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의 영웅들/아르헨티나

아르헨티나 축구 역사상 최고의 공격형 미드필더 Top 10

토르난테 2025. 6. 23. 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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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의 주관적인 순위입니다.
*대상자는 아르헨티나 국가 대표팀으로 A매치 1경기 이상 출전한 선수를 대상자로 했으며 이탈리아나 스페인으로 귀화한 오리운디도 아르헨티나 대표팀 경력이 있으면 포함했습니다.
*선수 사진은 대부분 플레이어스 유저인 법정스님의 소유님의 건조폼 입니다. 다만 법정님이 만들지 않은 선수들은 제가 만들었습니다.
*기록 출처는 RSSSF와 트렌스퍼마크트이며 둘의 기록이 상충할 경우에는 전자를 우선적으로 따릅니다.
*기록일은 2025년 6월 20일 기준입니다.

 


10위 에르민도 오네가

 


생년월일: 1940년 4월 30일
A매치 기록: 30경기 11골
신체조건: 키 175cm / 몸무게 70kg
주 소속팀: 리버 플레이트

1960년대 아르헨티나 무대에서 이름을 날렸던 공격형 미드필더이자 처진 공격수로 우수한 볼 컨트롤과 강력한 오른발 슈팅으로 팀의 승리를 안겨주었다.

리버 플레이트의 에이스로 활약했던 오네가는 보카 주니어스, 라싱 클루브에 밀려 암흑기를 겪는 리버 플레이트에 남으며 구단의 암흑기를 지탱했다. 그러다가 페냐롤로 이적한 뒤에는 1969년에 인터콘티넨탈컵 슈퍼컵 우승을 이뤄냈다.

아르헨티나 대표팀에서도 나름 족적을 남긴 오네가는 브라질 축구 협회 창립 50주년 대회인 1964 타사 데 나코에스에서 조국의 우승에 기여했으며 1966 잉글랜드 월드컵에서도 주전으로 참여해 8강 진출을 이뤄냈다.

 

9위 에르네스토 그리요

 


생년월일: 1929년 10월 1일
A매치 기록: 20경기 8골
신체조건: 키 170cm / 몸무게 74kg
주 소속팀: CA 인데펜디엔테

1950년대~60년대 남미 무대에서 이름을 날린 공격형 미드필더로 양발을 모두 잘 써 정확한 슈팅과 뛰어난 전진드리블을 활용했으며 단신이었지만 신체 밸런스가 좋아 몸싸움을 잘해 상대방의 대인 마킹도 잘 뿌리쳤다.

초년에는 인데펜디엔테에서 활약했던 그리요는 1956년에는 득점왕에 오르는 등 뛰어난 활약에도 우승을 거두지 못해 AC 밀란으로 이적했고 1958-59 시즌 세리에 A 우승을 이뤄냈다. 이후 아르헨티나로 돌아와서는 보카 주니어스에 입단해 아르헨티나 프리메라 디비시온 3회 우승을 이뤄냈다.

아르헨티나 대표팀에서도 나름 족적을 남긴 그리요는 1955년 코파 아메리카 우승과 1956년 코파 아메리카 준우승을 이뤄냈다.

 

8위 움베르토 마스치오

 


생년월일: 1933년 2월 20일
A매치 기록: 18경기 18골
신체조건: 키 177cm / 몸무게 75kg
주 소속팀: 라싱 클루브

1950년대 후반부터 1960년대에 걸쳐 이름을 날렸던 인사이드 포워드이자 공격형 미드필더로 상대 수비진을 교란하는 명민한 드리블과 양발 모두를 사용하는 기습적인 슈팅은 물론 드넓은 시야와 창의적인 양발 패스에서 나오는 절륜한 플레이메이킹까지 겸비하며 공격형 미드필더로서 부족함이 없었다.

