게 75kg
주 소속팀: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

'보덴호의 베켄바우어'라고 불렸던 1980년대 초반 최고의 리베로로 큰 키와 탁월한 수비 능력은 물론 공격을 전개하는 빌드업과 수비 라인 조율에서도 훌륭한 모습을 보여준 만능 수비수였다.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와 베르더 브레멘에서 전성기를 누리며 전자의 클럽에서 UEFA컵 우승을 이뤄냈으며 키커 랑리스테 평가에서 월드클래스 등급에 3회 선정되었음은 물론 구에린 스포르티보가 선정한 세계 베스트 일레븐에 2회 선정되는 등 만프레트 칼츠, 한스페터 브리겔, 칼하인츠 푀르스터와 함께 당대 분데스리가를 대표하는 수비수로 이름을 날렸다.

오스트리아 대표팀에서도 1978 아르헨티나 월드컵 2차 조별리그에서 서독을 상대로 3-2로 대역전승을 거둔 코르도바의 기적을 이끌었으며 1982 스페인 월드컵에서도 조국의 2차 조별 리그 진출에 큰 공을 세웠다.

 

센터백

 


이름: 에른스트 하펠
생년월일: 1925년 11월 29일
포지션: 센터백, 라이트백, 레프트백, 수비형 미드필더
A매치 기록: 51경기 5골
신체조건: 키 178cm / 몸무게 79kg
주 소속팀: 라피트 빈

축구 역사상 최고의 감독 중 한 명으로 더 유명하지만 선수 시절에도 페차이, 알라바와 함께 오스트리아 축구를 대표하는 수비수로 이름을 날렸는데 저돌적인 태클과 냉정침착한 판단 및 수비라인 지휘를 겸비했으며 킥력이 우수해 빌드업에 큰 영향력을 끼쳤음은 물론 프리킥 상황에서는 상대의 골문을 직접 노리기도 했다.

라피트 빈에서 전성기를 누리며 구단의 황금기를 이끈 하펠은 오스트리아 분데스리가 6회 우승 및 1951년 젠트로파컵 우승을 이뤄내는데 큰 공을 세웠고 1956-57 시즌 유러피언 컵 16강에서는 디펜딩 챔피언이자 저승사자 군단으로 불렸던 레알 마드리드와의 2차전에서 해트트릭을 기록하며 3-1 승리를 이뤄 승리를 최종 플레이오프까지 끌고 가는 활약을 펼치며 주목받기도 했다.

오스트리아 대표팀에서도 핵심 수비수로 활약하며 1954 스위스 월드컵에서 3위에 올리며 호세 산타마리아, 베르너 리브리히, 자우마 산투스 등과 함께 대회 최고의 수비수 중 하나로 호평받았다.

 

라이트백

 


이름: 게르하르트 하나피
생년월일: 1929년 2월 16일
포지션: 중앙 미드필더, 수비형 미드필더, 라이트백, 센터백
A매치 기록: 93경기 12골
신체조건: 키 169cm / 몸무게 67kg
주 소속팀: 라피트 빈

1950년대 정상급 라이트 하프로 평가받았던 선수로 강력한 킥력을 앞세워 뛰어난 롱패스로 수많은 골 찬스를 만들어냈으며 왕성한 활동량을 앞세워 주 포지션인 하프백은 물론 골키퍼를 제외한 모든 포지션에서 활약할 수 있었다.

라피트 빈에서 전성기를 보낸 하나피는 라피트 빈에서 오스트리안 풋볼 분데스리가 7회 우승을 이뤄냈고 하나피 개인도 오스트리아 올해의 축구선수로 3회 선정되었다. 이 시절 오스트리아 분데스리가에서 아우스트리아 빈의 에이스 에른스트 오크비르크와 라이벌리를 구축하기도 했다.

오스트리아 대표팀에서는 하나피-오크비르크-카를 콜러의 철의 커튼이라고 불렸던 탄탄한 중원 조합을 앞세워 1954 스위스 월드컵에서는 3위라는 호성적을 거두는데 큰 역할을 했다. 발롱도르 노미네이트에도 5회 선정되어 1961년에는 10위에 오르기도 했던 하나피는 은퇴 이후에는 건축가로 변신하며 제2의 인생을 살았다.

 

레프트백

 


이름: 다비드 알라바
생년월일: 1992년 6월 24일
포지션: 레프트백, 센터백, 레프트윙, 중앙 미드필더
A매치 기록: 111경기 15골
신체조건: 키 180cm / 몸무게 78kg
주 소속팀: FC 바이에른 뮌헨

2010년대 세계 최고의 레프트백 중 한 명으로, 공수 밸런스가 잘 잡혔으며 빠른 스피드와 탄탄한 기본기, 그리고 뛰어난 전술 이해도를 바탕으로 레프트백뿐만이 아니라 3선 미드필더와 센터백, 그리고 윙어까지 소화할 수 있었다.

바이에른 뮌헨에서 데뷔해 전성기를 보낸 알라바는 뮌헨에 머무는 동안 분데스리가 9연패를 포함해 총 10회 우승과 포칼 6회 우승, 그리고 2012-13 시즌과 2019-20 시즌에는 UEFA 챔피언스리그에서도 우승하며 두 번의 트레블을 이뤄냈다. 그 과정에서 알라바 개인도 2013-14 시즌 ESM 올해의 팀과 UEFA 챔피언스리그 시즌 베스트 스쿼드에 2회 선정되었다.

