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의 영웅들/이탈리아

이탈리아 축구 역사상 최고의 공격형 미드필더 Top 10

토르난테 2025. 5. 11. 1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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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의 주관적인 순위입니다.
*대상자는 이탈리아 국가 대표팀으로 A매치 1경기 이상 출전한 선수를 대상자로 했습니다.

*오리운디의 경우에도 이탈리아 국가 대표팀으로 A매치 1경기 이상 출전한 선수는 모두 포함했습니다.
*선수 사진은 대부분 플레이어스 유저인 법정스님의 소유님의 건조폼 입니다. 다만 법정님이 만들지 않은 선수들은 제가 만들었습니다.
*기록일은 2025년 5월 9일 기준입니다.

 


10위 주세페 지안니니

 


생년월일: 1964년 8월 20일
A매치 기록: 47경기 6골
신체조건: 키 177cm / 몸무게 70kg
주 소속팀: AS 로마

토티보다 먼저 로마의 왕자라 불렸던 1980년대 후반 정상급의 트레콰르티스타로 양발을 모두 잘 썼으며 부드러운 패싱력과 유려한 오프 더 볼, 그리고 신속정확한 판단력에 근거한 원터치 플레이로 팬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선수 생활의 대부분을 AS 로마에서 보낸 지안니니는 로마에 머무는 동안 코파 이탈리아 3회 우승과, 1982-83 시즌 40년 만에 세리에 A 우승을 이뤄냈으며 토티조차 경험하지 못한 유러피언 컵 결승에 진출하는 등 구단의 최전성기의 공격 진영의 에이스로 활약했다.

아주리 군단에서도 주전 미드필더로 중용받은 지안니니는 UEFA 유로 1988과 1990 이탈리아 월드컵에 참가했는데 팀의 왼쪽 측면에서 활약하며 대회 준결승행을 이끌었으며 특히 전자의 대회에서는 대회 올스타 팀으로 선정되었다.

 

9위 움베르토 마스치오

 


생년월일: 1933년 2월 20일
A매치 기록: 4경기 0골
신체조건: 키 177cm / 몸무게 75kg
주 소속팀: 라싱 클루브

1950년대 후반부터 1960년대에 걸쳐 이름을 날렸던 인사이드 포워드이자 공격형 미드필더로 상대 수비진을 교란하는 명민한 드리블과 양발 모두를 사용하는 기습적인 슈팅은 물론 드넓은 시야와 창의적인 양발 패스에서 나오는 절륜한 플레이메이킹까지 겸비하며 공격형 미드필더로서 부족함이 없었다.

라싱 클루브에서 활약하며 1957 코파 아메리카에서 오마르 시보리와 함께 더러운 얼굴의 천사들이라 불렸던 선수단의 공격을 이끌며 1957 코파 아메리카 우승을 이뤄냈는데 그 과정에서 9골을 득점하며 공동 득점왕에 올랐는데 우승의 분수령인 브라질전에서는 두 번째 골을 득점하며 3-0 대승을 이끌었고 우루과이전에서는 선제골을 포함한 멀티골을 득점하며 4-0 대승을 이끌었다. 

이 대회 직후 이탈리아로 건너간 마스치오는 볼로냐와 아탈란타에서 활약하며 이탈리아 국가대표팀에서 잠시 활약하다가 인테르에서는 로테이션 멤버로 1962-63 시즌 세리에 A 우승에 일조했고 피오렌티나를 거쳐 다시 라싱 클루브로 돌아온 뒤에는 1966 시즌 아르헨티나 프리메라 디비시온 우승과 1967년 코파 리베르타도레스와 인터콘티넨탈컵 우승을 이끌었다.

