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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식 키퍼 vs 스위퍼 키퍼, 치열한 경쟁의 역사

토르난테 2024. 4. 2. 15: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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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서론

현대 축구의 골키퍼는 빌드업의 시발점 역할을 훌륭하게 수행함은 물론 라인을 올리는 상황에서는 골라인 밖으로 나가 넓은 범위를 커버하기도 한다. 아무리 슛 스토퍼의 역할에 능해도 빌드업 과정에 기여도가 낮으면 반쪽짜리 골키퍼 취급을 받기도 한다.

그러나 과거부터 이런 골키퍼가 중용받는 것은 아니었다. 도리어 저런 공격적인 성향으로 인해 안정감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국가대표팀 주전경쟁에서 밀려나는 경우도 수두룩했다. 당장 우리나라만 해도 이운재가 김병지 대신 선택받은 이유는 탄탄한 안정감에 있었지 않는가?

그럼에도 스위퍼 키퍼 성향의 골키퍼를 좋아하는 팬들 역시 많았고 우수한 골키퍼에 대한 기준은 항상 화두에 오른 논쟁거리였다. 그래서 준비했다. 각 시대, 각 나라의 클래식 키퍼와 스위퍼 키퍼의 대표팀 넘버 원 수문장 경쟁 사례를 말이다.


2. 클래식 키퍼 vs 스위퍼 키퍼, 그 치열한 경쟁의 역사

2-1. 1950년대 아르헨티나

로젤리오 도밍게스 vs 아마데오 카리소

 

아마데오 카리소와 로젤리오 도밍게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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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이 제2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참화를 겪고 있을 때 아르헨티나는 일명 리버 플레이트를 중심으로 라 마키나라는 축구 전술의 대혁명기를 겪고 있었고 세계 최초로 수비형 아웃사이드 포워드가 등장하기도 했다. 비록 1940년대 하반기 경제위기로 인해 프로팀들이 흔들리면서 핵심 선수들을 콜롬비아에 내줬지만 그럼에도 아르헨티나는 우수한 축구문화를 바탕으로 엄청난 선수풀을 가지고 있었기에 여전히 남아메리카의 맹주로 이름을 날리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골키퍼에도 변종이 등장했다. 바로 남미 최초의 스위퍼 키퍼라고 불리는 아마데오 카리소가 혁명의 중심지 리버 플레이트에서 데뷔했고 1949년에는 주전으로 도약했다. 그리고 주전으로만 아르헨티나 프리메라 디비시온 5회 우승을 이뤄냈으며 훗날에는 남미 축구 역사상 최고의 골키퍼로 평가받기도 했다.

그러나 당시 아르헨티나 대표팀 감독으로 장기집권한 기예르모 스타빌레 감독의 선택은 라싱 클루브의 정통파 골키퍼로 이름을 날린 로젤리오 도밍게스였다. 실제로 일명 '더러운 얼굴의 천사'라고 불리며 최고의 전력으로 나선 1957년 코파 아메리카에서 로젤리오 도밍게스가 주전으로 나서며 우승에 큰 공을 세운 반명 카리소는 백업 자리마저 페로 카릴 오에스테 소속의 골키퍼 안토니오 로마에게 내주며 대표팀에 소집조차 되지 못하는 굴욕을 겪었다.

그러나 이 대회가 끝나고 로젤리오 도밍게스가 스페인의 레알 마드리드로 이적했기에 더는 그를 대표팀에 소집하기 어려웠던 스타빌레는 결국 전술을 재편해 카리소를 주전으로 기용했지만 1958 스웨덴 월드컵에서 아르헨티나는 조별 예선에서 탈락했다. 그리고 카리소는 또 다른 젊은 정통파 골키퍼 안토니오 로마와의 주전 경쟁에서 밀려났다. (도밍게스 역시 기량 쇠퇴로 인해 아르헨티나로 복귀했으나 성장해버린 안토니오 로마를 넘지 못했다.)

훗날 카리소가 국제축구역사통계연맹으로부터 20세기 남아메리카 올해의 팀에 선정되며 영광을 누린 것과 다르게 당대에는 로젤리오 도밍게스에게 대표팀 우선순위가 확실히 밀렸다. 카리소는 A매치 20경기에 출전했지만 도밍게스는 A매치 58경기에 출전한데다가 그마저도 도밍게스가 레알 마드리드로 떠나 대표팀 소집이 불가능해졌기에 카리소가 주전으로 도약한 것이다. 당시에는 A매치 데이도 없었고 항공편 및 교통편도 열악했다.