라싱 클루브에서 활약하며 1957 코파 아메리카에서 오마르 시보리와 함께 더러운 얼굴의 천사들이라 불렸던 선수단의 공격을 이끌며 1957 코파 아메리카 우승을 이뤄냈는데 그 과정에서 9골을 득점하며 공동 득점왕에 올랐는데 우승의 분수령인 브라질전에서는 두 번째 골을 득점하며 3-0 대승을 이끌었고 우루과이전에서는 선제골을 포함한 멀티골을 득점하며 4-0 대승을 이끌었다. 

이 대회 직후 이탈리아로 건너간 마스치오는 볼로냐와 아탈란타에서 활약하며 이탈리아 국가대표팀에서 잠시 활약하다가 인테르에서는 로테이션 멤버로 1962-63 시즌 세리에 A 우승에 일조했고 피오렌티나를 거쳐 다시 라싱 클루브로 돌아온 뒤에는 1966 시즌 아르헨티나 프리메라 디비시온 우승과 1967년 코파 리베르타도레스와 인터콘티넨탈컵 우승을 이끌었다.

 

7위 호르헤 부루차가

 


생년월일: 1962년 10월 9일
A매치 기록: 57경기 13골
신체조건: 키 177cm / 몸무게 70kg
주 소속팀: CA 인데펜디엔테

1980년대 아르헨티나 대표팀의 우수한 공격 자원으로 간결한 원터치 플레이와 번뜩이는 센스와 우수한 드리블 돌파력은 물론 오프 더 볼에서의 판단력과 움직임이 대단해 조력자로서도 훌륭한 모습을 보여줬으며 공격형 미드필더 이외에도 윙어와 처진 공격수 역할도 훌륭하게 수행했다.

인데펜디엔테에서 전성기를 누린 부루차가는 마랑고니, 지우스티, 보치니와 함께 인디펜디엔테판 마법의 사각형을 구성해 활약했는데 로스 디아블로스 로하스에 머무는 동안 1983년 아르헨티나 프리메라 디비시온 전기리그 우승을 이뤄냈으며 1984년에는 코파 아메리카와 인터콘티넨탈컵에서 그레미우와 리버풀을 각각 꺾고 우승을 차지했다. 그리고  낭트에서도 핵심 선수로 활약하며 1985-86 시즌 리그앙 올해의 외국인 선수상을 수상하며 프랑스 무대 최고의 선수 중 하나로 활약했고 1994년에 다시 인데펜디인테로 돌아와서 1995년에는 레코파 수다메리카나와 수페르코파 수다메리카나 우승을 이뤄내는데 공을 세웠다.

아르헨티나 대표팀에서도 마라도나의 파트너로 활약한 부루차가는 1983 코파 아메리카에서 득점왕에 오른 것을 시작으로 1986 멕시코 월드컵에서는 마라도나, 발다노와 함께 삼각편대를 이루며 결승전에서 득점해 조국의 우승에 기여하며 남미 올해의 선수 투표에서 4위에 올랐다. 그리고 1990 이탈리아 월드컵에서도 조국의 준우승에 기여했다.

 

6위 후안 세바스티안 베론

 


생년월일: 1975년 3월 9일
A매치 기록: 72경기 9골
신체조건: 키 186cm / 몸무게 79kg
주 소속팀: SS 라치오

1990년대 후반~2000년대 초반에 이름을 날렸던 플레이메이커로 중장거리 패스에 능해 먼 지역에서도 상대 수비를 단번에 허무는 킬패스를 날렸으며 우수한 중거리 슈팅은 물론 탄탄한 체격으로 압박을 무력화시키는 능력에서도 뛰어났다.

이탈리아 무대에서 전성기를 누린 베론은 파르마에서 1998-99 시즌 코파 이탈리아와 UEFA컵 2관왕을 이뤄냈고 라치오에서는 구단의 전성기를 이끌며 1999년 UEFA 슈퍼컵에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를 상대로 우승한 것을 시작으로 1999-2000 시즌 세리에 A와 코파 이탈리아 더블 우승을 이뤄내는데 큰 공을 세워 1999-2000 ESM 올해의 팀에 선정되었다.