레알 마드리드로 이적한 이후에도 수비의 중핵으로 활약하며 라리가와 UEFA 챔피언스리그를 모두 우승하며 더블 크라운을 이뤄냈고 2021-22 시즌 라리가 올해의 팀에 선정된 알라바는 오스트리아 대표팀 소속으로도 세 차례의 UEFA 유로에 참가하며 센추리 클럽에 가입했다. 오스트리아 올해의 축구 선수 10회 선정은 덤이다.

 

수비형 미드필더

 


이름: 요제프 스미스틱
생년월일: 1905년 11월 28일
포지션: 수비형 미드필더, 중앙 미드필더, 센터백
A매치 기록: 39경기 2골
신체조건: 키 186cm / 몸무게 83kg
주 소속팀: 라피트 빈

1920년대 하반기와 30년대 상반기 유럽 대륙에서 이름을 날렸던 분더 팀의 센터 하프로 큰 키와 빠른 스피드를 겸비했으며 인내심이 강하고 전투적이면서 동시에 지능적인 수비로 상대 센터 포워드들을 집어삼켰다. 게다가 훌륭한 롱 패스를 앞세워 안정적인 볼 배급으로 명성을 떨치기도 했다.

라피트 빈에서 전성기를 누리며 오스트리아 리그 3연패 및 1930 미트로파컵 우승을 포함해 공식대회 5회 우승 및 7회 준우승을 이뤄낸 스미스틱은 1930년 미트로파 컵에서는 1926-27 시즌에 자신들을 2게임 동안 합계 3-7로 패하게 했던 스파르타 프라하를 상대로 복수에 성공하며 팀의 첫 우승을 차지하기도 했다.

1930년대 초반 세계 최고의 국가대표팀이라 불렸던 분더 팀의 주장으로 활약한 스미스틱은 1931-32 시즌 중유럽컵에서 디펜딩 챔피언 이탈리아를 무찌르고 우승을 차지했으며 1934 이탈리아 월드컵에서는 편파 판정이라는 악재 속에서도 팀을 준결승으로 이끌어내는 공을 세웠다. 그리고 말년에는 후배 에른스트 오크비르크의 포지션을 공격수에서 하프백으로 바꾸도록 설득했고 자신의 노하우를 상당히 전수해주며 세계 최고의 하프백으로 키워내기도 했다.

 

라이트 메짤라

 


이름: 에른스트 오크비르크
생년월일: 1926년 3월 7일
포지션: 수비형 미드릴더, 중앙 미드필더, 공격형 미드필더, 사이드백
A매치 기록: 62경기 6골
신체조건: 키 183cm / 몸무게 85kg
주 소속팀: 아우스트리아 빈

1950년대 최고의 하프백 중 한 명으로 드넓은 시야와 정교한 롱패스를 활용한 우수한 볼 배급 능력, 그리고 원활한 수비력과 탄탄한 기본기를 겸비했음은 물론 축구지능까지 고차원적인 수준이라  인사이드 포워드나 풀백으로도 뛸 수 있었고 무엇보다도 꾸준하고 일관적인 경기력을 유지해서 한 영국 언론사는 그를 두고 시계태엽이라 부르기도 했다.

아우스트리아 빈에서 전성기를 누리며 커리어의 시작과 끝을 함께한 오크비르크 개인 통산 오스트리아 분데스리가 5회 우승 및 오스트리안컵 3회 우승을 이뤄냈음은 물론 1952년에는 소규모 클럽 월드컵인 코파 히우에서 팀을 4강에 올리며 대회 베스트 일레븐에 선정되었고 1953년에는 FIFA XI으로 선정되어 잉글랜드 FA 창립 90주년 기념 경기에 출전하며 창의적인 패스로 공격의 시발점 역할을 하며 4-4 무승부를 기록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오스트리아 대표팀에서도 라이트 하프 게르하르트 하나피, 레프트 하프 칼 콜러와 함께 화려한 중원라인을 형성해 1954 스위스 월드컵에서는 팀이 3위라는 호성적을 거두는데 큰 공을 세워 대회 베스트 일레븐에 선정되었고 말년에는 이탈리아 무대에 중견팀이었던 삼프도리아로 입단해 새로운 도전을 펼친 오크비르크는 비록 우승 트로피를 들지는 못했지만 개인은 뛰어난 활약을 펼쳐 1956년 발롱도르 투표에서 7위에 랭크되었으며 1960-61 시즌에는 그 당시 삼프도리아의 구단 역사상 최고의 성적이었던 세리에 A 4위에 올리는데 공헌했다.

 

레프트 메짤라

 


이름: 헤어베르트 프로하스카
생년월일: 1955년 8월 8일
포지션: 중앙 미드필더, 수비형 미드필더, 공격형 미드필더
A매치 기록: 83경기 10골
신체조건: 키 180cm / 몸무게 76kg
주 소속팀: 아우스트리아 빈

1980년대 초반, 유럽 정상급의 후방 플레이메이커로 평가받았던 선수로 광활한 시야와 창의적이면서도 정확한 롱패스를 활용해 상대가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 수많은 골 찬스를 만들어냈다.

아우스트리아 빈에서 오스트리안 분데스리가 7회 우승과 오스트리안 컵 3회 우승을 이뤄낸 프로하스카는 세리에 A에서도 인테르에서는 코파 이탈리아 우승을 이뤄냈으며 AS 로마에서는 1982-83 시즌에 세리에 A 우승을 이뤄냈고 해달 시즌에 구에린 스포르티보 선정 세리에 A 외국인 선수 랭킹 5위에 선정되었다. 그리고 오스트리아 올해의 선수에 3회 선정되었다.