 

8위 아돌포 발론치에리

 


생년월일: 1897년 7월 27일
A매치 기록: 47경기 25골
신체조건: 키 182cm / 몸무게 77kg
주 소속팀: 토리노 FC

1920년대 이탈리아 무대를 평정한 인사이드 포워드로 드넓은 시야와 우수한 패스 센스를 바탕으로 팀의 플레이메이킹을 주도했으며 우수한 득점력마저 겸비해 이탈리아의 명 축구기자 지안니 브레라는 발론치에리를 주세페 메아차, 발렌티노 마촐라 등과 동급의 플레이메이커로 평가했다.

알레산드리아에서 데뷔해 1925-26 시즌에 토리노로 이적한 발론치에리는 토리노로 이적한 첫 시즌부터 팀 내 최다 득점자가 되며 뛰어난 활약을 펼쳤으며 1926-27 시즌에는 아르헨티나 출신 오리운디였던 훌리오 리보나티와 함께 공격 듀오를 구성해 압도적인 활약을 펼치며 우승을 이뤄냈지만 이 우승은 알레만디 이적 스캔들로 인해 박탈당했다. 그러나 이에 굴하지 않고 다음 시즌인 1927-28 시즌에는 팀 역사상 최초로 리그 우승을 차지하며 토리노가 명문으로 도약하는 길을 열었다.

주세페 메아차 등장 이전 아주리 군단에서도 에이스로 활약한 발론치에리는 1927-30 중유럽컵 우승을 이뤄냈고 1928 암스테르담 올림픽 동메달이란 성적을 이뤄내며 이탈리아 축구계의 태동기를 이끌며 황금기로 도약하는 기틀을 세웠다.

 

7위 지안카를로 안토뇨니

 


생년월일: 1954년 4월 1일
A매치 기록: 73경기 7골
신체조건: 키 177cm / 몸무게 70kg
주 소속팀: 피오렌티나

1970년대 하반기와 1980년대 상반기에 이름을 날리던 공격형 미드필더로 왕성한 활동량과 드넓은 시야, 그리고 정확한 패스를 모두 겸비했으며 트레콰르티스타 자리에 위치하다가도 포백 앞으로 내려가서 빌드업을 주도하기도 하는 바비 찰튼 스타일의 현대적인 미드필더였다.

피오렌티나에서 무려 15년간 활약한 안토뇨니는 1974-75 시즌에 코파 이탈리아를 우승했으며 1981-82 시즌에는 승점 1점 차이로 아쉽게 준우승을 거두었다. 안토뇨니 개인도 1980년 구에린 스포르티보 선정 월드 베스트 일레븐과 세계 최우수 선수 5위에 올랐으며 발롱도르 노미네이트에도 4회 선정되어 1982년에는 최고 성적인 11위에 랭크되었다.

아주리에서도 핵심적인 역할을 맡았던 안토뇨니는 상술했던 헌신적인 플레이 스타일이 베아르초트 감독의 눈에 들어 1978 아르헨티나 월드컵과 UEFA 유로 1980에서 주전으로 활약하며 조국을 4위에 올렸고 1982 스페인 월드컵에서도 주전으로 활약하며 아주리의 세 번째 월드컵 우승에 기여했다.

 

6위 지오반니 페라리

 


생년월일: 1907년 12월 6일
A매치 기록: 44경기 14골
신체조건: 키 172cm / 몸무게 70kg
주 소속팀: 유벤투스 FC

1930년대 이탈리아 축구를 빛낸 인사이드 포워드로 왕성한 활동량을 앞세워 중앙과 측면을 오가 메짤라라는 단어의 시조조가 되며 득점 찬스를 만드는 창조적인 패싱력과 직접 중거리 슈팅으로 득점하는 능력까지 겸비했다.

초년에는 유벤투스에서 전성기를 누린 페라리는 유벤투스 시절에는 레나토 체사리니와 함께 2선에서 활약하며 세리에 A 5연패를 이뤄냈고 인테르에서는 대표팀에서도 영혼의 듀오로 이름을 날린 주세페 메아차와 함께 2선에서 경기를 지배하며 세리에 A 2회 우승을 이뤄냈고 말년에 볼로냐에서도 스쿠테토를 들었다.

