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라질 축구 국가대표팀 역대 올스타

국대 올스타 짜보기/남미

브라질 축구 국가대표팀 역대 올스타

토르난테 2025. 5. 26. 1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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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사항

 

2025년 5월 25일 기준입니다.

 

기존에는 대표팀 활약에 가산점을 더 부여했지만 이 부분을 제외하고 다시 선정했습니다. 즉 독일 대표팀 경력만 있으면 그 안에서는 선수 자체의 위상을 반영해 선정했습니다.

 

그러나 감독은 브라질 대표팀 감독으로서의 활약을 기준으로 뒀습니다. 고로 셀레상의 지휘봉을 잡은 적 없는 감독들은 선정 대상에서 걸러졌습니다.

 

최소한의 밸런스는 챙길 예정이며 더블 리베로를 내는 현상이나 중앙 공격수로만 세 명이 나서는 현상은 최대한 피할 예정입니다.

 

선수 사진은 에펨네이션에서 활동하고 계시는 법정스님의 소유님의 건조폼을 주로 활용했습니다.

 


1. 브라질 축구 국가대표팀

 

별칭: 셀레상

월드컵: 출전 21회 / 우승 5회

코파 아메리카: 출전 35회 / 우승 9회

컨페드컵: 출전 7회 / 우승 4회

올림픽: 출전 13회 / 금메달 1회

최다 출전 선수: 카푸, 142경기

최다 득점 선수: 네이마르, 79골

 


2. 베스트 일레븐

 

골키퍼

 

 

이름: 지우마르

생년월일: 1930년 8월 22일

포지션: 골키퍼
A매치 기록: 94경기 98실점 / 35클린시트
신체조건: 키 181cm / 몸무게 72kg
주 소속팀: FC 산투스

 

브라질 축구 역사상 최고의 골키퍼 중 한 명으로 뛰어난 반사신경과 민첩한 몸놀림으로 상대의 슈팅을 선방했으며 공격수의 압박 속에서도 침착함을 유지하며 안정적인 골키퍼가 무엇인지 보여줬다.

상파울루 주의 코린치안스와 산투스에서 활약한 지우마르는 코린치안스에서는 캄페오나투 파울리스타 3회 우승을 이뤄냈으고 산투스에서는 펠레, 페페, 지투 등과 함께 구단 역사상 최고의 황금기를 이끌며 캄페오나투 파울리스타 5회 우승과 전국 리그 5회 우승을 이뤄냈음은 물론 코파 리베르타도레스와 인터콘티넨탈컵을 모두 2회 연속 우승을 하는 데 성공하며 남미 무대와 세계 무대도 평정했다.

개인 통산 캄페오나투 파울리스타 8회 우승을 이뤄낸 지우마르는 셀레상에서도 주축으로 활약했는데 1958 스웨덴 월드컵과 1962 칠레 월드컵에서 주전으로 골문을 지키며 월드컵 2연패에 크게 공헌했고 은퇴한 이후에는 브라질 축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센터백

 

 

이름: 카를루스 아우베르투
생년월일: 1944년 7월 17일

포지션: 라이트백, 센터백
A매치 기록: 53경기 8골
신체조건: 키 180cm / 몸무게 77kg
주 소속팀: 산투스 FC

브라질 축구 역사상 최고의 라이트백 중 하나로 특히 현지 팬들은 그를 역대 최고의 라이트백으로 꼽는다. 최초의 현대적인 측면 수비수로 알려져 있으며 날카로운 오버래핑은 물론 중앙으로 치고 들어와 뛰어난 패싱력으로 골 찬스를 만들어내기도 했으며 이런 공격적인 부분에서의 강점들과는 다르게 수비수로서의 기본기도 뛰어나 중앙 수비수로 뛸 수도 있었다.

플루미넨시에서는 캄페오나투 3회 우승을 이뤄내며 어린 시절부터 자우마 산투스에 버금가는 브라질 최고의 라이트백으로 평가받았던 카를루스 아우베르투는 산투스에서 전성기를 누리며 캄페오나투 파울리스타 4회 우승은 물론 1968년에는 브라질 전국 리그 우승을 이뤄냈다. 펠레의 세계구적인 인기와 이를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을 벌기 위한 산투스의 수뇌부와 브라질 정계에 의한 친선경기를 다른 브라질 클럽의 2배 이상을 뛰는 산투스였기에 혹사로 인해 전성기가 다소 빨리 지나갔는데 전성기가 지난 뒤 미국으로 건너가서도 북미 챔피언십 4회 우승을 이뤄냈다.

하지만 아우베르투가 빛났던 부분은 역시 셀레상에서의 활약인데 1970 멕시코 월드컵에서는 주장으로 출전해 팀의 본선과 예선 전승 우승에 큰 공을 세웠으며 그 공로를 인정받아 대회 올스타 팀에 선정되었는데 특히 그의 결승전에서의 골은 월드컵 역사상 최고의 골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1960년대 후반부터 1970년대 초반까지 있었던 산투스의 비정상적인 혹사만 아니었더라도 그는 축구 역사상 최고의 라이트백의 자리에 올랐을 가능성이 높다.

 

 

센터백

 

 

이름: 도밍구스 다 기아
생년월일: 1912년 11월 19일

포지션: 센터백
A매치 기록: 30경기 0골
신체조건: 키 182cm / 몸무게 81kg
주 소속팀: 플라멩구

브라질 축구 역사상 최고의 중앙 수비수 중 하나로 훌륭한 수비 기술과 강한 피지컬을 물론 그 당시 수비수로서는 드물게 훌륭한 발 기술을 가지고 있었고 이를 활용해 오히려 상대 공격수를 농락하기도 했다.

브라질 무대의 바스쿠 다 가마와 플라멩구에서 전성기를 보낸 도밍구스 다 기아는 개인 통산 캄페오나투 카리오카 4회 우승을 이뤄냈으며 1933년에는 우루과이의 클루브 나시오날에서 당대 최고의 수비수 호세 나사치와 조합해 우수한 수비력을 펼쳐 팬들로부터 신성한 마스터라 불렸으며 아르헨티나의 보카 주니어스에서도 리그 우승을 이뤄냈다.

셀레상에서도 대체 불가능한 센터백이었던 도밍구스 다 기아는 1938 프랑스 월드컵에서 셀레상의 준결승 진출에 크게 공헌했으며 해당 대회에서 베스트 일레븐에 들었으며 이후 1945년에 열린 코파 아메리카에서는 팀은 준우승에 그쳤지만 본인은 MVP를 수상 받으며 대회 최고의 선수로 공인되었다.

 

 

라이트백

 

 

이름: 자우마 산투스
생년월일: 1929년 2월 27일

포지션: 라이트백, 센터백
A매치 기록: 98경기 3골
신체조건: 키 173cm / 몸무게 73kg
주 소속팀: 파우메리아스

아우베르투와 함께 브라질 역대 최고의 라이트백으로 손꼽히며 실제로 브라질 대표팀 활약은 카푸나 아우베르투, 다니 아우베스보다도 확실히 우위에 있다고 평가받는 선수로 바위 또는 벽이라 불렸을 정도로 견고한 대인 수비 능력과 깔끔한 패싱력으로 앞선 공격수를 지원하는 훌륭한 빌드업을 겸비했다.

포르투게자에서 월드클래스 라이트백의 반열에 오른 자우마 산투스는 파우메이라스에서 전성기를 누렸는데 줄리뉴와 함께 오른쪽에서 황금라인을 구축하며 이름을 날렸는데 라이벌이었던 펠레의 산투스와 치열하게 경합하며 캄페오나투 파울리스타 3회 우승을 포함해 1965년 토르네오 리우상파울루 우승을 이뤄냈고 1967년에는 브라질 전국리그인 토르네오 호베르투 고메스와 타사 브라질 더블을 이뤄냈으며 코파 리베르타도레스에서도 2회 준우승을 이뤄냈다.

브라질 대표팀에서의 활약은 더욱 빛났던 자우마 산투스는 무려 네 번의 월드컵에 출전해 1954 스위스 월드컵에서는 팀이 8강에 탈락했음에도 베스트 일레븐을 선정한 세 개의 매체 중 두 개의 매체에서 대회 올스타 팀에 선정되었고 1958 스웨덴 월드컵에서는 컨디션 난조로 주전 자리를 니우통 데 소르디에게 내줬지만 결승전에서는 선발 출전해 뛰어난 활약을 펼쳐 스웨덴의 레프트윙 스코그룬트를 지워버려 7개의 매체 중 4개의 매체에서 대회 올스타 팀에 선정되는 기염을 토했다. 1962 칠레 월드컵에서도 ESPN 데포르테스가 선정한 대회 올스타 팀에 선정되었다.

커리어는 카푸가 가장 뛰어났고 고점에서의 기량은 아우베르투가 가장 좋았지만 자우마 산투스의 고점에서의 기량도 이들 못지 않았음은 물론 15년 가까이 정상급 선수로 활약하며 가장 기복없는 활약을 보였고 국제대회에서도 꾸준하게 최고의 선수로 평가받았다.

 

 

레프트백

 

 

이름: 호베르투 카를루스
생년월일: 1973년 4월 10일

포지션: 레프트백, 레프트윙, 수비형 미드필더
A매치 기록: 125경기 11골
신체조건: 키 168cm / 몸무게 73kg
주 소속팀: 레알 마드리드

21세기를 대표하는 공격형 레프트백으로 탄환인간이라 불렸을 정도로 엄청난 지구력과 스피드를 겸비했으며 거침없는 오버래핑과 단단한 몸을 이용한 대인 수비, 그리고 악마의 왼발로 불리는 강력한 왼발 킥력도 가지고 있었다.