라치오가 재정난에 허덕이자 베론을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로 이적시켰으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 첼시 등 프리미어리그 무대에서는 부진하다가 인테르 밀란으로 임대로 합류한 뒤에는 2005-06 시즌 세리에 A 우승과 코파 이탈리아 2연패를 이루고 고향팀 에스투디안테스로 돌아가 아르헨티나 프리미어 디비시온 전기리그 2회 우승과 2009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우승을 이끌었다.

아르헨티나 대표팀에서도 주전 멤버로 활약한 베혼은 1998 프랑스 월드컵과 2002 한일 월드컵에 주전으로 나섰으나 포지션 경쟁자 리켈메의 대두와 페케르만의 비선호로 인해 한때 대표팀에서 밀려났었으나 2007 코파 아메리카에서 복귀하며 리켈메와 공존에 성공해 결승 진출을 이뤄냈다. 그러나 2010 남아공 월드컵에서도 주전 자리를 차지했지만 첫 경기에서 부상당하며 아르헨티나 대표팀과의 인연을 다소 허무하게 끝냈다.

 

5위 후안 로만 리켈메

 


생년월일: 1978년 6월 24일
A매치 기록: 51경기 17골
신체조건: 키 183cm / 몸무게 79kg
주 소속팀: 보카 주니어스

남미의 지단이라 불렸던 2000년대 정상급 공격형 미드필더로 드넓은 시야와 높은 수준의 볼 컨트롤은 물론 창의적인 킬러 패스로 정확한 골 찬스를 만들어냈지만 빠른 템포의 플레이가 요구되는 현대축구에서 느린 플레이를 추구해 현대 축구의 반역자, 느림의 미학이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했다.

보카 주니어스에서 커리어의 시작과 끝을 장식한 리켈메는 아르헨티나 프리미어 디비시온 전기리그 4회 우승과 후기리그 1회 우승을 이뤄내며 아르헨티나 올해의 선수상을 4회 수상했고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3회 우승을 이뤄내며 그중 2001년과 2007년에는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MVP를 수상했고 리켈메 개인도 남미 올해의 팀에 4회 선정되었더,

유럽 무대에서는 첫 도전인 바르셀로나에서 크게 실패했지만 비야레알에서 부활에 성공하며 재차 전성기를 누린 리켈메는 2004-05 시즌에는 당시 구단 역대 최고의 성적인 라리가 3위에 올렸는데 그 과정에서 라리가와 코파 델 레이에서 도합 46경기 17골 21도움을 기록하는 우수한 퍼포먼스로 돈 발롱 선정 라리가 최우수 외국인 선수에 선정되었고 마르카가 선정한 가장 예술적인 선수로 선정되었다. 그리고 유럽 무대에서도 인터토토컵 2회 우승 및 UEFA 챔피언스리그 4강 진출이라는 업적을 세웠다.

아르헨티나 대표팀에서도 2000년대 중반부터 주전으로 활약한 리켈메는 2005 컨페드컵 준우승을 이뤄내며 컨페드컵 실버볼을 수상했고 2006 독일 월드컵에서는 8강에서 탈락했지만 도움왕에 올랐다. 그리고 2007 코파 아메리카에서는 메시와 찰떡궁합을 보여주며 5골로 득점 2위에 오르며 준우승을 이뤄냈으며 2008 베이징 올림픽에서도 와일드카드로 발탁되어 금메달을 타냈으나 대표팀 감독 마라도나와의 불화로 다소 아쉽게 은퇴했다.

