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축구 역사상 최고의 센터백 Top 11~20

국가의 영웅들/이탈리아

이탈리아 축구 역사상 최고의 센터백 Top 11~20

토르난테 2025. 4. 27. 1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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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의 주관적인 순위입니다.
*대상자는 이탈리아 국가 대표팀으로 A매치 1경기 이상 출전한 선수를 대상자로 했습니다.

*오리운디의 경우에도 이탈리아 국가 대표팀으로 A매치 1경기 이상 출전한 선수는 모두 포함했습니다.
*선수 사진은 대부분 플레이어스 유저인 법정스님의 소유님의 건조폼 입니다. 다만 법정님이 만들지 않은 선수들은 제가 만들었습니다.
*기록일은 2025년 4월 27일 기준입니다.

 


20위 리카르도 페리

 


생년월일: 1963년 8월 20일
A매치 기록: 45경기 4골
신체조건: 키 181cm / 몸무게 77kg
주 소속팀: 인테르 밀란

1980년대~1990년대 상반기 이탈리아 정상급 스토퍼였는데 동료 수비수들을 활용하는 지능적인 플레이와 날카로운 슬라이딩 태클은 물론 준수한 발밑까지 겸비했지만 집중력에서 단점을 보이며 세리에 A 최다 자책골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인테르에서 선수 생활 대부분을 보낸 페리는 인테르 밀란의 암흑기 때도 베르고미와 함께 묵묵히 버텨내며 1981-82 시즌 코파 이탈리아 우승을 이뤄냈고 마테우스, 브레메의 합류 이후에는 1988-89 시즌 세리에 A 우승과 두 번의 UEFA컵 우승을 이뤄냈다. 피리 개인도 1988년에는 인테르 올해의 선수상을 수상했고 1990년과 1991년에는 월드 사커 선정 월드 일레븐에 선정되었다.

아주리 군단에서도 비에르코보드의 부진을 틈타 코스타쿠르타를 제치고 주전으로 올라선 페리는 UEFA 유로 1988과 1990 이탈리아 월드컵에서도 모두 주전으로 활약했는데 말디니-바레시-페리-베르고미라는 '밀라노 올스타'라고 불리던 수비라인을 구성해 카테나치오의 정점을 보여주며 준결승에 오르는 활약을 보여줬다.

 

19위 풀비오 콜로바티

 

 

생년월일: 1957년 5월 9일
A매치 기록: 50경기 3골
신체조건: 키 183cm / 몸무게 75kg
주 소속팀: AC 밀란

1970년대 후반과 80년대 초반에 이탈리아 무대에서 이름을 날린 스토퍼이자 라이트백으로 터프하고 강력한 대인 수비는 물론 엄청난 집중력에서 나오는 우수한 공중볼 경합 능력은 물론 강력한 카리스마에서 나오는 리더십까지 겸비했다.

AC 밀란에서 데뷔해 바레시와 함께 밀란의 미래로 불렸던 콜로바티는 AC 밀란에서 1976-77 시즌 코파 이탈리아 우승과 1978-79 시즌 세리에 A 우승을 이뤄냈지만 토토네로 스캔들의 여파로 AC 밀란이 강등당했을 때도 팀에 남아 바레시와 함께 1980-81 시즌 세리에 B 우승을 이뤄내며 팀을 다시 승격시켰으나 부진한 경기력으로 고생하는 와중에 팬들이 던진 돌에 맞자 1981-82 시즌이 끝나고 다시 강등당한 AC 밀란을 등지고 인테르 밀란으로 이적한 행적 때문에 배신자라고 불리며 40년이 지난 아직까지도 밀란 서포터들에게 미움을 받고 있다.

밀란 팬들에게는 배신자라고 많은 비난을 받지만 아주리 군단에서도 뛰어난 모습을 보였던 콜로바티는 1982 스페인 월드컵에 주전 멤버로 참가해 팀의 우승을 이끌며 대회 베스트 일레븐에 선정되는 영광을 누리며 밀란 팬들을 제외한 이탈리아 국민들에게는 찬사를 받았는데 월드컵에서의 활약 덕분에 1982년에 프랑스 언론 옹즈 몽디알이 뽑은 유럽 올해의 스토퍼 투표에서 1위 칼하인츠 푀르스터 다음으로 많은 표를 얻었다.