파우메이라스와 레알 마드리드에서 전성기를 누린 호베르투 카를루스는 파우메이라스에서는 브라질 세리 A 2연패를 이뤄냈고 레알 마드리드에서는 라리가 4회 우승과 챔피언스리그 3회 우승을 이끌어냈음은 물론 카를루스 개인도 ESM 올해의 팀에 7회나 선정되었을 정도로 꾸준하게 활약했고 UEFA 올해의 수비수에도 2회 선정, 발롱도르 투표에서 10위 안에 3회 선정되었음은 물론 2002년에는 개인 통산 최고 순위인 2위에 오르기도 하는 등 높은 고점도 동시에 보여줬다.

셀레상에서도 월드컵 3회 출전, 코파 아메리카 4회, 그리고 컨페드컵 1회에 출전했으며 두 번의 월드컵 베스트 일레븐에 올랐으며 두 번의 코파 아메리카를 우승했다. 특히 2002 한일월드컵에서는 팀을 우승으로 이끌며 대회 올스타 팀에 들었으며 발롱도르 투표에서 2위에 올랐으며 1997년 컨페드컵에서는 귀신같은 궤적의 프리킥을 날려 득점했는데 그 슈팅의 궤적이 너무나도 경이로워 UFO 슛이라 불렸다.

 

 

수비형 미드필더

 

 

이름: 파우캉
생년월일: 1953년 10월 16일

포지션: 중앙 미드필더, 수비형 미드필더, 공격형 미드필더
A매치 기록: 34경기 6골
신체조건: 키 183cm / 몸무게 71kg
주 소속팀: AS 로마

브라질 역대 최고의 미드필더 중 한 명으로 광활한 시야와 창의적인 두뇌에서 나오는 패스로 경기를 지배했으며 뛰어난 지구력과 볼 컨트롤 능력과 수비스킬, 그리고 다양한 포지션을 무난하게 소화하는 축구 지능까지 겸비한 완벽한 미드필더였다.

브라질의 인테르나시오나우에서 처음 두각을 나타낸 파우캉은 엘리아스 피게로아와 함께 인테르나시오나우의 황금기를 이뤄내며 1979년 무패 우승을 포함해 주립리그 5회 우승 및 전국리그 3회 우승을 이뤄냈다. 파우캉 개인도 브라질 전국 리그 대회 베스트 일레븐에 3회 선정되었고 특히 1978년과 1979년에는 당대 최고의 공격형 미드필더 지쿠를 제치고 브라질 세리 A MVP를 수상했다.

우럽으로 건너간 뒤에 AS 로마에서도 전성기를 이어나간 파우캉은 코파 이탈리아 2회 우승 및 1982-83 시즌에는 스쿠테토를 따냈고 1983-84 시즌에는 유러피언 컵 결승에 올려놓았는데 이때 파우캉의 활약이 대단해서 로마 팬들은 그를 두고 로마의 여덟 번째 왕이라고 불렀다. 이때도 파우캉은 1982-83 시즌 구에린 스포르티보 선정 세리에 A 외국인 선수 랭킹 1위에 올랐고 옹즈도르 투표에서도 1982년에는 3위, 1983년에는 2위에 오르는 영광을 누렸다.

셀레상에서도 파우캉의 활약은 대단했는데 1982 스페인 월드컵에서 지쿠, 소크라치스, 세레주와 함께 황금의 사중주로 불리며 그들을 훌륭하게 보좌하며 뛰어난 경기력을 보였다. 이러한 활약을 팬들에게 인정받아 2차 리그에서 탈락했음에도 불구하고 1982 스페인 월드컵 실버볼과 대회 베스트 일레븐에 선정되었다. 은퇴한 뒤에는 AS 로마 명예의 전당과 브라질 축구 명예의 전당에 모두 헌액되었다.

 

 

공격형 미드필더

 

 

이름: 지쿠
생년월일: 1953년 3월 3일

포지션: 공격형 미드필더, 중앙 미드필더, 포워드
A매치 기록: 71경기 46골
신체조건: 키 172cm / 몸무게 68kg
주 소속팀: 플라멩구

1980년대 상반기를 수놓은 당대 최고의 선수이자 공격형 미드필더로 탄탄한 기본기와 교묘한 드리블, 창의적인 패싱 스킬과 양발 슈팅 스킬을 겸비했으며 스트라이커들을 초월하는 득점력을 보여주기도 했다. 특히 프리킥에 능해 프리킥 통산 최다골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전성기의 대부분을 플라멩구에서 보낸 구단 통산 최다 득점자 지쿠는 캄페오나투 카리오카 7회 우승과 브라질 전국리그인 세리 A 3회 우승을 이뤄냈으며 개인적으로도 캄페오나투 카리오카 득점왕 5회, 브라질 전국 리그 베스트 일레븐에 5회 선정되었고 1981년에는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결승 1차전에서 멀티골을 넣어 2-1 승리했는데 1승 1패 상황 최종전에서도 멀티골을 넣으며 2-0으로 승리하는데 크게 기여해 우승은 물론 대회 MVP를 수상했고 인터콘티넨탈컵에서는 붉은 제국이라 불리는 리버풀을 3-0으로 완파하며 대회 MVP를 수상했다. 유럽 무대 도전을 위해 이탈리아 세리에 A의 우디네세로 이적해 활약하며 1983-84 시즌 올해의 선수에 올랐으나 향수병으로 다시 플라멩구로 돌아갔으며 말년에는 J리그에서 새로운 도전을 했다.

셀레상에서는 황금의 사중주라 불렸던 미드필더 조합의 핵심으로 참가한 지쿠는 개인은 훌륭했지만 팀 성적은 아쉬웠는데 1978 아르헨티나 월드컵에서는 아르헨티나와 페루의 승부조작 의혹으로 2차 조별리그 2위로 밀려나 3위의 성적에 만족해야 했다. 그리고 1982 스페인 월드컵에서는 사상 최고의 전력이라 호평받고 본인은 대회 베스트 일레븐에 드는 활약을 보이고도 이탈리아에게 역전패하며 아쉽게 탈락했으며 1986 멕시코 월드컵에서도 만회에 실패했다.

당대 남미 축구계의 아이콘이었던 지쿠는 남미 올해의 선수상 투표에서 1977년, 1981년, 1982년, 총 3회 수상했고 1983년에는 월드 사커지 선정 올해의 선수상을 수상했고 은퇴 이후에는 브라질 축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공격형 미드필더

 

 

이름: 펠레
생년월일: 1940년 10월 23일

포지션: 포워드, 공격형 미드필더, 스트라이커, 윙어
A매치 기록: 92경기 77골
신체조건: 키 173cm / 몸무게 75kg
주 소속팀: FC 산투스

명실상부 축구 역사상 최고의 선수로 압도적인 운동신경과 훌륭한 축구 지능은 물론 공격수로서 필요한 모든 능력을 가지고 있었던 역대 최고의 스코어러이자 플레이메이커였다.

산투스를 구단 역사 최고의 황금기로 이끈 펠레는 팀의 에이스로 주립리그인 캄페오나투 파울리스타에서 10번이나 우승했으며 전국리그에서도 5연패를 포함한 6회 우승을 달성했다. 코파 리베르타도레스와 인터콘티넨탈컵에서도 2연패를 기록하며 당대 최강의 팀으로 군림했다. 특히 1962년에는 주립리그인 캄페오나투 파울리스타와 전국리그를 모두 석권함은 물론 코파 리베르타도레스는 당대 남미 최강의 팀인 페냐롤을 꺾으며 트레블을 달성했고 추가로 인터콘티넨탈컵에서는 유럽 최강의 팀인 에우제비우의 벤피카를 꺾는 기염을 토했다.

1958 스웨덴 월드컵에서 팀을 월드컵 우승으로 이끌고 신인상과 실버볼을 차지했다. 이후 1970 멕시코 월드컵에서는 절륜한 플레이메이킹을 보내며 역대 최고의 대표팀이라는 수식어와 함께 예선과 본선에서 전승 우승하며 대회 MVP를 수상하며 우월함이 무엇인지 만천하에 보여줬다.

펠레는 프랑스 풋볼이 추산한 명예 발롱도르를 7회 수상했으며 1959년에는 공식전과 비공식전을 합쳐 127골을 득점하며 FIFA 집계 한 해 최다 득점으로 기록되었으며 월드컵 3회 우승을 달성한 유일한 선수다.

 

 

라이트윙

 

 

이름: 가린샤
생년월일: 1933년 10월 28일

포지션: 라이트윙
A매치 기록: 50경기 12골
신체조건: 키 169cm / 몸무게 72kg
주 소속팀: 보타포구

역대 최고의 라이트윙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 선수로 소아마비로 인해 양다리의 길이가 달랐으나 오히려 그런 점을 이용해 자신만이 할 수 있는 드리블을 보여주며 상대 수비를 벗겨냈다. 크로스와 패스로 찬스를 만드는 데에도 능했다.

펠레의 산투스의 위용에 밀렸지만 지지, 니우통 산투스, 마리우 자갈루, 콰렌치냐 등과 함께 보타포구의 황금기를 누렸으며 캄페오나투 카리오카 3회 우승을 이뤄냈으며 보타포구 통산 출전 2위와 통산 득점 2위에 올라있으며 캄페오나투 카리오카 최우수 선수상을 3회 수상했다.

셀레상에서는 펠레와 함께 1958 스웨덴 월드컵부터 1966 잉글랜드 월드컵 때까지 활약했으며 펠레가 중도에 부상으로 이탈한 1962 칠레 월드컵에서는 에이스로서 팀을 이끌며 우승을 이뤄내며 득점왕과 골든볼을 수상했다. 특히 1962년에는 클럽과 대표팀에서 모두 대단한 활약을 보였는데 클럽에서 보타포구의 6관왕을 이끌었음은 물론 월드컵에서는 펠레 대신 에이스로 활약했다. 한 해 5개의 대회에서 MVP에 오른 것은 덤이다.