 

4위 리카르도 보치니

 


생년월일: 1954년 1월 25일
A매치 기록: 28경기 0골
신체조건: 키 168cm / 몸무게 66kg
주 소속팀: CA 인데펜디엔테

마라도나가 직접 밝힌 우상으로 1970~80년대 남미에서 이름을 날렸던 공격형 미드필더로 뒤에도 눈이 달렸다고 평가받았을 정도로 드넓은 시야와 뛰어난 패스 센스에서 나오는 킬패스로 인해 팬들은 그의 날카로운 킬패스를 '보치니풍의 패스'라고 불렀으며 패스뿐만이 아니라 드리블에도 일가견이 있었다.

현역 은퇴 이후에 이벤트로 한 경기 뛴 것을 제외하면 선수 생활 전부를 인데펜디엔테에서만 보냈고 19년간 활약하며 구단 통산 최다 출전자의 자리에 이름을 올린 보치니는 아르헨티나 프리미어 디비시온 4회 우승과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3연패를 포함한 4회 우승, 그리고 인터콘티넨탈컵 2회 우승을 이뤄냈으며 특히 1973년 대회에서는 아약스 대신 참가한 유벤투스의 골키퍼 디노 조프를 상대로 결승골을 득점하기도 했다.

개인으로도 남미 올해의 선수 투표에서 10위 안에 5회 선정되되었고 1983년에는 남미 올해의 선수 투표 3위를 기록함과 동시에 아르헨티나 올해의 선수로 선정된 보치니는 아르헨티나 대표팀에서는 자신을 우상으로 삼았던 마라도나의 백업 선수로 발탁되어 1986 멕시코 월드컵 우승을 경험했다.

 

3위 노르베르토 알론소

 


생년월일: 1953년 1월 4일
A매치 기록: 15경기 4골
신체조건: 키 176cm / 몸무게 68kg
주 소속팀: 리버 플레이트

1970년대~80년대 아르헨티나 무대의 정상급 공격형 미드필더로 창의적인 왼발 패스와 상대 수비를 농락하는 높은 수준의 드리블은 물론 절륜한 왼발 슈팅까지 겸비했으며 오픈 플레이 상황은 물론 세트피스 상황에서도 우수했다.

리버 플레이트에서 선수생활 대부분을 보낸 알론소는 아르헨티나 프리메라 디비시온 7회 우승을 이뤄냈는데 특히 1975년과 1979년에는 전기리그와 후기리그를 모두 석권했으며 1986년에는 코파 리베르타도레스와 인터콘티넨탈컵 연속 우승을 이뤄내기도 했으며 남아메리카 올해의 선수 7등 안에 세 번 들어 1975년에는 개인 통산 최고 순위인 2위에 올랐다.

그러나 아르헨티나 대표팀에서는 세사르 루이스 메노티와 카를로스 빌라르도는 서로 다른 축구를 추구했음에도 둘 다 각자의 이유로 알론소를 배제했는데 1978 아르헨티나 월드컵에서 교체 출전으로 3경기에 출전한 게 메이저 대회에 모습을 드러낸 전부였고 그 뒤에는 디에고 마라도나를 넘어서지 못했다.

 

2위 안토니오 사스트레

 


생년월일: 1911년 4월 27일
A매치 기록: 34경기 6골
신체조건: 키 174cm / 몸무게 72kg
주 소속팀: CA 인데펜디엔테

1930년대 아르헨티나를 대표하던 인사이드 포워드로 드리블과 패스에 능하며 이를 활용한 플레이메이킹 능력으로 후대의 많은 아르헨티나 선수들에게 영감을 주었다고 전해지며 하프백에서도 활약할 수 있었다.

인디펜디엔테 구단 통산 출전 9위에 랭크되었으며 통산 득점 5위에 랭크된 사스트레는 아르세니오 에리코, 비센테 데 라 마타와 함께 삼각편대를 구성해 활약하며 아르헨티나 프리미어 디비시온 2연패는 물론 코파 이바라구렌, 코파 알다오에서 2연패라는 성과를 내며 크고 작은 공식 대회에서 7회 우승을 이뤄내며 로스 디아블로스 로하스가 황금기를 누리는데 가장 큰 공을 세웠다.