 



2-2. 1960년대 유고슬라비아

밀루틴 쇼슈키치 vs 페타르 라덴코비치

 

유고슬라비아의 레전드 쇼슈키치 vs 1860 뮌헨 역사상 최고의 선수 라덴코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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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유럽은 항상 축구 혁명의 중심지였다. 유럽대륙 최초의 펄스 나인은 오스트리아와 헝가리에서 시작되었고 유기적인 스위칭 플레이를 연구한 학파가 중유럽에 기반한 다뉴브 학파로 불렸다. 실제로 유고슬라비아 역시 이들의 영향을 받아 공격진에서 유기적인 스위칭으로 상대를 공략했고 화려한 테크닉을 가진 드리블러가 많아 유럽의 브라질이라 불렸다.

공격형 미드필더나 윙어와 같은 2선 자원만 드리블을 잘했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실제로 유고슬라비아의 OFK 베오그라드의 주전 키퍼 라덴코비치는 골키퍼였음에도 롱킥으로 빌드업에 기여함은 물론 아예 전방으로 드리블을 감행하는 플레이를 펼쳐 많은 팬들을 놀라게 했다.

그러나 유고슬라비아 축구계가 다뉴브 학파의 모든것을 받아들이진 않았다. 1950년대 헝가리에는 그로시치 줄러의 활약으로 인해 스위퍼 키퍼가 유행했음에도 유고슬라비아에서는 정통파 골키퍼 블라디미르 베아라가 이름을 날리고 있었다. 그랬기에 베어라의 영향을 받은 유고슬라비아 축구계는 정통파 골키퍼를 더 중용했다.

1956 멜버른 올림픽에서는 주전 골키퍼로 은메달을 목에 걸었던 라덴코비치는 이후 파르티잔의 골키퍼 밀루틴 쇼슈키치가 대두하자마자 바로 주전 자리를 차지한 것과 대조되게 1956 멜버른 올림픽 이후로는 대표팀에 소집조차 되지 못했고 결국 해외 이적이 가능한 나이가 되자 서독의 보르마티아 보름스러 이적해 한 시즌을 보내고 1860 뮌헨으로 이적했다.

반면 쇼슈키치는 유고슬라비아 대표팀의 불박이 주전으로 활약하며 1960 UEFA 유로 준우승과 1960 로마 올림픽 금메달, 그리고 1962 칠레 월드컵 4위에 오르는 대단한 성과를 이뤄냈고 1963년에는 잉글랜드 축구협회 창립 100주년을 기념하는 잉글랜드와 세계 올스타의 경기에 초청받아 소련의 레프 야신과 함께 세계 올스타팀의 골문을 번갈아가며 지키는 영광을 누리기도 했다.

그러나 말년에 온 분데스리가에서 둘의 위상은 대표팀과는 전혀 달랐다. 쇼슈키치는 제2차 세계대전 이전에 독일 축구계에 유행했다는 스위퍼 키퍼를 부활시킴은 물론 1860 뮌헨의 분데스리가 우승을 이끌었지만 쇼슈키치는 쾰른에서는 평범한 활약을 보였기에 독일에서는 라덴코비치의 인기가 더 대단했다.

물론 쇼슈키치 역시 강력한 완력을 통해 공을 멀리 던지며 팀의 빌드업을 이끌기도 했지만 라덴코비치는 그것을 넘어 아예 전진드리블로 전방으로 치고올라와 공격에도 적극적으로 가담했고 수비 상황에서도 종종 골문 밖으로 나와 스위핑하는 외줄타기식 플레이를 즐겼다. 당대 축구계가 그를 받아들이기엔 너무 멀리 앞서 있던 게 문제였다.



2-3. 1970년대 네덜란드

얀 반 베버린 vs 얀 용블루트

용블루트와 얀 반 베버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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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네덜란드는 토털 풋볼의 중심지였다. 페예노르트의 감독 하펠과 아약스의 감독 미헬스가 펼치는 지략대결 속에서 현대 축구의 시초인 토탈 풋볼이 발전했다. 그리고 토탈 풋볼의 슬로건은 '전원 공격, 전원 수비'였고 이는 골키퍼도 예외는 아니었다.

실제로 네덜란드 역시 '어떤 골키퍼가 좋은 골키퍼인가?'라는 논쟁이 흔했는데 선방 능력을 중요시하는 쪽은 PSV 에인트호번의 얀 반 베버린를 지지했고 골키퍼 역시 빌드업 과정에 적극 참여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쪽은 네덜란드의 중견팀들을 돌아다니며 활약했던 얀 용블루트를 지지했다.