 

 

레프트윙

 

 

이름: 호나우지뉴

생년월일: 1980년 3월 21일

포지션: 레프트윙, 포워드, 공격형 미드필더
A매치 기록: 97경기 33골
신체조건: 키 181cm / 몸무게 76kg
주 소속팀: FC 바르셀로나

2005년, 단 1년은 펠레, 마라도나, 메시, 호나우두가 보여준 모습을 보여준 창의적인 윙어다. 외계인으로 불렸으며 다른 선수들은 실전에서 사용할 수 없는 다양한 프리스타일 개인기를 경기 내내 실전에 맞게 구사하는 천재였으며 저 화려한 기술을 뛰어난 전술안과 결합해 절륜한 플레이메이킹을 구사했으며 프리킥 실력마저 역대급 레벨로 평가받았다.

그레미우에서 캄파오네투 가우초 우승을 이끌며 두각을 나타냈고 파리에서 정상급 선수로 올라서며 바르셀로나에 입단한 호나우지뉴는 FC 바르셀로나에서는 바르셀로나를 수렁에서 구하며 라리가 2연패를 이뤄냈으며 2005-06 시즌 챔피언스리그 우승이라는 대단한 성적을 거뒀는데 이때 호나우지뉴의 퍼포먼스가 대단해 2005년 발롱도르를 수상했으며 2005-06 시즌에는 라리가와 UEFA 챔피언스리그에서 도움왕을 수상하며 2005-06 시즌 UEFA 클럽 올해의 선수상을 수상했다,

그러나 무절제한 생활과 부실한 몸관리로 인해 고점을 오래 유지하지 못하며 2007-08 시즌에 최악의 부진을 거두자 AC 밀란으로 떠난 호나유지뉴는 전성기 때만큼의 퍼포먼스를 보여주지는 못했지만 세리에 A 도움왕을 수상하며 클래스를 증명했고 이후 브라질 무대로 돌아가서는 아틀레치쿠 미네이루에서는 2012년에 브라질 세리 A MVP와 팬선정 올해의 선수에 선정되었고 2013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우승을 이뤄내는데 크게 공헌하며 2013 남미 올해의 축구선수에 선정되며 커리어를 완성한다.

셀레상에서도 외계인이란 명성을 이어가며 뛰어난 퍼포먼스를 보여준 호나우지뉴는 1999년 코파 아메리카에 처음으로 명단에 올렸으나 히바우두와 제 호베르투에 밀려 벤치 신세를 졌었다. 그러나 2002 월드컵에서 호나우두, 히바우두와 함께 3R이란 공격 삼각편대를 이뤄내 우승에 크게 공헌해 대회 올스타 팀에 들었다. 이후 호나우두를 밀어내고 대표팀의 에이스로 군림해 2005 컨페드컵을 우승했으나 2006 독일 월드컵에서는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활약을 보이며 8강에서 탈락했다.

 

 

스트라이커

 


생년월일: 1976년 9월 22일
A매치 기록: 98경기 62골
신체조건: 키 183cm / 몸무게 90kg
주 소속팀: 인테르 밀란

축구 역사상 최고의 스트라이커 중 한 명으로 평가받으며 최전성기 시절에는 엄청난 스피드와 화려한 개인기, 그리고 뛰어난 슈팅 능력을 모두 겸비해 상대 수비수와 골키퍼를 무릎 꿇리며 압도적인 득점력은 물론 플레이메이킹 마저 능했던 스트라이커였으며 잦은 부상과 갑상선 비대증으로 인해 살이 찐 이후에도 엄청난 골 감각과 축구 센스, 그리고 적절한 위치 선정을 활용해 세계 최고의 스코어러 중 한 명으로 이름을 날렸다.

리우 데 자네이루에서 태어났지만 미나스제라이스 주의 명문 크루제이루에서 커리어를 시작해 역대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우승팀이 치르는 경기인 수페르코파 리베르타도레스에서 소속팀의 준우승을 이끌었음은 물론 호나우두 개인은 8골로 득점왕에 오르며 주목받기 시작한 호나우두는 "어느 날 리우데자네이루에서 등장해, 네덜란드와 카탈루냐에서 별이 되었다. 이탈리아에서 우상이 되었고 스페인에서 신이 되었다." 라는 에릭 칸토나의 발언처럼 네덜란드의 PSV에서 유럽 전역에 명성을 떨쳤고 바르셀로나의 코파 델 레이와 컵 위너스컵 우승은 물론 라리가 득점왕과 컵 위너스컵 결승전 MOM까지 이뤄내며 펠레와 마라도나에 비견되기 시작했으며 인테르에서 UEFA컵 우승을 이뤄냈는데 특히 UEFA컵 결승전에도 MOM에 선정되었으며 1997-98 시즌 UEFA 클럽 올해의 선수와 UEFA 클럽 올해의 공격수를 수상했다. 그리고 레알 마드리드로 돌아와서는 2002-03 시즌 라리가 우승과 챔피언스리그에서 만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홈구장에서 그들을 상대로 해트트릭을 이뤄냈다. 다만 부상이 잦아 팀에 꾸준하게 기여해주지는 못했으며 챔피언스리그 우승을 이뤄내지 못했고 우승컵 자체도 호나우두의 명성에 비하면 아쉬운 부분은 사실이었다.

상대적으로 아쉬운 클럽 커리어에도 불구하고 호나우두가 역대 최고로 평가받는 부분은 역시 브라질 대표팀에서의 활약상이 크다. 특히 월드컵에서의 활약이 대단했는데 백업 멤버였던 1994 미국 월드컵을 제외하더라도 1998 프랑스 월드컵에서는 골든볼과 준우승이라는 성적을 거뒀으며, 2002 한일월드컵에서는 득점왕과 우승, 그리고 실버볼을 석권했고 2006년 독일 월드컵에서는 한때 월드컵 통산 최다 득점자를 기록했었다가 지금은 클로제에게 자리를 내줬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클로제의 월드컵 활약이 호나우두 이상이라고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리고 코파 아메리카에서도 1997년과 1999년에 우승을 이뤄냈으며 1997 코파 아메리카 MVP를 수상했으며 1999 코파 아메라카에서도 팀 동료 히바우두와 공동 득점왕과 대회 베스트 일레븐에 선정되는 활약을 펼쳤다.

호나우두는 발롱도르 노미네이트 9회 선정되어 포디움에 4회 들었으며 1997년과 2002년에는 1위를 기록해 발롱도르를 수상했으며 피파 올해의 선수상 3회 선정과 옹즈도르 2회 수상, 그리고 현역으로 활약하던 2006년에 이미 브라질 축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 것을 시작으로 은퇴한 뒤에는 레알 마드리드 명예의 전당, 이탈리아 축구 명예의 전당 및 인테르 밀란 명예의 전당에 모조리 헌액되었음은 물론 2007년 축구통계협회가 선정한 역대 최고의 선수 100인 중 펠레에 이어 2위에 선정되기도 했다.

 

 

감독

 

 

이름: 마리우 자갈루

생년월일: 1931년 8월 9일
주 소속팀: 브라질 축구 국가대표팀


'셀레상의 현자'

 

선수 시절에도 우수한 축구 지능으로 자신의 입지를 다졌던 선수로 감독으로서도 상황에 따라 공격 축구와 수비 축구를 자유자재로 운용하며 브라질 축구는 물론 아시아 축구에도 큰 발전을 이뤄낸 축구인이다.

선수시절 전성기를 보냈던 보타포구에서 감독직을 시작해 캄페오나투 카리오카 2연패 및 1968년 타사 브라질 우승을 이뤄내 주목받은 자갈루는 1970 멕시코 월드컵을 앞두고 브라질 대표팀의 감독으로 부임해 펠레, 아우베르투, 제르송과 같은 각 라인의 중심축들과 활발한 소통을 통해 팀원 모두를 살리는 전술을 고안해내며 멕시코 월드컵 본선에서 이끌며 6전 전승으로 우승을 이뤄냈다. 그리고 1970 셀레상의 다수가 빠진 1974 서독 월드컵에서도 바뀐 브라질의 현실을 직시해 수비 축구로 4위에 올리며 선전했으나 우승과 화려함 모두 차지하지 못하자 팬들은 자갈루를 비난하며 그해 유행한 독감을 자갈루 독감이라 부르며 조롱하는 비극을 겪기도 했다.

이에 충격받은 자갈루는 1970년대 하반기에 많은 투자를 이뤄내던 중동으로 떠났는데  중동에서도 약체로 평가받는 쿠웨이트를 이끌고 1976 아시안컵 준우승을 이뤄내는 업적을 세웠고 사우디아라비아 축구의 발전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중동과 여러 브라질 팀을 돌아다니다가 1994년에 다시 셀레상의 지휘봉을 잡은 자갈루는 신예 호나우두, 카를루스, 히바우두와 베테랑이었던 둥가, 호마리우, 아우다이르를 아우르며 완벽한 신구조화를 이뤄냈고 1997년 코파 아메리카 우승 및 컨페드컵 우승을 이뤄내며 IFFHS 세계 최우수 국가대표팀 감독을 수상했고 1998 프랑스 월드컵에서도 우승후보 1순위로 많은 기대를 받았지만 결승전에서 호나우두가 컨디션 난조로 부진했고 결국 프랑스에게 0-3으로 패하며 준우승에 만족하며 물러났다.

 


베스트 일레븐

 

 

 


3. 서브 14인 포함 1군 스쿼드

 

 

이름: 에메르송 레앙
생년월일: 1949년 7월 11일

포지션: 골키퍼
A매치 기록: 80경기 48실점 / 45클린시트
신체조건: 키 182cm / 몸무게 76kg
주 소속팀: 파우메이라스

 

데뷔 시즌부터 은퇴 시즌까지 꾸준히 높은 고점을 유지한 골키퍼이며 정확한 던지기와 뛰어난 골킥을 활용해 수비수들과의 연계에 강점을 보여줬다.

파우메이라스와 그레미우에서 전설적인 활약을 펼친 레앙은 파우메이라스에서는 캄페오나투 파울리스타 3회 우승을 이뤄냈으며 브라질 전국리그 2연패를 이뤄냈으며 그레미우에서는 1980 시즌 캄파오네투 가우초 우승과 1981 시즌 브라질 전국 리그 우승을 이뤄냈다.