아르헨티나 무대를 평정한 뒤에는 브라질의 상파울루로 이적해 캄페오나투 파울리스타 무대에 도전장을 낸 사스트레는 상파울루에서도 노로냐, 레오디나스 등과 함께 활약하며 캄페오나투 파울리스타 3회 우승을 이뤄냈다.

아르헨티나 대표팀에서의 활약도 대단했던 사스트레는 세 번의 코파 아메리카에서 모두 주전으로 나와서 2회 우승과 1회 준우승을 이뤄내며 1930년대 하반기와 40년대 초반 아르헨티나의 전성기를 이끌어냈다.

 

1위 디에고 마라도나

 


생년월일: 1960년 10월 30일
A매치 기록: 91경기 34골
신체조건: 키 165cm / 몸무게 70kg
주 소속팀: SSC 나폴리

펠레, 메시와 함께 축구 역사상 최고의 선수로 추앙받는 인물로 축구 역사상 최고의 볼 컨트롤러이자 드리블러로 손꼽히며 현대 축구였다면 퇴장당했을 강력한 태클도 가볍게 무시했으며 오렌지도 축구공 마냥 가지고 놀 수 있었던 기막힌 볼 컨트롤 능력과 사방에 눈이 달려있다고 평가받는 압도적인 시야와 예측을 불허하는 창의적인 패스에서 나오는 플레이메이킹 능력은 물론 강력한 몸싸움 능력과 스테미너에 데드볼까지 능했던 완벽한 선수였으며 여기에 리더십마저 겸비해 동료 선수들의 처우 개선을 위해 구단 보드진과 협상하기도 했다.

1977년에 데뷔한 아르헨티노 주니오스에서 만 19세의 어린 나이에 이미 세계 정상급 선수로 올라선 마라도나는 보카 주니오스의 1981년 아르헨티나 프리미어 디비시온 전기리그 우승을 이뤄냈다. 그러나 바르셀로나에서는 초반에는 좋은 모습을 보였지만 안도니 고이코에체아에게 당한 태클로 심각한 부상을 입은 뒤에는 다소 실망스러운 퍼포먼스를 보였고 빌바오와의 코파 델 레이 결승전에서는 집단난투극을 주동하며 징계를 받기도 했다.

그러다가 당시 세리에 A 중하위권 나폴리로 이적한 마라도나는 인테르와 AC 밀란, 유벤투스 같은 북부의 전통 강호를 제치고 세리에 A 2회 우승은 물론 1986-87 시즌에는 리그에 이어 코파 이탈리아 우승을 이뤄 더블을 달성했고 1988-89 UEFA컵 우승을 이뤄내며 전설의 반열에 올랐으며 패배에 익숙하던 나폴리 선수들에게 위닝 멘탈리티를 선물했다. 물론 마라도나 개인도 남미 올해의 선수상을 6회 수상했으며 아르헨티나 프리미어 디비시온 득점왕을 5회 수상했고 1984-85 시즌에는 구에린 도르를 수상했고 1986년과 1987년에는 옹즈도르를 수상했다.

아르헨티나 대표팀에서는 클럽 활약을 능가하는 압도적인 퍼포먼스를 보여줬던 마라도나는 네 번의 월드컵과 세 번의 코파 아메리카 유니폼을 입었으며 특히 1986 멕시코 월드컵에서 보여준 5골 5도움이라는 압도적인 퍼포먼스는 단일 대회 역대 최고의 활약으로 평가받으며 1990 이탈리아 월드컵에서 무뎌진 대표팀을 이끌고도 팀을 결승에 올려놓으며 브론즈볼을 수상했다. 그 덕분에 아르헨티나 국민들이 생각하는 아르헨티나 역대 최고의 축구 선수를 넘어 스포츠 스타이며 마라도나를 숭배하는 종교도 있을 정도로 자국에서 사랑을 받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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