이탈리아 대표팀에서도 대단한 업적을 이뤄낸 페라리는 인사이드 포워드 자리에서 영혼의 파트너로 불렸던 주세페 메아차와 함께 두 번의 중유럽컵에 나와 우승 1회, 준우승 1회를 이뤄냈고 파트너 메아차와 함께 1934 이탈리아 월드컵과 1938 프랑스 월드컵에서 모두 우승하며 주전으로 월드컵 2연패를 이룬 유이한 이탈리아 선수라는 대기록을 남겼는데 이 두 대회에서 페라리는 9경기 3골 5도움을 기록했다.

 

5위 발렌티노 마촐라

 


생년월일: 1919년 1월 26일
A매치 기록: 12경기 4골
신체조건: 키 170cm / 몸무게 75kg
주 소속팀: 토리노 FC

이탈리아 역사상 최고의 공격형 미드필더 중 한 명으로 추앙받는 선수로 우수한 시야와 탄탄한 기본기를 앞세워 경기를 조립하고 팀의 플레이메이킹을 주도하는 역할을 해 팀 동료 마리오 리가몬티로부터 "마촐라는 팀의 절반이다. 나머지 절반은 남은 우리 10명에 의해 이루어진다."라고 말했을 정도로 경기 영향력이 컸으며 득점력도 우수했다.

1940년대 유럽 최강의 팀이라 불렸던 엘 그란데 토리노의 전성시대를 이끈 마촐라는 엘 토로의 세리에 A 5연패와 1942-43 코파 이탈리아 우승을 이뤄냈으며 마촐라 개인도 1942-43 시즌 코파 이탈리아 득점왕과 1946-47 시즌 세리에 A 득점왕을 수상하며 당대 유럽 축구계 최고의 선수 중 한 명으로 평가받으며 많은 이들의 존경을 받았으나 1949년, 벤피카와의 친선 경기 이후 리스본에서 돌아오는 길에 발생한 수페르가 비행기 참사로 인해 숨을 거뒀고 그들의 죽음으로 인해 토리노의 전설적인 신화는 비극적으로 막을 내렸다.

아주리에서도 핵심으로 활약했지만 수페르가의 비극이라는 비행기 사고로 팀원 전원이 사망하며 이탈리아 축구는 큰 타격을 입었고 발렌티노 마촐라의 신화는 비극적으로 마감했다. 그럼에도 실력은 사후에도 회자되어 푸스카스 페렌츠가 그의 아들 산드로 마촐라와 유러피언 컵 결승을 치른 이후에 "난 네 아버지와 경기를 했었지. 너도 그 못지않구나."라고 산드로 마촐라를 칭찬함과 동시에 발렌티노 마촐라를 추억했다.

 

4위 후안 스키아피노

 


생년월일: 1925년 7월 28일
A매치 기록: 4경기 0골
신체조건: 키 175cm / 몸무게 69kg
주 소속팀: CA 페냐롤

1950년대 최고의 인사이드 포워드 중 한 명으로 이름을 날렸으며 우수한 테크닉과 넓은 시야, 창의적이면서 정확한 패싱력을 보유했으며 임기응변에 능해 불리한 경기를 여러 번 뒤집었고 일부 감독들은 그를 골 게터로 활용하려고 했을 정도로 결정력도 우수했으며 축구지능도 높아 말년에는 새로운 개념인 리베로의 역할도 잘 소화했다.

1943년에 페냐롤에서 데뷔해 축구 선수 인생을 시작한 후안 스키아피노는 아우리네그로스의 공격을 이끌며 1949 시즌, 우루과이 프리메라 디비시온에서 16승 2무의 성적으로 무패 우승을 이뤄낸 업적을 포함해 우루과이 프리메라 디비시온 4회 우승과 토르네오 데 아너 7회 우승을 이뤄내는데 핵심적인 역할을 하며 남미 무대를 평정했다.