 

 

18위 에랄도 몬젤리오

 


생년월일: 1906년 6월 5일
A매치 기록: 35경기 0골
신체조건: 키 173cm / 몸무게 67kg
주 소속팀: 볼로냐 FC

1920년대 후반과 30년대 이탈리아 무대에서 이름을 날렸던 수비수로 오늘날의 오른쪽 센터백인 라이트 풀백에서 활약했는데 엄청난 스피드와 견고한 맨 마킹 실력은 물론 롱볼을 활용해 전방으로 볼을 보내는 능력에서도 이름을 날렸던 우아한 수비수였다.

이탈리아 축구의 황금기를 이끌었던 몬젤리오는 볼로냐의 1928-29 시즌 세리에 A 우승과 2회 준우승을 이뤄냈으며 당시 중유럽 지역의 챔피언스리그였던 미트로파 컵에서도 2회 우승을 이뤄내는데 큰 공을 세워 세간에서는 "볼로냐 공격에 스키아비오가 있다면 수비에는 몬젤리오와 가스페리가 있다."라고 평가했다. 그리고 1935-36 시즌에는 인테르의 알레만디와 함께 로마로 이적해 리그 최소 실점을 이뤄냈지만 시즌 개막 직후에 주전 공격수 일부가 에티오피아 전쟁에 징병된다는 루머로 인해 남미로 도망가버리는 악재를 극복하지 못해 우승에는 실패했다.

이탈리아 대표팀에서도 칼리가리스와 로제타의 시대가 저물자 알레만디와 함께 주전 자리를 차지해 활약한 몬젤리오는 1934 이탈리아 월드컵 우승을 이뤄냈으며 중유럽컵에서도 2회 우승을 이뤄냈고 1938 프랑스 월드컵에는 백업 멤버로 참가해 우승을 경험하며 월드컵 역사상 몇 안 되는 2회 우승자 중 한 명으로 이름을 남겼다.

 


17위 산드로 살바도레

 


생년월일: 1939년 11월 29일
A매치 기록: 36경기 0골
신체조건: 키 180cm / 몸무게 74kg
주 소속팀: 유벤투스 FC

1960년대 이탈리아 대표팀 주전 라베로 중 한 명으로 빠른 스피드를 활용한 뛰어난 수비라인 커버는 물론 강력한 몸싸움 능력과 우수한 헤더, 그리고 수비수치고는 우수한 발밑 능력으로 빌드업의 시작점 역할을 하며 체사레 말디니, 아르만도 피키와 라이벌리를 구성했다.

AC 밀란의 유스 출신으로 AC 밀란에서 세리에 A 2회 우승을 이뤄냈으나 페루 출신의 빅토르 베니테스에게 밀려나 유벤투스로 이적한 살바도레는 1960년대 유벤투스의 핵심 리베로로 활약하며 세리에 A 2회 우승과 1964-65 시즌 코파 이탈리아 우승을 이뤄내며 양 밀란의 전성기 속에서도 최대한의 성과를 내며 분전했다.

1960년대 중후반 아주리에서도 주전 리베로로 활약햔 살바도레는 966 잉글랜드 월드컵에서는 주장으로 참가했으나 북한전 패배로 인한 조별 리그 탈락이라는 수모를 겪었으나 이후 절치부심하며 UEFA 유로 1968에서는 조국의 첫 유럽선수권대회 우승이라는 영광을 이뤄냈다.

 

16위 카를로 파롤라

 


생년월일: 1921년 9월 20일
A매치 기록: 10경기 0골
신체조건: 키 174cm / 몸무게 74kg
주 소속팀: 유벤투스 FC

1940년대 하반기와 1950년대 상반기에 이탈리아 무대에서 이름을 날렸던 센터하프로 우수한 대인 수비 능력과 상대의 패스 흐름을 끊는 인터셉트로 이름을 날렸으며 풀백과 하프백을 잇는 연결고리 역할도 훌륭하게 수행했다.

유벤투스에서 선수 생활의 대부분을 보낸 파롤라는 1941-42 시즌 코파 이탈리아 우승을 이뤄냈으며 수페르가의 참사로 토리노 FC가 몰락해 왕좌의 공백이 생긴 이탈리아 무대에서 세리에 A 2회 우승을 이뤄내며 앞서나갔다.

