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헨티나 축구 역사상 최고의 윙어 Top 11~20
*작성자의 주관적인 순위입니다.
*대상자는 아르헨티나 국가 대표팀으로 A매치 1경기 이상 출전한 선수를 대상자로 했으며 이탈리아나 스페인으로 귀화한 오리운디도 아르헨티나 대표팀 경력이 있으면 포함했습니다.
*선수 사진은 대부분 플레이어스 유저인 법정스님의 소유님의 건조폼 입니다. 다만 법정님이 만들지 않은 선수들은 제가 만들었습니다.
*기록 출처는 RSSSF와 트렌스퍼마크트이며 둘의 기록이 상충할 경우에는 전자를 우선적으로 따릅니다.
*기록일은 2025년 6월 22일 기준입니다.
20위 킬리 곤살레스
생년월일: 1974년 8월 4일
A매치 기록: 56경기 9골
신체조건: 키 173cm / 몸무게 71kg
주 소속팀: 발렌시아 CF
앙헬 디 마리아가 직접 밝힌 우상으로 1990년대 후반~2000년대 초반 스페인 무대에서 이름을 날린 클래식 윙어로 교묘한 드리블 돌파와 날카로운 왼발 크로스는 물론 활동량이 뛰어나 공수 양면에서 높은 영향력을 발휘했으며 레프트백도 소화할 수 있었음은 물론 동료들과의 친화력이 뛰어나 팀워크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보카 주니어스에서 이름을 날리기 시작한 킬리 곤살레스는 레알 사라고사에서도 훌륭한 모습을 보여주며 발렌시아로 이적해 전성기를 발휘하며 두 번의 UEFA 챔피언스리그 준우승을 이뤄냈고 2001년에는 UEFA 올해의 팀에 들었으며 2001-02 시즌 라리가 우승을 이뤄냈다. 그러나 인테르 밀란으로 이적한 뒤에는 부진하며 백업으로 밀려났다.
아르헨티나 대표팀에서는 주로 비엘사 체제에서 중용된 킬리 곤살레스는 2004 아테네 올림픽에서 와일드카드로 참가하며 금메달을 목에 걸었고 2004 코파 아메리카에서 결승에 진출했지만 본인이 선제골을 넣었음에도 불구하고 브라질의 아드리아누에게 극적인 동점골을 허용한 뒤 승부차기에서 패해 아쉽게 준우승에 머물렀다.
19위 후안 카를로스 무뇨스
생년월일: 1919년 5월 6일
A매치 기록: 11경기 2골
신체조건: 미상
주 소속팀: 리버 플레이트
1940년대에 남미 무대에서 이름을 날렸던 아웃사이드 라이트로 라 마키나라 불렸던 공격조합의 일원으로 이름을 날렸으며 동료들에 비해 이름값은 떨어졌지만 쉴 새 없는 스위칭 플레이와 유기적인 팀워크를 보여줬으며 날카로운 크로스와 롱 패스를 바탕으로 수많은 찬스를 만들어냈다.
리버 플레이트에 머무는 동안 라 마키나의 일원으로 활약한 무뇨스는 아르헨티나 프리메라 디비시온 4회 우승을 포함해 국내 대회에서 총 7회 우승했고 우루과이 챔피언과의 슈퍼컵 대회인 코파 알다오에서도 3회 우승을 이뤄내며 구단의 황금기를 이뤄내는데 큰 공을 세웠다. 아르헨티나 대표팀에서도 주로 마리오 보예의 백업으로 활약하며 1945년 코파 아메리카 우승에 일조했다.
18위 페드로 칼로미노
생년월일: 1892년 3월 13일
A매치 기록: 37경기 5골
신체조건: 불명
주 소속팀: 보카 주니어스
아르헨티나 축구 태동기에 활약했던 아웃사이드 라이트로 빠른 스피드와 정확한 드리블은 물론 거친 수비에 대한 대비책으로 정지하는 속임수를 주 무기로 삼았으며 관중들의 환호를 이끌어내면서 상대 수비수에게 굴욕을 안기는 것도 서슴지 않았기에 미치광이라 불렸는데 바이시클 킥은 물론 헛다리 짚기와 넛 메그 등 다양한 기술에 능했던 테크니션이다.
1914년에 잠시 히스파노 아르헨티노로 떠났던 것을 제외하면 선수 생활 전부를 보카 주니어스에서만 보내며 구단 통산 득점 9위에 오른 칼로미노는 아르헨티나 프리메라 디비시온 4회 우승을 포함해 크고 작은 대회에서 총 9회 우승을 차지하는데 공헌했다. 칼로미노의 활약으로 인해 보카 주니어스는 1910년대 아르헨티나 무대를 제패했던 라싱 클루브의 전성기를 끝내고 아르헨티나 무대를 지배했다.
아르헨티나 대표팀에서도 네 번의 코파 아메리카에 참가해 1921 코파 아메리카에서 조국의 첫 코파 아메리카 우승을 이뤄내는데 큰 공을 세웠으며 두 번의 준우승을 이뤄내기도 했다.