1950년대 오크비르크 은퇴 이후 침체기를 겪던 오스트리아 대표팀을 다시 월드컵 본선 무대로 올리는데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한 프로하스카는 1978 아르헨티나 월드컵 2차 조별 리그에서는 탈락이 확정된 상황에서 디펜딩 챔피언 서독을 상대로 3-2로 이기는데 큰 공을 세우며 축구의 프로화가 가속화되었던 1960년 이후로는 오스트리아 최고의 선수 중 하나로 꼽힌다. 그 증거로 2003년에 오스트리아 축구협회 선정 지난 50년간 최고의 오스트리아 축구선수로 선정되었다.

 

공격형 미드필더

 


이름: 마티아스 신델라
생년월일: 1903년 2월 10일
포지션: 포워드, 스트라이커, 공격형 미드필더
A매치 기록: 43경기 26골
신체조건: 키 175cm / 몸무게 63kg
주 소속팀: 아우스트리아 빈

펄스 나인의 중시조 중 한 명으로 알려진 선수로 몸싸움을 제외하고는 공격수로서 못하는 게 없다고 알려져 있으며 그중에서도 창의적인 플레이와 드리블 스킬이 뛰어나 그라운드의 모차르트라는 별명으로 불렸으며  몸싸움을 허락하지 않을 정도로 몸의 움직임이 빨라서 마치 바람에 날리는 종이같이 몸싸움을 피했기 때문에 종이 인간이라고도 불렸다.

당대 유럽 최고의 선수 중 한 명으로 불렸던 신델라는 선수 생활 대부분을 아우스트리아 빈에서 보냈으며 1926년에는 리그 우승을 이뤄냈으며 컵 대회 5회 우승과 미트로파 컵 2회 우승을 이뤄냈는데 특히 1933년 대회 결승전에서는 주세페 메아차가 이끄는 인테르를 결승전에서 만났는데 1차전에서는 패했지만 2차전에서는 해트르릭을 기록하며 역전 우승을 이뤄내는 괴력을 보였다. 신델라 개인도 1933년 대회를 포함해 미트로파컵 득점왕을 2회 수상했고 오스트리아 리그 득점왕은 3회 수상했기에 리그 우승 횟수는 많지 않았지만 기량 자체가 워낙 훌륭해 구단 역사상 최고의 선수로 군림했다.

오스트리아 표팀에서도 유럽 대륙 최강이라 불렸던 분더팀의 에이스로 활약한 신델라는 펄스 나인 역할을 맡아 수비를 유인한 뒤 인사이드 포워드인 안톤 샬이나 요제프 비칸에게 득점 찬스를 내주는 획기적인 플레이로 당대 수비의 정석인 대인 방어 시스템을 완벽하게 붕괴시키며 1931-32 시즌 중유럽컵 우승 및 2회 준우승을 이뤄냈고 1934 이탈리아 월드컵에서도 편파판정 끝에 4위라는 기대 이하의 성적을 거뒀지만 진델라는 대회 베스트 일레븐에 들었다.

 

처진 공격수

 


이름: 요제프 비칸
생년월일: 1913년 9월 25일
포지션: 포워드, 스트라이커
A매치 기록:  30경기 19골
신체조건: 키 180cm / 몸무게 75kg
주 소속팀: 슬라비아 프라하

펠레, 게르트 뮐러, 호날두, 메시와 함께 축구 역사에서 가장 득점력이 좋은 선수 중 한 명으로 평가받았던 선수로 100m를 10초 대에 주파하는 빠른 스피드로 상대 수비 뒷공간으로 침투해 뛰어난 결정력으로 마무리하던 공격수였는데 단순한 포처가 아니라 훈련 시간에 묘기를 부렸다는 점을 보면 탁월한 드리블러였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오스트리아의 라피트 빈에서 데뷔해 정규리그 2회 준우승과 1933-34 시즌 리그 득점왕에 올라 처음 주목을 받았고 아드미라 빈으로 이적해서는 정규리그 2연패를 이뤄냈는데 이때의 활약으로 '분더 팀'이라고 불린 오스트리아 대표팀의 일원으로 활약하며 1934년 이탈리아 월드컵 4위라는 성적을 냈다. 그러나 비찬의 아버지는 남부 체코 출신 이민자였고 어머니도 체코 쪽 혈통이었던 관계로 체코슬로바키아로 떠나고 싶어 했기에 비찬은 일방적으로 계약의 파기를 꺼내기에 이르렀고 아드미라는 비찬에게 4년의 출장 정지라는 초강수로 응수했기에 비찬을 영입하고 싶어 하던 슬라비아 프라하는 변호사를 선임하고 거액의 이적료를 제시해서 출장 정지 징계를 깎으려 시도했다.

우여곡절 끝에 비찬은 1937년 8월부터 슬라비아 프라하에서 활약을 하게 되었는데 이때 비찬은 전성기 궤도에 오르며 엄청난 골 폭풍을 기록하기 시작했는데 슬라비아 프라하의 1938 미트로파컵 우승을 시작으로 정규리그 4연패를 포함한 5회 우승을 이뤄냈고 비찬 개인은 1938년 우승과 더불어서 미트로파컵 득점왕에 올랐으며 정규리그 득점왕을 무려 11회나 차지했다. 특히 1943–44 시즌에는 32경기에 출전해 76골을 기록하는 괴력을 선보였다. 체코슬로바키아 대표팀에서도 14경기에 출전해 12골을 득점했으나 세계대전 기간인지라 국제대회는 나서지 못했다.

