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축구 역사상 최고의 센터백 Top 21~30
*작성자의 주관적인 순위입니다.
*대상자는 이탈리아 국가 대표팀으로 A매치 1경기 이상 출전한 선수를 대상자로 했습니다.
*오리운디의 경우에도 이탈리아 국가 대표팀으로 A매치 1경기 이상 출전한 선수는 모두 포함했습니다.
*선수 사진은 대부분 플레이어스 유저인 법정스님의 소유님의 건조폼 입니다. 다만 법정님이 만들지 않은 선수들은 제가 만들었습니다.
*기록일은 2025년 4월 20일 기준입니다.
30위 마리오 리가몬티
생년월일: 1922년 12월 17일
A매치 기록: 3경기 0골
신체조건: 키 182cm / 몸무게 75kg
주 소속팀: 토리노 FC
제2차 세계대전 전후로 유럽 무대에서 명성을 떨친 정상급 센터하프로 숨 쉴 틈을 주지 않는 타이트한 맨 마킹과 저돌적인 태클로 상대를 제압했으며 제공권 경합에도 강점을 보였다.
1940년대를 풍미하며 유럽 최강의 팀이라 불렸던 엘 그란데 토리노의 수비라인의 리더로 활약한 리가몬티는 세리에 A 4연패를 이뤄내며 명성을 날렸지만 1949년, 벤피카와의 친선 경기 이후 리스본에서 돌아오는 길에 발생한 수페르가 비행기 참사로 인해 숨울 거뒀고 그들의 죽음으로 인해 토리노의 전설적인 신화는 비극적으로 막을 내렸다.
이탈리아 대표팀에서도 카를로 파롤라와의 주전 경쟁에서 우위를 점하며 종종 출전했지만 세계대전 여파로 국제경기를 거의 치르지 못했고 세계대전의 여파에서 회복해가던 1949년에 상술한 비행기 사고로 사망하며 대표팀에서 족적을 남길 수 없었다.
29위 마크 율리아노
생년월일: 1973년 8월 12일
A매치 기록: 19경기 1골
신체조건: 키 187cm / 몸무게 83kg
주 소속팀: FC 유벤투스
1990년대 후반~2000년대 초반에 이탈리아 무대에서 이름을 날린 수비수로 중앙과 측면을 두루 소화할 수 있었으며 스피드가 느렸지만 우수한 제공권 경합 및 악착같은 대인마크 그리고 양발을 사용해 정확한 클리어링을 자랑했다.
살레르니타나에서 데뷔해 좋은 모습을 보인 율리아노는 리피에게 큰 신임을 받으며 페라라, 몬테로, 페소토와 함께 수비라인을 구성했는데 입단 첫 해에 1996 UEFA 슈퍼컵 및 인터콘티넨탈컵 우승을 시작으로 세리에 A 4회 우승 및 수페르코파 이탈리아나 3회 우승을 이뤄냈고 2002-03 시즌에는 UEFA 챔피언스리그 준우승을 이뤄냈다.
2000년대 초반 이탈리아 대표팀에서도 로테이션 멤버로 활약한 율리아노는 UEFA 유로 2000에서는 조별리그 첫 경기를 제외하고는 주전 스토퍼로 나서 조국의 준우승을 이뤄냈고 2002 한일 월드컵에서는 센터백으로 보직을 변경한 말디니에 밀려서 백업으로 나섰다가 주전들의 결장으로 한일 월드컵 16강전에 선발 출전했지만 기대 이하의 모습을 보이며 탈락했다.
28위 안드레아 바르잘리
생년월일: 1981년 5월 8
A매치 기록: 73경기 0골
신체조건: 키 187cm / 몸무게 87kg
주 소속팀: 유벤투스 FC
2010년대 세리에 무대 정상급 센터백으로 20대 때는 기대만큼 성장하지 못하다가 유벤투스에 입단한 30대 시절에 두각을 나타냈는데 침착한 판단력과 빠른 스피드, 그리고 탄탄한 수비 기술까지 겸비해 안정감으로는 키엘리니, 보누치 이상의 모습을 보이며 사람들로부터 벽 또는 바위라고 불렸다.