1974년에 네덜란드 대표팀의 감독으로 올라선 리누스 미헬스는 당연하게도 얀 용블루트를 기용했다. 물론 이것은 얀 반 베버린이 대표팀의 알파이자 오메가 크루이프와의 불화가 있었다고 하지만 크루이프가 불참한 1978년에 아르헨티나 월드컵에서도 네덜란드 대표팀의 지휘봉을 잡은 하펠마저도 38세의 노장이었음에도 토털 풋볼과 가장 잘 맞는 골키퍼라는 이유로 얀 용블루트를 기용했다.

다른 나라에서는 대부분 정통파 키퍼가 이겼지만 1970년대 네덜란드의 기조는 이들과 달랐고 그랬기에 선방 능력에서는 베버린에 비해 한수 아래라고 평가받는 용블루트가 이길 수 있었다.

 


2-4. 1970년대 아르헨티나

우발도 피욜 vs 우고 가티

보카의 전설 우고 가티와 리버의 전설 우발도 피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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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헨티나의 골키퍼 철학에 기반한 대결은 카리소vs도밍게스로 끝나지 않았다. 더 치열한 대결이 아직 남았다. 리버 플레이트에서 아르헨티나 최고의 안정감을 자랑했던 우발도 피욜과 보카 주니어스에서 페널티 에어리어 밖으로 나와 팀의 공격 전개와 수비 커버를 이끈 우고 가티 사이에 치열한 대결이 있었다.

클럽에서는 우고 가티가 더 롱런했는데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3연패 및 1977 인터콘티넨탈컵에서도 홈에서 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와 비겼지만 원정에서 3-0 대승을 거두며 우승했고 1982년에는 아르헨티나 올해의 선수에 올랐다. 개인 수상 이력에서는 피욜이 앞섰지만 피욜의 활약은 대부분 대표팀 활약에 기반했고 무엇보다 가티는 보카 주니어스의 제1 에이스였지만 리버 플레이트의 에이스는 노르베르토 알론소와 다니엘 파사레야였다.

그러나 가티는 1966 잉글랜드 월드컵에서도 로마의 백업에 머물렀고 이후에는 아예 대표팀에 선발조차 되지 못했고 피욜은 1974 서독 월드컵이 끝난 뒤 카르네발리가 대표팀에서 물러난 뒤에 줄곳 주전으로 활약했다. 특히 1978 아르헨티나 월드컵 우승을 이뤄내며 대회 올스타에 선정되었고 이때의 활약 덕분에 1978 남미 올해의 선수 2위에 올랐다. 심지어 감독이 공격적인 축구를 구사하는 메노티였음에도 그랬다. 적어도 이 시대 대표팀은 보카처럼 수비라인이 가티 위주로 움직이는 부분에서는 한계가 있었기에 선방 능력에서 더 우월했던 피욜을 선택한 것 같았고 이 선택은 월드컵 우승 및 피욜의 결승전 활약 덕분에 현명한 선택이 되었다.

 


2-5, 1980년대 카메룬

토마스 은코노 vs 조셉앙투안 벨

토마스 은코노와 조셉앙투안 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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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카메룬 축구의 대약진을 상징하는 두 골키퍼로 국제축구역사통계연맹은 벨을 아프리카 최고의 골키퍼로 선정했고 프랑스 풋볼 측은 은코노를 발롱도르 드림팀 후보로 선정하는 등 아프리카 최고의 골키퍼라 하면 저 둘을 빼놓고 설명할 수 없었다.

특출난 운동신경을 바탕으로 날렵한 반사신경과 신들린 볼 캐칭으로 검은 고양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며 안정감이 넘치는 은코노와 팀이 높은 수비라인에서 플레이할 때 일종의 스위퍼 역할을 도맡아 처리하며 타이밍 좋은 전진수비 및 넓은 커버 범위, 그리고 우수한 발기술로도 명성이 자자한 조셉앙투안 벨은 대표팀에서도 치열한 주전 경쟁을 펼쳤다. 심지어 은코노는 상대적으로 고점이 높고 벨은 상대적에서 롱런했다는 부분까지 상반되었다.

대륙 대회인 아프리카 네이션스컵에서는 조셉앙투안 벨이 더 대단한 활약을 펼쳤는데 주전으로 나선 1984년과 1988년에는 모두 대회 우승을 차지했음은 물론 벨 개인도 대회 최우수 골키퍼 및 대회 올스타에 선정되는 영예를 누렸다. 반면 은코노는 주전으로 나선 대회인 1982년 대회와 1986년 대회에서 대회 베스트 일레븐에 선정되었지만 대회 우승을 차지하지는 못했다.