 

스트라이커

 


이름: 한스 크란클
생년월일: 1953년 2월 14일
포지션: 스트라이커, 라이트윙, 레프트윙, 포워드
A매치 기록: 69경기 34골
신체조건: 키 182cm / 몸무게 77kg
주 소속팀: 라피트 빈

오스트리아 축구 역사상 가장 위대한 스트라이커 중 한 명으로 페널티 박스의 군주라는 표현이 아깝지 않았는데 적절한 위치 선정과 원샷원킬이라는 칭호가 아깝지 않은 정확한 마무리를 바탕으로 너무나도 쉽게 득점했는데 특히 왼발을 잘 썼다.

1970-71 시즌에 라피트 빈에서 데뷔해 주목받았으나 전성기를 맞이했던 아우스트리아 빈의 아성에 밀려 리그 우승을 이뤄내진 못했던 크란클은 바르셀로나로 이적한 첫 시즌에는 1978-79 시즌 UEFA 컵 위너스컵 결승전에서 연장전 결승골을 기록하며 우승에 방점을 찍었음은 물론 라리가 득점왕에게 수상하는 피치치 트로피를 수상하기도 했다. 그러나 부상으로 인한 적응 실패로 다시 오스트리아로 돌아왔는데 라피트 빈에서 오스트리아 분데스리가 2회 우승을 이뤄내며 정규리그 2회 우승, 오스트리안 컵 4회 우승 및 크란클 개인은 리그 득점왕 4회 수상 및 오스트리아 올해의 선수 5회 선정이라는 대업적을 이뤄냈다.

오스트리아 대표팀에서는 1978 아르헨티나 월드컵 본선 진출은 물론 8강 2차 조별리그에서 디펜딩 챔피언 서독을 상대로 멀티골을 터뜨리면서 조국이 독일을 상대로 47년 만에 승리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 해당 시즌에는 클럽에서도 공식전 41경기에 출전해 42골을 득점하며 유러피언 골든슈를 수상했을 정도로 폼이 좋았는데 월드컵에서의 출중한 퍼포먼스까지 더해져 발롱도르와 옹즈도르에서 모두 2위에 올랐다.

 

감독

 


이름: 우고 마이슬
생년월일: 1881년 11월 16일
부임기간: 1919~1937

오스트리아 축구의 태동기를 연 명장으로 뛰어난 전술 운용 능력과 냉철한 승부사적 기질과 축구에 대한 열정으로 유명했으며 무려 10개 국어가 가능했던 뛰어난 외국어 능력을 바탕으로 각국의 지도자들과 원활하게 교류했는데 특히 그 과정에서 만난 지미 호건을 위시한 다뉴브 학파와 적극적으로 교류한 뒤에는 짧은 패스와 스위칭 플레이로 공격을 풀어나가는 전술을 적극적으로 연구했고 호건을 오스트리아 대표팀 코치로 초빙한 뒤에는 그와 함께 펄스나인 전술을 개발했고 마티아스 진델라는 이 전술의 수혜자가 되었다.

선수 은퇴 후 심판으로 활동하가다 1912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대표팀 감독으로 부임했다가 제1차 세계대전으로 징집되었다가 전쟁이 끝난 뒤인 1919년부터 심근경색으로 숨을 거둔 1937년까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해체로 인해 오스트리아 대표팀 감독을 맡았는데 그는 오스트리아 축구계를 유럽 일류로 올렸음은 물론 마티아스 진델라, 요제프 슈미스틱, 요제프 비칸, 발테르 나우쉬 등 뛰어난 재능들을 적극적으로 기용해 분더 팀이라 불리던 대표팀을 이끌고 1931-32 시즌 중유럽컵 우승, 1934 이탈리아 월드컵 4위 및 1936 베를린 올림픽 은메달이라는 성과를 이뤄냈다.

여담으로 오스트리아 대표팀 감독으로 재직중이던 1929년에 수술을 받은 이후, 마이슬은 거동이 불편한 관계로 지팡이를 짚고 다니게 되었는데 1930년대 초반 오스트리아 대표팀이 분더팀으로까지 불리며 오스트리아가 잘 나가게 되자 이 지팡이가 마이슬의 상징이 되었다.

 


베스트 일레븐

 

 


3. 서브 14인 포함 1군 스쿼드

 


이름: 발테르 제만
생년월일: 1927년 5월 1일
포지션: 골키퍼
A매치 기록: 41경기 78실점 / 7클린시트
신체조건: 키 182cm / 몸무게 79kg
주 소속팀: 라피트 빈

베아라, 그로시치와 함께 1950년대 중유럽을 대표하는 골키퍼로 특유의 카리스마와 강한 리액션으로 수비라인을 완벽하게 지휘하며 부다페스트의 호랑이, 글래스고의 흑표범이라고 불렸다.

라피트 빈에서 오스트리아 분데스리가 8회 우승 및 오스트리아 컵 2회 우승을 이뤄낸 제만은 오스트리아 올해의 선수상을 3회 수상했고 1951년에는 미트로파 컵을 우승했다.

오스트리아 대표팀 소속으로도 1948-1953 중유럽컵과 1954 스위스 월드컵에서도 주전으로 활약한 제만은 두 대회에서 모두 3위에 오르는 활약을 펼쳤다. 그리고 1953년 웸블리에서 열린 잉글랜드와 유럽 올스타의 친선 경기에서 블라디미르 베아라를 제치고 유럽 올스타 팀의 선발로 출전했다.

