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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축구의 참맛 1. 스위퍼 키퍼의 계보도

토르난테 2024. 4. 11. 2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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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국내 팬들에게는 해외 마케팅의 정점인 프리미어리그와 유럽 축구 전통의 스타군단인 레알 마드리드, 바르셀로나에 비해 분데스리가를 위시한 독일 축구의 인기는 없다. 심지어는 독일 축구사 최악의 암흑기를 겪고 있기에 과거의 업적까지 과소평가받는 경우가 강하다.

그래서인지 가장 꾸준하게 강력했던 독일 축구가 여러 방면에서 원조가 되며 트렌드를 이끌었다는 사실을 잘 모른다. 하지만 여러분들이 모른다고 사실이 거짓이 되는 것은 아니다. 대표적으로 현대식 백 스리 시스템도 원조는 독일 대표팀 감독 유프 데어발이었다. 독일 축구는 축구사 발전 과정에서 많은 영향력을 끼쳤다. 오늘은 독일 축구사가 스위퍼 키퍼에 끼친 영향을 설명하려고 한다.

 




1. 하인리히 슈툴파우트

 


생년월일: 1896년 1월 11일
A매치 기록: 21경기 40실점 / 5클린시트
신체조건: 키 184cm
주 소속팀: FC 뉘른베르크

'기록상 세계 최초의 스위퍼 키퍼'

1920년대 최고의 골키퍼인 사모라의 라이벌로 평가받았던 슈툴파우트는 선수 생활 전부를 뉘른베르크에서만 보내며 바이에른 주 리그 10회 우승, 남부 독일 리그 7회 우승 및 독일 축구 챔피언십 5회 우승을 이뤄내 뉘른베르크의 시대를 재창했는데 슈툴파우트는 뉘른베르크가 친선 경기에서 지는 것조차 수치스럽게 여겼을 정도로 승부욕이 강했으며 뉘른베르크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해 "이 도시, 이 클럽에서 플레이하는 것 그리고 뉘른베르크에서 사는 것은 영광스러운 일이다. 이 모든 것들은 길이 남고 위대한 뉘른베르크는 절대 침몰하지 않으리"라는 어록을 남기며 팀에 대한 애정과 자부심을 드러내기도 했다.

기록에 따르면 슈툴파우트는 종종 하프백과 포워드를 소화했을 만큼 발기술이 우수했고 모험적인 플레이도 즐겨서 종종 제2의 수비수라는 평가를 들었는데 20미터 정도를 달려와서 공격수보다 앞서 공을 처리하는 플레이를 세계 최초로 선보였다고 한다. 즉 중유럽에서는 그로시치 줄러, 러시아에서는 레프 야신, 남아메리카에서는 아마데오 카리소를 스위퍼 키퍼의 원류로 보는데 독일에서는 이를 부정했다.

 

2. 빌리발트 크레스

 


생년월일: 1906년 11월 13일
A매치 기록: 16경기 25실점 / 4클린시트
신체조건: 키 183cm / 몸무게 75kg
주 소속팀: 드레스드너 SC 

'볼 컨트롤은 훌륭했지만...'

1930년대 독일 무대 최고의 골키퍼 3인방 중 한 명으로 로트바이스 프랑크푸르트와 드레스드너 SC, 그리고 FSV 프랑크푸르트에서 전성기를 누렸고 특히 드레스드너에서는 가울리가 작센 6회 우승, 독일 챔피언십 2회 우승이라는 화려한 커리어를 쌓았다.

헬무트 쇤은 크레스를 두고  "크레스는 골라인에만 붙어서 플레이하지 않았고 말 그대로 페널티 에어리어에서 관리자였다. 위기 상황에서 실수가 적었고 결정적인 개입으로 상황을 끊어냈다. 빌리발트는 자신의 역할을 필드의 열한 번째 선수로 활용했다."라는 평가를 내렸을 정도로 발밑이 뛰어났는데 당대 골키퍼 포지션은 필드 플레이어에 재능이 없었던 사람이 주로 맡던 포지션임을 생각하면 동시대 다른 골키퍼들보다 얼마나 볼을 잘 다뤘는지 알 수 있다.