팔레르모에서 세리에 A 정상급 수비수로 활약한 바르잘리는 볼프스부르크에서 2008-09 시즌 분데스리가 우승을 이뤄냈으나 이후 기량이 하락하자 유벤투스에 로테이션 멤버로 입단했으나 콘테 체제에서 키엘리니, 보누치와 함께 수비라인을 서며 부활해 세리에 A 8연패 및 코파 이탈리아와 수페르코파 이탈리아나 각각 4회 우승을 이뤄냈고 유럽 무대에서도 2014-15 시즌과 2016-17 시즌에 UEFA 챔피언스리그 준우승을 이뤄냈다.
2017년 가에타노 시레아 경력모범상을 수상했고 세리에 A 올해의 팀에 4회 선정된 바르잘리는 이탈리아 대표팀에서도 종종 소집되었는데 2006 한일 월드컵에서는 백업으로 우승을 경험했으나 UEFA 유로 2008에서는 졸전을 거듭했다. 그래도 UEFA 유로 2012에서는 조별 리그 3차전 아일랜드 전에 부상에서 복귀한 뒤에 주전으로 활약하며 준우승을 이뤄냈다.
27위 로베르토 트리첼라
생년월일: 1959년 3월 18일
A매치 기록: 11경기 0골
신체조건: 키 183cm / 몸무게 75kg
주 소속팀: 엘라스 베로나
1980년대 중후반 세계 최고의 리그인 세리에 A에서 정상급 공격형 리베로로 군림한 인물로 스피드와 제공권 경합에서는 약세를 보였지만 적절한 판단력과 우수한 심리전을 바탕으로 대인 수비에 능했고 수비라인을 지휘하는 부분에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했음은 물론 공을 탈환한 뒤에는 후방에서 플레이메이커 역할을 맡아 위력적인 드리블로 공을 전진시키거나 드넓은 시야와 정밀도 높은 패싱력을 바탕으로 앞선으로 볼을 보내는 빌드업에도 능했다.
인테르의 유스 출신이지만 비니와의 주전경쟁에 밀려서 엘라스 베로나로 이적해 활약했는데 1981-82 시즌에 세리에 B 우승을 이뤄내며 팀을 세리에 A로 승격시켰고 1984-85 시즌에는 구단 역사상 유일한 세리에 A 우승을 이뤄내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며 엘라스 베로나의 황금기를 이끌다가 1987-88 시즌에는 시레아의 대체자로 유벤투스로 이적해 활약하며 1989-90 시즌에는 주장직을 수행하며 UEFA 컵과 코파 이탈리아 더블 우승을 이뤄내는데 공헌했다.
이탈리아 대표팀에서도 가에타노 시레아의 백업 자리를 두고 프랑코 바레시와 경쟁했는데 1984 LA 올림픽에서 4위를 기록했고 1986 멕시코 월드컵에서는 바레시를 제치고 시레아의 백업으로 최종 명단에 포함되었다. 그러나 1987년 이후에는 바레시가 세계 최고의 수비수로 성장하자 그에게 밀리며 대표팀에 뽑히지 못했다.
26위 피에를루이지 체라
생년월일: 1941년 2월 25일
A매치 기록: 18경기 0골
신체조건: 키 172cm / 몸무게 68kg
주 소속팀: 칼리아리
1960년대 후반~70년대 초반에 명성을 떨친 이탈리아 무대 최고의 리베로 중 한 명으로 체구가 작은 편이라 적극적인 몸싸움은 피하고 주로 두뇌를 이용한 심리전을 즐겨했고 기본기가 뛰어나 수비형 미드필더를 겸비할 수 있었으며 드넓은 시야와 탄탄한 볼 컨트롤, 그리고 특유의 창조성을 바탕으로 전방으로 날카로운 롱패스로 팀의 빌드업을 주도해서 프란츠 베켄바우어와 함께 공격형 리베로의 시초로 평가받았다.