 

 

이름: 프리드리히 콘칠리아
생년월일: 1948년 2월 25일
포지션: 골키퍼
A매치 기록: 84경기 97실점 / 33클린시트
신체조건: 키 181cm / 몸무게 80kg
주 소속팀: 바커 인스브루크

1970년대 후반~80년대 초반, 유럽 무대 톱클래스 골키퍼로 기민한 반사신경과 한 박자 빠른 다이빙에 치고 나오는 일대일 수비, 그리고 우수한 예측력을 바탕으로 한 페널티킥 선방 능력으로 골문을 튼튼하게 방어했다.

오스트리아 클라겐푸르트에서 데뷔해 바커 인스부르크에서 전성기를 누린 콘칠리아는 바커 인스부르크에서 오스트리아 분데스리가 4회 우승 및 오스트리아 컵 3회 우승, 그리고 미트로파컵 2연패를 이뤄냈는데 특히 1975년에는 오스트리아 분데스리가와 오스트리아 컵, 그리고 미트로파 컵 미니 트레블을 이뤄냈다. 그리고 해외 무대에 도전해 안더레흐트로 이적했으나 벨기에 무대 적응에 실패하고 오스트리아로 돌아와 아우스트리아 빈에서 커리어를 이어나가며 부활했는데 그곳에서도 오스트리아 분데스리가 4회 우승 및 오스트리아 컵 3회 우승을 이뤄내며 개인 통산 정규리그 8회 우승 및 도메스틱 컵대회 6회 우승을 기록했다.

1970년부터 오스트리아 대표팀에 소집되어 중용받은 콘칠리아는 1978 아르헨티나 월드컵에서는 팀의 2차 조별리그 진출에 공헌했음은 물론 2차 조별리그에서도 서독을 상대로 뛰어난 선방을 보여주며 코르도바의 기적을 이뤄냈다. 그리고 1982 스페인 월드컵에서도 2차 조별리그 진출에 큰 공을 세웠다.

 

 

이름: 요제프 블룸
생년월일: 1898년 2월 4일
포지션: 센터백, 라이트백, 레프트백
A매치 기록: 51경기 3골
신체조건: 키 175cm / 몸무게 79kg
주 소속팀: 퍼스트 비엔나

1920년대 하반기~30년대 초반, 중유럽 무대 최고의 수비수 중 한 명으로 강인한 대인 수비와 기술적인 슬라이딩 태클, 그리고 빠른 스피드와 적절한 위치 선정으로 수비하기 쉬운 위치를 선점해 공격수를 괴롭혔고 수비라인 지휘에 뛰어났음은 물론, 수비수였음에도 킥력이 우수해 페널티킥과 프리킥을 전담하며 통산 68골을 기록했다.

누스도르퍼에서 데뷔해 2부 리그인 퍼스트 비엔나로 이적해 1918년에 팀을 승격시키며 오스트리아의 명문으로 발돋움하는데 기틀을 세운 블룸은 승격팀의 수비라인을 이끌며 오스트리아 분데스리가 2회 우승 및 오스트리아 컵 3연패를 포함해 4회 우승을 우승을 이뤄냈고 1931년에는 미트로파컵 결승전에서 비너 AC를 상대로 홈과 원정에서 모두 승리하는데 공헌하며 승격 13년 만에 미트로파컵 우승을 이뤄내며 중유럽을 대표하는 구단으로 위상을 대폭 올렸다. 그리고 1933년 미트로파컵에서는 선수 겸 감독으로 우승을 차지하며 화려하게 선수생활을 마무리했다.

오스트리아 대표팀에서도 12년간 주전으로 활약한 블룸은 당시 A매치 50경기 이상 출전한 극소수의 선수였는데 두 번의 중유럽컵에 참가했고 1931-32 시즌 중유럽컵에서는 주장 완장을 차고 우승에 공헌했다.

 

 

이름: 카를 세스타
생년월일: 1906년 3월 18일
포지션: 센터백, 레프트백
A매치 기록: 44경기 1골
신체조건: 키 166cm / 몸무게 69kg
주 소속팀: 아우스트리아 빈

1930년대 중유럽 최고의 수비수 중 한 명으로 2-3-5 포메이션의 레프트 풀백으로 주로 활약했는데 키는 작았지만 몸집이 다부졌고 빠른 스피드와 날카로운 태클로 상대를 제압했기에 칼날이라는 별명으로 불렸으며 초년에 공격수로 활약했던 이력이 있어 공격력도 우수했는데 그 당시 다른 수비수들과는 다르게 적극적으로 오버래핑을 시도했던 당시 축구계의 혁명가였다.

지머링에서 데뷔해 빈 AC에서 1930-31 시즌 오스트리아 컵 우승을 이뤄내며 두각을 나타냈고 아우스트리아 빈에서 전성기를 누린 세스타는 오스트리아 빈에서 오스트리아 컵 2회 우승을 이뤄냈고 1936년에는 그라스호퍼와 볼로냐, 슬라비아 프라하, 우이페슈티, 그리고 결승전에서 스파르타 프라하를 모두 꺾고 미트로파컵 우승을 차지했지만 아쉽게도 정규리그 우승을 차지하지는 못했다.