디 만샤프트에서도 1934 이탈리아 월드컵에 주전으로 출전해 팀이 준결승에 진출하는데 큰 공을 새웠으나 준결승에서는 이전의 활약과는 무색하게 실수를 연발하며 체코슬로바키아에게 3-1로 패하면서 다시는 대표팀 골문을 지키지 못했다. 혁신적이었지만 안정감이 부족해 발목을 잡혔다.

 

 

3. 프리츠 헤어켄라트

 


생년월일: 1928년 9월 9일
A매치 기록: 21경기 33실점 / 6클린시트
신체조건: 키 179cm / 몸무게 73kg
주 소속팀: 로트바이트 에센

'오베리가 시대의 마지막 스위퍼 키퍼'

1950년대 중후반 독일 무대 최고의 골키퍼 중 한 명으로 헬무트 란과 함께 로트바이스 에센에서 1952-53 시즌 DFB포칼 우승 및 1954-55 시즌 독일 챔피언십 우승을 이뤄냈으며 1958 스웨덴 월드컵에서는 준결승 진출을 이뤄냈다.

프리츠 헤어켄라트는 아웃사이드 라이트로 경력을 시작했을 정도로 빠르고 민첩하며 드리블에 능했는데 이를 활용해 기습적으로 페널티라인 밖으로 튀어나와서 상대 공격수의 볼을 탈취하거나 페널티 박스 안에서의 일대일 상황에서는 각도를 좁혀나와 상대의 볼을 뺏고 전개하기도 했다.

 

 

4. 페타르 라덴코비치

 



생년월일: 1934년 10월 1일
A매치 기록: 3경기 (유고슬라비아)
신체조건: 키 187cm / 몸무게 84kg
주 소속팀: 1860 뮌헨

'스위퍼 키퍼 발전에 큰 공을 세운 유고슬라비아의 기인'

초창기 분데스리가를 빛낸 골키퍼이자 축구 골키퍼 발전사에 있어서 절대로 이름이 빠져서는 안 되는 골키퍼로 유고슬라비아 대표팀에서는 튀는 플레이스타일로 인해 1956 멜버른 올림픽을 제외하고는 잘 기용되지 못하다가 1860 뮌헨으로 이적한 뒤에 전성기를 이끌며 1963-64 시즌 DFB포칼 우승과 1964-65 시즌 UEFA 컵 위너스컵 준우승, 그리고 1965-66 시즌 분데스리가 우승을 이뤄냈고 키커지 선정 분데스리가 시즌 베스트 일레븐에 2회 선정되었다.

경기장 안팎에서 여러 기행으로 유명했는데 경기장 내에서는 페널티라인 외곽까지 나와 루즈볼을 처리했으며 먼 훗날 대한민국의 김병지처럼 전방으로 드리블을 감행해 많은 팬들을 놀라게 했으며 경기장 밖에서는 가수로 활동했는데 그가 부른 'Bin I Radi bin I Konig'은 1963년 유럽 3위의 히트곡이었다.

 

 

5. 스위퍼 키퍼의 암흑기

 

1970년대 서독 축구계에는 프란츠 베켄바우어를 필두로 기존의 수비라인에서의 자유로운 커버를 벗어나 경기장 전역을 자유롭게 돌아다니며 지휘하는 서독식 리베로의 유행으로 독일 내에서 골키퍼의 역량은 철저하게 선방 및 수비라인 지휘력으로 굳어지기 시작했다.

제프 마이어, 루디 카르구스, 하랄트 슈마허, 아이케 임멜과 같은 골키퍼 모두 기존의 안정적인 클래식 골키퍼 유형의 선수였다. 이 시대에 영향력은 프란츠 베켄바우어, 울리 슈틸리케, 로타어 마테우스, 마티아스 잠머와 같은 선수들의 몫이었고 골키퍼들은 철저하게 조연이었다.