셀레상에서도 레앙의 대단한 활약은 이어졌는데 1970 멕시코 월드컵부터 1986 멕시코 월드컵까지 1982 스페인 월드컵을 제외한 네 번의 월드컵에 참가했으며 1974 서독 월드컵과 1978 아르헨티나 월드컵에서 주전으로 활약하며 14회의 FIFA 월드컵 본선 출전 기록을 자랑하며 87.9%의 선방률을 보여주는 괴력을 보여줬다.

 

 


이름: 알리송 베케르
생년월일: 1992년 10월 2일

포지션: 골키퍼
A매치 기록: 72경기 33실점 / 44클린시트
신체조건: 키 193cm / 몸무게 91kg
주 소속팀: 리버풀 FC

 

2010년대 후반과 2020년대 초반 프리미어리그 최고의 골키퍼로 우수한 신체조건에 뛰어난 반사신경을 보유했으며 우수한 발밑 기술과 정확한 골킥 능력까지 갖췄으며 집중력도 우수했던 노이어 이후 세대에서 가장 완벽에 가까운 퍼포먼스를 선보였다.

인테르나시오나우에서 데뷔한 알리송은 캄페오나투 가우초 4연패를 기록했고 전국리그에서는 2015년에 25경기를 출전해 23실점만을 허용했으며 15번의 클린시트를 만들어내며 팀의 5위를 이끌어냈다. 그리고 AS 로마에서도 2017-18 시즌 UEFA 챔피언스리그에서 팀을 4강에 올려놓는데 큰 공을 세웠음은 물론 세리에 A 올해의 골키퍼와 UEFA 챔피언스 리그 시즌의 스쿼드를 동시에 석권했다.

클롭 체제의 리버풀에 합류한 알리송은 리버풀에서는 한층 더 성장한 모습을 보여주며 2018-19 시즌 UEFA 챔피언스리그 우승 및 2019-20 시즌 구단 역사상 첫 프리미어리그 우승을 이뤄냈고 2021-22 시즌에는  FA컵과 리그컵 더블과 리그와 UEFA 챔피언스리그에서 준우승을 거뒀다. 알리송 개인도 2018-19 시즌 UEFA 챔피언스리그 시즌의 스쿼드 및 UEFA 올해의 골키퍼를 동시에 석권했고 2019년 발롱도르 7위 및 처음 출범한 야신 트로피의 첫 수상자로 이름을 남겼다. 그리고 프리미어리그 골든글러브 2회 수상 및 2021-22 시즌 PFA 올해의 팀에 선정되었다.
 
브라질 대표팀에서도 세자르 이후 세대의 주전 선수로 활약한 알리송은 2018 러시아 월드컵에 참가해 조국을 8강에 올렸고 2019 코파 아메리카에서 셀레상을 우승으로 이끌었는데 그 과정에서 큰 공을 세워 알리송 개인도 코파 아메리카 골든 글러브와 팀 오브 더 토너먼트를 수상했다. 그리고 2021 코파 아메리카에서도 준우승을 이뤄냈다.

 

 

 

이름: 루시우
생년월일: 1978년 5월 8일

포지션: 센터백
A매치 기록: 105경기 4골
신체조건: 키 188cm / 몸무게 81kg
주 소속팀: 인테르 밀란

월드컵과 챔피언스리그를 모두 핵심 선수로 제패한 경험이 있는 2000년대 최고의 센터백 중 한 명으로 강력한 피지컬을 앞세워 거친 플레이와 전진 드리블과 전진 패스를 활용한 빌드업, 그리고 지능적이며 신속한 인터셉트와 뛰어난 공중전 능력과 위협적인 프리킥까지 겸비한 완벽한 수비수였다, 

21세기 분데스리가 최고의 수비수로 이름을 날렸던 루시우는 2001-02 시즌 레버쿠젠에서는 트리플 준우승을 달성했는데 결승전에서도 비록 졌지만 득점을 기록하는 등 놀라운 퍼포먼스를 선보여 ESM 올해의 팀에 들었으며 발롱도르 투표에서도 19위에 올랐다. 이를 바탕으로 이적한 바이에른 뮌헨에서는 분데스리가 3회 우승을 이뤄냈고 2005-06 시즌에는 우수한 퍼포먼스로 ESM 올해의 팀에 들었다. 그리고 2009-10 시즌에는 인테르로 이적해 트레블을 이뤄내며 ESM 올해의 팀에 들어 세 개의 소속팀에서 모두 ESM 올해의 팀에 선정되는 위대한 기록을 세웠다.

셀레상에서도 주장을 역임하며 브라질 대표팀 역사의 한 획을 그었던 루시우는 월드컵에 세 번, 컨페드컵에 네 번 참가했는데 특히 2002 한일 월드컵 우승과 두 번의 컨페드컵 우승을 이끌었는데 2009년에는 팀의 주장으로 우승하며 대회 베스트 일레븐에 선정되었다.

 

 

 

이름: 루이스 페헤이라
생년월일: 1949년 6월 21일

포지션: 센터백
A매치 기록: 32경기 0골
신체조건: 키 182cm / 몸무게 81kg
주 소속팀: 파우메이라스

1970년대를 호령한 스토퍼로 강하면서도 최적의 타이밍에 들어오는 태클은 상대 공격수들을 괴롭혔다. 수비라인 지휘 능력도 우수했으며 볼을 탈취한 이후에 역습을 주도하는 능력도 뛰어났다.

동갑내기였던 이메르송 레앙, 레이비냐와 함께 1970년대 초반, 제2의 아카데미아, 불멸의 소대라 불렸던 파우메이라스 구단 제2의 황금기를 이끈 루이스 페헤이라는 캄페오나투 파울리스타 3회 우승 및 브라질 세리 A 2회 우승을 포함해 국내외의 크고 작은 대회에서 12회의 우승을 이뤄내는데 큰 공을 세웠고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에서도 상승세를 이어가며 코파 델 레이와 라리가 우승에 공헌하며 월드 카서지 선정 월드 일레븐에 3회 선정되었다.

셀레상 유니폼을 입고도 공격진이 무너진 상황에서 짠물 수비를 보여주며 공격수들에게 악명을 떨쳤던 루이스 페헤이라는 1974 서독 월드컵 준결승 진출에 크게 공헌했는데 그 덕분에 1974년 남미 올해의 선수 투표에서 4위에 올랐으며 1975년과 1976년에도 각각 5위에 올랐다.

 

 

 

이름: 카푸
생년월일: 1970년 6월 7일

포지션: 라이트백, 라이트윙
A매치 기록: 142경기 5골
신체조건: 키 176cm / 몸무게 75kg
주 소속팀: AS 로마

같은 국적의 자우마 산투스, 카를루스 아우베르투와 함께 역대 최고의 라이트백 중 하나로 평가받는 선수로 오버래핑 상황과 수비 상황에서 모두 부족함 없는 모습을 보여주며 현대적인 측면 수비수의 교과서로 불렸다.

텔레 산타나가 이끄는 상 파울루에서 첫 전성기를 누린 카푸는 트리컬러 파울리스타에서 오른쪽의 지배자로 명성을 떨치며 1991년 브라질 세리 A와 캄페오나투 파울리스타 더블 우승, 캄페오나투 파울리스타 2연패,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2연패 및 인터콘티넨탈컵 2연패를 이뤄내는데 공헌했다. 특히 1993년에는 1992년 수페르코파 리베르타도레스 챔피언인 크루제이루와 레코파 수다메리카나에서 격돌해 승리하며 우승을 이뤄냈고 역대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우승 클럽끼리 열리는 왕중왕전인 수페르코파 리베르타도레스 우승을 이뤄내며 구단의 황금기를 이뤄내는데 큰 공을 세웠는데 그 과정에서 카푸 개인도 브라질 세리 A 시즌 베스트 일레븐에 2회 선정되었고 남미 올해의 팀에 4년 연속으로 선정되었으며 1994년에는 엘 파이스 선정 남미 올해의 선수상을 수상했다. =

레알 사라고사로 건너갔다가 적응에 실패해 파우메이라스로 돌아와 1996년 브라질 세리A 우승을 이끈 카푸는 이탈리아 무대에서 유럽에 재도전했는데 AS 로마에서는 세리에 A 역사상 가장 치열하다는 2000-01 시즌 리그 우승을 이끌었으며 말년에는 AC 밀란에 합류해 2003-04 시즌 세리에 A 우승과 2006-07 시즌 UEFA 챔피언스리그 우승을 이뤄내는데 공을 세웠으며 UEFA 올해의 팀에 2회 선정되었다.

브라질 대표팀에서도 A매치 통산 최다 출전 및 세 번의 월드컵 결승전에 출전한 대기록을 세운 카푸는 1994년에는 교체 출전으로, 2002년에는 주장으로 선발 출전해 우승을 차지해 발롱도르 투표에서 15위에 올랐으며 두 번의 코파 아메리카에서 우승도 경험했다. 다만 월드컵 올스타 팀에 한 번도 뽑히지 못한 것은 아쉬운 대목이다.

 

 

 

이름: 니우통 산투스
생년월일: 1925년 5월 16일

포지션: 레프트백, 센터백
A매치 기록: 75경기 3골
신체조건: 키 184cm / 몸무게 68kg
주 소속팀: 보타포구

20세기 최고의 레프트백 중 한 명으로 인정받는 선수로 축구사에서 측면 수비수의 오버래핑을 처음으로 정립한 선수로 알려졌다. 공격 기술부터 수비 기술까지 다재다능해서 백과사전으로 불렸다.

선수 생활을 오직 보타포구에서만 보낸 원 클럽맨이자 구단 통산 최다 출전자인 니우통 산투스는 영광의 팀이라 불리던 구단 역사상 최고의 황금기를 이끌며 캄페오나투 카리오카 4회 우승 및 1962년 6관왕과 같은 성과를 냈지만 펠레의 산투스에게 밀려 전국리그 우승은 아쉽게 달성하지 못했다.