분더팀이라 불리던 오스트리아 대표팀에서도 수비라인의 핵으로 활약한 세스타는 1931-32 시즌 중유럽컵 우승을 이뤄냈고 1934 이탈리아 월드컵에서는 오스트리아의 4경기에 모두 출전하며 오스트리아의 4강 진출을 이끌었다. 그러나 안슐루스로 인해 1938 프랑스 월드컵을 나서지 못했고 1940년대에는 잠시 독일 대표팀으로 뛰었다,

 

 

이름: 카를 슈토츠
생년월일: 1927년 3월 27일
포지션: 센터백, 라이트백, 수비형 미드필더
A매치 기록: 42경기 1골
신체조건: 키 173cm / 몸무게 72kg
주 소속팀: 아우스트리아 빈

제2차 세계대전 직후에 활약했던 수비수로 키가 큰 편은 아니었지만 세계 최고 수준의 제공권 경합 능력을 가지고 있었고 빠른 스피드와 우수한 수비 위치 선정으로 상대를 막아내며 무리한 태클을 시도하지 않고 안정적으로 수비했으며 수비라인 지휘 능력 역시 우수했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가장 치열했던 전투 중 하나였던 스탈린그란드 전투에 소년병으로 참전했다가 소련군의 포로가 되었는데 1948년에 오스트리아로 돌아와서 FC 빈에서 데뷔했고 아우스트리아 빈에서 전성기를 누리며 오스트리아 분데스리가 4회 우승 및 오스트리아 컵 2회 우승을 이뤄냈다.

오스트리아 대표팀에서도 중용받은 슈토츠는 1953년에는 유럽 올스타에 선정되어 잉글랜드와의 웸블리 친선전에 출전했고 1954 스위스 월드컵에서 3위를 경험했다.

 

 

이름: 로베르트 사라
생년월일: 1946년 6월 9일
포지션: 라이트백
A매치 기록: 55경기 3골
신체조건: 키 173cm / 몸무게 72kg
주 소속팀: 아우스트리아 빈

1970년대 오스트리아 무대 최고의 수비수 중 한 명으로 안정적인 수비력과 탄탄한 공격력을 겸비했는데 특히 날카로운 오른발 크로스로 득점 찬스를 만드는 부분과 우수한 지구력을 바탕으로 공격과 수비, 양 면에 적극적으로 가담해 상대를 끈질기게 막아내는 것으로 유명했다.

선수생활 마지막 시즌을 제외하면 아우스트리아 빈에서만 보낸 사라는 구단의 전성기를 이끌며 오스트리아 분데스리가 9회 우승 및 오스트리아 컵 6회 우승을 이뤄냈다. 자라 개인도 오스트리아 분데스리가에서만 517경기에 출전하며 오스트리아 분데스리가 역대 개인 통산 최다 출전자에 랭크되었고 은퇴한 뒤인 2001년에는 팬선정 아우스트리아 빈 세기의 팀에 이름을 올렸다.

오스트리아 대표팀에서도 1978 아르헨티나 월드컵에 참가해 서독과의 경기에서 크란클의 역전골을 어시스트하며 코르도바의 기적을 이뤄내는데 공헌했고 1998년에 잡지 '크로넨 차이퉁'이 선정한 오스트리아 세기의 팀에 선정되었다.

 

 

이름: 발테르 나우쉬
생년월일: 1907년 2월 5일
포지션: 중앙 미드필더, 수비형 미드필더, 공격형 미드필더, 레프트백
A매치 기록: 39경기 1골
신체조건: 키 179cm / 몸무게 77kg
주 소속팀: 아우스트리아 빈

1930년대 유럽 최고의 하프백 중 한 명으로 포워드로 경력을 시작해 전성기를 레프트 하프 및 센터 하프로 보냈으며 말년에는 수비수로 뛰었을 정도로 축구 전반에 대한 이해도가 높았는데 그중에서도 특히 드넓은 시야를 바탕으로 한 날카로운 스루 패스로 득점 찬스를 만들어내는 부분과 빠른 기동력을 바탕으로 적절한 위치에서 볼을 받거나 상대를 유리한 위치에서 저지하는 능력이 돋보였다.

16세의 어린 나이에 데뷔한 나우쉬는 마티아스 진델라와 함께 아우스트리아 빈의 전성기를 이끌며 오스트리아 분데스리가 5회 우승을 이뤄냈고 1933년과 1936년에는 각각 인테르 밀란과 스파르타 프라하를 상대로 미트로파컵 우승을 이뤄내는데 큰 공을 세웠다.

당대 유럽 최강이라 불린 분더팀 오스트리아 대표팀에서도 주축으로 활약하며 무려 네 번의 중유럽컵에 나가 1931-1932년 대회에서는 우승을 차지했고 1927-30년 대회와 1933-35년 대회에서는 준우승을 차지하는 등 뛰어난 활약을 보였으나 정작 1934 이탈리아 월드컵에서는 부상으로 낙마하며 불참했다.

 

 

이름: 카를 콜러
생년월일: 1929년 2월 9일
포지션: 중앙 미드필더, 수비형 미드필더, 레프트백, 센터백
A매치 기록: 86경기 5골
신체조건: 키 182cm / 몸무게 77kg
주 소속팀: 퍼스트 빈

1950년대 초중반 유럽 최고의 레프트 하프 중 한 명으로 스피드는 평범했지만 공수 양면에서 뛰어났는데 공격적인 부분에서는 정밀도 높은 패스로 팀의 플레이메이커 역할을 맡을 수도 있었음은 물론 강력한 중거리 슈팅으로 때때로 분위기를 바꾸기도 했고 수비적인 부분에서는 한혈마와 같은 지구력과 강력한 집념을 바탕으로 경기장 전역을 뛰어다니며 플레이메이커를 보호하는 능력에도 능했다.

자신이 주축인 소속팀 퍼스트 빈에서는 팀의 플레이메이커 역할을 훌륭하게 수행했는데 소속팀이 양대 전력인 라피트 빈과 아우스트리아 빈에 비해 전력이 약했음에도 불구하고 1954-55 시즌 오스트리아 분데스리가 우승 및 1960-61 시즌 오스트리아 컵 우승을 이뤄내는 기염을 토했다.