우루과이 대표팀에서도 빼어난 활약을 펼치며 두 번의 월드텁에 참가했으며 1950 브라질 월드컵에서는 동점골을 기록하며 우승에 기여해 대회 베스트 일레븐에 선정되었으며 1954 스위스 월드컵에서도 공격의 주축으로 활약하며 팀의 4강 진출에 공헌했다.

1954 스위스 월드컵 이후에는 유럽 무대에 도전하며 이탈리아의 AC 밀란에서 노르달, 리드홀름과 함께 팀의 공격을 이끌며 리드홀름과 함께 세리에 A 3회 우승과 1956년 라틴 컵 우승을 이뤄냈으며 1957-58 시즌 챔피언스리그 결승 진출을 이뤄냈고 말년을 보낸 AS 로마에서는 리베로로 활약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탈리아 대표팀에서는 큰 족적을 남기지는 못했다.

 

3위 산드로 마촐라

 


생년월일: 1942년 11월 8일
A매치 기록: 70경기 22골
신체조건: 키 179cm / 몸무게 74kg
주 소속팀: 인테르 밀란

아버지 발렌티노 마촐라와 라이벌 지안니 리베라와 함께 이탈리아 역사상 최고의 공격형 미드필더로 손꼽히며 훌륭한 슈팅 스킬과 창의적인 패싱력, 탄탄한 볼 컨트롤과 같은 공격형 미드필더의 필수적인 덕목은 물론 기동력도 탁월했으며 측면과 중앙을 오가는 왕성한 활동량도 그의 트레이드 마크였다.

인테르 밀란 역대 통산 득점 4위에 올라있으며 선수 생활을 오직 인테르 밀란에서만 보낸 원 클럽맨 산드로 마촐라는 세리에 A 4회 우승과 유러피언 컵 2연패, 그리고 인터콘티넨탈컵 2연패를 이루며 그란데 인테르의 시대를 열었는데 이 과정에서 마촐라는 훌륭한 퍼포먼스를 보여줘 레알 마드리드의 푸스카스로부터 "너의 아버지 발렌티노 마촐라 못지않구나."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왕성한 활동량으로 중앙과 측면을 오가며 상대 수비진을 압박해주는 스타일 덕분에 아주리 군단에서는 리베라보다 더 중용되었으며 자주 선발로 출전했다. 특히 UEFA 유로 1968에서는 대회 우승을 이끌며 대회 베스트 일레븐에 선정되었고 1970 멕시코 월드컵에서도 주전으로 활약하며 조국의 결승행을 도왔다.

인테르와 아주리의 전설인 산드로 마촐라 개인도 여러 영예를 누렸는데 1963-64 시즌에는 유러피언 컵 득점왕에 올랐으며 1964-65 시즌에는 세리에 A 득점왕에 오르기도 했고  월드 사커지 선정 월드 일레븐에 5회 선정되었음은 물론 발롱도르 노미네이트에도 9회 선정되어 1971년 투표에서 2위를 차지했다.

 

2위 지안니 리베라

 


생년월일: 1943년 8월 18일
A매치 기록: 60경기 14골
신체조건: 키 175cm / 몸무게 69kg
주 소속팀: AC 밀란

이탈리아 축구를 대표하는 트레콰르티스타로 신기에 가까운 볼 컨트롤을 가진 것은 물론 양발을 자유자재로 사용하며 창의적인 패싱력과 정교한 드리블로 유명했음은 물론 1972-73 시즌 세리에 A 득점왕 및 코파 이탈리아 득점왕도 2회 수상한 적도 있었을 정도로 득점력도 훌륭했다.