셀레상에서도 백업 멤버로 1949 코파 아메리카 우승을 경험한 것을 시작으로 1950 브라질 월드컵의 마라카냥의 비극을 경험하기도 했으나 새옹지마라고 주전 멤버가 아닌 덕분에 이후에도 자주 기용되었던 니우통 산투스는 펠레, 가린샤 등과 함께 브라질 대표팀의 최전성기를 누리며 두 번의 월드컵에서 우승하는데 크게 기여했다. 니우통 산투스 개인도 1958 스웨덴 월드컵에서는 대회 베스트 일레븐에 선정되었다.

 

 

 

이름: 토니뉴 세레주
생년월일: 1955년 4월 21일

포지션: 수비형 미드필더, 중앙 미드필더, 센터백, 공격형 미드필더
A매치 기록: 57경기 5골
신체조건: 키 183cm / 몸무게 75kg
주 소속팀: 아틀레치쿠 미네이루

1980년대를 대표하는 최고의 수비형 미드필더 중 하나로 왕성한 활동량과 강력하면서도 기술적인 완성도도 높은 명품 태클과 지능적인 인터셉트와 같은 수비적인 부분에서는 물론 부드러운 볼 컨트롤과 넓은 시야를 활용한 창의적인 롱패스 실력과 기습적인 공격 가담까지 겸비한 완전체 미드필더로 공의 주인이라는 별명으로 불렀다.

보통 고점은 높지만 전성기가 짧다는 이야기가 있는 브라질 국적 선수들과는 다르게 자기 관리 능력이 뛰어나 1970년대 중반부터 1990년대 중반까지 약 20년간 정상급 기량을 펼친 세레주는 아틀레치쿠 미네이루에서는 캄페오나투 미네이루 7연패 및 두 번의 브라질 세리 A 준우승을 이뤄냈으며 세레주 개인도 전국 리그 베스트 일레븐에 3회 선정되었음은 물론 MVP에 2회 선정되는 활약을 펼쳤다.

유럽으로 건너간 뒤에는 AS 로마에서는 1983-84 시즌 유러피언 컵 결승에 올랐으며 삼프도리아에서는 코파 이탈리아 2회 우승과 1989-90 UEFA 컵 위너스컵 우승을 이뤄냈고 1990-91 시즌에는 구단 역사상 첫 세리에 A 우승을 이뤄내는데 공헌했으며 이듬해에는 재차 유러피언 컵 결승에 진출했다. 그러다가 다시 브라질로 돌아가서는 상파울루에서 활약하며 코파 리베르타도레스와 인터콘티넨탈컵에서 우승하는 공을 세웠는데 특히 1993년에는 인터콘티넨탈컵 맨 오브 더 매치에 선정되었다.

브라질 대표팀에서는 출중한 퍼포먼스를 보여줬음에도 다소 결과가 아쉬웠는데 지쿠, 파우캉, 소크라치스와 함께 중원 조합을 구성해 황금의 사중주라 불리며 기대를 모았으나 2차 리그에서 이탈리아에 패하며 탈락하는 아쉬움을 경험하기도 했으며 1986 멕시코 월드컵에서도 8강에 진출했으나 승부차기에서 패하며 준결승전 진출에는 실패했다.

 

 

 

이름: 지지
생년월일: 1928년 10월 8일

포지션: 중앙 미드필더, 공격형 미드필더, 라이트윙, 포워드
A매치 기록: 68경기 20골
신체조건: 키 174cm / 몸무게 68kg
주 소속팀: 보타포구

축구 역사상 최고의 중앙 미드필더 중 한 명으로 축구 지능이 높아 감독이 졸고 있을 때 팀을 지휘하기도 했으며 광활한 시야와 정교하면서도 창의적인 숏패스와 롱패스로 경기를 지배했으며 발기술이 좋아 상대 수비수 두 명 정도는 제칠 수 있었고 프리킥에도 능했음은 물론 중앙 미드필더, 하프백, 인사이드 포워드 및 윙어까지 다양한 포지션을 막힘없이 소화할 수 있었기에  '미스터 풋볼'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브라질 무대의 플루미넨시와 보타포구에서 전성기를 누린 지지는 특히 보타포구에서는 캄페오네투 카리오카 3회 우승을 이뤄냈으며 전국 리그에서도 펠레의 산투스를 견제하는 강팀으로 이름을 날렸다. 다만 레알 마드리드에서는 디 스테파노와의 불화와 스페인 적응 실패로 좋은 활약을 보여주지는 못하고 떠났다.

브라질 대표팀에서는 1954 스위스 월드컵부터 1962 칠레 월드컵까지 참여해 두 번의 월드컵의 우승 주역으로 활약한 지지는 특히 1958 스웨덴 월드컵에서는 중원을 지휘하며 팀을 우승으로 이끌며 대회 MVP에 선정되는 맹활약을 펼쳤다.

 

 

 

이름: 지르송
생년월일: 1941년 1월 11일

포지션: 중앙 미드필더, 공격형 미드필더
A매치 기록: 70경기 14골
신체조건: 키 172cm / 몸무게 69kg
주 소속팀: 보타포구

1960년대 후반과 1970년대 초반 남미 최고의 플레이메이커로 평가받았던 선수로 경기장 전체를 읽는 드넓은 시야와 예술과도 같은 볼 컨트롤은 물론 짧은 왼발 패스와 롱패스에 모두 능해 적절하게 템포를 조절하거나 골 찬스를 만들어내는 만능 플레이메이커였으며 왼발 기술이 좋아 팬들에게 황금의 왼발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플라멩구에서 데뷔한 지르송은 1961년 토르네이우 히우상파울루 우승 및 1963년 캄페오나투 카리오카 우승을 이뤄냈고 지지의 대체자로 보타포구로 이적한 뒤에는 캄페오나투 카리오카와 토르네이우 히우상파울루에서 각각 2개의 우승컵을 추가했으며 1968년에는 전국 리그인 타사 브라질을 우승했다. 이후 상파울루로 이적한 뒤에는 캄페오나투 파울리스타 2회 우승을 이뤄냈고 말년을 보낸 플루미넨시에서는 캄페오나투 카리오카 우승컵을 한 개 더 추가했다.

셀레상에서도 1970 멕시코 월드컵의 브라질 대표팀의 두뇌로 활동한 지르송은 중앙 미드필더에서 템포를 조절하며 팀의 예선과 본선 전승 우승에 기여하며 대회 베스트 일레븐은 물론 복수의 매체에서 펠레에 이어 대회에서 두 번쨰로 훌륭한 선수로 평가받았다.

 

 

 

이름: 지지뉴
생년월일: 1921년 9월 14일

포지션: 공격형 미드필더, 포워드, 중앙 미드필더, 스트라이커
A매치 기록: 53경기 30골
신체조건: 키 169cm / 몸무게 63kg
주 소속팀: 플라멩구

펠레 이전 브라질 축구의 아이콘이었던 선수로 인사이드 포워드에게 필요한 모든 덕목을 가지고 있던 창의적인 플레이메이커로 이름을 날렸으며 이외에도 하프백이나 전방 공격수로도 훌륭한 모습을 보여줄 수 있었던 선수라 풋볼 마스터, 혹은 대가라는 뜻의 마에스트레라 불렸다.

플라멩구와 방구 AC에서 전성기를 누린 지지뉴는 플라멩구에서는 캄파오네투 카라오카 3회 우승을 이뤄내며 승리의 급행열차라 불리며 남미 최고의 클럽으로 군림한 바스쿠 다 가마 왕조를 잘 견제했고 전성기 이후에 상파울루에서는 캄페오나투 파울리스타 우승을 이뤄냈다. 지지뉴 개인도 방구에서 뛰던 1951년에는 캄페오나투 카리오카 득점왕에도 오르며 아데미르와 함께 브라질 최고의 스타로 군림했다.

지지뉴의 위대한 활약은 셀레상에서도 이어졌는데 코파 아메리카에 여섯 번 출전해 1949년 대회 우승과 네 번의 준우승을 기록했으며 1950 브라질 월드컵에서도 팀은 마라카냥에서 우루과이에게 패하며 준우승에 머물렀지만 지지뉴는 골든볼을 수상했다.

 

 

 

이름: 줄리뉴
생년월일: 1929년 7월 29일

포지션: 라이트윙
A매치 기록: 24경기 11골
신체조건: 키 180cm / 몸무게 77kg
주 소속팀: 피오렌티나

1950년대 세계 최고의 라이트윙 중 한 명으로 평가받았으며 가린샤가 대두하기 이전 최고의 아웃사이드 라이트로 활약했는데 브라질리언답게 훌륭한 드리블과 개인기 스킬을 활용한 날카로운 컷인 플레이는 물론 크로스로 공격을 지원하는 능력도 당대 최고였다,

포르투게사에서 브라질 최고의 선수 중 한 명으로 성장한 줄리뉴는 유럽의 피오렌티나에서는 구단 역사상 첫 세리에 A 우승 및 유러피언 컵 준우승을 이뤄냈고 파우메이라스에서도 펠레와 라이벌리를 구성하며 캄페오나투 파울리스타 3회 우승을 이뤄냈으며 1960 시즌 전국리그에서도 펠레의 산투스를 꺾고 우승을 차지하는 기염을 토했다.

비록 셀레상에서의 활약은 1953 코파 아메리카 준우승과 1954 스위스 월드컵 8강으로 다소 아쉬웠으나 클럽에서의 활약이 너무나도 대단해 브라질 축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음은 물론 세 시즌만 활약한 피오렌티나에서도 1996년에 구단 역사상 최고의 선수로 선정되는 위엄을 보였다.