오스트리아 대표팀에서는 사령관 에른스트 오크비르크 및 만능 미드필더 게르하르트 하나피를 보좌하며 함께 중원을 구성하며 활약했는데 1954 스위스 월드컵에서 조국의 준결승 진출 및 3.4위전 승리를 이끌었고 1958 스웨덴 월드컵에도 참가했다.

 

 

이름: 안드레아스 헤어초크
생년월일: 1968년 9월 10일
포지션: 공격형 미드필더, 중앙 미드필더, 레프트윙
A매치 기록: 103경기 26골
신체조건: 키 183cm / 몸무게 80kg
주 소속팀: 베르더 브레멘

1990년대 오스트리아 최고의 축구 선수이자 분데스리가 정상급 공격형 미드필더로 마치 자국 역사상 최고의 음악가인 모차르트를 연상시키는 우아한 패스와 깔끔한 드리블로 공격을 이끌었으며 정교한 왼발 프리킥과 코너킥으로도 명성을 떨쳤다.

라피트 빈에서 데뷔해 주목받았던 헤어초크는 베르더 브레멘에 입단한 첫 시즌에 공격수 윈톤 루퍼와 합을 맞추며 팀의 분데스리가 우승을 견인했고 이듬해에는 1993-94 시즌 DFB포칼 우승을 이뤄냈으며 UEFA 챔피언스리그에서도 좋은 모습을 보여줬다. 그러다가 1995-96 시즌에 바이에른 뮌헨으로 이적했으나 부진했고 다시 베르더 브레멘으로 돌아와 여섯 시즌을 더 보내며 1997-98 시즌 인터토토컵 우승 및 1998-99 시즌 DFB 포칼 우승을 이끌었고 헤어초크 개인도 1994-95 시즌 키커 선정 분데스리가 시즌 베스트 일레븐으로 선정되는 영광을 누렸다.

오스트리아 대표팀에서도 A매치 103경기에 출전하며 핵심으로 군림한 헤어초크는 1992년 오스트리아 올해의 선수상을 수상했고 1990 이탈리아 월드컵과 1998 프랑스 월드컵 본선에 참가했다.

 

 

이름: 카를 치셰크
생년월일: 1910년 8월 28일
포지션: 라이트윙, 포워드, 공격형 미드필더
A매치 기록: 40경기 24골
신체조건: 키 171cm / 몸무게 69kg
주 소속팀: 아드미라 바커

1930년대와 40년대에 걸쳐 이름을 날렸던 아웃사이드 라이트로 측면에서 크로스를 올리기보다는 중앙으로 침투하는 플레이를 선호했는데 우수한 공간지각 능력과 빠른 스피드를 겸비해 적절한 위치로 침투해 많은 득점을 올렸음은 물론 공중볼 경합 능력과 헤더 득점에도 우수한 모습을 보였다. 심지어 측면에서 크로스를 선호하지 않았을 뿐 막상 크로스를 줘야 하는 상황에서는 양질의 크로스를 제공하기도 했다.

선수 생활 전체를 지금의 아드미라 바커인 바커 빈에서만 보낸 치셰크는 1930년대에는 우승 트로피를 들지 못했고 조국 오스트리아가 독일에 합병된 뒤에는 가울리가 오스트마르크에서 3회 준우승을 이뤄냈지만 우승을 하지 못하다가 나치의 패망으로 오스트리아가 독립한 뒤에는 1946-47 시즌 오스트리아 분데스리가와 오스트리아컵을 동시에 우승하며 도메스틱 더블을 기록하기도 했다.

오스트리아 대표팀에서도 핵심으로 활약한 치셰크는 1931년 데뷔전에서 강호 스코틀랜드를 상대로 5-0 대승을 이뤄내는 과정에서 멀티골을 기록하며 화려하게 데뷔했고 1931-32 중유럽컵에서는 조국의 우승을 이끌었다. 그리고 1934 이탈리아 월드컵에서도 4강 진출이라는 성과를 냈다. 그러나 나치 독일 체제에서는 에른스트 레너에게 밀려 뽑히지 않다가 독립 이후에 다시 선발되었다.

 

 

이름: 알프레드 쾨르너
생년월일: 1926년 2월 14일
포지션: 레프트윙, 포워드
A매치 기록: 47경기 15골
신체조건: 키 174cm / 몸무게 70kg
주 소속팀: SK 라피트 빈

1950년대 오스트리아 무대 최고의 아웃사이드 레프트로 형 로베르트에 비해 스피드와 드리블 돌파력은 약간 부족했지만 우수한 공간 지각력과 영리한 축구지능, 그리고 정교하게 허를 찌르는 왼발 패스를 활용한 플레이메이킹으로 유명했으며 또한 측면에서의 정교한 왼발 크로스로 아군 공격수의 득점을 도왔고 특히 다양한 슈팅으로 상대의 골문을 공략하는 부분에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했는데 특히 좁은 각도에서 휘어지는 왼발 슈팅은 그의 트레이드 마크였다.

제2차 세계대전 직후에 아웃사이드 라이트였던 형 로베르트와 함께 라피트 빈의 측면 공격을 책임졌던 알프레드 쾨르너는 소속팀의 오스트리아 분데스리가 7회 우승 및 1945-46 시즌에는 리그에 이어 오스트리아 컵까지 동시에 석권하며 도메스틱 더블을 이뤄냈고 1951년에는 젠트로파 컵에서 라치오와 아드미라 빈을 꺾고 우승했다. 특히 라피트 빈의 홈경기에는 17년간 한 번도 결장하지 않았다. 그리고 말년에는 아드미라 빈에서도 활약했다.