AC 밀란에서 선수 생활의 대부분을 보내며 구단 통산 출전 4위 및 통산 득점 3위에 랭크된 골든 보이 지안니 리베라는 AC 밀란에서 19년간 활약하며 세리에 A 3회 우승 및 코파 이탈리아 우승 4회를 이뤄내 그란데 인테르와 양립하는 이탈리아의 또 다른 왕조를 만들었고 유럽 무대에서도 1962-63 시즌과 1968-69 시즌에 유러피언 컵 우승을 이뤄냈고 1967-68 시즌과 1972-73 시즌에는 UEFA 컵 위너스컵 우승을 이뤄냈음은 물론 1969년에는 남미의 패자 에스투디안테스의 거친 플레이를 뚫고 인터컨티넨탈컵 우승을 이뤄냈다.

소속팀에서는 뛰어난 활약을 펼쳤지만 아주리에선 다소 아쉬웠던 리베라는 19세에 데뷔해 주전 자리를 차지한 것과는 대조적으로 그의 전성기 때에는 전술상의 이유로 전반전을 포지션 라이벌 산드로 마촐라에게 양보해야 했으며 후반전에 주로 기용되었다. 그래도 조커 역할을 훌륭하게 수행하며 UEFA 유로 1968 우승과 1970 멕시코 월드컵 준우승을 이뤄냈다.

은퇴 후 AC 밀란의 부구단주가 된 리베라는 AC 밀란에서 많은 영예를 누렸는데 FUWO 선정 유럽 올해의 팀에 2회 선정되었고 발롱도르 노미네이트에도 9회 선정되어 1963년에는 2위, 1969년에는 1위를 기록하며 발롱도르를 수상해 명실상부 유럽 최고의 선수로 군림했다. 그리고 은퇴한 이후에는 AC 밀란 명예의 전당 헌액 및 1999년 20세기 최고의 AC 밀란 선수로 선정되었고 이탈리아 축구 명예의 전당 및 이탈리아 스포츠 명예의 전당에도 헌액되었다.

 

1위 프란체스코 토티

 


생년월일: 1976년 9월 27일
A매치 기록: 58경기 9골
신체조건: 키 180cm / 몸무게 82kg
주 소속팀: AS 로마

2000년대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트레콰르티스타이자 펄스 나인롤 공격수로 우수한 원터치 패스로 찬스를 만드는 능력과 넓은 시야와 창의적인 패싱력에서 나오는 플레이메이킹 능력은 물론 피지컬과 볼 컨트롤을 겸비한 탈압박 능력은 물론 득점력까지 공격형 미드필더에 필요한 모든 덕목을 갖추었으며 2007-08 시즌에는 펄스 나인으로도 활약하기도 했던 다재다능한 선수였다.

자타공인 AS 로마 역사상 최고의 선수이자 최강의 선수로 선수생활을 모두 AS 로마에서만 보낸 토티는 구단 역대 최다 출전과 최다 득점자를 랭크하고 있으며 2000-01 시즌 세리에 A 우승을 이뤄내며 발롱도르 5위에 랭크되었으며 두 번의 코파 이탈리아와 수페르코파 이탈리아나 우승을 이뤄냈다.

아주리 군단에서는 UEFA 유로 2000떄 훌륭한 활약을 보여주며 팀을 결승에 올려놓으며 대회 베스트 일레븐에 선정되었으나 이후로는 기대에 못 미치는 모습을 보여주다가 2006 독일 월드컵에서 도움왕에 오르며 팀의 우승에 기여하고 화려하게 대표팀에서 은퇴했다.

토티 개인도 수많은 영광을 누렸는데 1999년 세리에 A 영 플레이어를 시작으로 세리에 A 올해의 이탈리아 선수 5회 수상, 세리에 A 평점왕인 구에린 도르 2회 수상, ESM 올해의 팀 3회 선정, 세리에 A 올해의 선수 2회 수상과 도움왕 2회 수상은 물론 2006-07 시즌에는 이브라히모비치, 카카, 아드리아누, 루카 토니 등 훌륭한 공격수들을 제치고 세리에 A 득점왕을 이뤄내기도 했으며 빅리그의 다른 득점왕에 앞서며 유러피언 골든슈를 수상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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