 

 

 

이름: 네이마르
생년월일: 1992년 2월 5일

포지션: 레프트윙, 포워드, 공격형 미드필더
A매치 기록: 119경기 74골
신체조건: 키 175cm / 몸무게 68kg
주 소속팀: FC 바르셀로나

 

2010년대 최고의 선수 중 한 명으로 당대 최고의 드리블 실력은 물론 볼 컨트롤 실력은 물론 득점력과 왕성한 활동량을 통해 3선까지 내려가서 팀의 경기를 풀어주는 역할에 능통한 완벽한 2선 자원인데 특히 고난이도의 개인기인 사포를 구사하는 능력은 역대 최고 수준으로 평가받았다.

산투스에서 첫 전성기를 누린 네이마르는 캄페오나투 파울리스타 3회 우승과 2011 시즌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우승을 이뤄냈으며 개인적으로도 브라질 세리 A 올해의 팀 3회 선정과 2011 브라질 세리 A 올해의 선수상을 수상했고 바르셀로나에서는 전성기를 누리며 2014-15 시즌 트레블을 이뤄냈고 2015년과 2017년에 발롱도르 3위에 올라 포디움에 올랐다.

그러나 바르셀로나에서는 메시가 있었기에 바르셀로나에서 주인공이 될 수 없었고 발롱도르를 원했던 네이마르는 역대 이적료 1위에 해당하는 2억 2200만 유로라는 천문학적인 이적료를 기록하며 파리 생제르맹으로 이적하며 리그앙 4회 우승과 구단 역사상 최초로 챔피언스리그 결승에 진출하는데 공헌했음은 물론 개인 통산 UEFA 챔피언스리그 올해의 스쿼드에 3회 선정되었다.

셀레상에서도 전체적인 활약상은 훌륭했지만 정작 메이저 대회 활약은 기대에는 미치지 못했다는 평가를 받았는데 물론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는 성적이 2014 브라질 월드컵 4강과 2021 코파 아메리카 준우승이라는 성적이다. 이 대회에서 모두 팀의 에이스로 활약했다.

 

 

 

이름: 히바우두
생년월일: 1972년 4월 19일

포지션: 포워드, 공격형 미드필더, 스트라이커, 윙어
A매치 기록: 74경기 35골
신체조건: 키 186cm / 몸무게 73kg
주 소속팀: FC 바르셀로나

1990년대 후반~2000년대 초반 세계 최고의 선수 중 하나로 악마의 왼발이라고 불렸을 정도로 강력하면서도 정확한 왼발 킥력과 뛰어난 득점력과 찬스 메이킹 능력을 모두 겸비했으며 공이 발에 붙어 다닌다는 말이 나왔을 정도로 드리블과 볼 컨트롤 능력이 발군이었는데 피지컬마저 강했다. 종합하자면 공격수로서의 기량과 플레이메이커로서의 기량이 모두 뛰어난 완성형 선수였다.

중소 클럽인 산타크루스에서 데뷔한 히바우두는 파우메이라스에서 첫 전성기를 누리며 1994 시즌 브라질 전국 리그 우승 및 브라질 세리 A 시즌 베스트 일레븐에 2회 선전되었고 데포르티보에서는 라리가 정상급 선수로 올라섰으며 바르셀로나에서는 라리가 2회 우승을 이뤄냈고 1997-98 시즌 라리가 올해의 선수상을 수상하며 당대 라리가 최고의 선수로 군림했고 AC 밀란에서는 개인의 활약은 아쉬웠지만 2002-03 시즌 UEFA 챔피언스리그 우승을 경험했다.

브라질 대표팀에서도 파트너 호나우두와 함께 더 화려한 활약을 펼쳤던 히바우두는 1997 컨페드컵 우승을 시작으로 1998 프랑스 월드컵 준우승이라는 성적을 이뤄냈고 1999년 코파 아메리카에서는 팀의 에이스로 활약해 득점왕과 MVP를 석권하며 우승에 크게 공헌해 트레블 팀 에이스인 베컴을 제치고 발롱도르와 피파 올해의 선수상, 그리고 월드 사커지 선정 올해의 선수상을 모두 수상했다. 그리고 2002 한일 월드컵에서는 호나우두, 호나우지뉴와 삼각 편대를 구성해 월드컵 우승을 이뤄냈으며 대회 올스타 팀과 실버슈를 수상했다.

 

 

 

이름: 호마리우
생년월일: 1966년 1월 29일

포지션: 스트라이커
A매치 기록: 70경기 55골
신체조건: 키 168cm / 몸무게 71kg
주 소속팀: FC 바르셀로나

골의 왕이라 불렸던 1990년대 최고의 스트라이커 중 한 명으로 동물적인 감각을 앞세워 상대의 오프사이드 트랩을 무너트려 득점했으며 신체 밸런스와 양발 사용 능력 모두 훌륭했으며 볼 컨트롤과 뛰어난 드리블 실력까지 자랑했기에 바르셀로나 시절 그의 파트너 스토이치코프는 그를 두고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선수 중 하나. 그는 종종 경기 중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고 비판받기도 했지만 골 기록을 보면 도저히 논쟁이 불가능했지. 그는 무에서 골을 창조해 내는 선수야. 그의 피니쉬는 비범했고 나는 종종 그가 탁월한 수비수들을 시체를 지나는 것 같이 통과하는 것을 볼 수 있었지. 오늘날 그와 같은 선수는 없어."라는 극찬을 했다.

바스쿠 다 가마에서 데뷔해 캄페오나투 카리오카 2연패를 이뤄냈음은 물론 주립리그 득점왕에 오르며 주목받은 호마리우는 히딩크 체제의 PSV 에인트호번에서 첫 전성기를 누리며 에레데비시 3회 우승과 득점왕 3회 수상, 그리고 1989년 네덜란드 올해의 축구선수를 수상하며 유럽에서도 통한다는 것을 확실하게 보여줬고 바르셀로나에서는 PSV 시절을 뛰어넘는 최전성기에 올라섰는데 1993-94 시즌에 30골을 터트리며 라리가 우승을 이뤄냈고 챔피언스리그에서도 결승전에 진출하는 기염을 토했다. 그러나 감독 및 동료들과의 불화로 이리저리 떠돌아다니며 실력이 정체되었다.

그러나 친정팀 바스쿠 다 가마로 돌아간 뒤인 2000년에는 축구선수로서는 황혼기인 34세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소속팀에서 공식전 71경기에 출전해 66골을 득점했으며 브라질 대표팀 소속으로는 2경기에 출전해 7골을 기록한 것을 포함해 2000년 한 해 동안 공식전 73골을 기록했음은 물론 소속팀의 브라질 세리 A 우승 및 코파 메르코수르 우승을 이뤄냈으며 호마리우 개인도 브라질 리그 대회 베스트 일레븐과 MVP에 동시에 선정되었음은 물론 각종 대회에서 득점왕을 휩쓸며 마지막 전성기를 누렸다. 호마리우는 캄페오나투 카리오카 및 브라질 세리 A, 네덜란드 에레데비시, 스페인 라리가와 UEFA 챔피언스리그를 포함해서 클럽 통산 16회의 득점왕에 오르는 괴력을 펼쳤다.

셀레상에서도 1985 남미 U-20 챔피언십에서 조국의 우승 및 개인의 득점왕을 동시에 이뤄내며 주목받기 시작한 호마리우는 성인 대표팀에서도 1989년 코파 아메리카에서 우승에 기여했으며 1994 미국 월드컵에서도 팀의 공격을 이끌며 우승해 월드컵 우승과 골든볼을 모두 석권했음은 물론 1994년에는 피파 올해의 선수상을 수상했고 프랑스 풋볼로부터 1994년 이전 발롱도르 수상자를 재평가할 때 기존 수상자인 스토이치코프를 제치고 1994년 명예 발롱도르를 수상했다. 그리고 1997년 컨페드컵에서는 호나우두와 함께 궁극의 투톱을 구성해 코파 아메리카와 컨페드컵에서 모두 우승을 차지했다. 특히 컨페드컵에서는 7골로 동료 호나우두마저 제치고 득점왕을 차지했는데 결승전 호주전에서는 호나우두와 함께 더블 해트트릭을 기록하며 실버볼과 골든슈를 수상하는 괴력을 뽐냈다. 호마리우는 A매치 17경기에 출전해 19골을 기록했음에도 감독들과의 불화로 국가대표팀에 꾸준히 소집되지는 못했지만 30대 후반인 2005년에도 소집된 이력이 있을 정도로 롱런했다.

 


브라질 역대 올스타 1군 25인 팀

 

 


4. 리저브

 


생년월일: 1966년 5월 8일
A매치 기록: 102경기 70실점 / 53클린시트
신체조건: 키 182cm / 몸무게 74kg
주 소속팀: SC 인테르나시오날

 

1990년대 세계 최고의 골키퍼 중 한 명으로 작은 키 때문에 공중볼 처리에서는 약점을 보였지만 엄청난 반사신경과 안정적인 핸들링은 물론 발밑도 준수하고 스피드도 빨라 스루패스를 미리 걷어내는 드넓은 수비범위를 자랑했으며 페널티킥 선방에도 장기를 보였음은 물론 큰 경기에서 강한 모습을 보여준 강심장이다.

브라질의 인테르나시오날에서 오랜 기간 활약하며 1988년 브라질 전국 리그 MVP를 수상한 타파레우는 유럽 무대에서도 파르마와 갈라타사라이에서 좋은 모습을 보였는데 파르마에서는 1992-93 시즌 UEFA 컵 위너스컵을 우승했고 갈라타사라이에서는 1999-2000 시즌 UEFA컵에서 뱅거의 아스날을 무찌르고 우승했으며 2000년에 열린 UEFA 슈퍼컵에서도 레알 마드리드를 무찌르고 우승했다.