스트라이커 출신이었던 파롤라는 수비수였음에도 불구하고 오버헤드킥에도 뛰어난 모습을 보여주며 유명세를 떨쳤는데 그 당시 축구를 가볍게 접했던 사람들은 파롤라 하면 수비력이 아닌 오버헤드킥을 떠올렸을 정도로 그의 오버헤드킥은 유명세를 탔다.

 

15위 아르만도 피키

 


생년월일: 1935년 6월 20일
A매치 기록: 12경기 0골
신체조건: 키 171cm / 몸무게 71kg
주 소속팀: 인테르 밀란

1960년대 유럽 축구를 풍미한 그란데 인테르의 주장으로 안정적인 커버플레이와 완벽한 클리어링은 물론 미드필더 진영으로의 원활한 볼 배급 능력을 겸비했으며 기술적으로 세련된 태클을 보여주기도 했다.

1960년대 중반 유럽에서 잘 나가던 그란데 인테르 시절 인테르의 리베로를 맡은 피키는 AC 밀란의 리베로 체사레 말디니와의 라이벌리를 구성하며 세리에 A 3회 우승과 유러피언 컵 2연패를 이뤄내며 유럽 축구 최고의 리베로 중 하나로 이름을 날렸다.

다만 아주리에서의 경력은 일천한 편인데 이는 1960년대 중반 이탈리아의 감독을 맡았던 에드문도 파바리가 피키를 전술적인 이유를 명분으로 제외시켰으나 그 결과는 북한에게 패해 조별리그에서 탈락하는 수모를 겪었기에 피키를 신뢰하지 않았던 파바리는 엄청난 비난에 시달리며 경질당했고 이후 피키는 대표팀에 복귀했으나 UEFA 유로 1968을 앞두고 큰 부상을 당하며 그의 대표팀 커리어는 허무하게 끝난다.

 

14위 체사레 말디니

 


생년월일: 1932년 2월 5일
A매치 기록: 14경기 0골
신체조건: 키 183cm / 몸무게 76kg
주 소속팀: AC 밀란

역대 최고의 레프트백 파올로 말디니의 아버지이자 1960년대 상반기 세계 최초의 리베로 중 하나로 공격 가담은 거의 하지 않았지만 팀의 수비라인을 지휘하며 안정적인 커버플레이와 우수한 수비라인 통솔력과 효과적인 경기 템포 조절, 그리고 상대 공격수를 잡아먹는 대인 수비 능력도 뛰어났다.

아르만도 피키, 산드로 살바도레와 라이벌리를 이뤘던 체사레 말디니는 1950년대부터 1960년대에 걸쳐 활약했는데 50년대 첫 전성기 시절에는 센터하프로 활약했고 네레오 로코 체제의 두 번째 전성기에는 카테나치오 시스템의 리베로로 활약해 세리에 A 4회 우승과 1956년에는 라틴 컵 우승을 이뤄냈고 1962-63 시즌에는 로코의 카테나치오의 스위퍼 역할을 훌륭하게 수행하며 팀의 첫 유러피언 컵 우승에 크게 공헌하며 AC 밀란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1960년대 초반 아주리에서도 핵심 멤버로 활약한 체사레 말디니는 1962 칠레 월드컵에서 뛰어난 기량을 보여줬는데 팀은 조별 리그에서 탈락했지만 체사레 말디니의 활약은 대단해 우승팀 브라질과 준우승팀 체코슬로바키아의 선수들을 제치고 대회 베스트 일레븐에 선정되었다.

 

13위 로베르토 로사토

 


생년월일: 1943년 8월 18일
A매치 기록: 37경기 0골
신체조건: 키 176cm / 몸무게 73kg
주 소속팀: AC 밀란

1960년대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수비수인 로사토는 수려한 외모와 동시에 거칠고 교활한 플레이를 보여주는 상반된 성격의 선수라 천사의 얼굴을 한 악마라 불렸고 서독 언론에서는 그의 거칠과 강력한 수비력으로 인해 망치라고 부르기도 했다.