초년에는 엘라스 베로나에서 활약하다가 1964-65 시즌을 앞두고 칼리아리로 이적했는데 칼리아리 역사상 최고의 수비수로 평가받는 활약을 펼치며 1969-70 시즌에 칼리아리의 세리에 A 우승을 이뤄냈음은 물론 30경기에서 11실점만 내주며 세리에 A 역사상 역대 최소 실점 우승이라는 성과를 이뤄냈고 은퇴한 뒤에는 칼리아리 역대 베스트 일레븐에 선정되었다.
이탈리아 대표팀에서도 체사레 말디니, 산드로 살바도레 등의 뒤를 이어 리베로 역할을 맡았던 체라는 1970 멕시코 월드컵에서 특유의 짠물 수비로 조국의 결승행을 이끌었지만 결승전에서는 펠레, 자이르지뉴 등에게 압도당하며 준우승에 머물렀다.
25위 마르코 마테라치
생년월일: 1973년 8월 19일
A매치 기록: 41경기 2골
신체조건: 키 193cm / 몸무게 90kg
주 소속팀: 인테르 밀란
축구 역사상 최악의 더티 플레이어 중 한 명이자 이탈리아 축구계의 대기만성을 상징하는 인물 중 한 명으로 특유의 트래쉬토크와 팔꿈치를 휘두르는 거친 플레이 스타일로 악명이 높아 커리어 통산 25개의 레드카드를 받았으며 강력한 피지컬에서 나오는 헤더와 거친 태클로도 악명이 높았는데 이외에도 데드볼 상황에서 헤더로 골문을 위협하는데 능했고 킥력도 우수해 페널티킥이나 프리킥의 키커로도 자주 나섰다.
페루자에서 첫 전성기를 누린 마테라치는 잠시 에버튼에 다녀왔지만 1990년대 후반~2000년대 초반 페루자의 핵심 수비수로 활약했고 특히 2000-01 시즌에는 수비수로 활약했음에도 리그에서 30경기에 출전해 12골 득점하면서 명성을 떨쳐 인테르에 입단했다.
인테르에서도 빠르게 주전 자리를 잡아 2000년대 하반기 인테르의 전성기를 이끌며 세리에 A 5회 우승과 코파 이탈리아 4회 우승을 이뤄냈으며 2009-10 시즌에는 백업 멤버로 UEFA 챔피언스리그 우승과 트레블을 경험했다, 마테라치 개인도 2006-07 시즌에 특히 뛰어난 활약을 펼치며 ESM 올해의 팀에 선정되었고 세리에 A 올해의 수비수상을 수상했으며 인테르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이탈리아 대표팀에서도 2002 한일 월드컵에 처음 메이저 대회에 참가한 마테라치는 2006 독일 월드컵에서는 원래 백업으로 대기했다가 네스타의 부상으로 주전으로 등극해 뛰어난 퍼포먼스를 보여주며 우승을 이뤄냈는데 특히 결승전에서는 지단에게 페널티킥을 내줬지만 직접 동점골을 득점했고 연장전에서는 지단을 도발해 퇴장시켰으며 승부차기에서는 두 번째 키커로 나와 성공시키며 우승에 공을 세웠다.
24위 아리스티드 과르네리
생년월일: 1938년 3월 7일
A매치 기록: 21경기 1골
신체조건: 키 181m / 몸무게 79kg
주 소속팀: 인테르 밀란
1960년대 그란데 인테르의 한 축으로 피지컬을 활용한 수비를 즐기는 스토퍼였음에도 커리어를 통틀어 단 한 장의 레드카드도 받지 않아 팬들로부터 신사 스토퍼라 불렸다.