그럼에도 월드컵에서는 은코노가 주전으로 활약했는데 은코노는 1982 스페인 월드컵 조별리그에서 3무를 기록하는데 큰 공을 세워 높은 평점을 기록했고 1990 이탈리아 월드컵에서는 디펜딩 챔피언 아르헨티나와의 경기에서 연이은 선방을 보이며 무실점을 보이며 1-0 승리를 이끌었으며 그 대회에서 8강에 진출하며 아프리카 최초의 월드컵 8강 진출 업적을 남겼다. 반면 벨은 1994년 미국 월드컵에서 주전으로 두 경기에 나섰지만 카메룬전 6-1 대패로 인해 주전 자리를 후배 송고에게 내줬음은 물론 집이 불타는 비극을 경험하기도 했다.

이 둘이 뛰어난 퍼포먼스를 보이는 대회가 차이가 나는 이유는 카메룬 대표팀의 전력에 있다. 카메룬은 아프리카에서는 탑독이었다. 그렇기에 라인을 올려 공격적으로 플레이할 때 유리했고 이때 넓은 커버 범위와 빌드업의 시작점 역할을 잘 수행했던 조셉앙투안 벨이 주전으로 활약할 수밖에 없었다. 반면 국제무대에서는 유럽과 남미의 강호들에 비해 전력이 한참 미치지 못하며 언더독에 가까웠다. 그랬기에 라인을 내렸고 커버플레이보다 선방 능력이 더 중요했기에 부폰조차 반했던 은코노의 신들린 선방이 더 필요했다. 그래서 네이션스컵에서는 벨을, 월드컵에서는 은코노를 기용했고 카메룬 대표팀은 이 차이를 잘 이해했다.

 


2-6. 2000년대 대한민국

이운재 vs 김병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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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에서도 이 논쟁은 있었다. 당시로서는 드물게 전진드리블로 직접 공을 몰고 나와 빌드업을 주도한 김병지와 엄청난 안정감을 자랑하며 강력한 카리스마에서 나오는 수비라인 지휘 능력으로 위기 상황 자체를 적게 만든 이운재, 누가 더 좋은 골키퍼인지에 대한 논쟁은 한국 축구계에서 유명한 논쟁이었다.

대표팀에 먼저 선발된 건 경희대학생 시절의 이운재였지만 초년에는 선배 김병지가 먼저 대표팀 주전으로 도약해 1998 프랑스 월드컵 네덜란드전에서 홀로 연이은 선방으로 팀을 5-0보다 더 크게 지지 않게 노력했기에 네덜란드 대표팀 감독 거스 히딩크로부터 "우리는 더 많은 득점을 할 수 있었지만 대한민국의 골키퍼가 너무 뛰어나서 더 많은 골을 넣지 못했다."라는 찬사를 듣기도 했다.

그러나 정작 이 발언을 했던 히딩크는 처음에는 김병지를 기용했으나 플레이스타일로 인한 리스크가 너무 컸기에 신생팀 수원 삼성에서 이름을 날린 이운재를 적극 기용했는데 우수한 판단력과 흔들리지 않는 강한 정신력을 바탕으로 하는 차원이 다른 안정감을 자랑했음은 물론 수비 조율 부분에서는 아시아에서도 적수가 없었던 이운재는 감독의 신임에 부응해 2002 한일 월드컵 4위를 기록했으며 부폰, 카시야스와 같은 거물급 골키퍼와 선방 대결을 벌여 승리하기도 했다.

이 시기를 기점으로 K리그에서도 이운재가 앞서기 시작했는데 특히 2004년 K리그 챔피언 결승전에서 승부차기에서 포항 측 마지막 키커 김병지의 페널티 킥을 막고 수원의 우승을 이끌기도 했다. 그래도 김병지 역시 위에 언급했던 스위퍼키퍼 선배들인 아마데오 카리소, 우고 가티, 라덴코비치, 조셉앙투안 벨과 같이 롱런하며 K리그 통산 최다 출전 및 k리그 통산 최다 클린시트를 기록했음은 물론 153경기 연속 무교체 출전하며 이 부분에서도 K리그 최다 기록을 자랑하며 K리그 최고령 출전과 K리그 골키퍼 최다 득점 기록까지 세운 부분은 위안이다.

대한민국은 세계 무대에서 라인을 올리기보다는 내리는 상황이 더 많이 나왔고 이는 이운재를 기용하는 게 전략적으로 유리하다는 이야기가 되었다. 물론 능동적 축구를 선호하는 2020년대의 벤투였으면 이야기가 달랐겠지만 말이다.