17위 루벤 아얄라
생년월일: 1950년 1월 8일
A매치 기록: 25경기 11골
신체조건: 키 175cm / 몸무게 71kg
주 소속팀: 아틀레티코 마드리드
후배 로베르토 아얄라 이전에 생쥐라 불렸던 선수로 양측면의 날개는 물론 중앙 공격수도 능숙하게 소화했으며 사이드를 가로지르는 폭발적인 질주와 날카롭게 들어오는 오른발 패스로 득점 찬스를 만들어냈으며 슈팅력도 우수했다.
산 로렌소에서 데뷔해 첫 전성기를 누린 아얄라는 1972년 아르헨티나 프리메라 디비시온 전기리그와 후기리그를 모두 제패했고 이를 바탕으로 대표팀에도 소집되어 1974 서독 월드컵에 레프트윙으로 참가해 조국의 1차 조별 리그 통과에 공헌했다.
유럽 무대 도전장을 낸 아얄라는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에서 제2의 전성기를 누렸는데 1975-76 시즌 코파 델 레이 우승과 1976-77 시즌 라리가 우승을 이뤄내며 크루이프, 네스켄스와 더불어 당대 라리가 최고의 외국인 선수 중 하나로 평가받았다.
16위 라울 베르나오
생년월일: 1941년 11월 5일
A매치 기록: 15경기 4골
신체조건: 키 177cm / 몸무게 72kg
주 소속팀: CA 인데펜디엔테
1960년대 남미 무대에서 이름을 날렸던 라이트윙으로 오른쪽 측면에서 거칠 것 없이 질주해 미치광이라 불렸으며 이런 저돌적인 모습과는 다르게 높은 수준의 테크닉을 앞세워 우아한 플레이를 펼쳐 우측면의 시인이라고도 불렸다.
인디펜디엔테에서 전성기를 누린 베르나오는 아르헨티나 프리메라 디비시온 3회 우승을 이뤄냈으며 남미 대륙에서도 펠레를 보유한 산투스와 우루과이의 양대 강호 클루브 나시오날과 페냐롤 등 쟁쟁한 상대들을 물리치고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2연패를 이뤄내는 과정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등 인데펜디엔테가 남미 최고의 명문으로 발돋움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
아르헨티나 대표팀 소속으로는 코르바타의 벽에 밀려 중용받지 못해 월드컵에는 나서지 못했던 베르나오는 1967 코파 아메리카에서는 강력한 경쟁자 오마르 코르바타를 밀어내고 주전으로 활약하며 준우승을 이뤄냈다.
15위 클라우디오 카니자
생년월일: 1967년 1월 9일
A매치 기록: 50경기 16골
신체조건: 키 173cm / 몸무게 68kg
주 소속팀: BC 아탈란타
축구 역사상 가장 빨랐던 선수 중 한 명으로 육상선수 출신으로 100m를 10초대에 주파하는 스피드로 이름을 날리며 바람의 아들이라는 별명으로 불렸으며 스피드뿐만이 아니라 굳센 바디밸런스와 현란한 발기술, 그리고 동료들에게 찬스를 만들어주는 부분에도 능해 윙어는 물론 처진 공격수 역할도 훌륭하게 수행할 수 있었으며 슈팅력도 제법 괜찮았으나 기복이 심했다.
리버 플레이트에서 데뷔해 아탈란타에서 전성기를 누린 카니자는 AS 로마로 이적하는 등 상승세를 달리다가 1993년에 코카인을 복용한 죄로 13개월의 출전 정지라는 징계를 받았고 징계가 풀린 뒤 벤피카로 이적했으나 적응하지 못하고 아르헨티나의 보카 주니어스로 이적했으나 1996년 9월에 그의 어머니가 건물 5층에서 뛰어내려 자살하는 참극이 벌어져 1996-97 시즌은 출전하지 않았으며 이후 기량이 쇠한 뒤 레인저스와 카타르 SC에서 말년을 보내는 등 클럽 커리어는 악재의 연속이었다.
다소 불운한 개인사로 인해 클럽 커리어가 좋지 않았음에도 카니자가 명성을 떨친 것은 아르헨티나 대표팀에서의 압도적인 개인기량 덕분인데 1990 이탈리아 월드컵에서 마라도나의 공격 파트너로 맹활약하며 16강 브라질전에서도 수세에 몰렸으나 마라도나의 패스를 받은 카니자의 결승골로 브라질을 물리쳤고 준결승 이탈리아전에서도 동점골을 기록해 조국의 결승 진출에 큰 역할을 했고 1991 코파 아메리카에서는 우승을 기록했다. 그 덕분에 1990년과 1991년에는 남미 올해의 선수 투표에서 개인 통산 최고 순위인 2위에 오르기도 했다.
14위 마리오 보예
생년월일: 1922년 7월 30일
A매치 기록: 17경기 7골
신체조건: 미상
주 소속팀: 보카 주니어스
1940년대 아르헨티나 무대 최고의 아웃사이드 라이트로 엄청난 스피드를 가지고 있어 원자인간이라 불렸으며 날카로운 슈팅 능력으로 도살자라는 별명으로도 불렸으며 측면은 물론 중앙에서도 뛰어난 기량을 발휘했다.