초년에는 자리잡지 못하다가 인테르로 이적해 전성기를 누린 과르네리는 란데 인테르의 시대를 이끌며 아르만도 피키, 타르치시오 부르니치, 지아친토 파케티와 함께 강력한 카테나치오를 선보였고 팀에 세리에 A 3회 우승과 유러피언 컵 2연패, 그리고 인터콘티넨탈컵 2연패를 선물했다. 그리고 볼로냐와 나폴리에서도 잠시 활약했다.
1960년대 중후반 이탈리아 대표팀의 레귤러로 활약한 과르네리는 1966 잉글랜드 월드컵에서는 소련과 북한에 패해 탈락하며 토마토와 달걀을 맞으며 귀국하는 신세였지만 절치부심한 UEFA 유로 1968에서는 특유의 짠물 수비를 앞세워 조국의 우승을 이뤄내는데 공헌하며 명예를 회복했다.
23위 알프레도 포니
생년월일: 1911년 1월 20일
A매치 기록: 23경기 0골
신체조건: 키 172cm / 몸무게 72kg
주 소속팀: 유벤투스 FC
1930년대 하반기부터 제2차 세계대전 기간 동안 활약했던 수비수로 2-3-5 시스템에서 라이트 풀백을 맡았는데 안정적인 맨 마킹과 우수한 제공권 능력을 겸비해 상대 공격수를 잡아먹었는데 파트너인 라바와는 다르게 냉정하고 침착했다고 전해진다.
유벤투스에서는 백업 시절이었던 1934-35 시즌에 세리에 A 우승이 전부지만 코파 이탈리아 2회 우승 및 세리에 A 3회 준우승을 이뤄냈다. 세계대전 도중에 징집으로 유벤투스를 떠났다가 전쟁이 종전하자 복귀했다.
이탈리아 대표팀에서도 1934 월드컵 우승 멤버들에게 뒤지지 않은 활약을 펼친 포니는 1936 베를린 올림픽에서 조국의 우승에 큰 공을 세워 금메달을 목에 걸었고 1938 프랑스 월드컵에서도 첫 경기는 몬젤리오와의 주전경쟁에서 밀렸지만 8강 프랑스전부터는 주전으로 출장해 클럽에서 호흡을 맞춘 라바와 함께 수비라인을 구성했고 결국 조국의 우승을 이뤄냈다.
이탈리아의 기자 에토레 베라는 라바와 포니의 센터백 듀오를 두고 "라바는 공격수들에 매우 아름답고 격렬한 열정으로 맞대응한다. 칼리가리스를 연상시킨다. 또한 빠른 시간 안에 최대의 슈팅 파워를 낼 수 있고 종종 하프백들을 생략한 채 공격진에 침투하기도 한다. 포니보다 라바가 더 침착하고 통제된 스타일이다. 둘은 기술로 서로를 보완할 수 있는 관계였다."라고 평가했다.
22위 피에트로 라바
생년월일: 1916년 1월 21일
A매치 기록: 30경기 0골
신체조건: 키 175cm / 몸무게 77kg
주 소속팀: 유벤투스 FC
1930년대 하반기부터 제2차 세계대전 기간 동안 활약했던 수비수로 2-3-5 시스템에서 레프트 풀백으로 활약했는데 이탈리아의 전설적인 언론인 카를로 펠리체 키에사의 평에 의하면 라바는 피지컬적으로 뛰어나고 헤딩에 능하며 양발을 모두 잘 썼는데 다혈질적이며 투쟁심이 강해 가끔 난투극이 벌어지면 적극적으로 참여했다고 전해진다.