 


2-7. 2000년대 독일

올리버 칸 vs 옌스 레만

올리버 칸과 옌스 레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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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동갑내기 골키퍼였던 올리버 칸과 옌스 레만은 선배 쾨프케, 일그너 때문에 모두 늦은 나이에 대표팀에서 빛을 봤다. 그럼에도 뛰어난 기량으로 2000년대 초중반 치열한 주전 경쟁을 선보였다.

2000년대 초반을 대표하는 골키퍼로 경이로운 선방 능력과 뛰어난 수비 라인 통솔, 그리고 압도적인 카리스마로 상대 공격수와의 기싸움에 능한 고전적인 골키퍼 올리버 칸과 드넓은 시야와 우수한 발기술, 그리고 정확하면서도 강력한 던지기를 활용한 빠른 역습을 이끈 빌드업에 최적화된 골키퍼 옌스 레만의 경쟁 역시 당대를 들썩이던 논쟁이었다.

2000년대 초반에는 그 둘은 기량적으로 상대가 되지 않았다. 레만도 준수했지만 올리버 칸은 2000-01 시즌 챔피언스리그 우승 및 2002 한일 월드컵 준우승 주역으로 활약했고 전자의 대회에서는 파이널 MOM을, 후자의 대회에서는 골든볼을 수상했고 2001년과 2002년, 2년 연속으로 발롱도르 포디움에 들었다. 올리버 칸은 압도적인 탑독이었고 레만은 부폰, 톨도 등이 포진한 세계 2진급 레벨에도 들지 못했다.

그러나 2002-03 시즌 이후 칸이 기량이 떨어지고 레만이 아스날 이적으로 기량이 오르며 2003-04 무패우승 및 2005-06 UEFA 클럽 올해의 골키퍼를 따내면서 상황이 뒤집힌다. 클린스만 감독은 칸에게 UEFA 유로 2004에서의 부진의 책임을 물어 벤치로 내렸고 레만을 주전으로 올렸다. 그리고 레만은 능동적인 축구로 무장한 새로운 전차 군단의 2006 독일 월드컵 3위를 이끌었고 개인도 대회 올스타 팀 서브 멤버에 들었으며 UEFA 챔피언스리그에서의 활약이 더해져 2006 발롱도르 투표에서 10위에 올랐다.

전력이 수직하락했던 녹슨 전차 군단 시절에는 올리버 칸이 필요했다. 하지만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했고 이 과정에서 칸은 동갑내기인 레만에게 밀렸다. 물론 독일은 2010년대에는 이 둘의 장점을 합친 뒤 업그레이드한 마누엘 노이어가 등장해 이런 고민을 할 필요가 없어졌다.

 


3. 결론

 

 

하지만 이 논쟁은 노이어가 등장하면서 국면이 전환된다. 기존의 골키퍼 역할 역시 야신, 부폰 못지않게 소화했던 노이어는 그러면서도 과거 이탈리아식 리베로가 연상되는 커버플레이를 선보이며 필드 플레이에 이전보다도 더 적극적으로 가담했고 이는 11vs10으로 싸우는 효과를 만들어줘 바이에른은 유럽 무대의 강호로 장기간 군림했다.

그리고 이 노이어를 보고 자란 많은 골키퍼 지망생들은 볼 컨트롤과 같은 필드 플레이어의 기본기를 다지기 시작했고 노이어의 효과를 본 지도자들은 이를 적극 장려했다. 결국 노이어를 보고 자란 세대인 알리송, 마이크 메냥, 우나이 시몬, 디오구 코스타와 같은 골키퍼들이 노이어의 길을 따라가기 시작했고 앞으로 데뷔할 유망주들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반면 발밑이 약한 골키퍼들은 점점 더 설자리가 사라질 가능성이 높은데 지금은 아주리에서 독보적인 위치에 있는 돈나룸마 역시 이 추세대로라면 비카리오에게 주전자리르 빼앗길 확률이 높다.

안정성을 추구하는 과거와는 다르게 더 많은 사람을 빌드업에 가담시키고 싶어하는 현재는 10vs10이라는 패러다임은 사라졌다. 11vs11 패러다임에서는 골키퍼는 스위퍼 역할을 맡는 게 불가피하다. 우리 골키퍼가 스위핑이 되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라운드에서 10vs11로 싸우는 것과 같이 된다. 시대의 변화를 받아들여야 한다.

 


FCU 회장

박수용의 토르난테 블로그 주인장

동네 축덕 아저씨의 축구썰 페이지 주인장

 

박수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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