셀레상에서도 그 훌륭한 명성을 이어간 타파레우는 1988년에 서울 올림픽 은메달을 시작으로 코파 아메리카 우승 2회와 1994 미국 월드컵 우승, 그리고 1998 프랑스 월드컵 결승 진출을 이끌며 맹활약했고 은퇴한 뒤에는 브라질 축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이름: 치아구 시우바
생년월일: 1984년 9월 22일

포지션: 센터백
A매치 기록: 113경기 7골
신체조건: 키 181cm / 몸무게 79kg
주 소속팀: 파리 생제르맹

2010년대 최고의 센터백 중 하나로 특별한 약점이 없었고 세련된 태클과 훌륭한 수비라인 조율로 후방에서 큰 영향력을 끼쳤던 선수라서 대표팀 선배 호나우두는 그를 두고 "프란츠 베켄바우어의 족적을 따라가는 선수"라는 평가를 내렸다.

초년에는 변방을 떠돌며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던 치아구 시우바는 AC 밀란에서 2010-11 시즌 세리에 우승을 이뤄냈고 세리에 A 올해의 팀에 2회 선정되었고 본격적인 전성기를 누린 PSG에서는 리그앙 7회 우승과 팀 역사상 첫 챔피언스리그 결승에 진출했음은 물론 치아구 시우바 개인으로도 리그앙 올해의 팀에 7회 선정되었다. 말년에 이적한 첼시에서도 수비라인의 퀄리티를 올리며 2021-22 시즌 챔피언스리그 우승에 공헌했으며 UEFA 올해의 팀에 개인 통산 3회 선정되었다.

셀레상의 암흑기에도 굳건하게 좋은 모습을 보여준 치아구 시우바는 2014 브라질 월드컵 4강을 이끌었으며 그가 빠진 경기에서 브라질은 독일에게 7-1로 대패를 당하는 수모를 겪었다. 그러나 이후에도 중용받으며 2018 러시아 월드컵에서도 주전으로 활약했으며 2019년 코파 아메리카에서도 우승에 기여해 대회 베스트 일레븐에 선정되었다.

 

 

 

이름: 다니 아우베스
생년월일: 1983년 5월 6일

포지션: 라이트백, 라이트윙,중앙 미드필더
A매치 기록: 126경기 8골
신체조건: 키 172cm / 몸무게 70kg
주 소속팀: FC 바르셀로나

앙헬 로마노, 리오넬 메시와 함께 압도적인 우승 트로피를 휩쓴 트로피 헌터로 왕성한 활동량과 날카로운 공격력을 더해 오른쪽을 지배했으며 측면에서 엄청난 커버 능력과 플레이메이킹 능력으로 중원과 연계하며 우측 공격수를 지원하는데 능했다.

세비야의 UEFA컵 2연패를 이뤄내며 2007년 발롱도르 투표에서 14위에 오르며 라모스와 함께 당대 라리가 최고의 라이트백에 오른 다니 아우베스는 바르셀로나에서 전성기를 보냈으며 라리가 6회 우승과 챔피언스리그 3회 우승 및 2009년 6관왕과 2014-15 시즌 트레블이라는 대업적을 달성했다.

유벤투스에서는 세리에 1회 우승과 챔피언스리그 결승 진출을, 파리에서는 리그앙 2회 우승을 기록하며 화려한 클럽 커리어를 보여줬는데 다니 아우베스 개인도 개인적으로도 UEFA 올해의 팀과 ESM 올해의 팀에 각각 5회 선정되었으며 2008-09 시즌에는 라리가 올해의 수비수상을 수상했다.

브라질 대표팀에서도 두 번의 코파 아메리카 우승에 공을 세웠는데 2007년 코파 아메리카에서는 결승전에 득점을 기록했으며 2019년 코파 아메리카에서는 리오넬 메시를 제치고 대회 MVP를 수상하는 활약을 펼쳤으나 월드컵 무대에서는 2010 남아공 월드컵에서는 백업 멤버, 2014 브라질 월드컵에서는 마이콩과 로테이션으로 나섰으며 2018 러시아 월드컵 때는 주전으로 나설 예정이었으나 부상으로 나서지 못했다.

 

 

 

이름: 주니오르
생년월일: 1954년 6월 29일

포지션: 레프트백, 수비형 미드필더, 중앙 미드필더
A매치 기록: 74경기 6골
신체조건: 키 172cm / 몸무게 69kg
주 소속팀: 플라멩구

1980년대 최고의 레프트백 중 한 명으로 화려하면서도 빠른 드리블 돌파와 웬만한 공격형 미드필더 수준의 볼 컨트롤 능력과 측면에서 중앙으로 침투해 플레이메이킹을 하며 킬 패스를 뿌리며 팀 공격을 주도하면서도 비슷한 유형의 후배 마르셀루와는 다르게 수비적으로 빈틈이 없었다고 평가받았다.

플라멩구와 토리노에서 활약한 주니오르는 플라멩구의 구단 통산 최다 출전자에 랭크된 주니오르는 브라질 전국리그 4회 우승과 1981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우승에 이어 인터콘티넨탈컵에서 붉은 제국 리버풀을 상대로 3-0 완승을 거두었는데 이 경기에서 주니오르는 유럽 정상급 라이트백 필 닐을 농락하며 경기를 자신의 것으로 만든 활약을 보여줘 남아메리카 올해의 선수 3위에 올랐다.

 

토리노 이적 이후에는 수비형 미드필더로 보직을 변경해서도 세리에 A 올해의 선수를 수상할 정도로 우수한 실력을 보여줬고 브라질로 돌아간 뒤인 1992년에는 38세의 나이에도 브라질 전국 리그 올해의 선수를 수상하며 롱런했다.

셀레상에서는 1982년에 이름을 날렸던 황금의 사중주를 보좌하며 활약한 주니오르는 세계 최고의 팀으로 수식되었던 브라질 대표팀의 일원으로 활약했으나 1982 스페인 월드컵과 1986 멕시코 월드컵에서 모두 준결승 진출에도 실패하며 부진한 성적을 낸 아쉬움이 있다. 그래도 주니오르 개인은1982 스페인 월드컵 올스타 팀과 1982년 남아메리카 올해의 선수 5위에 오르는 영광을 누리기도 했다.

 

 

 

이름: 둥가
생년월일: 1963년 10월 31일

포지션: 수비형 미드필더, 중앙 미드필더
A매치 기록: 91경기 6골
신체조건: 키 176cm / 몸무게 77kg
주 소속팀: 피오렌티나

1980년대 하반기와 1990년대 상반기를 대표하는 수비형 미드필더로 성실한 몸 관리에서 나오는 왕성한 활동량과 계산적이면서 거친 태클, 안정적인 패스, 경기의 흐름을 읽는 날카로운 전술안, 강력한 카리스마에서 나오는 훌륭한 통솔력을 겸비한 선수로 기존의 화려한 브라질 선수와는 거리가 있었던 선수였다.

인테르나시오날에서 데뷔해 캄페오나투 가우초 3회 연속 우승을 이뤄내며 주목받은 둥가는 피오렌티나와 슈투트가르트에서도 우승컵을 들지는 못했지만 팀의 핵심 선수로 좋은 모습을 보여줬는데 특히 피오렌티나에서는 월드 사커지 선정 월드 일레븐에 2회 선정되며 명성을 떨쳤고 J리그에서도 주빌로 이와타에서도 경기를 지고도 웃으며 수다를 떨었을 정도로 해이해진 선수단에게 "웃지 말라고 바보들아!"라고 일갈해 팀의 베테랑으로서 위닝 멘탈리티를 선물하며 팀을 1997 시즌 J리그 우승팀으로 만들었다.

1990년대 브라질 축구의 부활을 이끈 위대한 주장으로 월드컵 세 번, 코파 아메리카 네 번, 그리고 컨페드 컵에 한 번 참가해 총 다섯 번 결승에 진출해 네 번 우승했다. 1994 미국 월드컵과 1998 프랑스 월드컵에서 주장으로 대회에 참가해 모두 대회 베스트 일레븐에 들었으며 1994 미국 월드컵과 1997년 코파 아메리카와 컨페드컵에서는 주장으로 우승컵을 들었다.

 

 

 

이름: 지투
생년월일: 1932년 8월 8일

포지션: 수비형 미드필더, 중앙 미드필더
A매치 기록: 52경기 3골
신체조건: 키 179cm / 몸무게 69kg
주 소속팀: FC 산투스

브라질 축구 역사상 최고의 수비형 미드필더로 평가 받는 선수로 빠른 발과 왕성한 활동량을 겸비했고 터프한 태클로 상대의 공격형 미드필더를 괴롭히는데 능했으며 뛰어난 리더십으로 팀을 하나로 묶는데 능했다.

펠레, 페페와 함께 산투스의 황금기를 이끈 1등 공신인 지투는 주립리그인 캄페오나투 파울리스타에서 9회 우승 및 전국리그 5연패를 이뤄냈고 브라질 밖에서도 코파 리베르타도레스와 인터콘티넨탈컵에서도 2연패를 기록하며 당대 최강의 팀으로 군림했다. 특히 1962년에는 주립리그인 캄페오나투 파울리스타와 전국리그를 모두 석권함은 물론 코파 리베르타도레스는 당대 남미 최강의 팀인 페냐롤을 꺾으며 트레블을 달성했고 추가로 인터콘티넨탈컵에서는 유럽 최강의 팀인 에우제비우의 벤피카를 꺾는 기염을 토한다.

클럽에서의 커리어도 우수했지만 대표팀에서는 더 빛나는 활약을 펼쳤던 지투는 셀레상 유니폼을 입고 1958 스웨덴 월드컵과 1962 칠레 월드컵에서 모두 주전으로 활약하며 우승했으며 특히 1962 칠레 월드컵에서는 팀 밸런스를 안정시키며 결승전에선 득점까지 기록하는 활약을 보여주며 다수의 매체로부터 대회 베스트 일레븐에 선정되기도 했다.