1935-36 시즌 유벤투스에서 데뷔한 라바는 전성기 시절에는 코파 이탈리아 2회 우승 및 세리에 A 준우승 3회에 그쳤지만 마지막 시즌에는 세리에 A 우승을 이뤄냈다. 다만 사고도 꽤 많이 쳤는데 상술했던 거친 성격으로 인해 1947년의 데르비 디탈리아에서 인테르의 공격수 베니토 로렌치를 주먹으로 가격하기도 했고 1938~39 시즌에 유벤투스의 보드진이 급여 인상을 거부하자 은근히 태업성 플레이를 펼치곤 했고 갈등이 중재된 이후에도 몇번 더 충돌해 중간에 팀을 떠나기도 했다.
이탈리아 대표팀에서도 1934 월드컵 우승 멤버들에게 뒤지지 않은 활약을 펼친 라바는 첫 경기에서 이탈리아 대표팀 최초로 퇴장을 당하는 굴욕을 겪기도 했지만 1936 베를린 올림픽에서 조국의 우승에 큰 공을 세워 금메달을 목에 걸었고 1938 프랑스 월드컵에서도 포니와 호흡을 맞춰 조국의 우승을 이뤄냈다. 특히 라바가 대표팀에서 출전한 30경기 중 이탈리아가 패배한 경기는 단 한경기에 불과했을 정도로 그의 기량은 우수했다.
이탈리아의 기자 에토레 베라는 라바와 포니의 센터백 듀오를 두고 "라바는 공격수들에 매우 아름답고 격렬한 열정으로 맞대응한다. 칼리가리스를 연상시킨다. 또한 빠른 시간 안에 최대의 슈팅 파워를 낼 수 있고 종종 하프백들을 생략한 채 공격진에 침투하기도 한다. 포니보다 라바가 더 침착하고 통제된 스타일이다. 둘은 기술로 서로를 보완할 수 있는 관계였다."라고 평가했다.
21위 루이지 알레만디
생년월일: 1903년 11월 8일
A매치 기록: 24경기 0골
신체조건: 키 182cm / 몸무게 75kg
주 소속팀: 인테르 밀란
1920년대와 30년대에 걸쳐 이탈리아 무대 정상급 레프트 풀백으로 평가받았던 선수로 이탈리아 역사상 최고의 축구기자 지안니 브레라의 말을 빌리면 "알레만디는 자연의 억제되지 않은 힘이었다. 그는 곱슬머리였는데 악마처럼 보였다. 그의 빠른 달리기는 곡예 점프만큼이나 인상적이었고, 그 스피드로 그의 경쟁자들보다 항상 공에 먼저 닿곤 했다."라고 평가했다.
레그나네시에서 데뷔해 AC 레나노에서 이탈리아 정상급 수비수로 성장한 알레만디는 1925년 유벤투스로 이적해 비르지니오 로세타와 강력한 풀백라인을 구축하며 명성을 날렸는데 이 시기에 지역 라이벌 토리노에게 뇌물을 받았다는 알레만디 스캔들의 희생자가 되었는데 본인이 지속적으로 결백을 주장하자 1928년에 사면되었지만 인테르로 팀을 옮겼다.
인테르에서는 8년간 활약한 알레만디는 1929-30 시즌 세리에 A 우승을 이뤄냈고 무려 세 시즌이나 준우승을 이뤄냈다. 우승후보로 평가받는 AS 로마로 이적해서는 대표팀 파트너 몬젤리오와 호흡을 맞췄으나 전년도 득점왕 구아이타가 전쟁에 나선다는 루머에 속아 야반도주했고 또다시 리그 준우승에 머물렀다.
이탈리아 대표팀에서는 오랫동안 칼리가리스의 백업을 맡았던 알레만디는 1927-30 시즌 중유럽컵 우승을 경험하기도 했으나 칼리가리스가 오스트라와의 경기에서 부진하며 그를 대신해 주전으로 도약했고 결국 1934 이탈리아 월드컵과 1933~35 중유럽컵 우승을 이뤄내며 그에게 온 기회를 완벽하게 잡아냈다.