오스트리아 대표팀에서도 주축으로 활약한 쾨르너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에 해방된 조국의 대표팀에 재건을 도왔고 1954 스위스 월드컵에서는 홈팀 스위스를 상대로 멀티골을 터트리는 등 조국이 3위라는 성적을 기록하는 과정에서 큰 공을 세웠으며 1958 스웨덴 월드컵에서도 본선 진출에 성공했다.

 

 

이름: 안톤 샬
생년월일: 1907년 6월 22일
포지션: 포워드, 레프트윙, 스트라이커
A매치 기록: 28경기 27골
신체조건: 키 170cm / 몸무게 72kg
주 소속팀: 아드미라 바커

1920년대 후반부터 1930년대 중반 세계 최고의 인사이드 포워드 중 한 명으로 빠른 스피드와 우수한 테크닉을 바탕으로 수많은 득점을 기록했고 주 포지션인 인사이드 포워드 이외에도 아웃사이드 포워드나 풀백으로도 종종 기용되었다.

아드미라 빈이라고 불리던 시절의 아드미라 바커에서 전성기를 누린 샬은 통산 353경기 304골을 기록했는데 개인은 오스트리아 분데스리가 득점왕을 무려 5회 수상했고 팀은 오스트리아 분데스리가 7회 우승 및 컵대회 3회 우승을 이뤄냈고 안슐루스 이후에도 1938-39 시즌 가울리가 오스트마르크 우승 및 독일 챔피언십 준우승이라는 성적을 냈다.

분더 팀이라고 불렸던 1930년대 초반 유럽 최강 오스트리아의 핵심으로 활약한 샬은 1931-32 시즌 중유럽컵 우승을 이뤄내는데 큰 공을 세웠고 1934 이탈리아 월드컵에서도 준결승 진출에 큰 역할을 했다. 특히 대표팀에서는 독일과 스위스를 상대로 2회의 해트트릭을 기록했고 헝가리와 벨기에를 상대로 2회나 포트트릭을 기록했다.

 

 

이름: 요한 슈투드니카
생년월일: 1883년 10월 12일
포지션: 포워드, 스트라이커, 레프트윙, 공격형 미드필더
A매치 기록: 28경기 18골
신체조건: 키 167cm
주 소속팀: AC 비너

중유럽 최초의 스타플레이어이자 최초의 펄스 나인으로 역사에 이름을 알린 인물로 일반적인 센터 포워드와는 다르게 박스 안에만 머무르지 않고 보다 아래의 위치에서 패스와 드리블을 통해 경기를 풀어나갔던 아름다우면서도 기술적인 다뉴브 스타일의 시조라 평가받는다.

비너 AC의 원 클럽맨이었던 슈투드니카는 정규리그 4회 우승 및 챌린지 컵 3회 우승을 이뤄냈고 슈투드니카 개인도 1902년과 1903년에는 세계에서 가장 많은 골을 득점하기도 했다.

오스트리아 축구의 선구자와도 같았던 요한 슈투드니카는 오스트리아 대표팀에서도 1912 스톡홀름 올림픽에 오스트리아 대표로 참가했는데 독일을 상대로 동점골을 기록하며 5-1 대승을 이끌어냈다.

 

 

이름: 프란츠 빈데르
생년월일: 1911년 12월 1일
포지션: 스트라이커, 포워드
A매치 기록: 19경기 16골
신체조건: 키 190cm / 몸무게 82kg
주 소속팀: 라피트 빈

1930년대 하반기부터 40년대 상반기까지 명성을 떨쳤던 거구의 고전적인 스트라이커로 큰 덩치로 인해 스피드도 느렸고 볼을 다루는 기술도 평범한 수준이었지만 빠른 방향 전환과 공이 터질듯한 강력한 킥력과 우수한 슈팅스킬을 바탕으로 거리를 가리지 않고 중거리 슈팅을 꽂아 넣었으며 강력한 피지컬과 투지를 앞세워 공중볼 경합에서 장점을 보였다.

선수 생활 전체를 라피트 빈에서 보낸 빈데르는 422경기에 출전해서 700골을 득점했고 리저브 경기를 제외하고 1군 경기로 한정해도 378경기에서 591골을 기록한 득점기계였는데 실제로 독립국 시절에 오스트리아 1부 리그 4회 우승과 안슐루스 시절에 있었던 가울리가 오스트마르크에서 2회 우승을 차지한 것을 포함해 정규리그 6회 우승을 이뤄냈고 1938년에는 DFB포칼 우승을 이뤄냈으며 1941년에는 독일 챔피언십 우승을 이뤄냈음은 물론 빈데르 개인도 오스트리아 1부 리그 득점왕과 가우리가 오스트마르크 득점왕을 각각 3회 수상했고 DFB포칼과 독일 축구 챔피언십에서도 각각 한 번씩 득점왕에 올랐다.

오스트리아 대표팀에서도 당시 고령이었던 진델라나 체코슬로바키아로 떠난 비찬의 후계자로 주목받으며 착실하게 활약했던 빈데르는 1938년 월드컵 본선 진출을 가리는 라트비아전에서는 빈더의 골로 2-1 역전승을 거뒀으나 안슐루스로 인해 빈더의 월드컵 데뷔는 이뤄지지 않았다. 나치 체제 독일 대표팀에서도 9경기 10골을 기록했고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오스트리아 대표팀으로 복귀한 뒤에도 대표팀 레귤러 멤버로 활약하며 오스트리아에서는 총 19경기에 출전해 16골을 기록했다.

 


오스트리아 역대 올스타 1군 25인 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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