토리노와 AC 밀란에서 명장 네레오 로코의 신임을 듬뿍 받은 로사토는 토리노에서 이탈리아 무대 톱클래스 센터백으로 성장했고 은사 로코가 AC 밀란으로 돌아가자 그를 따라 밀란 수비라인의 핵을 맡았는데 그 기간동안 코파 이탈리아 3회 우승 및 1967-68 시즌 세리에 A 우승과 1968-69 시즌 유러피언 컵과 인터콘티넨탈컵 우승을 이뤄냈으며 UEFA 컵 위너스컵 2회 우승을 기록했다. 로사토 개인도 상술한 업적을 인정받아 AC 밀란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발카레지 체제의 아주리 군단에서도 카테나치오 전술의 중요한 축으로 활약한 로사토는 주로 스토퍼 역할을 맡아 짠물 수비를 보여줬는데 UEFA 유로 1968에서는 조국의 우승에 공헌했고 1970 멕시코 월드컵에서도 짠물 수비를 보여주며 결승에 진출했지만 결승전에서 펠레의 브라질을 막아내지는 못해 준우승에 머물렀다.

 

12위 알레산드로 코스타쿠르타

 

생년월일: 1966년 4월 24일
A매치 기록: 59경기 2골
신체조건: 키 182cm / 몸무게 75kg
주 소속팀: AC 밀란

1990년대 당시 세리에 A 최고의 스토퍼 중 하나로 힘과 축구 지능을 겸비했으며 뛰어난 대인 마킹 능력을 앞세워 바레시, 말디니, 타소티와 함께 역사상 최고의 포백 라인을 구성하여 활약하였으며 바레시의 은퇴 이후에는 수비라인의 리더로 성장했다.

커리어의 전부를 AC 밀란에서만 보낸 코스타쿠르타는 밀란 제너레이션 1기의 핵심 및 2기의 조연으로 활약하며  세리에 A 7회 우승 및 2002-03 시즌 코파 이탈리아 우승과 UEFA 챔피언스리그 5회 우승이라는 대기록을 기록했다. 특히 밀란 제너레이션 시절에는 말디니, 바레시, 타소티와 함께 철의 포백을 구성해 활약했고 은퇴한 뒤에는 AC 말란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1980~90년대 당시 이탈리아의 두터운 선수층 때문에 20대 후반에서야 대표팀에 소집된 코스타쿠르타는 1994 미국 월드컵에서 준우승을 이뤄냈으며 UEFA 유로 1996과 1998 프랑스 월드컵에서도 주전으로 활약했다.

 

11위 치로 페라라

 


생년월일: 1967년 2월 11일
A매치 기록: 49경기 0골
신체조건: 키 180cm / 몸무게 80kg
주 소속팀: 유벤투스 FC

1990년대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수비수 중 하나로 시스템과 포지션에 구애받지 않고 우수한 활약을 펼쳤을 정도로 축구와 수비수의 포지션에 대한 이해도가 높았으며 한 박자 빠른 태클로 상대 공격수를 무력화시켰으며 우수한 수비라인 조율 능력은 물론 우수한 발밑 기술로 빌드업의 시작점 역할도 맡았다.

나폴리에서 데뷔해 개인의 첫 전성기와 구단 역사상 최고의 황금기를 누린 페라라는 1986-87 시즌 도메스틱 더블을 포함해 세리에 A 2회 우승과 코파 이탈리아 1회 우승을 이뤄냈고 1988-89 시즌에는 UEFA컵 우승을 이뤄내며 나폴리의 유일무이한 유럽 대항전 트로피를 따내는데 크게 공헌했다. 그러다가 나폴리의 재정난과 유벤투스의 리빌딩이라는 조건이 잘 맞아 유벤투스에 합류한 페라라는 리피 체제 수비라인의 핵심 역할을 수행하며 세리에 A 5회 우승과 1994-95 시즌 코파 이탈리아 우승은 물론 UEFA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에 4회 진출해 1995-96 시즌에는 우승을 차지했고 페라라 개인은 1996-97 시즌과 1998-99 시즌에는 ESM 올해의 팀에 선정되었다.

아주리에서도 리카르도 페리, 피에트로 비에르코보드 코스타쿠르타와 치열한 주전 경쟁을 펼쳤던 페라라는 UEFA 유로 1988과 1990 이탈리아 월드컵에서는 백업 멤버였으며 사키 체제에서는 철저하게 외면받으며 3년간 거의 출전하지 못했으나 바레시 은퇴 이후 대표팀 주전 자리에 올라섰음에도 UEFA 유로 1996과 1998 프랑스 월드컵에서는 대회를 앞두고 예기치 못한 부상으로 나서지 못했고 UEFA 유로 2000에서는 이미 칸나바로-네스타 라인에 밀려 벤치에 앉았을 정도로 메이저 대회와는 지독히도 인연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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