 

 

 

이름: 호벨리누 히벨리누
생년월일: 1946년 1월 1일

포지션: 공격형 미드필더, 레프트윙, 중앙 미드필더
A매치 기록: 92경기 26골
신체조건: 키 169cm / 몸무게 73kg
주 소속팀: 코린치안스

펠레 이후, 지쿠 이전 브라질 대표팀의 아이콘이었던 선수로 플립플랩 드리블의 시조로 화려한 드리블을 보여줬으며 원자폭탄 킥이라 불렸던 매서운 왼발 프리킥을 보여줬다. 즉 킥과 드리블, 패스에서 모두 완벽한 모습을 보이는 플레이메이커였다.

어린 시절부터 펠레 다음 세대의 브라질을 책임질 재능이라고 평가받은 호베르투 히벨리누는 첫 전성기를 누린 코린치안스에서는 산투스와 파우메이라스의 기세에 밀려 우승컵을 차지하지는 못했지만 펠레, 아데미르 다 기아, 페드로 로차와 함께 상 파울루 주의 4대 플레이메이커로 평가받았고 1971년에는 브라질 세리 A 올스타 팀에 선정되었다. 그리고 플루미넨시에서는 플라멩구의 지쿠와 치열한 접전을 벌이며 캄페오나투 카리오카 2연패를 이뤄냈다.

1970 멕시코 월드컵에서 지역예선과 본선에서 전승 우승을 거두며 화려하게 자신을 세상에 알린 히벨리누는 1970년에는 대회 올스타에 선정되었고 1974 서독 월드컵에서도 팀의 핵심 선수로 팀 공격을 이끌며 팀이 4위에 올라서는데 공헌했다.  히벨리누 개인도 남미 올해의 선수 10위 안에 5회 선정되었으며 1977년에는 개인 통산 최고 순위인 2위에 올랐고 은퇴 이후에는 브라질 축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이름: 자이르지뉴
생년월일: 1944년 12월 25일

포지션: 라이트윙, 레프트윙, 포워드, 스트라이커
A매치 기록: 81경기 33골
신체조건: 키 172cm / 몸무게 71kg
주 소속팀: 보타포구

1970년 브라질을 상징하는 선수 중 한 명으로 빠른 스피드를 활용한 드리블 돌파와 정확한 오른발 슈팅, 그리고 화려한 발기술을 이용해 상대 수비의 압박을 따돌리는 능력도 지녔지만 크로스의 정확도가 나빠 클래식 윙어로 기용되진 못했다.

제2의 가린샤라 불리며 전성기를 누린 자이르지뉴는 보타포구에서 캄페오나투 카리오카 4회 우승과 1968년 브라질 전국 리그 우승을 포함해 총 10개의 트로피를 들어 올렸고 이후 마르세유에서 유럽 무대에 도전했으나 반 시즌만에 다시 귀환해 크루제이루에서 부활하며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우승을 이뤄내기도 했다.

셀레상에서는 1970 멕시코 월드컵에서 전승 우승을 차지했던 셀레상의 주포였다. 본선에서 6경기 모두 출전해 7골을 넣었으며 이런 활약을 인정받아 1970 월드컵 베스트 일레븐에 선정되었고 사람들은 그를 월드컵 폭풍이라 불렸다. 펠레와 토스탕이 은퇴한 이후에 열린 1974 서독 월드컵에서도 공격진의 에이스로 조국을 4위로 올렸다.

 

 

 

이름: 토스탕
생년월일: 1947년 1월 25일

포지션: 포워드, 스트라이커, 공격형 미드필더
A매치 기록: 54경기 32골
신체조건: 키 170cm / 몸무게 69kg
주 소속팀: 크루제이루

하얀 펠레라 불렸던 1970년대 초반 세계 최고의 선수 중 한 명으로 유럽의 크루이프에 대한 남미의 대답으로 평가받았으며 경기 흐름을 완벽하게 파악하는 완벽한 전술안과 경기장 전체를 망라하는 드넓은 시야에서 나오는 창의적인 패스로 수많은 골 찬스를 만들었으며 상대 마킹맨을 농락하는 탈압박 능력과 화려한 드리블 실력을 겸비한 공격수였다.

크루제이루에서 전성기를 보낸 크루제이루의 왕 토스탕은 캄페오나투 미네이루 5회 우승 및 1966년 브라질 전국 리그 우승을 이뤄냈는데 이 과정에서 전국리그 5연패를 이뤄냈던 펠레의 산투스를 상대로 1차전 6-2 대승 및 2차전 3-2 역전승을 이뤄내는 과정에서 모두 득점포를 가동했고 토스탕 개인도 1970년에는 브라질 전국리그 득점왕과 베스트 일레븐에 선정되었으며 1971년에는 브라질 전국리그 MVP를 수상했음은 물론 남미 올해의 선수상도 수상했다.

브라질 대표팀에서도 1970 브라질 월드컵 우승에 크게 공헌한 토스탕은 왕이라 불린 펠레의 뒤를 이어 부왕이라는 칭호로 불렸는데 히벨리누, 자이르지뉴, 카를루스 아우베르투, 제르손 등 전설적인 선수가 다수 포진했음을 감안하면 토스탕의 위상이 얼마나 높았는지 알 수 있다. 다만 망막박리라는 치명적인 안구 질환으로 인해 26세라는 어린 나이에 은퇴했는데 이는 브라질 축구계의 큰 손실이었다. 토스탕은 짧은 기간 굵은 활약을 보여줬기에 이를 인정받아 브라질 축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는 영예를 누렸다.

 

 

 

이름: 레오니다스 다 시우바
생년월일: 1913년 9월 6일

포지션: 스트라이커, 포워드
A매치 기록: 19경기 21골
신체조건: 키 175cm / 몸무게 74kg
주 소속팀: 플라멩구

펠레 이전 브라질 축구 최고의 스타 중 한 명으로 정확한 위치 선정과 정교하면서도 강력한 왼발 슈팅 능력을 갖췄으며 고무인간이라 불렸을 정도로 훌륭한 탄력성을 겸비해 축구 역사상 최초로 바이시클 킥을 시도했으며 득점 찬스를 만드는 부분에도 능해 인사이드 포워드로도 활약할 수 있었던 전천후 공격수였다.

바스쿠 다 가마, 보타포구, 플라멩구에서 캄파오네투 카리오카를 각각 한 번씩 우승하며 개인 통산 3회 우승을 이뤄낸 레오디나스는 1940년에는 득점왕도 거머쥐었으며 상 파울루로 이적한 이후에는 제2의 전성기를 누리며 사스트레와 함께 캄파오네투 파울리스타 5회 우승을 이뤄냈다. 실제로 레오디나스의 활약과 인기가 대단해 브라질의 초콜릿 제조업체인 렛타는 레오디나스의 허락하에 그의 별명인 검은 다이너마이트의 포르투갈어인 Diamante Negro라는 이름의 초콜릿을 발매했다. 

셀레상 유니폼을 입고도 맹활약한 레오니다스는 특히 1938 프랑스 월드컵에서의 활약은 발군이었는데 그가 결장한 4강 이탈리아전에서 브라질은 패배를 당해 3위에 머물렀음에도 7골을 득점한 레오디나스의 활약은 대단해 결승에 오른 이탈리아와 헝가리의 선수들을 제치고 대회 최우수 선수상을 수상했다. 당연하게도 브라질 축구 명에의 전당에도 헌액되었다.

 

 

 

이름: 아르투르 프리덴라이히
생년월일: 1892년 7월 18일

포지션: 스트라이커, 포워드
A매치 기록: 23경기 10골
신체조건: 키 178cm / 몸무게 62kg
주 소속팀: CA 파울리스타노

 

축구 역사상 비공식전 포함 최다 득점자이자 브라질 축구 역사상 최초의 스타플레이어로 당시 브라질 축구계에 만연했던 인종차별이라는 장벽을 걷어내고 성공적인 커리어를 써내려갔으며 브라질 대표팀에서도 흑인이 활약할 수 있는 판을 깔아놓은 기념비적인 인물이며 특유의 저돌적이면서 날쎈 플레이스타일로 인해 호랑이라는 벼령으로 불렸다.

CA 파울리스타노에서 활약하며 구단의 아이콘으로 군림한 프리덴라이히는 팀에 머무는 동안 캄페오나투 파울리스타 6회 우승을 이뤄냈고 상파울루로 이적한 뒤에도 캄페오나투 파울리스타 우승 횟수를 한번 추가했다. 그리고 캄페오나투 파울리스타 득점왕에 개인 통산 9회 수상했고 1925년에는 유럽 투어에서 엄청난 퍼포먼스를 선보이며 열 경기에서 단 한 번도 패배를 허용치 않았다. 특히 파리에서 열린 첫 경기에서 파울리스타누는 프랑스를 상대로 7:2 대승을 거두며 유럽인들을 충격에 빠트렸는데 브라질의 전문가 알레산드리 다코스타 박사는 이를 두고 "아르투르의 축구는 차원이 달랐습니다. 프랑스 사람들은 깜짝 놀랐습니다. 단 한 경기를 보고서도 말이죠. 아르투르는 이로써 왕 중의 왕이 되었습니다. 세계 축구의 왕 중의 왕이 된 거죠!"라고 찬사를 보냈다.

셀레상에서도 1919년과 1922년에 열린 코파 아메리카에서 모두 우승을 차지하는데 큰 공을 세운 프리덴라이히는 특히 1919년 대회에서는 우승은 물론 득점왕과 MVP까지 모두 석권했는데 이때를 두고 알레샨드리 다코스타 박사는 "그때 당시를 돌아보면 아르투르가 축구에 얼마나 큰 기여를 했는지 잘 알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그때까지만 해도 브라질 언론은 경마에 대한 기사만 주로 다뤘습니다. 그런데 아르투르가 골을 넣고 남아메리카 챔피언십에서까지 우승을 하자 구석에 몇 줄 실리던 게 고작이었던 축구기사가 신문에 대서특필되었죠! 아르투르는 축구를 인기 종목으로 만들었습니다."라고 회상했다. 실제로 브라질에서 축구가 인기 종목으로 오른 것은 물론 흑인도 축구에 제약 없이 참가하게 된 부분에는 프리덴라이히의 공이 절대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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