우루과이 출신의 바렐라와 함께 보카 주니어스의 에이스로 군림한 보예는 아르헨티나 프리메라 디비시온 2회 우승을 이뤄냈고 보예 개인도 1946년에는 리버 플레이트에서 뛰던 라 마키나의 구성원들을 제치고 리그 득점왕을 차지했으며 이후 라싱 클루브에서도 정규리그 2회 우승을 이뤄내는 과정에서 큰 공을 세웠다.
아르헨티나 대표팀에서도 라 마키나의 아웃사이드 라이트 후안 카를로스 무뇨스와 치열한 주전 경쟁에서도 우위에 서며 아르헨티나의 코파 아메리카 3연패에 기여했다.
13위 클라우디오 로페스
생년월일: 1974년 7월 17일
A매치 기록: 54경기 10골
신체조건: 키 177cm / 몸무게 72kg
주 소속팀: SS 라치오
1990년대 후반과 2000년대 초반에 이름을 날렸던 레프트윙으로 폭발적인 스피드와 허를 찌르는 드리블 실력을 바탕으로 상대 수비진의 골머리를 썩게 만든다고 하여 세간으로부터 이라는 별명으로 불렸으며 날카로운 왼발 킥력으로 골문을 직접 타격하는 부분에도 능했으며 레프트윙 이외에도 처진 공격수 역할도 막힘없이 소화했다.
라싱 클루브에서 데뷔해 명성을 떨친 클라우디오 카니자는 당시 상승세를 달리던 발렌시아로 이적해 1998-99 시즌에는 코파 델 레이 우승은 물론 라리가에서도 우수한 활약을 펼치며 단일 시즌 공식전 42경기 30골이라는 대기록을 세웠고 1999-2000 시즌에는 UEFA 챔피언스리그 준우승을 이뤄냈으며 이후 라치오로 이적한 뒤 2003-04 시즌 코파 이탈리아 우승을 이뤄냈고 전성기가 지난 뒤에는 멕시코의 클럽 아메리카와 미국의 캔자스 시티 위자드와 콜로라도 래피즈에서 뛰기도 했다.
그러나 아르헨티나 대표팀에서는 공격 파트너 바티스투타와의 불협화음으로 인해 뛰어난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고 실제로도 1998 프랑스 월드컵과 2002 한일 월드컵에 주전으로 참가했음에도 기대를 밑도는 활약을 보였다. 라치오에서 검증된 조합이었던 크레스포와의 페어가 이뤄지지 않은 부분이 아쉬웠다.
12위 엔리케 구아이타
생년월일: 1910년 7월 11일
A매치 기록: 4경기 1골
신체조건: 키 172cm / 몸무게 73kg
주 소속팀: AS 로마
1930년대 아르헨티나와 이탈리아 양 무대에서 모두 훌륭한 활약을 보여줬던 아웃사이드 라이트로 신체적으로 강인하진 못했지만 스피드가 빨랐고 기술적으로 우수했으며 양발을 모두 잘 써 양발로 중거리 슈팅을 날려대며 원더골을 뽑아냈다.
아르헨티나 시절에는 에스투디안테스에서 활약하다가 이탈리아로 귀화하면서 AS 로마로 이적한 구아이타는 1934 이탈리아 월드컵 우승과 1934-35 시즌 세리에 A 준우승과 리그 득점왕을 수상하며 검은 해적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며 팬들의 신임을 받았다.
그러나 1936-37 시즌 세리에 A 개막을 앞두고 이탈리아와 에티오피아의 전쟁에 징병된다는 루머를 듣고 이탈리아에서 도망쳐 아르헨티나로 다시 귀화하며 라싱 클루브로 이적했고 아르헨티나 대표팀 소속으로 1937 코파 아메리카 우승을 이뤄냈다.
11위 오스카르 마스
생년월일: 1946년 10월 29일
A매치 기록: 37경기 10골
신체조건: 키 167cm / 몸무게 66kg
주 소속팀: 리버 플레이트
1960년대~70년대에 걸쳐 아르헨티나 무대 톱클래스 레프트윙으로 군림한 인물로 체구는 작았지만 굉장히 빠른 스피드와 기술적인 드리블을 겸비해 상대 수비수를 농락해 원숭이라고 불렸으며 오른발은 거의 쓰지 못했지만 왼발 킥력이 대단해 15시즌 연속 리그 두 자릿수 득점을 기록했다.
아르헨티나의 리버 플레이트에서 전성기를 보낸 마스는 1975년 아르헨티나 프리미어 디비시온 전기리그와 후기리그를 모두 제패했고 마스 개인도 아르헨티나 프리미어 디시비온 득점왕 2회와 1970 시즌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득점왕에 올랐으며 레알 마드리드에 잠시 머물렀을 때에는 코파 델 레이 우승을 이뤄냈다.
아르헨티나 대표팀에서도 주축으로 활약한 마스는 1966 잉글랜드 월드컵에서는 처진 공격수를 맡아 8강 진출에 공헌했으며 1967 코파 아메리카에서는 준우승을 차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