 

 

6. 옌스 레만

 



생년월일: 1969년 11월 10일
A매치 기록: 61경기 51실점 / 31클린시트
신체조건: 키 190cm / 몸무게 87kg
주 소속팀: FC 샬케 04

'40년 만에 해동된 스위퍼 키퍼'

1990년대와 2000년대에 걸쳐 이름을 날린 명 골키퍼로 샬케에서는 1996-97 시즌 UEFA컵 결승전에서 막강한 전력을 가진 인테르를 상대로 무수하게 많은 슈퍼세이브로 팀에게 우승트로피를 선물했고 도르트문트에서는 분데스리가 우승을 차지하는데 공을 세웠으며 아스널에서는 무패 우승과 UEFA 챔피언스리그 준우승을 이뤄냈다.

옌스 레만은 경장자인 일그너, 쾨프케, 올리버 칸과 다르게 드넓은 시야와 우수한 발기술, 그리고 정확하면서도 강력한 던지기를 활용한 빠른 역습을 이끈 빌드업으로 유명했음은 물론 기습적으로 페널티박스 밖으로 전진해 상대 공격수의 볼을 탈취하기도 했다. 이런 플레이를 샬케 유스 시절부터 봐왔던 노이어는 레만의 영향을 받아 스위퍼 키퍼 스타일의 골키퍼로 성장했다.

 

 

7. 마누엘 노이어

 



생년월일: 1986년 3월 27일
A매치 기록: 117경기 113실점 / 48클린시트
신체조건: 키 193cm / 몸무게 93kg
주 소속팀: FC 바이에른 뮌헨

'스위퍼 키퍼 혁명을 완수한 혁명가'

축구 역사상 최고의 골키퍼 중 한 명으로 FC 샬케에서는 2009-10 시즌 분데스리가 준우승과 2010-11 시즌 DFB포칼 우승 및 UEFA 챔피언스리그 4강 진출에 공을 세워 독일 올해의 선수상을 받았고 바이에른 뮌헨에서는 2013년 트레블과 2020년 6관왕을 포함해 분데스리가 11연패를 이뤄냈고 키커 랑리스테 평가에서도 월드클래스 등급을 12회나 받으며 베켄바우어, 우베 젤러 다음으로 많이 받았던 독일 축구사 최고의 선수 중 한 명이다.

샬케 유스 시절부터 선배 스위퍼 키퍼 레만을 보고 자란 노이어는-전성기의 노이어는 클래식한 골키퍼의 역할을 완벽하게 소화함과 동시에 수비라인 뒷공간 넓은 범위를 마치 이탈리안 리베로처럼 커버했기에 노이어가 속한 팀은 수비수 한 명이 더 있는 효과를 받아 라인을 다른 팀보다 높게 올렸고 심지어 펩은 골문으로부터 최종 수비진을 40m까지 올리기도 했다. 이전의 스위퍼 키퍼들도 적절한 커버플레이와 빌드업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았지만 노이어는 아예 수비수 한 명 더 있는 효과를 낸 부분은 골키퍼로서 이보다 더 큰 영향력을 끼치기는 불가능했다.

 

 

2014WC 프랑스전 전반전 노이어의 히트맵



당연하게도 골키퍼 육성의 기준점은 노이어가 되었으며 노이어 이후 세대의 골키퍼를 고르는 기준에서는 수비라인과 점유율을 올리는 강팀들은 스위퍼 키퍼들을 택했고 약팀에서도 빌레필트의 슈테판 오르테가가 특정 경기에서 자신이 가장 많은 볼터치를 기록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골키퍼의 역사는 노이어 등장 이전과 이후로 나온다는 말이 과장이 아니다. 노이어는 역사상 최고의 골키퍼였고 그가 은퇴하면 이는 확실하게 자리잡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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